정이용

전체 · 번역글 · 가사

2026.6.20 토 (관악)

『나단이라고 불러줘』 완독.


〈관악산신제〉 관람.

2026.6.16 화

독립영화 쇼케이스 〈지우러 가는 길〉 관람.

2026.6.15 월

〈더 플랫폼〉 시청. 자본주의는 가혹하고 혁명은 어렵다.

2026.6.14 일

대전 현충원 방문.

2026.6.13 토

서울퀴어퍼레이드. 작년에는 풀코스 걸었는데 올해는 대열에서 걷기도 하고 나와서 구경하기도 하고 그랬다.

2026.6.12 금

〈디스클로저 데이〉 관람.

2026.6.10 수

Pet Shop Boys - London


〈스픽 노 이블〉 시청. 대체로 재미있게 봤다. 다만 '험담 하지 말라'는 제목이 완전히 이해가 되진 않았는데, 덴마크 원작의 결말을 찾아보니 왜 그런 제목을 붙였는지 알 것도 같다(굳이 결말을 바꿀 거면 제목도 바꿔야 했지 않았을까?). 최근에 본 〈그 땅에는 신이 없다〉에서 답답한 홀아비 보안관 역할을 했던 배우가 여전히 답답한 성격의 미국인 아버지 역할로 나왔고, 제임스 맥어보이에 비해 너무 늙어보여서 왜 저렇게 캐스팅을 했을까 궁금증이 생겨 보고 나서 검색해보니 실제 두 사람이 한 살 차이 밖에 안 나는 걸 알고 깜짝 놀랐다. 제임스 맥어보이 연기는 아주 훌륭하지만 미친 살인마라기에는 너무 핫대디...용모를 감상하느라 그리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2026.6.7 일

〈백룸〉 관람.

2026.6.6 토 (용인)

커트보니것, 「2BR02B」 완독. 요즘엔 이정도 길이의 초단편은 없는 것 같기도 하고...쓰는 사람이 없다기 보다는 이런 글을 원하는 지면이 없는 거겠지만.


특정 음식에 대한 불내증을 판별하는 건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심각한 알레르기가 있는 게 아니고서야 음식을 먹자마자 문제가 바로 발생하진 않는다. 음식물이 위장을 통과해서 소장에 도달하기까지 최소 한두 시간에서 최대 반나절은 흘러야 하고, 그동안 입에 넣은 것 중에 정확히 어떤 식재료가 문제를 일으켰는지 추정하기에는 변수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최근에 덜익힌 계란 노른자가 내게 설사를 유발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이것을 알기까지 내가 살아온 인생 만큼의 시간이 걸렸다. 그러니까 내가 간장계란밥을 먹었을 때 배가 부글거리는 일이 잦다는 걸 인지할 만큼 간장계란밥을 자주 먹게 되기 전까지는 몰랐다. 나는 독립을 엄청 늦게 —중년의 나이에—했다. 간장계란밥이 주식이 되기까지 그만큼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처음 패턴을 인지했을 때는 간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계란은 매일 거의 매 끼니 먹었고 계란이 문제였다면 설사를 더 자주 했을텐데 그렇지는 않았으니까. 아무튼 설사 때문에 한동안 간장계란밥을 끊기도 했다. 대신 계란말이나, 계란찜, 삶은계란, 스크램블에그로 계란은 계속 먹었고 ‘당연히‘ 문제는 없었다(상기 메뉴에서 계란노른자를 안익혀 먹는 경우는 사실상 없으니까). 간장도 문제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간장이 문제면 메추리알 장조림을 먹었을 때도 문제가 생겼었겠지! 그래서 내게 간장계란밥은 이후 몇 년 동안 미스터리로 남았다.

시간이 흐르고 간장계란밥에 대한 경계심도 흐려지고 나는 다시 종종 간장계란밥을 해먹기 시작했다. 때로는 먹고 나서 멀쩡할 때도 있었기 때문에(이건 지금 생각해보니 가끔 완숙후라이가 될 때가 있어서 괜찮았던 것 같다) 점점 고삐가 풀렸고 다시 예전처럼 자주 먹기 시작하면서 설사도 다시 시작됐다.

그리하여 모든 변수를 고려한 결과 자연스럽게 안익힌 노른자가 문제였군! 하고 알게 되었다면 좋겠지만...그렇진 않았고 이번에야 말로 문제의 원인을 알아내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 바로 안 익힌 계란 노른자를 범인으로 지목하더라. 양도 중요했는데, 한 개 까지는 괜찮고 두 개 부터는 위험하다. 그래도 이부분은 스스로 터득했다.


백남준아트센터/경기도박물관 관람.

2026.6.5 금

〈뒷자리에 태워줘〉 관람.

2026.6.4 목

메린 쿠로토, 「내가 기억하는 렉스 리드 (1938~2026)」


자신감을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호퍼스〉 시청.

2026.6.3 수

패트릭 래든 키프, 「장전된 총」

브레인트리에서 사람들을 취재할 때, 그들은 내게 자식이 있느냐고 자주 묻곤 했다. 마치 자식을 키워본 부모라야 비로소 이 비극적인 도덕적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다. 주디의 오랜 친구인 뎁 코사릭은 내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난 그날 그 집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샘과 주디에게 단 한 번도 묻지 않았어요. 그들이 내게 거짓말하는 걸 원치 않으니까요. 그리고 말이죠, 내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나 역시 거짓말을 했을 겁니다. 성경책을 수십 권 쌓아놓고 맹세하래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을 보탰을 거예요."

2026.6.2 화

다크모드를 없앴다. 어두운색 배경에 밝은색 글자로 된 글을 읽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적절한 것 같아서.

2026.6.1 월

다니엘 좀파렐리Daniel Zomparelli의 게이 소설집 『Everything Is Awful and You're a Terrible Person(모든 게 끔찍하고 너는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야)』을 읽다가 말았다. 최근에 읽다 중단한 게이 소설과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까 '날것의', '솔직한'...뭐 대충 그런 찬사가 붙어 있는 소설. 어쩐지 제목에서 풍기는 감성도 비슷하지 않나...? 아무튼 잘 모르겠다. 내 감성이 아닐 뿐 훌륭한 소설일 것이다. 그래도 제일 처음에 수록된 단편 「GHOSTS CAN BE BOYFRIENDS TOO(유령도 남자친구가 될 수 있다)」까지는 괜찮았던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살인사건 이름에 피해자의 이름을 붙이지 말라 한다. 피해자의 이름이 계속 언급되는 것이 유가족에게 2차 가해가 될 수 있단다. 어떤 살인사건의 피해자 유족은 피해자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하면서 기억해달라고 한다. 자녀의 억울한 죽음이 잊히지 않았으면 한단다. 어떤 이들은 살인사건의 이름에 지역명을 붙이지 말라 한다. 지역 혐오 정서를 조장하기 때문이란다. 어떤 이들은 살인사건 이름에 가해자의 이름을 붙이라 한다. 어떤 연쇄살인범은 자기가 저지른 것도 아닌 살인사건을 부풀려 자백 한다. 자신의 악명을 세상이 가능하면 가장 크게 기억하길 바라는 것이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시사회 관람. 정녕 이정도밖에 할 수 없었나...

2026.5.31 일

베키 장, 「경성지연(傾城之戀): 상하이의 결혼 시장」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두 개의 영토〉 전시 관람.

2026.5.30 토

2026 프랑스단편영화특별전 관람.


〈그 땅에는 신이 없다〉 다 봤다. 재밌네.

2026.5.29 금

정해연, 『모델』 완독. 이건 좀 실망.

2026.5.28 목

기술 발전은 사람을 여유롭게 해주는 게 아니라 혼자서 더 많은 일을 하라고 부추기는 것 같다.


다니엘 펠젠탈, 「내 나이는 서른셋, 남편은 일흔일곱 – 내가 오직 연상의 남자하고만 잠자리에 드는 이유」

2026.5.27 수

에이사 윌리엄스, 「디스코는 구리지 않다」

펑크는 흔히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데 집중하는 허무주의적 연대로서 가장 정통성 있는 저항 음악으로 대접받는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소수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기득권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며 불법적인 퀴어 공간에서 태동한 디스코야말로 궁극의 저항 음악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다른 남성과 춤추는 행위 자체가 불법이고, 법으로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이 금지되며, 동성애가 정신질환으로 낙인찍히던 시절을 떠올려 보라. 그렇다면 디스코가 풍긴다고 여겨졌던 그 쾌락주의와 무분별함은, 사실 퀴어들이 감행한 가장 급진적인 저항 행위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Asa Williams 「Disco Doesn’t Suck」

〈군체〉 관람.

2026.5.26 화

불광문고가 폐점 5년 만에 역촌동에서 다시 서점을 연다고 한다.


제임스 볼드윈, 『조반니의 방』 완독.

가스 그린웰이 이 소설에 대해서 쓴 을 읽고 호기심이 생겼다. 50년대에 쓰여진 소설이라기에는 지금도 너무나 유효한 감정과 현실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이 비교적 최근(2019년)에 한국에 번역 출간되었다는 사실이 그런 점에서 이해되기도 했다(더불어 그 오랜 세월 번역이 안되었다는 점에서 퀴어 소설이 문단에서 얼마나 관심 밖이었는가 싶기도 하지만). 그린웰은 근래 이 소설이 '성소수자를 부정적이고 비극적으로 그린 것이 성소수자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작품을 변론하려는 차원에서 글을 썼다. 내가 이동은 작가와 함께 낸 첫 만화 『환절기』도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이 소설에 대한 요즘 세대의 반응과 비슷한 반응이 없지 않았다. 그 반응이란 마치 성소수자의 불행을 묘사하기라도 하면 그것이 모든 성소수자의 불행을 조장한다고 생각하는 식이다. 나는 당시에 그런 반응이 일종의 터널 비전 같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종종 자신의 불행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안하무인이 되기도 한다. 세상에 온통 고통받는 자신 밖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는 세상 모든 것이 나의 상처받은 마음을 고려해 주지 않는다고 여겨 화를 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세상 모든 상처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투사가 되어 화를 내기도 한다. 솔직히 요즘은 그게 누군가의 오랜 사유 끝에 자연발생된 생각이 아니라 어쩌면 그저 캔슬 컬쳐에 휩쓸려 다니는 사람들—나도 자유롭진 않지만—의 트집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분명 이 소설은 불행에 빠져있는 성소수자에게 격려가 될 만한 작품은 아닐지 모른다. 예술을 통해서 긍정과 낙관을 경험하고 싶은 사람에게 이 소설은 불쾌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돈으로 남자를 사는 늙고 부유한 게이들, 늙고 부유한 게이에게 아첨하면서 경제적으로 의지하는 젊고 가난한 게이들, 여성들을 기만하는 게이들, 게이들을 혐오하면서도 남자를 만나기를 멈추지 못하는 게이들, 게이 정체성을 부정하는 게이들, 전부 본받을 것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 같은 인간들이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이 재미있었다. 심지어 좋아하는 소설이 될 것 같다. 그린웰 처럼 긴 글을 써가면서 이 소설의 좋은 점을 변호할 만큼 지적인 이유를 찾진 못하겠지만 말이다. 내가 인상적이었던 것은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게이들이 사는 모습이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남성성에 대한 집착, 나이듦에 대한 혐오, 여성적인 게이에 대한 차별은 지금도 다르지 않다. 헬라와 조반니 사이에서 번민하는 데이비드의 모습도 시대착오적이라 치부할 수 없다. 이 시대에도 디나이얼 게이는 존재한다. 아무리 세월이 흐르고 강산이 변했다 한들 소수자가 소수자 정체성을 대번에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받아들이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나도 그랬지만 정체성을 완전히 받아들이기 전까지는 데이비드와 같은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다. 어쩌면 데이비드가 모든 것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 돌파를 선택하는 결말을 쓸 수도 있었겠지, 그렇다면 이 소설은 교훈적인 성장 소설이 됐을 것이고 단언컨대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데이비드가 결국 비겁한 혐오의 길을 선택한 결과 그 모든 파국에 이르렀다고 생각하면 나는 이 소설의 결말이 충분히 도덕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한다.


배명은, 『이상한 마을 청호리』 완독.

2026.5.25 월

키들-거리다 [동] 웃음을 멈추지 못하여 입속으로 실없이 자꾸 웃다
얽다 [동] 1. 얼굴에 우묵우묵한 마맛자국이 생기다. 2. 물건의 거죽에 우묵우묵한 흠이 많이 나다.
실그러-뜨리다 [동] 한쪽으로 비뚤어지거나 기울어지게 하다.
이울다 [동] 1. 꽃이나 잎이 시들다. 2. 점점 쇠약하여지다. 3. 해나 달의 빛이 약해지거나 스러지다.


〈남태령〉 관람.

2026.5.24 일

(OTT 시리즈) 1화를 보고 2화의 내용이 빤해 보여서 중단했던 것을 결국 봤는데, 2화에 등장할 거라 예상했던—필요하지만 지루하기 짝이 없는—스토리가 이미 벌어진 것으로 간주하고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어서 갑자기 모든 것이 흥미롭고 근사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곧 내가 2화를 클릭해야 하는 걸 3화를 클릭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모든 기대감이 사라졌다.

2026.5.22 금

가스 그린웰, 「의미 만들기」

얼마 전, 미국 서부의 한 주립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이성애자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친구는 동료 교수가 자신에게 애니 프루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가르친다고 핀잔을 주었을 때 무척 놀랐다고 털어놓았다. 퀴어였던 그 동료 교수는 이제 그런 이야기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비극으로 끝나는 게이 이야기는 읽을 만큼 읽었으니, 이제는 해피엔딩의 퀴어 이야기가 존재하므로 그런 작품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는 유의미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즉, 과거의 상황을 다룬 퀴어 이야기는 오늘날 특정 지역과 집단의 퀴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이상 더는 적절하지 않으며, 나아가 이러한 텍스트들이 적극적으로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 압박은 "작가가 인식하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이 내게 해피엔딩의 퀴어 이야기가 더 필요하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언제나 '그렇다'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퀴어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에게 원하는 삶과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해서 예술이 무의미하다고 믿는 것은 예술의 작동 방식을 오해한 것이다.

Garth Greenwell, 「Making Meaning」

가스 그린웰, 「심연에 매혹되다」

예술을 논할 때, 특히 퀴어 예술가나 퀴어에 관한 예술을 다룰 때 '긍정적'이라는 단어는 자주 쓰인다. 우리가 흔히 '담론'이라 부르는 거대한 여론의 장에서는 이 단어가 찬사와 권유의 의미로 널리 통용된다. 하지만 다른 수많은 비평 용어와 마찬가지로, 이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파악하기는 다소 어렵다. 삶에 대한 긍정도,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도 아닌, 목적어 없이 모호한 분위기처럼 떠도는 긍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실재하며 작가들에게 실질적인 압박으로 다가온다. 나를 비롯해 내가 아는 다른 작가들도 그런 압박을 느껴왔다. 우리의 작품이 너무 슬프다거나, 지나치게 퇴행적이라거나, 학자 헤더 러브가 말한 '낙후된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는 불만 속에서, 나는 긍정을 바라는 이 열망을 고스란히 느낀다.

우리가 예술로부터 필요로 하는 진정한 긍정은 이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회복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삶에 "예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와줄 예술이 필요하다. 이는 특정 정체성에 대입되거나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종류의 '정서적 지지나 격려'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론적 조건 자체에 내재된 격려이며, 독특할 정도로 냉정하면서도 가슴을 뛰게 하는 격려다. 회복 불가능함을 배제하는 예술은 내가 여기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진정한 긍정의 가능성 또한 배제한다. 그러한 예술은 그저 삶을 위한 선전에 불과하며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내가 예술을 논하는 자리에서 쓰이는 '긍정적'이라는 단어가 자칫 놓칠까 봐 우려하는 지점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 삶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한계와 유한함, 취약함, 그리고 뜻하지 않은 운명 앞에서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에 대한 인식 말이다. 예술이 건네는 "예"라는 대답이 설득력을 얻고 우리에게 유용하려면, 그것은 반드시 "아니오"를 통과한 대답이어야 한다. 즉 부정함을 내포한 긍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예술이 우리가 삶에 진정으로 "예"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우려면, 실패의 가능성과 죽음의 필연성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Garth Greenwell, 「Enamored of the Abyss」

2026.5.20 수

크리스틴 돔벡, 「Night Soil」


블로그가 좋은 건 언제든 수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소셜미디어는 회전 초밥집 같다. 올리거나 내리는 것만 된다는 점에서...

2026.5.19 화

유디지트 바타차르지, 「In Plain Sight」

2026.5.18 월

만화 그리기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SNS 계정에서 새내기 그림러들을 응원하기 위해 공유한 글을 보았다. 요약하자면 주변에 자신보다 잘 그리는 사람이 많다고 좌절하지 말라는 것, 어차피 그들 중 상당 수는 10년 후에는 더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는 것, 그러므로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과 꾸준한 것이 더 중요하단 것이다. 나도 어느덧 첫 책을 내고 12년이 흘렀다. 잠시 휴식기를 갖고 있는 5개월 남짓 나는 자발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다. 흔한 낙서 한 점 끄적거리지도 않았다. 그리고 싶다는 욕구도 없고, 그림 그리는 것이 더이상 재미있지도 않다. 어쩌면 나도 그 글에서 말하는 '10년'이라는 저주에 빠져든 걸까. 하지만 업계도 독자도 들여다 봐 주지 않는 고독한 작업을 명예나 인기와 같은 지지 없이 내적 동기만을 가지고 이어나가고 있는데 어떻게 마냥 신나고 재미있기만 할 수 있겠나. 그 인내심의 평균적인 시효가 10년인 것은 아닐까.

신나고 재미있을 수 만은 없는 데엔 가난도 큰 몫을 차지한다. 나는 한 해 천만 원 정도를 벌고 쓴다. 그나마 만화를 막 시작했을 때보다 공적 지원금이 생긴 이후 경제적으로는 나아진 편인데, 나아진 게 이정도다. 중년의 나이에 한 해 천만 원 남짓한 수입으로 연명한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책을 내는 것 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다른 작가들은 부업으로 돈을 벌겠지만 나는 작업 만으로도 벅차기도 하고, 무엇보다 일을 많이 하고 싶지 않다. 그러니까 책이 안 팔리는 걸 떠나서 가난은 순전히 내 탓이긴 하다. 그래서 부끄럽다. 나이를 먹으면서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의 씀씀이가 확실히 커졌다는 것을 느낀다. 경제적인 자립과 안정을 일궈낸 그들이 자랑스럽고 그들이 나에게 기꺼이 그런 값을 치른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끼지만, 한편으로는 되돌려 줘야 할 빚이 쌓여가는 느낌이 든다. 이걸 부담으로 느끼는 자신에게 자괴감도 든다. 그래서 점점 더 사람을 만나지 않게 된다. 나가면 다 돈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도서관 말고는 잘 나가지도 않는다. 마음마저 가난해진 것 같다.

가난한 마음 탓인지 요 근래엔 책이나 창작과 관련된 소개 컨텐츠(팟캐스트, 유튜브)를 거의 보지도 듣지도 않는다. 그냥 문득 모든 것이 좀 섭섭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스스로가 너무 철 없고 속 좁다는 생각이 들어서 애초에 나 같은 건 이런 걸 할 자격이 없다는 식의 결론에 이른다. 그림이 재미없어질 만도 하다. 사주에 관심이 많은 A가 작년에 스치듯 올해 내가 그런 감정을 느낄 것이라고 얘길 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 건지, 실제로 음양오행의 기운에 영향을 받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올해의 기운이 물러가면 이 저주도 풀리게 될까? 모르겠다.


제시 해신저, 「셀럽이 셀럽에게: 우리는 대스타 인터뷰의 묘미를 잃어버리고 있는 걸까?」


독립영화 쇼케이스 〈단지, 우리가 잠시 머무는 곳〉 관람.

2026.5.17 일 (중랑/노원)

장미축제에 갔으나 장미 사진은 하나도 찍지 않았다.


데이비드 S. 월리스, 「예술이 가르침을 줄 수 있는가?」

흔히 교훈적이라고 여겨지는 작품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대중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주며 비위를 맞추는 수준에 그친다. 영화 <바비>에서 대중문화 속에 간간이 등장하는 교훈의 순간들, 예컨대 현대 여성이 직면한 모순된 기준을 성토하는 아메리카 페레라의 독백이나, 기후 변화 불감증을 정면으로 풍자한 아담 매케이 감독의 <돈 룩 업>을 보며 리버럴 성향의 관객들은 자신이 '올바른 청자'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 이 드라마들이 던지는 사회 비판적 시선은 우리가 무언가 가치 있는 작품을 보고 있다는 면죄부를 주지만, 대다수 관객에게 이는 새로운 배움의 경험이 아니라 기계적인 복습에 불과하다. 진부한 통념을 그대로 거울처럼 비추어 관객의 세계관을 확인시켜 주는, 이른바 '마음 편한 밥벌이 콘텐츠(comfort watch)'라는 오늘날의 독특한 현상이다. 이는 철저히 알고리즘의 창작 논리를 따른다. 대중이 이미 수용한 지혜와 좋아요, 싫어요를 기록한 뒤 똑같은 결과물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방식이다.

David S. Wallace, 「Can Art Teach?」

2026.5.16 토

잠을 깊게 못 잤다. 방아쇠수지(건초염)가 생긴지 2주 됐는데 낫질 않아서 식습관, 생활습관을 점검해보는 와중 손을 깔고/베고 자는 잠버릇이 혹시 울혈을 일으켜서 방아쇠수지를 낫지 않게 방해하는 건 아닐까 싶어 간밤에 신경을 쓰고 잤더니 그랬던 것 같다. 하지만 확실히 아침 기상 후에 느껴지던 통증도 덜 하고 손이 덜 부은 것 같긴 하다.


정해연, 『용의자들』 완독. 페이지 터너란 게 이런 거구나. 몇 시간 만에 다 읽었다.

2026.5.15 금

꿈에 BTS 멤버로 제안을 받았다. 덜컥 수락했다. 알엠한테 축하받고 셀린(...) 매장도 둘러보는데 후줄근한 내모습이 순간 부끄러워 지고 현실 인식이 되면서 공황이 오려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한 걸까 나는 무대공포증도 있는데! 물러야 겠다 생각하고 알엠한테 나는 못 한다고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들고 있던 버킷에 담긴 모래 위에 편지를 썼으나(꿈이라서 이상함) 물에 다 씻겨 내려 갔다. 내 정신 좀 봐 아이폰으로 쓰면 되잖아! 하고 아이폰으로 작성하는데 첫 글자인 ‘알엠’이라는 글자부터 계속 오타가 나서 죽어도 수정이 안 됐다. 그런 와중에 잠에서 깼다.

처음에는 그저 요즘 그림 그리는 일 자체가 재미가 없고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인가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이런 꿈을 꾸었겠거니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어제 읽은 『먼저 온 미래』 때문에 평소에도 늘 생각하던 고민이 좀 더 선명해진 탓인 것 같다. 그 고민은 어쩌면 내가 그림 그리는 일이 재미가 없어진 이유 중에 하나일 지도 모른다. 내 책은 점점 더 안 팔리고 있고 이젠 출간을 해주겠다는 출판사 마저도 찾기 힘든 판국에, 책을 읽는 사람의 지갑은 인플루언서가 추천한 책 아니면 인플루언서의 책에만 열리는 것 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책을 읽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라 책을 쓴 작가를 더 흥미롭게 여기고 작가의 이야기가 결부된 책을 읽고 싶어한다. 굳이 작가일 필요도 없다. 아마 지금 당장 민음사TV에 출연하는 편집자나 마케터가 쓴 에세이가 나온다면 내 책 보다는 훨씬 많이 팔릴 것이다(솔직히 이렇게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불경하다고 느껴질 정도다).

문지혁 작가는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소설의 미래는 오토픽션에 달렸다. 몸을 가진 작가의 경험이 담겨 있지 못한, 재미있지만 어딘가 본듯한 것들은 빠르게 대체될 것이라 생각한다. 내면을 언어화 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장르는 소설이다. 앞으로는 저자성이 더욱 중요해지고, 작가들도 점점 더 앞으로 나올 거라 생각한다. 독자들은 이 소설을 쓴 사람이 진짜 살아있는 사람인지 확인하고 싶어 할 것”

문지혁 작가가 『먼저 온 미래』를 읽었는지, 아니면 책과 관계없이 문 작가 스스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장강명 작가도, 문지혁 작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얘기고 나는 그런 미래가 나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언짢았다. 물론 장강명 작가도 그런 변화를 달가워 하는 것 같진 않지만—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그는 그게 자신이 원하는 모습은 아닐 지언정 세상이 그렇게 변한다면 거부하지는 않을 사람이니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나나 내 이야기를 상품화 하고 싶지 않다. 아니 애초에 상품화 할 것이 없다. 그럴 만큼 나는 나와 내 인생이 흥미롭다고 생각하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 방책으로 나를 어떻게든 상품화 하기 위해서 흥미로운 시선으로 내 인생을 재검토 해보는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어차피 기억력도 그리 좋지 않으니 들여다 봐도 나올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사람도 잘 만나지 않고 친구도 거의 없다. 있는 친구도 일 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하다. 게으르고, 겁이 많고, 결정적으로 돈도 없기 때문에 거의 집에 있으니 남들이 모르는 것을 경험할 일 자체도 없다. 그러니까 이 미래는 나를 위해 설계되어 있지 않다.

내가 오토픽션을 비롯해서 자전적인 소설이 많아지고 그것이 대세가 되는 풍토를 언짢게 여겼던 것과, 그런 작가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결국 질시였던 것 같다. 그들은 자기 이야기를 팔고 있었는데 나는 그러지 못했고 가진 것도 없었으니까. 결국 꿈 속 아이돌은 작가로서 나를 파는 것에 대한 은유고, 후줄근한 자신에 대한 인식은 컨텐츠 없는 자신 대한 은유, 그리고 전달하지 못하는 메시지는 이제 와서 거역할 수도 그만둘 수도 없는 공포에 대한 은유였던 것 같다. 나는 이대로 계속 작가를 할 수 있을까? 해도 될까? 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나는 별로 작가가 될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떠나지 않는다.

2026.5.14 목

장강명, 『먼저 온 미래』 완독.


Matthew Stevens - Matthew Stevens (2026)

2026.5.13 수

넷플릭스의 〈Dept. Q〉는 다분히 애플TV+의 〈슬로 호시스〉를 의식하고 만든 것 같은데 —심지어 오프닝 시퀀스 음악도 비슷함— 그러기엔 유머나 톤이 다소 어색하고, 매튜 굳이 개리 올드먼 같은 캐릭터를 하기에도 영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결말은 궁금한데 캐릭터들이 재미 없으니까 참고 봐지지가 않네.

2026.5.12 화

뻐꾸기가 남의 새 둥지에 알을 낳는 습성을 (일부) 아이디어 삼은 스릴러 시리즈(더 체스트넛 맨: 숨바꼭질)와 호러 영화(쿠쿠)를 어쩌다 보니 연달아 시청했다. 둘 다 딱히 재미는 없었다.

2026.5.11 월

스파게티를 조리할 때 가장 귀찮은 게 면 삶는 과정이다. 최소 7분, 그냥 기다리기엔 길고 다른 걸 하면서 기다리기엔 짧은 이 과정을 단축할 방법이 간절했다. 대량으로 삶아서 미리 소분해서 냉장보관을 하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일단 소분하는 과정이 너무 귀찮아 보였고, 재가열한 면이라는 점도 찜찜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먹어 없애야 한다는 강박을 부채질 한다는 점에서 상하기 쉬운 식재료를 오래 보관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제미나이에게 물어봤다. 녀석이 몇 가지 제시한 방안 중에 한 시간을 불린 후 끓는 물에 1-2분을 삶는 방법이 가장 괜찮아 보였고, 오늘 아침 식사 때 시도해 봤는데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삶은 후 팬에 볶아 먹는 사람은 1분만 삶아도 괜찮을 것 같고, 나처럼 시판 소스를 그냥 비벼 먹는 사람은 2분 정도가 알맞을 것 같다(참고로 여기 사용한 스파게티면은 데체코 스파게티니11° 제품으로 알 덴테의 경우 7분으로 적혀있다). 나는 귀찮아서 그냥 불린 면이 담긴 냄비 째 바로 가열해서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이후로 2분만 끓였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자면 2분 보다는 더 끓였다. 내 방식으로 알 덴테를 추구한다면 1분 30초만 끓여도 될 것 같다. 나는 가열에 사용한 인덕션이 분 단위로만 타이머 설정이 가능하고 역시 귀찮기 때문에 그냥 2분 끓였다. 조금 아쉬운 점이라면 스파게티면을 불릴 때 면이 완전히 잠길 정도로 넓은 냄비가 없어서 부득이 절반으로 쪼개야 했다. 그래도 절반 길이가 먹는데 크게 지장이 있을 정도로 짧게 느껴지진 않았다. 전에 끓는 물에 마른 면을 삶을 때면 면이 냄비 바닥에 달라붙는 걸 방지하기 위해 최소 1분 정도는 저어줘야 했는데 미리 불린 면은 이유는 모르겠으나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달라붙지 않았다. 기대하지 않은 장점이고 귀차니스트에게는 크나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제미나이의 조언으로는 면을 너무 오랜 시간 불리는 건 면의 탄력성을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에 한 시간을 가장 추천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당장 배가 고플 땐 쓸 수 없다는 점(그래서 불리는 동안 두유 한 잔을 마시면서 버텼다), 전날 밤 미리 불려놓을 수도 없다는 점이 이 방법의 한계다. 그래도 이정도 단점이라면 여전히 해볼만 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고, 고유가 시대에 에너지 비용을 아낄 수 있다는 점과 더운 여름에 집을 한증막으로 만들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추천하고 싶다.


패트릭 래든 키프, 「시나리오 수정 전문가가 자신만의 목소리를 찾은 방법」


패트릭 래든 키프,「런던 지하세계에 발을 들인 한 십대 소년의 비극적인 죽음」

2026.5.10 일

제47회 서울연극제 〈감정 연습〉 관람.

2026.5.9 토

Chris Potter - Alive With Ghosts Today (2026)

2026.5.8 금

목돈 나가는 날. 불가피한 일(건강, 생필품—작업을 위해 구입하는 것도 포함)을 제외하고 오직 나를 위해 목돈을 지불하는 일이 있던가 생각해보니 없는 것 같다. 이런 생각 하면 안 되는 거겠지.


쓸쓸한 어버이날이었다. 쓸쓸한 역할은 나만 하고 싶었는데 각자가 다 쓸쓸한 모습을 하고 있으니까 더 우울했다.

2026.5.7 목

내일은 어버이날이니까... 미용실에 다녀왔다. 수 년째 같은 미용실을 다니는데도 늘 미루고 싶어지고, 어색하고, 불편하다. 미용실은 문제가 없다. 나라는 사람이 미용실이라는 공간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런 곳에 주기적으로 가야한다는 점이 가장 고통스럽다. 대체 나는 뭐가 문젤까.

2026.5.6 수

피터 슬레빈, 「트럼프 시대 속 자신의 역할을 고심하는 버락 오바마」


모든 컨텐츠의 최종 형태에 광고가 붙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광고가 붙지 않은 매체(단행본으로서의 책)는 보는 사람이 별로 없단 뜻일까.

2026.5.5 화 (구로/부천)

〈흔적도 없이〉 시청. 〈스포트라이트〉에서 다루었던 가톨릭 사제 성범죄 사건과 양상이 비슷하지만 규모와 기간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

2026.5.4 월

데이비드 세다리스, 『이제 와서 어쩌겠수』 완독.


『좋은사람도감』 완독.


〈문라이트〉 시청. 단편적 시퀀스를 엮어놓은 듯한 느낌. 장면과 장면 사이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 했다. 의도했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 나는 좀 아쉬웠다. 그리고 연출면에서 이성애자가 만들었다는 느낌이 좀 많이 들었던 것 같다. 그래도 영화가 싫진 않았다.


오늘 바람이 유독 불어서 창문으로 바깥바람 새어들어오는 틈이 어딘지 알게되었다. 손가락을 대보니 이정도면 그동안 실외 먼지와 정화조 냄새를 실내로 다 들였겠다 싶다. 틈을 막을 문풍지를 사러 동네를 다 돌았는데 겨울 끝났다고 매대에서 다 치워버렸더라. 일단 수건으로 틀어막으니 바람은 더이상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냄새도 좀 줄어들까...다만 이대로는 창문을 여닫을 수가 없어서 문풍지를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2026.5.3 일 (양천/구로)

Melanie C - Sweat (2026)

2026.5.2 토

포스코 미술관 〈물의 정령들 & 자연의 기록자들〉 전시 관람.

2026.5.1 금

Jesca Hoop - Long Wave Home (2026)

2026.4.30 목

조 본드, 「아버지의 모든 아들들」


콘스탄스 그레이디, 「영화 <마이클>을 둘러싼 서글프고 추악한 논쟁」


변영근, 『버드와처』 완독.


요즘 들어 모친으로부터 부쩍 밥 먹으러 오라는 연락이 자주 온다. 그냥 혼자 사는 노인의 외로움과 적적함 때문인지, 혼자 사는 무능하고 나약한 자식이 무능하고 나약한 아비가 갔던 길을 따라 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 하는 마음에 안위를 자주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 뭔지 모르겠다.

2026.4.29 수

小沼理, 『1日が長いと感じられる日が、時々でもあるといい』 완독.


2년 전인가 3년 전인가 기억이 가물한데, 서울 퀴어 축제 즈음 해서 오누마 오사무小沼理 작가님으로부터 DM을 받았다. 축제 기간 서울이나 그 근처에서 차나 식사를 겸한 만남을 제안하셨던 걸로 기억하는데, 영어도 못 하고 일본어도 못 하는 입장에서 시간을 내서 만나는 것이 두렵고 부담스러워 거절했었다. 거절을 하고 나면 거절했다는 사실이 부채감 처럼 남아 그것과 관련되었다고 느끼는 어떤 신호를 일상에서 다시 마주하게 될 때마다 감정이 다시 살아나곤 한다. 그런 감정이 누적되어 있었고, 때문에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눈 DM창도 이제 차마 다시는 열어 볼 수 없는 금기의... 띵즈라익댓이 되었다(당장 메시지를 주고 받은 시기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DM을 열어보면 바로 알 수 있는데 확인하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이 책을 굳이 읽어야 겠다고 생각한 것도 그런 감정에서였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나서 간단하나마 소감을 전하면서 거절로 끝나버린 기억을 좋게 희석하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어디에도 공개된 이메일 주소가 없길래 말았다. 전화도, 메시지도, 모든 즉각적인 소통 수단이 부담스러운 내게는 —사적인 영역에서— 방명록이나 이메일 같은 서신 문화가 사라진 것이 못내 아쉽다.

2026.4.28 화

폴 서루, 「총기 애호」

헤밍웨이는 사냥용 소총을 수두룩하게 가졌었고, 윌리엄 버로스도 권총 소지자였다. 방대한 총기 수집가였던 헌터 S. 톰슨은 “나는 이것들을 무기라기보다는 도구나 장난감으로 생각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 모두 자신의 총을 폭력적으로 사용했다. 헤밍웨이는 아끼던 산탄총으로 생을 마감했고, 톰슨 역시 아내와 통화하던 중 45구경 권총으로 자살했다. 스스로를 명사수라 자처했던 버로스는 멕시코에서 ‘빌헬름 텔’ 흉내를 낸다며 아내의 머리 위에 술잔을 올려두고 쐈다가, 아내의 얼굴을 맞춰 숨지게 했다.
온순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시민이면서도 사격을 즐기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내 허가증은 권총 휴대를 허용하지만, 나는 절대로 총을 차고 나가지 않는다. 대중의 시선에 노출된 총은 폭력을 불러일으키는 자석이 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대다수 미국 남성 총기 소유자들의 마음속에는 위급한 상황이 닥치면 악당을 쏘아 넘겨 영웅적으로 재앙을 막아내겠다는 환상이 이글거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최근 캐나다를 여행하며 한 여성에게 미국인과 캐나다인의 차이가 무엇인 것 같으냐고 물었다. 그녀는 이렇게 답했다. “미국인들은 겁이 많아요. 그래서 총을 그렇게 많이 가지고 다니죠. 그들은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런데 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요?” 물론, 총을 든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것이리라.
Paul Theroux, 「Gun Love」

2026.4.27 월

카레 우동으로 배를 채우고, 도토루에서 커피를 샀다. 주문할 때 점원이 사이즈를 잘 못 알아들었는지 연인에게 “M인가요? L인가요?”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연인은 검지와 엄지를 직각으로 세워 'L'자 모양을 만들며 “L로 주세요”라고 답했는데, 그 모습이 사뭇 경쾌해 보여 마음이 갔다. 나는 아이스 카페오레 M 사이즈를 주문했다. 손가락으로 M을 만드는 건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다.
小沼理, 『1日が長いと感じられる日が、時々でもあるといい』

2026.4.26 일

리지 존슨, 「40년 후, 체르노빌이 남긴 미망인의 비극」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동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발레리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수색을 계속할지 물었다. 나탈리아는 이미 그가 떠났음을 직감했다. "내 아이들이 이미 고아가 되었다면, 다른 아이들이라도 아버지를 지키게 해주세요." 그녀는 수색 중단을 요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Lizzie Johnson,
「A Chernobyl Widow’s Tragedy, Forty Years Later」

2026.4.25 토

성수에서 아트 페어 〈더프리뷰서울2026〉 관람. 무려 (아트 페어 참여하신) 전지 작가님께서 초청장(!)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그림 많이 봐서 좋았고 미술 보러오는 남남은 팔 할이 게이임.


음료를 안 시키면 음료보다 훨씬 비싼 디저트(아이스크림)를 시켜 먹는다고 해도 손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카페에서 먹지 않고 그냥 나왔다. 웃긴 게, 카페에서 파는 메뉴 중에 디저트가 아닌 게 있나?

2026.4.24 금

알렉스 새먼, 「누가 플로리다 오렌지를 죽였나」


Eivind Aarset - Strange Hands (2026)

2026.4.23 목

불교중앙박물관 전시 〈도솔산 선운사: 선禪에 들고 구름에 눕다〉 관람.

2026.4.21 화

영자원에서 〈스트레인지 데이즈〉 관람.

2026.4.20 월

‘즐겁게 살고 있는 사람은 글을 쓸 틈이(필요가) 없다’

2026.4.19 일 (의왕/안양)

“안녕하세요.” 젊은 남자가 서글서글한 저음으로 운전 기사에게 인사를 건네며 버스에 올랐다. 나와 A는 하차문 근처에 앉아있었다. 젊은이의 태도에 호감을 느낀 A가 내게 넌지시 무어라 말을 했지만, 나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젊은이가 껄렁한 자세로 버스 앞쪽의 노약자석에 누운 듯이 털썩 앉아 다리를 꼬는 모습을 보고 A에게 말했다. “사람이 이렇게 복잡하다." 주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젊은이의 앞자리에 앉아 있었던 노인이 —젊은이의 무릎 때문에— 자기 의자 등판이 밀리고 있다고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젊은이는 노인을 흘깃 쳐다본 후 무시하고 이내 시선을 휴대폰으로 돌렸다. 무시 당한 노인은 결국 자리를 포기하고 우리가 있던 자리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시간이 지나 그 젊은이는 하차 했고, 나는 그것으로 이 해프닝의 모든 막이 내렸다고 생각했다. '인사를 잘하는 서글서글한 젊은이의 이면에 존재한 무신경한 자기중심성이 한 노인을 피해자로 만들었다'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에서 흘러나온 캠페인 방송(운전기사에게 폭언과 폭행을 하지 말라는 내용)에 노인이 난데 없이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운전기사에게 폭언을 할 수가 있겠냐는 둥, 승객을 범죄자로 생각하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는 둥, 사측에서 즉시 시정해야 한다는 둥, 서울 버스는 이렇지 않은데 경기 버스만 이렇다는 둥, 노인은 한참을 수신인이 누군지도 모를 분노를 허공에 쏟아냈다. 버스 안 분위기는 일순간 얼어붙었다. 그제서야 나는 노인이 아까부터 계속 뒤를 돌아보았던 것이 젊은이에게 당한 울분이 쌓여 분풀이할 기회를 보고 있었던 거라는 걸 깨달았다.

얼마 전, 나는 붐비는 1호선 전동차에서 단지 출입문에 서서 자신의 하차 의지를 방해했다는 이유로 역에 도착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비키라며 시비를 거는 노인에게 “내렸다가 타면 되죠.”라고 응수했다가 말대꾸를 한다며 된통 봉변을 당한 일이 있었다. 나는 부당하게 모욕을 당했다는 생각에 굴욕감을 느꼈고, 부당하게 공격적으로 구는 저급한 인간 앞에서 효과적으로 대응하거나 제압하지 못 했다는 분노를 삭히느라 그날 하루 소중한 시간 일부를 낭비했다. 아마도 그날 내가 느꼈던 감정이 오늘 마주친 그 노인이 느낀 감정과 비슷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 노인도 나처럼 굴욕감과 분노를 느꼈고 당사자에게 되갚아 주지 못한 것에 분노했던 것 같다. 다만 그 어쩌지 못한 감정을 처리한 방식에서 차이가 있었다. 살았어도 나보다 수십 년을 더 산 노인이 그 긴 세월에서 아무런 교훈도 얻지 못하고 성장도 이루지 못한 채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너절하고 비루한 모습을 노출하면서 품위와 자존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광경을 목격한다는 사실이 그래서 한편으로는... 비극이었다.

2026.4.18 토

영자원에서 〈맨디〉 관람.

2026.4.17 금

일기를 공개한다는 것은, 그렇게 쓴 문장들을 광장(가령 SNS 같은)에서 낭독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잠그지 않은 방'에 살며시 놓아두는 이미지에 가깝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글을 읽어 내려갔지만, 내 생각은 좀처럼 글로 옮기지 못했다. 웬만한 말들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선점된 것 같았고, 어떻게 써도 타임라인에 떠도는 말들에 대한 반응에 그칠 것 같아 내 언어가 되지 않는 기분이었다.
小沼理, 『1日が長いと感じられる日が、時々でもあるといい』

2022년에 표지 일러스트레이션 작업을 했던 일본 게이 작가 오누마 오사무의 에세이집 『가끔은 하루가 참 길게 느껴지는 그런 날도 있으면 좋겠다』 앞부분 30페이지 가량을 번역해서 읽어보았다. 세상이 참 좋아져서 이젠 외서를 휴대폰 사진으로 찍어서 바로 번역해서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조금씩 읽다보면 다 읽을 날도 오겠지.


요즘 문득 귀에서 앵–하고 벌레가 날아가는 소리가 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는데 벌레를 본 적은 없었다. 오늘도 그 소리가 나서 한참을 두리번 거리는 와중에 그 소리가 또 났고 그게 내 목 관절 어딘가에서 나는 소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리 크로닌의 미이라〉 시사회 관람. 공포가 아니라 권태로움만 느낌.

2026.4.16 목

데이비드 세다리스, 『꼼짝도 못 하고 서 있기』 완독.


알고리듬을 의도적으로 피했더니, 배달되는 글이 별로 없어서 흥미로운 글이 어디에 있을까 찾아 다니게 된다.


데이비드 세다리스, 「당신의 고관절 수술은 나의 골칫거리」

2026.4.15 수

점심 식후 산책하는데 반바지를 입을 걸 그랬나 싶은 날씨.


겨울 외투를 다 빨았다.

2026.4.14 화

〈내 이름은〉 시사회 관람.

2026.4.13 월

〈두 검사〉 관람.

2026.4.8 수

톰 크루, 「남자가 남자를 바라볼 때」


톰 크루, 「열쇠구멍을 들여다보는 눈」


톰 크루, 「발자크도 감히 하지 못한 일: 톰 크루가 말하는 게이 소설의 기원」

2026.4.7 화

로넌 패로, 앤드루 마란츠, 「샘 올트먼이 우리의 미래를 손에 쥐게 될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일까요?」

2026.4.6 월

알렉스 니덤, 「“바바라 윈저가 저희 엉덩이를 때렸어요!” 펫 숍 보이즈가 들려주는 파격적인 비주얼의 세계, 경악한 음반사 간부들, 그리고 여왕의 인사를 외면했던 사연까지」


마크 C. 오플래허티, 「패션으로 기록한 Pet Shop Boys의 일대기」

2026.4.5 일

〈살목지〉 관람. 국산 호러를 기대하면서 보게 될 날은 언제쯤 올까.


샤론 러너, 「독성 가스라이팅: 3M 경영진은 어떻게 인체 혈액에서 발견된 '영원한 화학 물질'이 안전하다고 과학자를 세뇌했나」

2026.4.4 토

〈공놀이클럽의 사계절 체홉: 벚꽃동산〉 관람.

2026.4.3 금

인터넷 서점에 샘플로 올라와 있는 닐 테넌트(Pet Shop Boys)의 가사 선집 「머리말」을 번역해 보았다.

2026.4.2 목

굳이 싫어할 것 까지는 없는데 싫어하게 되는 건 내가 평가하는 수준 이상의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한 시기심인 것 같기도 하다.

2026.4.1 수

『예수의 아들』을 읽다가 말았다.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가 생각나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그래서 겠지.

2026.3.30 월

제임스 버틀러, 「내가 지금 이탈리아에라도 와 있는 건가?」

2026.3.29 일

스펜서 콘하버, 「새로운 동성애 혐오의 뜻밖의 배경」

2026.3.25 수

일라이 사슬로, 「'난 오염됐어. 그 파일 속에 있으니까.'」

2026.3.24 화

『우리가 마지막 순간을 함께할 수 있을까』 완독.

2026.3.22 일

〈프로젝트 헤일메리〉 관람.

2026.3.17 화

『나에게 없는 것』 완독.

2026.3.16 월

〈아르코〉 관람.

2026.3.7 토

〈햄넷〉 관람.

2026.2.28 토

낭독극 〈모노텔〉 관람. 영화 〈센티멘탈 밸류〉에는 연극을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나머지 딸이 주연으로 출연하는 연극 조차 보러가지 않는 영화감독(스텔란 스카스고르)이 나온다. 이걸 보는 내내 내가 그 영화감독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2026.2.27 금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서사가 흐릿한 두어 편은 읽다가 넘겼다. 작가가 아직 이런 글도 써보고 저런 글도 써보는 단계인 것 같기도 하고. 두세 편은 좋다고 느꼈는데 어떤 스타일로 굳어질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영자원에서 〈롬〉 관람.

2026.2.26 목

〈폭풍의 언덕〉 관람.

2026.2.25 수

〈왕과 사는 남자〉 관람.

2026.2.18 수

〈센티멘탈 밸류〉 말 그대로 '센티멘탈 밸류(개인적인 추억이나 사연이 담겨 있어 그 사람에게만 특별하고 소중한 가치)' 같아서 나한테는 별로 크게 와닿지는 않더라. 뭔 말 하는진 알겠는데 큰 감흥은 없는.

2026.2.9 월

인생에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편하게 죽을 수 있는 옵션이 있다면 좀 덜 불안하게 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2026.2.6 금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자들이 서로 조직화되고 소통하며 협력하는 정도를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 개인의 성취에 기반한 ‘능력주의’ 사회라는 그들의 말을 믿지 마라. 그것은 지옥의 사교계에 초대받지 못했거나 입성을 거부한 대중을 기만하기 위한 구실일 뿐이다.”


새로운 일을 하기 전 설렌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순수한 희열을 목격할 때마다 고장난 사람이 된 기분이 되곤 한다.


요즘은 직원들이 직접 출연하는 출판사 컨텐츠 보면 업무만으로도 바쁠텐데 출연 준비까지 한다 생각하면 저거 하면 추가 수당이 나올까? 나는 저렇게까지 회사에 헌신할 수 있을까? 저들은 정말 즐거워서 하는 걸까? 그냥 주니어라서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참는 걸까? 요즘 세대는 오히려 하고 싶어 하나? 싫어도 해야만 하는 것이 이 시대 출판인의 숙명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인 걸까? 그런 잡생각이 많아져서 화면 속에 웃고 있는 사람이 진짜 웃고 있는 건지 속으로는 울고 있는 건지 생각하느라 마냥 컨텐츠에 집중하는 게 잘 안된다.

2026.2.5 목

꼭 겨울 끝물에 병 나더라.


〈이제 그만 끝낼까 해〉 대체 누가 이딴 영화를 만든 거야 하고 벼르고 있다가 찰리 카우프만이라니까 어 그래. / 영화 끝나고 나오는 크레딧 폰트 사이즈 너무 쪼그매서 킹받음. / 이동진 한 줄 평도 킹받음.

2026.2.3 화

『성원씨는 어디로 가세요?』를 빌려와서 앞부분을 조금 읽다가 말았다. 그렇다고 바로 반납하지는 않고 대출 기한이 끝날 때까지 이 책을 읽고 싶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보고 있다. 재미가 없든, 싫든 안 읽으면 그만인데 왜 굳이 그런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하는 걸까. 그것도 생각해 볼 일.


그나저나 게이 소설가들은 왜들 그리 자전적 소설을 쓸까.

2026.2.1 일

추운데 아침 산책도 잘 한다 해놓고 며칠 사이 ‘먹고 움직이자’에서 ‘덜 먹고 나가지 말자’로 바뀜.


앱스타인 파일도 그렇고 왜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쾌락이 향하는 곳이라는 게 늘 착취, 지배, 성 탐닉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걸까. 저런 걸 탐닉하고 갈망하는 성향이 있어야 부와 권력을 거머쥐게 되는 걸까.

2026.1.31 토

명필름아트센터 마지막 기획전 〈믹의 지름길〉 관람.


넷플릭스에서 〈빛나는 TV를 보았다〉를 보았다. 난 아무런 정보 없이 봤는데, 트랜스젠더의 트랜지션 서사라는 정도는 알고 봐야 납득이 더 잘 될 것 같더라.

2026.1.28 수

블로그에 다크 모드 추가.


영하 10도를 넘나드는 추위가 2주나 지속되고 있다. 첫 주에는 아침 산책도 포기했는데 2주차 접어드니 이제 영하 13도도 아랑곳없이 산책 잘한다.


문수라서 〈직장상사 길들이기〉 관람.

2026.1.27 화

블로그를 고치면서 하루를 보냈다. 먹고 사는 덴 아무 쓸모없는 일인데 왜이리 재미있을까.

2026.1.26 월

『고랭순대 작품집』 1, 2, 3 완독.


트위터를 떠난 여러 이유가 있지만 아무래도 내가 비사교적인 초내향인인 점이 큰 몫을 한 것 같다. 디지털이라 해도 사회는 사회다. 왕래하는 사람이 늘수록 그 모든 오고감과 선의, 그런 게 다 빚 같고 때로는 짐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그냥 여기서 오타쿠처럼 혼잣말이나 하는 게 나한테 맞는 것 같다.

2026.1.24 토

국립중앙도서관 첫 방문.

2026.1.21 수

『여섯 번째 2월 29일』 완독.


〈시라트〉 관람. 유럽인의 현실 자각 영화.

2026.1.16 금

『돼지의 피』 완독.

2026.1.8 목

은평구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중구의 도서관에서 읽으려고 가져갔다가 출입구의 도난방지기에서 경보가 울렸다.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결국 나갈 때 또 경보가 울릴 거라는 생각이 들자 그 때 부터 의식의 모든 것이 그 생각으로 가득차서 집중이 되지 않았다. 그냥 들어올 때 처럼 모른척 나갈 것인가? 하지만 들어오는 건 의심스러워 보이지 않아도 나가는 건 의심스러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럼 미리 얘기를 하는 게 좋을까? 그러면 어떤 문장으로 얘길 하는 게 좋을까? ...같은 식이다. 당연히 가져온 책도 읽을 수 없었다. 이러고 있을 바엔 그냥 포기하고 빨리 나갈까 싶었으나 들어오자마자 나가는 건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아서 꾸역꾸역 한 시간을 채우고 준비한 멘트를 하고 나왔다.

2026.1.5 월

망막병 재발.

2026.1.3 토

영자원에서 〈달팽이의 회고록〉 관람.

2025.12.30 화

〈주토피아2〉 관람.

2025.12.27 토

어제 새 책을 낼 출판사와 미팅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출판사가 책의 디자인과 마케팅을 우리가 책을 두 권 냈던 출판사에서 도움받고 있다고 해서 조금 신기하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튿날 새벽 어쩐지 일찍 눈이 떠졌고 새벽의 기운 탓인지 두 책을 냈던 그 출판사와 유쾌하지만은 않게 결별한 일이 다시 떠올랐다. 대형 출판사의 임프린트였던 그 출판사는 2020년 모기업에 흡수되었고 어느 시점에 사전 고지 없이 우리 책의 판매를 중단시켰다. 2022년 뒤늦게 책이 유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그저 책이 다 팔려서 품절이 된 줄 알고 트위터 계정에 품절 사실을 알리자, 트위터를 본 담당자로부터 뒤늦게 저간의 사정에 대한 메일을 받았다. 요는 합병 이전의 출판사 이름으로는 유통이 불가해서 표지만 새로 해서 “서둘러” 유통을 재개하겠다는 것이었는데, 1년이 훌쩍 지나도록 유통이 재개되었다는 소식은 없었다. 이후 다른 플랫폼에서 온라인 서비스 제안이 왔고 출판사에 온라인 전송 협의 요청을 했으나 결렬됐다. 그래서 결국 2023년 10월 출판사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했고 그 와중에 출판사가 “조만간 도서 유통이 정상화될 것”이라며 계약이 종료돼도 재고를 판매할 수 있게 해달라기에 동의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2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판매는 재개되지 않고 있다. 돈이 들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자신들의 계약 의무도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이익이 되지 않으면 돈 한 푼 들지 않는 작가의 요청도 거절하는 출판사와 간접적이지만 이런 식으로 다시 엮이게 되는구나. 과연 창고에 보관 중인 책들이 빛을 볼 날이 올까? 뭐 그건 향후 우리의 이름이 이익이 될지 말지에 달려있겠지. 세상 일이 그렇다.


〈척의 일생〉 관람.

2025.12.24 수

『테이블 포 투』 뉴욕은 재미있었는데 캘리포니아는 내 취향이 아닌 듯...완독은 못 할 것 같다.

2025.12.16 화

『2025 김승옥 문학상 수상작품집』

2025.12.14 일

〈우리는 광장에서〉 시사회 관람.

2025.12.13 토

뮤지컬 〈명랑 가족〉 관람.

2025.12.12 금

여성 한 분이 운영하는 작은 카페에 가끔 책을 읽으러 간다. 가면 내가 항상 앉게 되는 자리가 있다. 일부러 그 자리를 고집하는 것은 아니고 좁은 카페다 보니 남는 자리가 거기 뿐인 경우가 많다. 계산대와 거의 붙어있는 데다, 2인이 앉을 수도 있지만 사실상 1인용 자리다. 나는 주로 계산대를 등지는 방향으로 앉는데,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반대편에도 의자는 있지만 등받이가 없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등받이가 있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반대 쪽에 앉아 굳이 카페 주인과 눈을 마주치고 싶지 않기도 하니까. 오랜만에 가니 그 자리의 인터페이스가 약간 업그레이드 되었다. 테이블 위에 도서 받침대가 놓여있고 책이 두 권 비치되어 있었다. 책이 놓여있는 위치 때문에 등받이가 없는 쪽은 앉기가 전보다 더 애매해졌다. 인터페이스의 의도가 한층 강력해진 것. 나는 그동안 전혀 의식하지 못 했던 짝이 맞지 않는 의자(스툴)의 존재가 철저한 의도였다는 걸 깨달았다. 아마도 최초의 의도는 볼드체 문장에 담긴 이유였을 것 같다. 하지만 그 의도가 한층 강화된 이유는 이 일기의 첫 문장 머리에 담겨있지 않을까 짐작해보며 책을 펼쳤다.

2025.11.30 일

〈프레데터: 죽음의 땅〉 관람.

2025.11.23 일

〈국보〉 관람.

2025.11.15 토

낭독극 〈멜라닌〉 관람.

2025.11.8 토

〈부고니아〉 관람.

2025.11.3 월

〈8번 출구〉 관람.

2025.11.2 일

연희극 〈불편한〉 관람.

2025.10.25 토

〈세계의 주인〉 관람.

2025.10.22 수

〈빅 볼드 뷰티풀〉 관람.

2025.10.16 목

〈웨폰〉 관람.

2025.10.13 월

〈중간계〉 시사회 관람.

2025.10.9 목

『집, 다음 집』 완독.

2025.10.7 화

〈그저 사고였을 뿐〉 관람.

2025.9.28 일

연극 〈엔드 월〉 관람.

2025.9.27 토

〈퍼펙트 블루〉 관람. 얼마 전에 본 〈오프닝 나이트〉가 이 영화의 레퍼런스였을 줄이야.

2025.9.22 월

〈어쩔수가없다〉 관람.

2025.9.18 목

선크림 바르면 눈도 시리고, 계속 돈 들여 가면서 나한테 맞는 거 찾기도 짜증나고, 무기자차는 가방에 다 묻어나고, 얼굴 허옇게 뜨는 것도 보기 싫고, 더워 죽겠는데 얼굴에 옷 한 겹 입은 것 같은 답답한 느낌도 싫고, 그러다 땀흘리면 세수 한 번 하고 싶은데 그러면 선크림을 다시 발라야 하잖아? 생각하며 세수를 그만두는 내가 한심하기도 하고, 이래저래 삶의 질이 하락하는 소리가 들려서 그냥 올 여름엔 안 바르고 살아봤다(대신 햇빛 강할 때는 양산을 쓰고). 솔직히 너무 편하고 좋다.

2025.9.15 월

『술꾼도시여자의 주류 생활』 완독.

2025.9.13 토

영상도서관에서 존 카사베츠 감독의 〈오프닝 나이트〉를 보았다. 2024년에 이 영화를 원작으로 한 뮤지컬이 영국 웨스트엔드에 선보였는데, 내가 좋아하는 게이 싱어송라이터 루퍼스 웨인라이트가 작곡을 담당했고 그 음반이 어제 막 나와서 들어보던 차에 내용이 궁금하기도 했다. 사실 더 궁금했던 이유는 2년 전에 읽었던 단편 소설 「오프닝 나이트」 때문이었다. 소설을 읽었을 때만 해도 나는 제목이 그냥 소설 속 무대가 미술 전시회 오프닝 리셉션이라 그렇겠거니 생각했었다. 하지만 뮤지컬 덕분에 영화의 존재를 알게 되고 더욱이 영화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이미 존재감이 있는 작품이라고 하니 소설 제목으로 차용했을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소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나는 천상 씨네필은 못 되어서인지 영화 자체에 그렇게 큰 감명을 받지는 못했지만, 소설과 영화의 연결고리를 가늠해 보는 차원에서는 흥미롭게 봤고,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인 머틀은 연극 개봉을 앞두고 배우인 자신과 작품 속 인물이 너무 동떨어져 있으며, 현실감이 떨어진다는 불평을 하다가 거부감에 몸부림을 치며 무대 위에서 대본에서 벗어난 객기인지 병증인지 모를 돌발 행동들을 이어간다. 그렇게 무대와 무대 뒤의 사연이 뒤섞여 영화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디까지가 대본이고 어디까지가 그녀 자신인지도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떻게든 소설을 계속하기 위해서) 소설 속에 본인 삶의 농도를 높이기로 했다’는 작가의 글쓰기와 겹쳐보이기도 했다. 그래서 작가가 이 영화 같은 소설을 쓰려했다기보다 이 영화를 좋아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소설가의 연인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화자는 자신이 연인의 소설에 등장한다는 걸 긍정했던 시기가 있었음을 인정하지만 종국엔 그것이 불화의 불씨가 되었음을 회상한다. 실제 삶이 어느 정도 반영된 소설을 쓰는 작가로서 2020년 이후 소설계에서 불거진 논란들을 보면서 고민이 없진 않았을 것 같다. 몇몇 기성작가들은 그것을 누구 혼자만 소유할 수 있는 기억이라고 할 수 있냐는 식으로 작가만을 대변하는 듯한 소설을 내놓았고, 어느 비평가는 결국 기분의 문제라는 식으로 결론 내리기도 했다. 워낙 글을 탁월하게 쓰시는 분들이니 내 T자아도 그런 항변들을 어느정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내 F자아는 여전히 그 글들을 다소 고깝게 여기고 있었다. 이 소설은 그 기분으로 치부되는 문제가 좀 더 복잡한 층위의 사연을 내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면에서 내 F자아를 어루만져주는 것 같았고 그래서 이 소설을 좋아한다. 어쩌면 이 소설이 진짜 소설가의 마음은 아닐지라도 그가 소설가의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소설에 이용된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가 자기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그려냈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으로 남은 이 영화가 못내 흔적으로 남긴 소설가의 마음은 아니었을까 상상해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고통 속에 마신 술에 너무 취한 나머지 몸을 제대로 가눌 수도 없지만 어떻게든 무대에 서서 공연을 해내는 머틀처럼.

2025.9.7 일

생각을 많이 하면 난 항상 자책하는 결론으로 빠지는 것 같다. 이것도 습관이겠지.


〈3학년 2학기〉 관람.

2025.9.1 월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완독.

2025.8.26 화

어릴 때 TV에서 본 〈에이리언2〉를 다시 보았다. 다시 본다는 게 무색할 정도로 유명한 장면 몇 개를 빼놓고는 처음 본 영화처럼 봤다(아마 당시에 본 것도 가위질이 꽤나 많이 됐었겠지만). 모든 면에서 기술적으로 진보한 속편이지만, 2편에는 H.R기거가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거의 컨셉 디자인이 필요했을 법한 외계의 인공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인간이 만든 장소만 나온다. 그리하여 제임스 카메론 답게 다분히 헤테로스럽고 퀴어한 느낌이라고는 1도 없는 밀리터리 괴수 액션 영화가 되었다. 그래서 개인적으론 두 시간이 훌쩍 넘는 러닝타임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영화는 아주 훌륭하게 잘 만들었다고 생각하지만 굳이 내 취향 리스트에 넣진 않을 것 같다.

2025.8.25 월

부모의 사랑이 조건 없는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좋은 부모 만난 덕에 그런 낭만적인 생각도 할 수 있음을 다행이다 생각하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2025.8.24 일

『어둠 뚫기』 완독. 전작들 보다는 재미있게 읽었다. 오토픽션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의도된 곡선을 그리면서 결말에 이르는 식은 아니라서 초반의 기세가 중후반으로 갈 수록 옅어지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건 오토 픽션이니까 어쩔 수 없지 않았을까 싶다(인생을 구상해둔 소설처럼 살순 없으니). 나도 모친이 미싱사를 했었기도 하고 편모 가정의 둘째라 가족 관계의 어떤 부분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느끼기도 해서 이입이 잘 되었던 것 같다. 그래도 화자는 나와 달리 사람에 대한 그치지 않는 기대와 애정이 있는 것 같다. 그렇기에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고 상처를 감당해야만 했을 것 같다. 끝내 모친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그런 성정에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2025.8.22 금

‘할 수 없지’란 말을 속으로 자주 되뇐다. 잠깐이나마 비어지려는 처지의 서운함을 달랜다.

2025.8.20 수

〈발레리나〉 관람.

2025.8.16 토

〈내 말 좀 들어줘〉 관람.


〈에이리언:어스〉 보고 실망스러운 마음을 〈에이리언:로물루스〉와 〈프로메테우스〉 재시청으로 달래었다. 그나저나 프로메테우스 썩토 점수는 왜 낮을까 재미있는데...솔직히 나는 로물루스보다 프로메테우스가 더 좋음. 로물루스는 재미있지만 질문이 없어서 아쉽다.

2025.8.12 화

빅 프리디아Big Freedia 의 퀴어 가스펠 컨셉 앨범(Pressing Onward)을 듣고 있으니 문득 내가 교회에서 초등부부터 중등부까지 성가대 활동을 했었다는 사실이 기억난다(성가대를 했었다는 사실 이상은 아무 기억도 남아있지 않지만). 교회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아마도 그 특유의 눈에 띄는 의상을 착용하고 노래를 한다는 점에 끌렸던 것 같다. 많은 게이가 실제 흑인 침례교회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빅 프리디아의 증언과 게이들이 천착하는 디스코와 신스팝,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세속화된 교회 음악의 특성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교회가 그렇게도 핍박하는 퀴어가 교회의 의례와 퍼포먼스에 누구보다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아이러니하다. 종교적 의례란 것이 본디 퀴어할 수 밖에 없는지, 퀴어가 종교적 의례에 기여했기 때문인지 그 선후는 모르겠지만, 끌리는 마음 만큼은 너무 아니까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하고.

2025.8.10 일

〈머티리얼리스트〉 관람

2025.8.8 금

〈야당(디렉터스 컷)〉 관람.

2025.8.3 일

부친의 죄는 대부분 술에서 비롯됐다. 술에 취해 출근을 안 해서 직장을 오래 다니지 못했고, 그렇게 돈을 벌지 못했고, 술에 취에 밤늦게 집에 들어와서는 온가족이 밤새 잠을 못 자도록 말을 걸어댔다. 그도 아니면 택시비를 내지 않고 택시 기사와 싸우다가 새벽에 파출소에서 전화가 오게 만들거나. 양친은 하루가 멀다하고 서로 싸웠다. 새벽에 싸움을 말리러 온 셋방 주인들이 생각난다.

와중에 부친은 더러 모친을 패기도 했다. 하지만 적어도 난 그에게 맞은 기억은 없다. 오히려 실질적 가장이었던 모친에게 맞은 기억은 참 많다. 주된 이유는 청소였다. 모친이 직장에서 퇴근했을 때 집을 어질러 놓고 청소를 해놓지 않았다고 모친은 원목 방비의 빗자루대를 매로 삼아 허벅지를 두들겨 팼다. 빗자루살을 손으로 감아쥔 부분이 회복되지 못한 채 늘 누워있었다. 그만큼 자주 맞았다. 나의 죄는 힘들게 일하는 모친을 돕지 않은 죄였다. 모친은 빗자루를 들 때면 늘 그 단순한 죄목을 다양하게 변주한 문장으로 읊었다.

어찌어찌 부친이 죽고 한참 세월이 흘러 어찌어찌 남은 가족이 독립의 형태를 갖추고 따로 살기 시작한 이후에 모여서 밥을 먹는 자리에서 어릴 때 모친에게 맞았던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가해자들이 늘 그렇듯이 모친은 자기가 자녀들을 때렸다는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다. 모친은 “너희들은 그럼 그걸 다 기억하고 있냐?”고 물었고, “그럼, 다 기억하지”라고 얼른 대답했던 기억이 난다. 이 때가 아니면 못한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후 한동안 모친이 반찬을 해서 나르는 날이 늘었던 것 같다. 모친은 미안한 것이 있으면 미안하다는 말 대신 끊임없이 보상을 하려 든다. 사랑을 주는 방법을 몰라서 사랑 대신 돈을 쥐어준다.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가 그럴테지만. 다만 상처는 보상으로 아물지 않고, 사랑이 금전으로 깊어지는 것 같진 않다. 더욱이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가해를 사과하고, 또 사과를 받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인생살이의 씁쓸함 한 스푼 정도는 거기에 있겠지.


연극 〈춘섬이의 거짓말〉 관람.

2025.7.31 목

〈판타스틱 4: 새로운 출발〉 관람.


끝까지 살아남으면서도 유의미한 결과를 내고 싶다...그럼, 지금까지는 유의미한 결과가 아니었냐고? 아닌 것 같음. 그냥 살아남아만 있는 수준인 것 같음...

2025.7.28 월

요 며칠 변비약 없이도 잘 살아 모드...이대로 지속되길 바라.

2025.7.26 토

라이언 머피가 드디어 새로운 제시카 랭을 찾아낸 것 같네. 〈그로테스커리〉는 보면서 도통 무슨 얘긴가 하다가 끝났다.

2025.7.25 금

“심리학자들은 인지적 공감(타인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능력)정서적 공감(타인의 감정을 보며 느끼는 본능적인 감정)을 구분합니다.” 예전에 어느 심리학과 교수가 한국인들은 공감을 잘 하는 편이지만 인지적 공감은 부족한 편이라고 했던 게 생각난다.


해외 아티스트의 신보를 감상하면서 좋은 느낌이 들면 매체에 실린 리뷰와 인터뷰를 찾아서 읽는다. 이런 과정이 한국 만화엔 없다는 씁쓸한 감정을 느끼면서.

2025.7.25 금

냉장고 고쳤다! ㅠㅠ


아오리의 국산 품종이라는 썸머킹을 작년에 사먹어 보고 실망했으나 올해도 혹시나 해서 사보았는데 또 실망. 기본적으로 제대로 익은 것을 수확 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심지어 씨도 흰색일 정도면 먹을 수 없을 정도로 설익은 게 아닌지? 아닌게 아니라 시고 떫어서 이건 사과라고 할 수도 없음(나는 이딴 것을 사고 왜 반품하지 않는 걸까).


자기가 인터뷰 하는 작가 책 한 권 읽어보지도 않고 앵무새 같은 질문이나 하면서 인터뷰어로 밥벌어 먹고 사는 사람도 있는데 나같은 게 뭘 안다고 만화를 그리고 있을까 같은 생각 그만해야 겠다 생각함...난 잘하고 있다!

2025.7.24 목

불바다에 빠진 것 같은 날씨에 냉장고는 고장이 났고.

2025.7.22 화

셀린 송이 드디어 백인 영화를 만들었다고? 보지 않아도 전작 보다 좋을 것이다. 백인들에게 인정 받기 위해서는 싫어도 부모의 나라를 팔아야만 했던 고통(이건 내 뇌피셜이 아니라 그녀의 연극 〈엔들링스〉에서 스스로 고백함)에서 해방되었을테니…

2025.7.21 월

지르텍 먹고 잔 다음 날은 오전을 완전히 날리게 된다.

2025.7.20 일

〈메간 2.0〉 관람.

2025.7.19 토

북유럽(혹은 그런 류) 범죄 스릴러에는 사건에 빠져서 가정을 원만하게 유지하는 데 실패하는 주인공이 꼭(!!!) 나온다. 장르라는 게 대체 뭐길래, 대체 누가, 이렇게 천편일률적으로 무너지는 주인공을 언제까지고 계속 봐야 하는 천년의 형벌을 부여한 걸까. 적어도 미국판 〈The Night of〉에서는 원만하게 지켜야 할 가정도 가족도 없지만, 좀처럼 낫지 않는 악성 무좀과 고양이 털 알레르기에 시달리면서 고양이를 키우는 변호사 주인공이 ‘무너지는 주인공’의 임무를 수행해 낸 성공적인 변주가 있었지만, 그런 사례는 굉장히 드물고 세상은 여전히 그 형벌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주인공들은 천편일률적으로 무너지고 있다. 오늘도.

2025.7.18 금

영자원에서 〈뽀삐〉+〈요세미티와 나〉 관람.


〈언테임드〉는 꾹참고 2화까진 넘겨보려고 했는데 못 넘길 것 같다.

2025.7.17 목

아프다는 핑계로 밥을 많이 먹고 있다. 하지만 헥사메딘 가글 부작용 때문인지 미각이 둔해졌음...

2025.7.16 수

〈어둠 속의 감시자〉 나는 그럭저럭 재밌게 봤는데 평가는 처참하네...미스터리 장르에서 범인 없는 결말은 관객을 모욕하는 일일까. 범인 없는 미스터리 장르 하니 〈고스포드 파크〉 생각도 난다. 그 영화도 좋아했는데.


편도선염과 구내염 콤보. 요즘 왜 이렇게 비실비실 할까.

2025.7.15 화

SNS 디톡스 중...안 보려고 하니 안 봐지긴 하네.

2025.7.14 월

자연 다큐멘터리를 종종 수면제로 활용해야겠다.


소설가들은 발표하지 않았던 단편 소설을 소설집에 싣기도 하나? 그냥 궁금했던 것.

2025.7.13 일

〈슈퍼맨〉 관람. 요즘 블럭버스터는 모든 것이 뇌절의 극한까지 가있어서 지루하게 보진 않았지만 너무 많은 걸 겉핥기 수준으로 다룰 뿐이라 기억나는 게 별로 없는 느낌.

2025.6.29 일

〈바다호랑이〉 관람.

2025.6.22 일

퀴퍼 다녀온 이후로 쌈장 만들 때마다 된장 온몸에 바르고 나와서 동성애는 똥이라고 외치던 아저씨가 생각난다.


또 아픈 곳이 하나 씩 늘고 있어서 걱정이다. 주로 관절과 힘줄, 인대 부위들이고 쓰지 않아도 아프고 쓰면 더 아프고.

2025.6.21 토

〈엘리오〉 관람.

2025.6.19 목

〈서울국제도서전〉 관람.

2025.6.18 수

도시의 간판이 재미가 없어진 게 90년대부터 간판 제작에 컴퓨터가 도입되고 기성 폰트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였는데, AI가 만들어낸 일러스트레이션과 영상이 활용되기 시작하는 지금 그 때의 기분이 되살아나는 것 같다.

2025.6.17 화

모친이 지금 내 나이에 고등학생 자녀가 둘이나 있었구나 생각하니 참 새삼스럽다.

2025.6.13 금

〈소년의 시간〉에 대한 페미니즘적 리뷰에 내 아들은 페미니즘의 피해자 라면서 너희가 하는 페미니즘은 낡고 어리석다며 가시돋친 사연을 보내는 어머니가 등장하는 걸 보면, 내 아들이 여성혐오(범죄)자라는 현실을 맞닥뜨린 부모의 모습을 중요하게 담고 있는 이 작품의 시의성이 너무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같은 작품을 놓고 자기 좋은 쪽으로만 해석하는 인간의 한계도 느낀다.

자식도 없는 너희가 이 작품을 제대로 볼 수 있을리 없다는 확신의 찬 말들에서는 모성과 사랑의 호르몬이라는 옥시토신 생각도 나게 하고. 그러니까 내 가족, 내 사람, 내 집단에 대한 사랑과 보호 본능이 큰 사람은 외부로 상정된 대상과 집단에 대한 공격성은 되려 크기도 하다는 점...

2025.6.8 일

창작ing 연희극 〈52Hz〉 관람.

2025.6.5 목

2013년 데뷔 이후 처음으로 이란 걸 받았다.

2025.6.4 수

이재명 대통령 당선

2025.6.1 일

사실, 쉽게 나오는 것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게 바로 당신의 재능의 핵심이기 때문이죠.
Neil Tennant

2025.5.31 토

〈하이파이브〉 관람. 〈외계+인〉 보다는 낫다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순전히 러닝타임 때문일 것. 그리고 간접광고가 무슨 테레비 연속극 마냥 짜치게 나오더라. 요즘 영화 원래 이런데 나만 몰랐나.

2025.5.28 수

〈씨너스:죄인들〉 관람.

2025.5.22 목

〈엔들링스〉 관람.

2025.5.18 일

〈미션 임파서블: 파이널 레코닝〉 관람.

2025.5.4 일

〈해피엔드〉 관람.

2025.4.30 수

〈썬더볼츠*〉 관람.

2025.4.25 금

〈압수수색〉 관람.

2025.4.17 목

〈헤레틱〉 관람.

2025.4.13 일

안산 단원구 4.16 기억교실에 다녀왔다. 빈자리를 눈으로 확인했을 때 다가오는 죽음의 실감이라는 것이 있어서 몇 번을 울컥하는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고통을 분담해도 모자랄 장소인 단원구 곳곳에서 세월호 희생자 납골당 건립을 반대하는 세력들의 흔적을 봐야했던 것도 가슴 아팠다.

2025.4.12 토

〈베러맨〉 관람

2025. 4.11 금

〈목소리들〉 관람

2025.4.4 금

윤석열 탄핵 인용

2025.3.30 일

넷플릭스에서 〈복수는 나의 것〉을 보았고, 나는 확실히 씨네필 취향은 아닌 것 같음.

2025.3.23 일

〈플로우〉 관람.

2025.3.20 목

팟캐스트에서 학창시절 담임선생의 무신경한 행정에 대한 에피소드를 듣다가 고등학교 때 생각이 났다. 학기 초, 담임이 나를 포함 몇 명을 호명해서 교무실로 호출했다. 서너 명 정도가 무리지어 교무실로 향하는 어색한 공기 속에서 무슨 일인지 서로 궁금해 했다. 어색한 것은 서로 친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궁금해 한 것은 그 무엇도 공통점이랄 게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담임은 본인의 책상을 등지고 의자에 앉아 그 앞에 우리를 쪼로록 세워놓고는 말했다. 결손 가정 학생을 위한 급식비 지원 프로그램이 있다면서 우리들이 그 대상이라 신청을 하려고 하는데 동의를 구하겠다는 거였다. 싫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교실로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다만 올 때와는 달리 말하는 사람이 없었고 곧 각자의 속도로 흩어졌다. 급식비 지원 프로그램은 학기를 넘겨 곧 폐지되었고, 그 친구들과도 그 날 이상의 접점이 생기진 않았다.

2025.3.18 화

나는 문을 닫아 놓은 저편의 일을 잊어버리는 습관이 있다. 문을 닫아 놓는 곳은 주로 베란다인데, 이를테면 베란다에 있는 세탁기를 돌려놓은 것을 까맣게 잊어버린다거나, 베란다 인덕션에서 조리하던 음식을 잊어버려서 냄비를 홀랑 태워먹는다거나, 식히려고 베란다에 잠시 둔 밥을 잊어버리고 새로 밥을 짓는다거나, 하수구 냄새가 나는 방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놓고 문을 닫은 후 잊어버리고 그냥 잠들어서 아침에 그 방만 시베리아가 된 걸 확인한다거나...


쌀 살 때마다 비싸다 비싸다 했는데 일본 쌀값 소식 듣고 나니 쌀이 참 싸다 하고 있다.

2025.3.15 토

〈에밀리아 페레즈〉 관람.

2025.2.28 금

〈미키 17〉 관람. 총기를 다 잃은 것 같은 봉준호 영화.

2025.2.26 수

〈컴플리트 언노운〉 관람.

2025.2.23 일

〈퇴마록〉 관람. 나는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가 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영화를 잘 해줬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이런 생각을 〈원더풀 데이즈〉 때부터 했던 것 같다.

2025.2.21 금

〈미망〉 관람. 여러모로 『YOYO』가 생각나는 영화였다. 남녀가 걷는 광화문과 종로의 그 길도 그렇지만 밤샘한 남주가 택시에서 자는 와중에 사직 터널 통과하는 장면도 있더라. ㅎㅎ

2025.2.17 월

Pet Shop Boys는 2012년 팔로폰 레이블과 재계약이 불발된 후 10여년 동안 인디로 앨범을 자체 제작 했었는데, Chris Lowe가 작년 어느 인터뷰에서 이번에 레이블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로 ‘스트리밍 수익이 개선됐기 때문’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그 인터뷰를 읽었을 당시에는 그게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갸우뚱 했었다. 그전에는 스트리밍 수익이 변변치 않았나? 아님 2020년대 들어서 그들의 인기가 상승한 걸까? 생각했었는데, 오늘 산책하면서 문득 그들이 레이블을 떠난 시기인 2012년 전후의 음악 청취 환경을 생각해보니 그때만 해도 스포티파이가 미국 시장에서 시범 서비스를 하고 있었고, 애플 뮤직은 등장하지도 않았었더라. 피지컬 음반은 저물었는데 합법적인 디지털 음원 시장은 여명에 불과한 상태. 지금은 스포티파이와 애플뮤직이 전 세계에서 서비스를 하고 있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음악을 소비한다. 굳이 불법적인 경로로 MP3를 다운받아서 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피지컬 음반은 굿즈 개념이 되었다. 지금은 너무 당연해진 풍경이 바뀐 게 고작 10년 정도라니 새삼스럽다.

2025.2.5 수

Pet Shop Boys - If Jesus had a sister

2025.1.31 금

사람들이 자기가 신뢰하고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걸 따라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는 게 생각할 수록 좀 무섭다. 그게 닫힌계에서는 ‘사회성’의 척도로 여겨지기도 한다는 점도.


의사는 굳이 약을 먹을 정도는 아니라고 했음에도 논문을 쓰기 위해서 ADHD 약을 처방 받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논문을 쓰지 않으면 ADHD 환자가 되지 않음에도 논문을 쓰지 않는 삶을 선택할 수 없는 현대인을 생각했다.


Pet Shop Boys - The Survivors

2025.1.26 일

Pet Shop Boys - Will-o-the-wisp

2025.1.25 토

〈검은 수녀들〉 관람. 2025 최악의 영화 후보에 올린다.

2025.1.22 수

Pet Shop Boys - Give stupidity a chance

2025.1.19 일

‘경쟁적인 성격’이라 함은 경쟁의 상황에 놓이는 것을 기꺼이 추구한다는 식으로 해석하기 쉽지만, 경쟁심(뜻: 남과 겨루어 이기려는 마음)이라는 단어의 의미로 생각해본다면 경쟁을 회피하려 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경쟁심은 있을 수 있다. 다시 말해 경쟁에 초연한 사람이라면 경쟁의 상황에서 졌을 때도 큰 타격을 받지 않겠지만, 이기고 지는 것에 연연하는 사람은 그 집착과 미련으로 하여금 더 달음질 할 수도, 아니면 그런 생각에 압도 당해서 아예 도망쳐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경쟁을 추구하는 사람도 경쟁적인 것이고, 경쟁을 회피하는 사람도 경쟁적인 것이다. 과한 두려움은 과한 열망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생각난다. 동성애 혐오가 동성애의 욕망을 부정하는 데서 시작되듯 열망의 반대는 혐오가 아니라 무감(無感)이다.

2025.1.18 토

〈노스페라투〉 관람. 이 감독 영화 드디어 대형 스크린으로 봤네. 잘 만들었더라.

2025.1.17 금

망막병 재발.

2025.1.15 수

내란 수괴범 체포.


릴라 샤피로, 「There Is No Safe Word」

2025.1.11 토

예전에 내가 SNS에 적기도 했고, 이 글의 본문에 언급된 웹사이트(자수 문제 해결 가이드)의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HTML은 뜨개질 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차곡차곡 의도한 모양을 만들어 나가고 비틀린 모양을 바로 잡는 과정이 그런 느낌을 주는 걸지도 모르겠다. 또한 많은 뜨개러들이 고백하듯 나도 HTML을 작성하고 있을 땐 시간이 무척 잘 흐르고, 그런 편집 행위 속에서 묘한 위안을 얻는다. 본업인 그림과 달리 재능에 대한 생각이 나를 갉아먹지도 않고, 투입한 만큼의 결과물이 나오고, 순전히 자기 만족 이상의 목표가 없다는 점 때문일까.

2025.1.5 일

〈시빌 워:분열의 시대〉 관람. 극중 미국 대통령의 최후가 지금 대한민국 대통령의 최후였으면 했어.

2025.1.4 토

미술대학 건물 안에서 교수 살인마에게 쫓기다가 늘 같은 방에서 살아남는 꿈을 오랜만에 다시 꾸었다. 저번엔 언제 꿨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지금 시기가 공교롭게도 새작품을 막 들어간 시점이라 아마 전에도 그런 맥락이 있었지 않았을까 싶다. 그림이 너무 어렵고 잘해낼 자신이 없다. 왜 작품을 거듭할 수록 그런 생각이 더 커질까.

2025.1.2 목

새해라고 없던 의욕이 샘솟진 않네.


의욕 없음은 일단 낫지 않는 부비동염 탓인 것으로.

2024.12.30 월

코감기와 함께하는 연말.

2024.12.29 일

〈하얼빈〉 관람. 롯데시네마 수퍼LED 뭐시기에서 봤는데, 스크린도 좋고, 영화도 좋고, 어둠 속에서 빛을 밝히려 하는 인물의 분투가 결코 과거의 일만 같지 않아서 찡하기도 했고. 그런데 영화 바깥으로 슬픈 일 때문에 곱씹을 겨를이 없네.

2024.12.28 토

팥빵주의자라면 대전에서는 성심당 보다는 정인구 팥빵.


앤드류 설리번, 「열렬한 Pet Shop Boys 팬들을 위한: 크리스 로 인터뷰 전문」

2024.12.25 수

앤드류 설리번, 「열렬한 Pet Shop Boys 팬들을 위한: 닐 테넌트 인터뷰 전문」

2024.10.25 금

Laura Marling - Patterns in Repeat (2024)

2024.9.18 수

Rufus Wainwright - Dinner at Eight

2024.7.22 월

사람들의 일하느라 밥 못 먹었다는 얘기는 늘 신기하다. 말하는 당사자들은 자기 연민 처럼 그런 말을 하지만 내 입장에선 ‘나는 일하면서 허기라는 걸 느낄 수 없을 만큼 도파민이 뿜어져 나온다’로 들려서 은근한 자랑으로 느껴진다. 일중독자의 나라에서는 그럴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2024.6.29 토

우리 만화를 프랑스어로 출간한 Éditions çà et là의 Serge가 서울 도서전 참관을 위해 서울에 온다고 하여 겸사겸사 식사 자리를 갖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무엇보다 프랑스의 현대미술관인 퐁피두 센터에서 6개월 동안 대규모 만화 전시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준 것이 기억에 남았다. 소식을 전하는 Serge의 어조에서도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라는 은근한 흥분이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국립현대미술관에 만화가 걸린다는 건 그들이 만화를 '모던'으로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맞지, 만화도 당당한 현시대의 미술인데. 왜 아니겠나? 부럽고 멋지면서도 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은 어떤가. 과연 내 생에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만화를 큐레이션하고 작가들을 조명할 날이 오기는 할까?

2024.7.8 월

Pet Shop Boys - Rent

2024.6.22 토

〈Boy Erased〉 시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