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용

디스코는 구리지 않다 (번역)

Asa Williams 「Disco Doesn’t Suck」

1979년 7월 12일, 디스코는 미국 대중의 손에 암살당했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지미 카터가 백악관에서 디스코를 튼 첫 번째 대통령이 되었고, <토요일 밤의 열기>(1977)나 <금요일 밤의 열기>(1978) 같은 영화들은 이 장르가 가진 대중적 인기와 매력을 유감없이 증명했다. 도나 서머, 비지스, 아바 같은 아티스트들은 1970년대 후반 내내 차트 정상을 지키며 라디오 방송을 장악했다. 록 음악의 독점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디스코는 미국 전역을 휩쓴 반문화 운동의 핵심 축으로 자리 잡으며, 주류 사회의 억압적인 문화에 전면으로 저항했다.

미국 대도시의 나이트클럽 안에서 디스코는 개인을 표현하는 해방구였다. 사방이 꽉 막힌 어두운 공간에서 사람들은 비로소 온전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보수적인 바깥세상은 차단되었고, 보복의 두려움 없이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가 그 벽 안에서 허용되었다. 이는 디스코 음악의 초석을 다진 수많은 흑인과 퀴어 아티스트들에게 흔치 않은 기회였다. 민권 운동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던 시절이었고, 미국정신의학회가 동성애를 정신질환 분류에서 제외한 것은 1973년에 이르러서였다. 전 미국 전역에서 동성 관계가 합법화된 것은 2003년 '로렌스 대 텍사스' 판결 이후의 일이다. 퀴어 성향, 성 해방, 여성 권 신장 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었던 디스코의 본질은 미국의 주류 사회와 긴장을 유발할 수밖에 없었다. 1979년 2월, 디스코 앨범들이 그래미 어워드를 휩쓸면서 싫든 좋든 이 음악은 대중의 시선 한복판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1970년대 초에 접어들며 히피 운동이 품었던 낙관주의는 서서히 바래 가고 있었다. 베트남 전쟁의 진통, 마틴 루터 킹 목사와 존 F. 케네디의 암살, 워터게이트 스캔들, 그리고 미국 도시 전역의 범죄율 상승이 맞물린 결과였다. 특히 뉴욕이 '공포의 도시'로 변모해 가던 상황은 이러한 침체를 가속했다. 이 속에서 나이트클럽 음악은 일종의 탈출구를 제공했다. 리처드 다이어는 자신의 기념비적인 에세이 <디스코를 위한 변론>에서 이를 다음과 같이 상세히 설명한다. "일상의 따분함, 노동, 가사, 그리고 일상적인 성차별과 인종차별이 이 사회의 계급 및 성별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따분함에서 벗어나려는 도피는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자체로부터의 도피로 볼 수 있다."

디스코가 출현하기 전에는 동성끼리 춤추는 행위를 금지하는 호모포비아적 법률 때문에 대부분의 게이 바가 지하 댄스 바 형태로 운영되었다. 이곳을 찾는 이들 중 다수는 밤 외출을 할 때 보석금을 챙겨 들고 다녀야 했다. 경찰의 단속이 수시로 일어났으며, 그중 가장 널리 알려진 사건이 바로 1969년 스톤월 항쟁이다. 스톤월 항쟁 이후 사회정치적 변화가 일어나면서 동성 간의 춤이 마침내 합법화되었다. 그럼에도 많은 클럽이 여전히 자체적인 출입 제한 규정을 고수했기에, LGBTQ 커뮤니티와 그 연대자들은 자신들만의 공간을 직접 만들어야 했다. 이 초기 클럽들은 라이브 밴드 대신 바이닐 레코드, 즉 '디스크'로 음악을 틀었다. 데이비드 맨쿠소는 자신의 공간 '더 로프트'에서 사적인 비영리 댄스파티를 조직하기 시작했다. 이는 합법적이었기에 경찰 단속으로 문을 닫을 염려가 없었고, 덕분에 다양한 배경을 가진 이들이 모여들었다. 로프트의 음향 엔지니어였던 알렉스 로즈너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대략 60%가 흑인이었고 70%가 게이였다. 성적 지향과 인종, 경제적 계층이 한데 섞여 있었다. 음악이라는 공통분모 하나로 온갖 사람들이 진정으로 어우러진 공간이었다."

로프트의 성공을 지켜본 이들이 더 처치, 더 갤러리, 더 파빌리온 같은 클럽들을 잇달아 열었다. 각기 저마다의 색깔이 있었지만, 사회에서 가장 소외된 이들이 그루브에 몸을 맡기고 자신을 잊을 수 있도록 음악을 틀어준다는 점만큼은 모두 같았다. 이 지하 클럽들은 믹싱과 샘플링이라는 혁신적인 방법으로 음악을 큐레이팅하는 DJ들에게 의존했다. 음악적 소스는 아이작 헤이즈나 커티스 메이필드 같은 아티스트들이 이끈 프로그레시브 소울에서 주로 가져왔다. 여기에 초기 디스코 클럽을 찾았던 이들의 배경을 반영하듯 라틴 아메리카 음악의 요소도 흡수했다. 레코드를 틀고 음악을 샘플링하는 클럽은 당시 동시대에 활동하던 레드 제플린이나 핑크 플로이드의 값비싼 록 공연과 달리 비용 부담이 적었다. 덕분에 디스코는 저렴하게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로 부상하며 1970년대 중반 차트를 폭발적으로 강타했고, 백인과 이성애자 커뮤니티까지 디스코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디스코가 거둔 주류 사회에서의 성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그 악명 높은 '스튜디오 54'다. 이 클럽이 보여준 호화로운 쾌락주의와 박카스 축제를 연상케 하는 파티는 앤디 워홀부터 마이클 잭슨에 이르는 다양한 유명 인사들을 매료시켰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적 인기 속에서도 스튜디오 54를 지탱한 핵심은 퀴어 커뮤니티였다. 마크 베네케라는 게이 남성이 보안 팀을 이끌었는데, 그는 디스코의 뿌리를 지켜내고자 종종 이성애자 남성들의 출입을 막아서기도 했다.

디스코 음악이 전하는 메시지의 상당 부분은 권리 신장, 특히 여성과 퀴어 커뮤니티, 그중에서도 흑인과 유색인종 퀴어 커뮤니티의 권리 회복에 맞춰져 있었다. 다이애나 로스의 'I’m Coming Out'(1980)이나 실베스터의 'You Make Me Feel (Mighty Real)'(1978) 같은 곡들은 디스코가 어떻게 자신들에게 소속감과 자유를 선사했는지에 집중했다. 샤카 칸의 'I’m Every Woman'(1978)은 흑인 여성의 연대와 자매애라는 아이디어를 포용했고, 시스터 슬레지의 'We Are Family'는 공동체 의식을 고취했다. 성적 지향과 욕망도 당당하게 드러났다. 빌리지 피플의 'Macho Man'(1978)은 강렬한 호모에로틱 서브텍스트를 담고 있었으며, 아바의 'Gimme! Gimme! Gimme! (A Man after Midnight)'(1979)는 성적 관계에서 여성의 주체성을 찬미했다.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아마도 녹음 당시 성인영화 배우로 활동하던 안드레아 트루의 'More More More'(1976)일 것이다. 그는 포르노그래피 촬영에 관한 내용을 노래에 담았다. 이처럼 디스코 음악 자체가 지닌 의미는 록 음악의 그것과 완전히 달랐다.

그러나 디스코가 주류 문화로 편입되면서, 운동의 시작점 단계에서 그토록 중요했던 퀴어 요소들을 대거 상실할 위험에 처했다.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는 디스코의 정점이자 동시에 조종을 울린 사건이었다.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작가 닉 콘은 디스코의 진화 과정을 다음과 같이 진단했다. "디스코 열풍은 흑인 게이 클럽에서 시작되어 이성애자 흑인과 게이 백인으로 번졌고, 그곳에서 대량 소비 단계로 넘어갔다. 브롱스의 라틴계, 스태튼 아일랜드의 서인도 제도인, 그리고 마침내 브루클린의 이탈리아계 미국인들에게까지 도달한 것이다."

<토요일 밤의 열기>가 거둔 성공은 수많은 모방 영화를 낳았고, 그 음악과 서사는 복제되었다. 하지만 사운드트랙을 장악한 것은 비지스였고, 이성애 중심적인 스토리와 퀴어 재현의 부재가 결합한 이 결과물은 디스코 음악이 가진 다채롭고 퀴어한 기원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 디스코가 주류로 부상하면서 록 음악과의 대조도 뚜렷해졌다. 디스코는 유약하고 이질적인 도시 인구를 대변하는 것으로 여겨진 반면, 록은 보수적인 시골의 블루칼라 인구를 대변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리너드 스키너드, 올맨 브라더스, 반 헤일런 같은 밴드들이 이 지역에서 더 큰 인기를 누렸는데, 이들의 음악은 기타 중심적이었으며 대개 남성적인 시선으로 쓰였다. 도시 내부에서는 라모스 같은 밴드들이 펑크 음악을 시작하고 있었는데, 이는 디스코 음악과 그 스타일이 가진 과도한 사치스러움에 대한 반발이었다. 음악의 뼈대만 남기고 스스로 직접 만드는 DIY 윤리를 강조함으로써, 디스코에 필수적이었던 독점적인 스튜디오 환경과 가장 먼 거리를 두려 했다. 디스코는 미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음악이었고 전 세계로 퍼져나갔지만, 그에 따른 역풍도 만만치 않았다. 피터 브라운스타인은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디스코의 부상은 게이 문화의 주류화를 동반했으며, 어쩌면 미국이 퀴어화되는 서막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디스코가 들여온 것은 동성애 그 자체라기보다는, 남성 페르소나의 여성성 수용을 포함해 성적 자아를 지속적으로 탐색하는 행위였다. 말할 필요도 없이, 이처럼 세상이 뒤집히는 상황은 디스코를 혐오하는 또 다른 미국을 극도로 불안하게 만들었다."

'디스코는 쓰레기다(Disco Sucks)'라는 구호는 록과 펑크 팬들 사이에서 유행어가 되었는데, 1970년대 당시 이 표현이 품은 호모포비아적 함의는 지금보다 훨씬 강했다. 디스코의 세가 점점 커지자 핑크 플로이드나 롤링 스톤스 같은 밴드들까지 자신들만의 디스코 음반을 발표했고, 이에 따라 장르에 대한 반발은 더욱 거세졌다. 디트로이트의 한 DJ 무리는 자신들을 '디스코 덕스 클랜(Disco Dux Klan)'이라 부르며 디스코 음악 틀기를 거부하는 시위를 벌였고, 오리건의 한 DJ는 전기톱으로 디스코 레코드 소장품을 부수기도 했다. 시애틀에서는 록 팬들이 이동식 댄스 플로어를 점거했다. 이러한 대응의 이면에는 인종차별과 호모포비아적 정서가 짙게 깔려 있었다.

1979년 7월 12일, 시카고 화이트삭스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홈으로 불러들였다. 경기 흥행을 위해 당시 미국 방송계에서 가장 거침없이 디스코를 비판하던 DJ 스티브 달은 디스코 레코드를 가져오는 관중에게 입장료를 할인해 주는 이벤트를 제안했다. 수거한 레코드들은 하프타임 때 경기장 한복판에서 폭파될 예정이었다. 평소 화이트삭스의 평균 관중은 1만 5천 명 선이었으나, 이날 경기에는 무려 5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레코드들이 수거되었는데, 화이트삭스의 흑인 직원이었던 빈스 로렌스는 그중 상당수가 디스코가 아닌 일반 흑인 아티스트들의 음반이었다고 지적했다. 레코드들은 폭약이 설치된 컨테이너에 담겼다. 이윽고 하프타임에 레코드들이 폭파되자, 관중들은 폭도로 변해 경기장으로 난입했다. 작가 크레이그 워너가 지적했듯, "디스코에 가해진 공격은 주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가장 추악한 형태의 인종차별, 성차별, 호모포비아에 합법적인 목소리를 부여한 꼴"이었다.

이 사건 이후 디스코의 자리는 어느 정도 록 음악으로 대체되었다. 펑크가 차트를 거슬러 올라왔고, 그 가공되지 않은 접근성 덕분에 세를 불려 나갈 수 있었다. 펑크는 흔히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데 집중하는 허무주의적 연대로서 가장 정통성 있는 저항 음악으로 대접받는다. 하지만 나는 오히려 소수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기득권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며 불법적인 퀴어 공간에서 태동한 디스코야말로 궁극의 저항 음악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다른 남성과 춤추는 행위 자체가 불법이고, 법으로 여성성을 드러내는 것이 금지되며, 동성애가 정신질환으로 낙인찍히던 시절을 떠올려 보라. 그렇다면 디스코가 풍긴다고 여겨졌던 그 쾌락주의와 무분별함은, 사실 퀴어들이 감행한 가장 급진적인 저항 행위였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 The Gay & Lesbian Review (2025.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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