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용

40년 후, 체르노빌이 남긴 미망인의 비극 (번역)

원문: A Chernobyl Widow’s Tragedy, Forty Years Later — The New Yorker (2026.4.25)

By Lizzie Johnson

나탈리아 호딤추크가 집에서 보낸 마지막 저녁은 여느 때와 다름없었다. 그녀는 키이우에 있는 방 셋짜리 아파트에서 마늘을 썰어 절이고, 우크라이나 전선의 병사들에게 보낼 양말과 목도리를 뜨며 정갈한 일상을 지키고 있었다. 어느덧 초겨울의 어둠이 창밖을 잠식해 들어오고 11월의 빛이 바래가는 동안 그녀의 몸짓은 느릿하게 이어졌다. 평소라면 저녁 식사 무렵 딸에게 전화를 걸었겠지만, 그날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일찍 잠자리에 들기로 했다. 그녀가 택한 잠자리는 복도에 놓인 초록색 무늬의 소파였다. 두꺼운 벽 두 개가 버티고 있는 그 복도를 그녀는 자신만의 '벙커'라 불렀다. 러시아의 공습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줄 가장 안전한 요새였기 때문이다.

일흔세 살의 나탈리아는 키이우 좌안에 위치한 옛 소련 시절의 투박한 7층 아파트에 살고 있었다. 인근에 발전소가 있는 이 단지를 현지인들은 '체르노빌 하우스'라고 불렀다. 1986년 원전 사고 이후 소련 도시 프리피야티에서 쫓겨난 이주민 가족들이 주로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나탈리아의 남편 발레리 호뎀추크는 노심 융해 사고 당시 가장 먼저 목숨을 잃은 희생자였다. 수천 톤의 콘크리트와 강철 아래, 원자로 내부 어딘가에 묻힌 그의 유해는 끝내 수습되지 못했다. 그는 서른다섯의 나이에 멈춰 섰다.

나탈리아는 홀로 두 자녀, 라리사와 올레를 키워냈다. 이제 장성한 아이들은 각자의 가정을 꾸려 해외에 살고 있다. 쉰세 살인 딸 라리사는 1991년 남편과 함께 벨라루스로 떠났고, 네 살 터울인 아들 올레는 2022년 러시아의 전면 침공 이후 가족과 함께 독일로 거처를 옮겼다. 세월의 무게는 나탈리아를 비껴가지 않았다. 무릎과 허리, 손목에 통증이 가실 날이 없었다. 거동이 불편해진 그녀는 매주 반복되는 러시아의 공습에도 대피소로 가기를 거부했다. 그런 몸을 이끌고도 매년 여름이면 기차를 타고 시외곽의 별장 '다차'를 찾았다. 실외 화장실에 난방조차 되지 않는 투박한 집이었지만, 정원을 가꿀 때 그녀는 가장 평온함을 느꼈다.

나탈리아는 수년에 걸쳐 수차례 체르노빌을 방문했다. 남편의 옛 동료들은 3호기와 4호기 원자로 사이 벽면에 그의 추모비를 세워두었다. 방사능 수치가 너무 높아 단 몇 분 이상 머물 수 없었기에 직원들은 늘 그녀를 재촉하며 끌어내다시피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남편의 온기를 느꼈다. 다가오는 4월 26일, 사고 40주년 기념식을 앞두고 그녀는 특별한 사진 촬영을 위해 2주 뒤 다시 그곳을 찾을 계획이었다. 그녀는 수십 년간 남편을 향한 절개를 지키며 아이들에게 아버지의 기억을 물려주었다. 남편의 훈장들을 키이우 체르노빌 박물관에 기증했고, 내키지 않을 때조차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에 응했다. 딸 라리사는 "그 고통을 매번 온몸으로 다시 통과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기꺼이 응하셨어요. 그것이 어머니의 십자가였으니까요"라고 회상했다.

나탈리아의 거실 벽에는 액자에 담긴 발레리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그의 얼굴은 세월의 풍파를 비껴간 듯 매끄러운 피부와 짙은 눈썹 그대로, 그녀의 기억 속에 박제된 모습이었다. 나탈리아는 가족들에게 잠결에 남편이 자주 나타난다고 말하곤 했다. 때로는 다정한 위로를 건네러, 때로는 불길한 경고를 전하러.

그날 새벽 1시경, 키이우에 공습 사이렌이 울려 퍼졌다. 제트스키만 한 크기의 러시아 드론 수백 대가 십여 발의 미사일과 함께 쏟아져 내렸다. 폭발음이 도시를 뒤흔들었다. 45kg의 폭약을 실은 드론 한 대가 '체르노빌 하우스' 7층을 정면으로 들이받았다. 공교롭게도 나탈리아의 거실 창문이 정확한 표적이었다. 자녀들은 나중에야 그 드론이 경로를 이탈해 인근 발전소를 노리려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했다. 아들 올레는 "수학적으로 보면 거의 불가능한 확률이죠. 도시의 규모와 아파트 수, 인구수를 따져보면 수백만 분의 일의 확률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겁니다"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나탈리아는 코파치 마을에서 4남매 중 셋째로 자랐다. 가족들은 국가에서 배정받은 땅에서 가축을 기르고 자급자족하며 살았다. 어린 시절 그녀는 호밀을 털고 베틀로 꽃무늬 양단을 짰다. '즐루크토'라 불리는 커다란 통에 빨래를 담아 야외에서 씻거나 근처 시냇가로 가져갔다. 겨울이면 형제들과 함께 썰매에 빨래를 싣고 나가 얼음 구멍을 뚫어 헹궈냈다. 특히 두 살 터울인 여동생 마리야와는 무엇이든 함께하는 각별한 사이였다. 이제 일흔한 살이 된 마리야 멜니크는 "우리는 늘 붙어 다녔어요"라고 회상했다.

사춘기 시절, 자매는 인근 프리피야티의 식당에 취직하기로 모의했다. 그곳에서 1970년 무렵, 나탈리아는 남서쪽으로 60km 떨어진 크로피우니아 출신의 제대 군인 발레리를 만났다. 두 사람 모두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와 함께 건설된 신도시 프리피야티가 약속하는 찬란한 미래를 믿었다. 발전소 보일러실에서 근무하며 언젠가 원자로 부서로 옮기길 꿈꾸던 발레리는 나탈리아의 단아한 미모와 성실함에 마음을 빼앗겼다. 퇴근길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걷던 두 사람은 코파치의 문화센터에서 춤을 추며 사랑을 키웠다. 몇 달간의 교제 끝에 발레리는 그녀의 부모님께 청혼 허락을 구했다. 1971년 4월, 열아홉의 나탈리아와 스무 살의 발레리는 결혼반지도 생략한 채 부부가 되었다.

부부의 첫 보금자리는 조립식 트레일러였다. 이후 프리피야티가 도시의 진용을 갖추자, 나탈리아와 발레리는 여동생의 집에서 멀지 않은 레시 우크라인키 거리의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배정받았다. 부부는 벽면을 화사한 무늬로 도배하고 앞마당에는 코스모스를 심었다. 1979년 공식적으로 시 승격을 받은 프리피야티는 인구 4만 9천 명의 도시로 성장했다. 라리사와 올레가 다니던 유치원에는 수십 명의 아이들이 북적였다. 방과 후 남매는 집 앞 수양버들 나무에 올라가 늘어진 가지 아래 숨어 부모님과 숨바꼭질을 하곤 했다.

발레리는 아들과 딸을 끔찍이 아꼈다. 아버지 없이 자란 그는 자신의 아이들에게만은 다른 유년 시절을 선물하고 싶어 했다. 그들은 강아지와 함께 그물버섯을 따러 다녔고, 숲에서 크로스컨트리 스키를 즐겼다. 여름이면 발레리의 하얀색 '모스크비치' 세단을 타고 아조프해로 여행을 떠나거나, '키이우해'라 불리는 거대한 저수지 근처에서 캠핑을 했다. 주말이면 코파치에 있는 외가 식구들과 시간을 보냈다. 라리사와 올레, 사촌들은 사과나무에 올라가 아직 익지도 않은 시큼하고 딱딱한 초록 사과를 베어 물었다. 가을이면 어른들은 수확한 사과 더미 속에서 아이들이 한 입씩 베어 물고 버린 흔적을 발견하곤 했다.

나탈리아와 발레리는 때때로 며칠씩 얼굴을 보지 못했다. 나탈리아가 스무 살 무렵 집 앞 양수장에서 오퍼레이터로 일하기 시작하면서, 그녀의 퇴근 시간과 발레리의 야간 근무 시작 시간이 겹치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그사이 발레리는 승진을 거듭해 체르노빌에서 가장 최신 시설이었던 4호기 원자로의 선임 오퍼레이터가 되었다. 아침 햇살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타일로 뒤덮인 4호기 건물은 위용이 대단했다. 2호기에서의 공로를 인정받아 훈장을 받은 발레리의 초상화는 도시의 명예 게시판에 걸렸다. 나탈리아는 친구와 가족들을 초대해 고기와 버섯을 넣은 감자 요리를 대접하며 축하 파티를 열었다. 라리사는 "우리 가족은 프리피야티, 그리고 체르노빌 발전소와 함께 태어난 셈이에요. 우리는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완전히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사람들의 일원이었죠"라고 말했다.

1986년 봄, 나탈리아와 발레리는 결혼 15주년을 맞이했다. 그해 4월, 발레리는 키이우에 가서 자신의 모스크비치를 팔기로 했다. 차량 등록 절차와 새 주인과의 보드카 한 잔, 그리고 프리피야티로 돌아오는 버스 일정까지 고려하면 자정 근무 시간에 맞추기 빠듯할 터였다. 그래서 다음 날 아침 8시 근무 예정이었던 동료 올렉산드르 젤렌초프와 교대 근무를 바꾸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차 거래는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발레리는 평소 차 앞 대시보드에 넣어두던 수호성인 성화(아이콘)를 새 주인에게 건네주고 저녁 식사 시간 무렵 프리피야티로 돌아왔다. 그는 젤렌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근무를 바꾸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이제 일흔다섯 살이 된 젤렌초프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만약 그때 내가 출근했더라면, 당신은 지금 나와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발레리와 이야기하고 있었을 겁니다."

발레리는 나탈리아에게 오늘 밤은 꽤 힘든 근무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원자로 점검 준비가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의 지시에 따라 운영진은 터빈의 비상 전력 시스템을 테스트할 계획이었다. "원자로 가동을 중단하게 될 거야." 그가 말했다.

나탈리아는 쉬는 날을 맞아 TV에서 로맨스 영화를 보고 있었다. 열세 살 라리사와 아홉 살 올레는 이미 잠든 밤이었다. 영화 줄거리를 곱씹던 나탈리아는 문을 나서려는 발레리를 향해 몸을 돌렸다. 식당에서 처음 만났던 그 옛날의 기억이 스쳤다. 그녀가 물었다. "당신, 나랑 사랑해서 결혼한 거야, 아니면 조건 보고 한 거야?"

"당연히 사랑해서지." 그가 대답했다.

그는 작별의 입맞춤을 남긴 채, 꼭 돌아오겠다는 약속과 함께 집을 나섰다.

발레리가 체르노빌에 도착했을 때 시계는 이미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는 평상복을 사물함에 넣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런데 빳빳하게 풀이 죽은 흰색 작업복에 얼룩이 묻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매사에 완벽을 기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쓰던 그의 성격은 동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동료들의 짓궂은 농담을 뒤로한 채, 그는 새 작업복을 다시 요청해 갈아입었다.

발레리가 출근해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운영 일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일지를 살피던 그의 눈이 멈췄다. 폭발 방지를 위해 원자로에 냉각수를 공급하는 비상 노심 냉각 시스템이 가동 중단 상태였기 때문이다. 발레리는 퇴근을 준비하던 선임 오퍼레이터 미하일 리보치킨에게 왜 비상 시스템이 꺼져 있는지 따져 물었다. 리보치킨은 수석 엔지니어의 지시였다고 답했다. 발레리는 예정된 테스트에 대해 더 자세한 정보를 요구했지만, 리보치킨의 답변은 모호하기만 했다. 불안함을 느낀 발레리는 운영 일지에 서명하고 근무를 인수받기를 거부했다. 그가 서명하지 않으면 리보치킨 역시 퇴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리보치킨은 2020년 한 우크라이나 다큐멘터리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결국 원자로실 교대 감독관에게까지 연락이 갔죠. 제가 전화를 걸어 말했어요. '내가 계속 남아서 근무를 서든가, 저 친구가 인수를 하든가 결판을 내주십시오. 퇴근 버스가 곧 떠난단 말입니다.'"

결국 감독관이 직접 발레리에게 전화를 걸어 서명을 지시했다. 테스트를 시작해야 하니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발레리는 무언가 찜찜해하는 기색이었어요." 리보치킨이 덧붙였다. "저는 원자로가 이미 반 출력으로 가동 중이고, 곧 가동을 중단하면 아무 문제 없을 거라고 달랬죠. 결국 그는 서명했고, 저는 자정 5분쯤에 발전소를 나섰습니다."

약 1시간 15분 뒤, 발레리는 원자로 노심의 열을 식히는 순환 펌프가 비정상적으로 흔들리는 것을 감지했다. 그는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 펌프실로 달려갔고 제어실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은 열기는 이미 물을 증기로 바꾸고 있었다. 원자로는 정상적으로 멈추지 않았다.

도움을 요청하던 발레리의 목소리는 원자로 지붕을 날려버릴 만큼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끊겼다. 불길이 허공을 찔렀고 방사능은 밤하늘로 뿜어져 나갔다. 발레리는 최초 폭발 당시 잔해에 깔려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동료들은 방사성 증기와 연기가 자욱한 안개 속을 헤치며 몇 시간 동안 그를 찾아 헤맸다. 그 연기는 훗날 수색에 참여한 이들 중 일부의 목숨을 앗아갔다. 교대 근무자가 온 뒤에도 수색은 계속되었으나, 저녁 무렵에는 모두가 희망을 내려놓아야 했다. 결국 두 명의 직원이 이 소식을 나탈리아에게 전하러 파견되었다.

나탈리아는 이미 아침부터 발레리를 찾아다니고 있었다. 여동생이 달려와 폭발 소식을 전한 직후였다. 그녀는 군인들이 방사능 낙진을 막기 위해 거품을 뿌려대던 버스 터미널로, 흰 가운을 입은 이들이 구급차에서 들것에 실린 희생자들을 내리던 병원으로 달려갔다. 영안실에서는 박스를 딛고 올라서서 높은 창문 너머 놓인 창백한 시신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남편은 없었다. 발전소로 연결되는 전화선은 이미 끊긴 상태였다. 그녀는 수색을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의 동료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발레리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수색을 계속할지 물었다. 나탈리아는 이미 그가 떠났음을 직감했다. "내 아이들이 이미 고아가 되었다면, 다른 아이들이라도 아버지를 지키게 해주세요." 그녀는 수색 중단을 요청하며 이렇게 말했다.

다음 날, 당국의 권고에 따라 아파트 복도를 식초로 닦고 있던 나탈리아에게 대피령이 내려졌다. 당국은 반려동물을 두고 떠날 것과 사흘치 짐만 챙길 것을 지시했다. 사흘 뒤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는 말과 함께. 현지 주민들에게 소련 지도부는 폭발의 심각성을 축소하기에 급급해 보였다. 국제 사회를 향해서는 아예 사고 자체를 부인하며 관련 정보 유출을 철저히 차단했다. 그러나 방사능 구름은 이미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 약 1,100km 떨어진 스웨덴의 연구소 경보기를 울렸고, 수만 명의 사람을 서서히 병들게 하고 있었다. 소련의 거짓말이 속속 드러나자, 당시 일본을 방문 중이던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이 사건에 대한 크렘린의 대응은 인류 전체의 정당한 우려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나탈리아는 라리사, 올레와 함께 대피 버스에 올랐다. 아이들은 그때 두고 온 소중한 물건들을 지금도 기억한다. 원숭이 인형, 피규어, 그리고 무선 조종 자동차. 한동안 그들은 크로피우니아에 있는 시어머니 댁에 머물렀다. 나탈리아는 시어머니에게 발레리가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 거짓말은 5월, 미하일 고르바초프 서기장이 뉴스에 나와 체르노빌 사고의 사망자가 단 두 명뿐이라고 발표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가 연설에서 인정한 유일한 사망자 중 한 명이 바로 발레리였다.

그해 여름, 라리사와 올레는 크림반도의 캠프로 보내졌다. 나탈리아는 체르노빌로 돌아가 몇 주간 양수장에서 근무하며 '리퀴데이터(사고 수습 요원)' 칭호를 얻었지만, 독으로 얼룩지고 텅 빈 프리피야티는 더 이상 그녀의 고향이 될 수 없었다. 가을 학기가 시작되기 전 가족은 키이우로 이주했다. 대피 주민들을 위해 급히 마련된 아파트였는데, 이 과정에서 주택 배정 순번을 기다리던 다른 시민들이 밀려나기도 했다. 학교 친구들은 라리사와 올레를 '체르노빌 고슴도치'라 놀려댔고, 그들이 방사능을 내뿜는다는 근거 없는 소문을 퍼뜨렸다. 나탈리아는 기숙사에서 침구류를 관리하는 일을 시작했다. 그녀는 발레리의 사망 진단서를 발급받으려 애썼다. 미망인 연금을 받아 살림에 보태고 심리적인 매듭을 짓고 싶었지만, 시신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사고 이후 우리는 뿔뿔이 흩어졌어요." 키이우 동남쪽 마을로 이주한 여동생 마리야가 말했다. "땅과 가족, 그리고 돌아가 추억할 장소마저 모든 것을 빼앗겼죠."

그럼에도 나탈리아는 새 아파트를 '집'으로 만들기 위해 애썼다. 가구를 사고 발레리의 초상화를 걸었다. 그녀는 남편의 부드러운 곱슬머리와 보조개가 패는 미소, 그리고 목소리의 결을 단 한 순간도 잊지 않았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주변에서는 이제 그만 새 짝을 찾으라고 권했지만, 그녀는 재혼에 추호의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발레리가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한때 인기 관광지였던 체르노빌은 4년 전 벨라루스를 통해 우크라이나로 진입한 러시아군이 잠시 이곳을 점령한 이후, 대부분의 방문객에게 폐쇄되었다. 하지만 이번 겨울, 수주간의 계획과 수차례의 요청 끝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사진작가이자 코디네이터인 세르히 모르구노프와 나의 동행 취재를 허가했다. 우리는 키이우에서 북쪽으로 2시간 반을 달려 검문소를 통과한 뒤, 통제 구역(Exclusion Zone) 내부로 들어섰다.

우크라이나 군은 여전히 체르노빌에 주둔하며 기반 시설을 엄중히 감시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재침공으로부터 키이우로 향하는 주요 도로 중 하나를 방어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우리가 방문한 날은 모든 것이 고요했고, 풍경은 거칠고 야생적인 생명력으로 가득했다. 10년 전 우크라이나 정부는 통제 구역 내에 약 2,300제곱킬로미터 규모의 생태 보존 구역을 조성해 토착 종과 식생의 회복을 유도했다. 그 덕분에 스라소니, 불곰, 무스의 개체 수가 다시 늘어났다.

프리피야티에 가까워지자 거대한 강철 컨테이너의 둥근 등줄기가 하늘을 찔렀다. 거대 비행기 격납고처럼 생긴 이 보호 구조물은 방사능 유출을 막기 위해 2016년 파괴된 원자로 위에 씌워졌다. 이 '신규 안전 봉인(New Safe Confinement)' 아치의 수명은 고작 100년이다. 그 후에는 또 다른 구조물을 지어야 하고, 이런 과정은 앞으로 수천 년간 반복될 것이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노동자들과 엔지니어들은 2025년 2월 러시아 드론이 이 아치를 들이받았던 사건을 여전히 화제로 삼고 있었다. 당시 충돌은 화재로 이어졌고 또 다른 핵 재앙의 공포를 불러일으켰으나, 모스크바는 공격 사실을 부인했다.

우리는 체르노빌 본부에서 체크인을 하고 몸에 축적되는 방사능 수치를 측정할 선량계를 받았다.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면책 동의서에 서명하자 정부가 배정한 가이드가 차에 올라탔고, 우리는 레시 우크라인키 거리로 향했다. 라리사와 올레가 묘사했던 프리피야티는 내가 본 풍경과는 사뭇 달랐다. 아이들의 기억 속 도시는 목가적이었다. 식료품점에서는 바나나와 귤을 살 수 있었는데, 이는 소련의 다른 도시들을 옥죄던 배급제의 영향에서 비껴나 있는 듯 보였다. 새해 전야면 중앙 광장에는 음악과 춤이 넘쳐났다. 아코디언과 탬버린 소리가 울려 퍼졌고, 어느 해인가에는 거대한 전나무가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쓰러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들어선 프리피야티는 도시가 있던 자리에 정글이 들어차 있었다. 한때 핵 과학자들이 머물던 폴리스야 호텔 옥상에는 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도시 중심부의 에네르게틱 문화궁전 내부는 허물어진 수영장에 차가운 빗물이 고여 있었다. 주변 환경을 실시간으로 측정하는 가이거 계수기가 나지막하게 클릭 소리를 냈다.

우리는 나탈리아가 근무했던, 그리고 지금도 가동 중인 양수장 근처에 차를 세웠다. 그날 근무 중이던 쉰여덟 살의 건장한 오퍼레이터는 나탈리아가 남편의 추모비를 방문했을 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15km 떨어진 곳에서 태어난 그는 십 대 시절 강제 대피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체르노빌을 자신의 '조국'이라 여겼다. 그는 자신이 자란 땅과의 연결고리를 놓지 않기 위해 이곳에서 10일씩 교대 근무를 서고 있었다. 길 건너편, 울창하게 엉킨 숲 사이로 호딤추크 가족이 살던 아파트가 눈 덮인 풍경 속에 회색빛으로 우뚝 서 있었다. 아이들이 놀던 집 앞 수양버들은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굵고 구불구불하게 변해 있었다. 가이드는 건물의 기초가 무너지고 있다며 발걸음을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1층 아파트 문에는 마커로 쓴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우리는 당신들을 기억합니다."

라리사는 집이 계단 바로 위 왼쪽이라고 일러주었다. 사진작가 세르히는 계단실에 놓인 낡은 우편함 뭉치를 살피다 걸음을 멈췄다. 39호실 우편함에는 빛바랬지만 여전히 알아볼 수 있는 글자로 '발레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2층으로 올라가자 호딤추크 가족의 집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뒤틀린 창문 틈으로 얼음처럼 차가운 바람이 휘몰아쳤다. 나탈리아와 발레리가 직접 붙였던 화사한 벽지는 층층이 벗겨져 나갔고, 초록빛 바탕 위로 장미 문양이 드러나 있었다. 거실에는 부서진 가구들이 쌓여 있었고, 주방 싱크대 위에는 파란 리본으로 묶인 채 비닐에 싸인 말라 비틀어진 꽃다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날 밤, 통제 구역을 지나 키이우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는 나탈리아의 가족이 대대로 살았던 코파치 마을의 흔적을 지나쳤다. 방사능에 오염된 것으로 간주된 가옥들은 사과 과수원과 함께 통째로 평탄화되어 땅에 묻혔다. 이제 남은 것은 봉긋하게 솟은 흙더미뿐이었다. 사고 직후, 나탈리아와 여동생은 조상 대대로 내려온 땅과 작별하기 위해 마지막 산책을 했다. 작은 다리 위를 거닐며 그들은 겨울철 빨래를 하던 고된 일상을 추억했다. 아버지가 수영을 금지했던 근처 호수처럼, 시냇물은 여전히 맑고 매혹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깊은 습지 속에 유사(流砂)가 숨어 있어, 한 번 발을 들이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고 경고하곤 하셨다.

이제 러시아의 지뢰가 곳곳에 매설된 이 땅은 접근조차 불가능하다.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침공과 불법 합병 이후, 나탈리아는 모스크바 미틴스코예 묘지에 있는 남편의 가묘조차 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1998년, 폭발 현장에서 혹은 방사능 중독으로 숨진 27명의 동료 노동자 및 소방관들과 함께 발레리의 묘비가 세워질 수 있도록 끈질기게 싸웠다. 그녀는 남편이 마지막 근무를 나가기 며칠 전까지 입었던 셔츠 한 벌을 그곳에 묻었다. 남편의 체취가 사라질까 봐 끝내 세탁하지 못했던 옷이었다.

라리사와 올레에게 모스크바는 계속해서 상실만을 안겨주었다. 올레가 우크라이나를 떠나 독일로 이주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열일곱 살이던 아들에게 러시아의 전쟁에 좌우되지 않는 삶을 주기 위해서였다.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다섯 살 딸 발레리아는 자신의 조국이 아닌 땅에서 자라고 있었다. 한편 라리사는 러시아의 동맹국인 벨라루스에 발이 묶였다. 나탈리아는 딸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혐오하는 그 나라로 옮겨가기를 완강히 거부했었다. "우리는 이제 모든 것을 잃었어요." 라리사가 말했다. "어머니가 예전에 겪으셨던 그 상태와 똑같아진 거죠. 집과 고향을 잃는다는 건, 돌아갈 길 없는 거대한 심연 속으로 다리 위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우리에겐 돌아갈 곳이 없어요. 어머니가 계셨고, 집과 아파트가 있었을 때는 돌아갈 곳이 있었죠. 하지만 이제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드론의 폭발로 나탈리아의 아파트 현관문은 형체도 없이 타버렸다. 연기는 위층을 향해 소용돌이치며 솟구쳤다. 한 이웃은 나중에 "숨을 쉴 공기가 전혀 없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밖으로는 불길이 어둠을 가르며 뿜어져 나왔고, 창틀 파편들이 보도 위로 흩어졌다. 주차장에서는 자동차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복도 벙커의 두꺼운 벽 덕분에 나탈리아는 다행히 큰 부상을 면한 상태였다.

밖으로 나온 그녀는 옆집 이웃인 이리나 부티나와 마주쳤다. 서른여섯 살의 부티나는 당시 암 투병 중이었으며, 열세 살 딸과 생후 17개월 된 아들을 키우고 있었다. 나탈리아는 엘리베이터와 계단으로 이어지는 층간 방화문을 열려 했지만, 폭발의 충격으로 문은 꽉 맞물려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부티나는 "나탈리아 할머니가 자기 집에 불을 꺼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저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무슨 수로요?'라고 물었죠"라고 전했다.

나탈리아는 있는 힘을 다해 다시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남편 발레리의 초상화, 옷장 속에 둔 그의 가죽 벨트, 코파치와 프리피야티에 남겨두고 온 모든 삶의 흔적이 담긴 사진첩까지, 그에게 남은 마지막 유산들이 불길에 휩싸일 위기였다. 그녀는 공습 후 단수에 대비해 욕조에 미리 물을 받아두었었다. 그녀는 맨손으로 욕조 물을 퍼 날라 불길에 뿌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불길은 아파트를 집어삼켰고, 그녀마저 덮쳤다. 머리카락이 타 들어갔고 몸의 절반 가까운 피부에 수포가 잡히며 진물이 흘러나왔다. 결국 그녀는 집을 구하려는 사투를 포기해야 했다.

복도에서는 여전히 문이 열리지 않고 있었다. 부티나는 필사적으로 문을 비틀어 열려 애썼다. 공기는 짙고 검은 연기로 가득 차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부티나는 아이들을 집 안으로 돌려보내 창문을 통해 숨을 쉬며 기다리라고 일렀다.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제발 제 아이들이 죽는 모습만은 보지 않게 해주세요. 이 자물쇠가 열리게 도와주세요. 그 순간, 문이 열렸습니다."

기적 같은 일이었다. 부티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불길을 피해 계단실로 몸을 옮겼다. 바로 그때 나탈리아가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맨발이었고 큰 충격에 빠진 상태였다. 입고 있던 잠옷은 열기에 녹아내려 있었다. 나탈리아는 부티나에게 구급차를 불러달라고 청했다. 부티나는 일단 여기서 나가야 한다고 말했고, 나탈리아는 절뚝거리며 7층 계단을 내려갔다. 3층에 잠시 멈춰 친구에게 슬리퍼와 분홍빛 속살이 드러난 몸을 가릴 스웨터를 빌린 그녀는 숄을 머리에 둘렀다. 밖으로 나온 나탈리아는 구급차 뒷좌석에 실려 인근 화상 전문 센터로 긴급 이송되었다. 그녀는 이튿날 새벽 숨을 거두었다. 이 공격으로 그녀를 포함해 총 7명이 목숨을 잃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를 "크렘린이 다시 한번 일으킨 새로운 비극"이라고 명명했다.

나탈리아의 부고는 우크라이나 전역에 빠르게 퍼졌다. 이미 매일 밤 반복되는 죽음의 수치에 무뎌질 대로 무뎌진 나라였지만, 그녀의 죽음은 달랐다. 러시아군은 민간인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으나, 작년 한 해 민간인 사망자 수는 2022년 전면전 시작 이후 가장 많은 2,500명 이상을 기록하며 전년 대비 31%나 급증했다. 나탈리아의 죽음은 국가적인 애도로 이어졌다. 나는 현지 뉴스 매체들이 올린 그녀의 흑백 사진들을 살펴보았다. 사진 속의 그녀는 여동생과 함께 식료품점에 서 있는 볼이 통통한 젊은 여성이기도 했고, 프리피야티의 눈밭에서 발레리 옆에 편안히 누워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공격이 있고 며칠 뒤, 작업자들이 '체르노빌 하우스'를 찾아와 그을음으로 시커멓게 변한 나탈리아네 아파트의 뻥 뚫린 창문에 합판을 덧댔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시스템을 집중 타격하면서 주민들이 겨울 내내 난방도 전기도 없이 버티던 중이었기에, 찬바람은 칼날처럼 건물 사이를 파고들었다. 이웃들은 남겨진 것들을 수습했다. 발코니에 흩어진 감자 몇 알, 블라우스 몇 벌, 그리고 소련 원자로의 선구자 니콜라이 돌레잘의 에세이 '평화적 원자력의 탄생' 대목이 펼쳐진 채 제본이 터져버린 책 한 권이 전부였다.

나탈리아는 키이우 동남쪽에 있는 여동생 마리야의 마을에 안치되었다. 이번 봄, 마리야는 그 묘역에 금잔화와 국화, 라벤더 씨를 뿌릴 예정이다. 나탈리아의 아이들은 그 꽃이 피는 것을 보지 못할 것이다. 딸 라리사는 "그 가냘픈 여인이 어떻게 이 모든 것을 짊어지고 사셨을까요?"라고 되물었다. "제가 직접 결혼을 하고, 내 집을 꾸미고, 아이를 낳고 나서야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어머니가 가슴속에 품고 사셨던 그 삶의 무게를 말입니다."

나탈리아가 세상을 떠나고 며칠 뒤, 프리피야티에서 함께 대피했던 그녀의 오랜 친구가 그녀를 기리며 체르노빌을 찾았다. 친구는 발레리의 추모비 앞에 꽃다발을 내려놓으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마침내, "나탈리아가 당신 곁으로 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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