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용

내가 지금 이탈리아에라도 와 있는 건가? (번역)

원문: Am I perhaps in Italy? - London Review of Books

제임스 버틀러(James Butler) | 2026.4.2

“너희는 남자가 아니다. 그저 애송이들일 뿐이지. 소셜 미디어가 없었다면 너희는 내 첩(concubine) 노릇이나 했을 거다.”

2024년 미국 대선 정국에서 터져 나온 가장 기괴한 발언 중 하나는 로버트 J. 오닐의 입에서 시작됐다. 그는 오사마 빈 라덴을 사살했다고 주장하는 전직 네이비 실(Navy SEAL) 요원이자 열렬한 트럼프 지지자다. 젊은 남성 캠페이너 무리를 겨냥한 그의 X(옛 트위터) 게시물을 본 이들은 처음에 이것이 단순한 단어 선택의 실수인지 의아해했다. 하지만 오닐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민주당 측 인플루언서인 해리 시슨스에게 다음과 같은 답글을 남기며 쐐기를 박았다.

“너 같은 ‘베타1’ 놈들이 어떤 용도로 쓰이게 될지 정확히 가르쳐주지. 바로 식량, 그리고 성욕 해소용이다.”

성적 행위와 포식 행위의 결합, 혹은 포식으로서의 성관계. 정신분석학자들이 달려들어 분석하기에 이보다 더 완벽한 소재는 없을 것이다.

사실 트럼프 지지자가 성(性)을 물리적 지배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미 “그곳을 움켜잡아라(grab ’em by the pussy)”라는 전례가 있지 않은가. 다만 오닐이 그 대상—상대가 아무리 소년미 넘치는 매끄러운 외모일지라도—으로 다른 ‘남성’을 선택했다는 점은, 미국 우파의 광기 어린 동성애 혐오를 고려할 때 사뭇 기이하게 다가온다. 물론 트럼프 진영의 핵심부에는 피터 틸이나 재무장관 스콧 베센트 같은 동성애자 남성들이 포진해 있고, 디지털 변두리에도 이들이 잠복해 있다. 하지만 오닐은 그들과 결이 다르다. 그는 자신의 발언이 이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훼손한다고 전혀 생각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그에게 ‘위험’이란 본인이 삽입당하는 쪽, 즉 지배당하고(베타처럼) 여성화되는 입장에 처할 때만 발생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트윗 한 줄은 사소해 보일지 모르나 시사하는 바가 크다. 클라우스 테벨라이트가 독일 자유군단(Freikorps)2의 판타지를 연구하며 내놓은 사회학적 통찰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군인들이 느꼈던 오염과 침투에 대한 공포, 그리고 폭력적인 방식을 통한 사회적 지위 복구에 대한 갈망 말이다. 성적인 주제가 나올 때 으레 그렇듯, 오닐의 게시물을 접한 이들은 그가 심리적 무장 해제 상태에서 내면의 치부를 드러냈다고 직감했다. 일각에서는 그가 아프가니스탄 주둔 시절 이러한 가학적 판타지에 동화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까지 제기하고 있다.

수 세기 동안 서구인들에게 ‘동방’은 에로틱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관음의 대상이었다. 당시 기독교인 여행자들은 오스만 제국 남성들, 특히 군인들 사이에 만연했던 미소년(catamite) 선호 풍습을 단골 소재로 언급하곤 했다. 16세기, 악명 높은 해적이자 개종자였던 울루치 알리와 하산 베네치아노가 한 소년을 차지하기 위해 격렬하게 다투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한 서구 스파이는 알리가 “입에 담지 못할 악덕(남색)에 깊이 빠져 있으며, 300명이 넘는 시종 소년들을 거느리고 쾌락을 탐했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이러한 ‘남색(sodomy)’ 습속은 흔히 외부로부터 유입된 ‘전염병’ 같은 것으로 치부되었다. 영국의 법률 용어인 ‘버거리(buggery)’가 불가리아의 이단인 보고밀파(Bogomil)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은, 이들이 정교하고 음란한 성적 관습을 행한다고 믿었던 당시의 편견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하지만 ‘소돔’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근대 초기 내내 이탈리아는 ‘입에 담지 못할 악덕’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스페인의 한 하인은 주인이 자신을 범하려 하자 “나리, 여기가 이탈리아라도 되는 줄 아십니까?”라며 거세게 저항했고, 17세기의 한 학생은 이탈리아 이발소에 들르기 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엉덩이 주변에 ‘방어용 바구니’를 착용하기까지 했다.

노엘 맬컴의 저서 『금지된 욕망』을 읽은 독자라면 오닐의 발언이 그리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의 논지는 명료하다. 1400년에서 1750년 사이, 남성 간의 성관계는 지역마다 독특한 양상을 띠며 실존했다는 점이다. 당시 지중해 연안의 이슬람 및 기독교 문화권에서는 소년애적 남색이 폭넓게 퍼져 있었다. 대개 30세 미만의 성인 남성과 아직 수염이 나지 않은 10대 소년 사이에서 이루어진 관계였다. 연령은 성적 역할을 결정짓는 절대적 기준이었으며, 소년들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수동적인 역할을 강요받았다. 당시 형사 법정은 항문 성교(‘버거리’ 혹은 ‘완전한 남색’)를 엄격히 감시했으며, 처벌 수위는 역할에 따라 차등 적용되었다. 역사적으로 ‘바텀(bottoms, 피삽입자)’은 늘 더 가혹하고 부당한 대우를 견뎌야 했다.

물론 다른 형태의 성관계에 대한 처벌 수위는 제각각이었다. 드물게 법정 기록에는 성인이 되어서도 남색을 고집하는 ‘상습적’ 혹은 ‘고질적’ 남색가들이 등장한다. 성인끼리 관계를 맺거나, 성인 남성이 삽입당하는 쪽에서 쾌락을 느끼는 이 ‘이례적인’ 사례들은 성직자와 법 집행자 모두를 분노케 했다. 설교자 요한 가일러 폰 카이저베르크는 그리스도의 상징적 연령이자 결혼 적령기인 33세를 넘긴 남색가는 교화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1539년 루카의 형벌 규정 역시 연령에 따라 벌금과 투옥을 차등 적용했으나, 50세가 넘은 남성에게만큼은 예외 없이 즉각적인 사형을 선고했다.

북유럽 문화권에서는 앞서 언급한 남유럽식 패턴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남색으로 기소된 사례 자체가 훨씬 드물 뿐 아니라, 누군가를 비방하기 위한 수단으로조차 거의 활용되지 않았다. 또한 연령에 따라 체계적으로 역할을 나누는 관습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역사학자들에게 하나의 난제를 던져주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른바 ‘원시적 형태의 동성애(Proto-homosexuality)’는 1700년경에야 비로소 등장한다. 이때부터 동성을 유혹(cruising)하거나 반공개적인 성관계를 맺는 일관된 관행과 장소가 포착되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의 유혹 기술은 그리 정교하거나 미묘하지 않았으며, 시작부터 상대의 성기를 움켜쥐는 위험천만한 방식이 흔했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간혹 발견되는 파편적인 증거들은 베일에 싸인 지하 세계의 존재를 암시한다. 1630년대의 한 연대기 작가는 서더크(Southwark)에서 안식일마다 모임을 갖는, ‘남색의 죄’로 결속된 16명의 ‘맹세한 형제들’에 대해 기록했다. 비슷한 시기 한 예수회 논설가도 ‘특수한 사회 혹은 집단’에 속한 비밀 남색가가 50명까지 늘어났다고 기술했다. 이러한 증거들은 비록 이례적이긴 하지만, 남색가들의 ‘짐승 같은 결사체’가 어느 날 갑자기 18세기가 되자마자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님을 입증하기엔 충분하다.

초기 동성애 역사학자들은 빈약한 문학적 근거를 토대로, 남유럽의 미소년 및 가니메데(Ganymede)3 문화가 북유럽에도 존재했으나 단지 기록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가정했다. 하지만 맬컴은 이러한 가정들이 설득력이 없다고 반박한다. 북유럽에서는 중대한 사회적 위반이 있을 때만 처벌했다거나, 사형 제도가 신고를 위축시켰다거나, 영국은 고문이 드물어 공범의 이름이 덜 거론되었다는 식의 추측성 방어 기제는 힘을 잃는다. 해석은 더 단순해야 한다. 증거가 광범위하게 부재한다는 것은, 실제로 그런 현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금지된 욕망』의 핵심 논지는 두 갈래로 나뉜다. 첫째, 지중해 문화권은 ‘소년애적 남색’이라는 고유한 패턴을 공유했으나 북유럽에는 그런 관습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 둘째, 이러한 패턴의 존재 여부가 각 문화권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원주민과 조우하는 과정에서도 그대로 재현되었다는 점이다. 맬컴이 제시하는 증거들이 쌓여감에 따라, 더 넓은 의미의 수정주의적 관점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낸다. 그는 과거의 기록 속에서 현대적 의미의 ‘게이’를 발굴하려는 시도는 물론, 어떠한 종류의 ‘선험적 이론’을 전제한 거대 담론에도 회의적이다. 그가 훑어내는 방대한 사료는 미셸 푸코와 관련된 통념마저 뒤흔든다. 즉, 과거에는 성 정체성이 단지 ‘금지 혹은 허용된 행위의 목록’에 불과하다가 특정 시점을 기점으로 ‘내면의 성향과 정체성’의 영역으로 전이되었다는 ‘시대적 분수령’ 이론에 정면으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다. 푸코는 이를 두고 “과거의 남색가는 일탈을 저지른 개인에 불과했으나, 이제 동성애자는 하나의 종(species)이 되었다”고 정의한 바 있다.

맬컴은 저명한 사상사학자이지만, 성(性)의 역사 분야에서는 사실상 외부인이다. 오스만 제국의 외교 관계를 연구하던 중 발견한 놀라운 기록들이 결국 논문으로 이어졌는데, 그 초안은 ‘정보가 결여된 독단주의’와 맬컴이 타파하려 했던 ‘정통 학설에 대한 맹목적 추종’에 사로잡힌 학계의 편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대한 응수로 맬컴은 근대 초기 성 문화에 관한 방대한 학술 자료를 섭렵했고, 사상사학자 특유의 명료한 논리를 바탕으로 ‘남색’이 가변적이며 점진적으로 진화해온 법적·신학적 범주임을 규명해냈다. 말하자면 『금지된 욕망』은 학계의 편견을 정면으로 돌파하고 맬컴의 결정적 승리를 선언하기 위해 집필된 저작인 셈이다.

외부자는 고착화된 학문의 합의에 균열을 내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하지만 그 신분에는 한계도 따르기 마련이다. 맬컴의 주장이 완전히 새로운 것만은 아니다. 이미 다른 학자들도 범지중해적 패턴을 관찰하거나 북유럽의 사례에 대해 비판적 의구심을 제기해왔다. 루이스 크롬튼의 야심 찬 연구서 『동성애와 문명(2003)』 역시 기독교권과 아랍 치하 스페인의 박해 양상을 비교하며 유사한 교차 문화적 논의를 펼쳤다. 맬컴과 마찬가지로 크롬튼 또한 당시 사람들이 타인을 “그쪽 계통(de ce métier)”, 즉 ‘그런 부류’로 얼마나 빈번하게 지칭했는지에 주목했다. 크롬튼의 저서는 동성애의 역사적 연구 자체가 그 나름의 고유한 정치사를 지니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실제로 『동성애와 문명』은 네브래스카주 의원들이 금지 법안까지 발의하며 저지하려 했던 대학 프로그램에서 탄생한 책이다. 일탈적인 성 관념이 단지 묘사되는 것만으로도 타인에게 전염될 수 있다는 공포는 비단 근대 초기만의 특징이 아닌 것이다.

미셸 푸코는 ‘행위’에서 ‘정체성’으로의 전환이 19세기 새로운 법적·의학적 규범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성(性) 역사학자들은 그 시기를 앞당기면서도 행위와 정체성을 구분하는 기본 틀은 고수해 왔다. 『금지된 욕망』의 성취 중 하나는 일관된 성적 성향, 즉 ‘그쪽 계통(ce métier)’에 대한 인식이 당대에 이미 보편적이었음을 입증한 데 있다. 아퀴나스 주석가들은 ‘적절치 못한 성별을 가진 개인’의 성적 동기를 논했고, 의학 권위자 피에트로 다바노는 성인의 남색을 생물학적 기형의 결과로 보았다. 정액이 항문으로 잘못 전달되는 통로가 있어 그곳에서도 쾌락을 느낀다는 기상천외한 논리였다.

남색가들 역시 ‘자연’이라는 개념의 모호함을 역이용해 자신들을 변호했다. 1628년 베네치아의 한 신부는 “하느님이 항문에서도 쾌락을 느끼게 만드셨다면, 그 용도로 쓰는 것이 죄일 리 없다”는 관찰을 남겼다. 네덜란드의 설교자 안드레아스 클링크는 자신의 추행이 유전적 성향 탓이라 변명했다. 임신 중인 어머니가 부재중인 아버지를 너무 간절히 그리워한 나머지 그 영향이 자식에게 미쳤다는 것이다. 이 시기가 저물어갈 무렵에는 상류층을 중심으로 더욱 당당한 자기주장이 포착된다. 1720년대 파리 경찰 기록에 따르면, 유혹 중 체포된 한 기사는 칼을 휘둘러 저항한 뒤 선임 경관을 해고하겠다고 협박하며 이렇게 쏘아붙였다. “누구도 감히 나를 막지 못하게 한 채, 튈르리 정원 한복판에서 섹스를 하고 싶다.”

맬컴이 핵심 지표로 삼은 또 다른 문헌은 마이클 로크의 저작 『금지된 우정(1996)』이다. 이 책은 1432년부터 1502년까지 운영된 피렌체의 남색 단속 기관 ‘밤의 관청(Office of the Night)’을 분석한 결과물이다. 70여 년의 운영 기간 동안 이 기관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포함해 무려 1만 6천 명의 남성을 조사했고, 2,400건 이상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당시 피렌체 인구가 4~5만 명이었음을 고려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수치다. 대부분은 소년애적 패턴을 따랐다. 능동적 파트너는 대개 청년층이었으며, 피렌체 남성의 평균 결혼 연령인 30세를 넘긴 이가 기록에 등장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제보자들은 관청이 권력자들에게 유독 관대하다고 비판했지만, 기록은 계급과 직종을 가리지 않고 전 방위적으로 나타난다. ‘악명 높은’ 상습 남색가들은 소수였으나, 이들은 성인이 되어서도 관계를 지속하며 다른 성인과 사귀거나 스스로 수동적 역할을 맡기도 했다. 로크에 따르면 이들의 평균 연령은 일반적인 사례(27세)보다 훨씬 높은 39세였으며 대개 미혼이었다.

피렌체가 매우 특이한 사례였다는 점은 자명하다. 다만 피렌체가 남색에 유독 취약했던 것인지, 기록을 남기는 데 유달리 집착했던 것인지, 아니면 처벌 수위가 상대적으로 낮아 실상이 더 잘 드러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당대인들에게 피렌체는 의심할 여지 없는 ‘소돔’이었다. 독일에서 남색을 뜻하는 완곡어구는 ‘플로렌첸(florenzen)’, 즉 ‘피렌체질 하다’였을 정도다. 일부 피렌체인들은 오히려 이런 평판을 즐기기까지 했다. 엄격한 도덕 정치를 펴던 사보나롤라가 실각하자, 한 시 공무원은 이렇게 외쳤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이제 다시 마음 놓고 남색을 즐길 수 있겠군요!”

맬컴은 로크의 저작이 ‘탁월하게 연구되었다’고 정당하게 평가하면서도, 이 책이 당시 피렌체에 다른 지역보다 더 넓은 의미의 관용이 존재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켰다고 지적한다. 『금지된 욕망』에 나열된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고 때로는 지칠 만큼 상세한 성적 결합의 목록은, 역설적으로 그 시대가 가했던 잔혹한 처벌의 상세한 기록이기도 하다. 역사적 인물에 과도하게 감정을 이입하는 위험성을 경계하더라도, 1579년 세비야에서 단지 ‘부도덕한 접촉’을 했다는 이유로 화형대에서 스러진 두 명의 17세 소년 이야기를 마주할 때면 솟구치는 분노를 억누르기 어렵다. 성기만을 매달아 처형하도록 규정한 시에나의 법이나, 1407년 베네치아 산 마르코 광장에서 한 성직자가 철장에 갇힌 채 굶어 죽어가는 광경을 대중의 본보기로 삼았던 기록 역시 마찬가지다. 당시 법 집행자들은 성직자를 직접 살해했다는 도덕적 오점을 피하고자 ‘굶겨 죽이는’ 기만적인 방식을 택했다.

동성애의 역사는 명예 회복과 보상이라는 문제의식을 통해 정치적 시급성을 획득한다. 아무리 세련된 분석 틀을 갖추었을지라도, 그 궁극적인 동기는—비록 당사자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인식하지 못했을지라도—‘우리와 닮은 이들’을 찾으려는 갈망인 경우가 많다. 오랜 기간 지속되었거나 애정이 표현된 이례적인 관계들은 이러한 탐색에서 가장 매력적인 지표가 된다. 피렌체의 기록에는 자신의 가니메데에게 매혹된 나이 든 남성들의 사례가 보존되어 있다. 한 미혼 직조공은 자신의 소년 외에는 “다른 신을 보지 않는다”고 고백했고, 어떤 의사는 소년을 위해서라면 “세상에서 가장 큰 바보짓”도 서슴지 않았다. 짝사랑에 빠진 소년애의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비극적인 함의는 토마스 만이 이를 문학적으로 다루기 훨씬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기록 보관소의 먼지 쌓인 흔적들 사이에서도 진실한 애정의 자취는 선명히 감지된다. 포르투갈의 한 성당지기는 어느 기타 연주자에게 보낸 애절한 연애편지에서 “내 손가락이 닿았을 때 당신 품 안에서 즉시 튀어 오르던 그 심장!4”을 회상했다. 이 편지들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기타 연주자가 이를 포르투갈 종교재판소에 넘겼기 때문인데, 이는 예술가와의 연애에 관한 현대적 조언이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유효한지를 방증한다. 같은 보관소에는 또 다른 편지 뭉치도 전해진다. 한 수도사가 “나를 홀리는 작은 그대, 나의 강아지”에게 보낸 이 편지들은 두 사람이 명백히 마음을 주고받은 관계였음을 보여준다. 연인이 곁에 없을 때, 이 수도사는 현대 동성애 문학의 특징이기도 한 절제되면서도 절박한 어조로 이렇게 읊조린다. “그대는 이미 나를 죽이기 시작했소. 내 사랑, 난 죽어가고 있소! 나를 도와주오. 그대를 향한 그리움으로 나는 죽어가고 있소!”

『금지된 욕망』의 정수는 맬컴이 발굴해낸 아카이브 자료에 있다. 1588년 이스탄불 주재 베네치아 전권공사(bailo)주: 외교관 직함가 자신의 가신단 소속이었던 두 청년을 상대로 실시한 수사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사건의 주인공은 현지 기독교 가정의 아들인 자네시노와 베네치아에서 갓 건너온 젊은 이발사 그레고리오였다. 정확한 나이를 가늠하긴 어렵지만, 도제 생활을 막 마친 그레고리오는 자네시노보다 ‘겨우 몇 살 어린’ 1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수사가 시작될 무렵 자네시노는 이미 가신단에서 쫓겨나 둘의 접촉이 엄격히 금지된 상태였다. 하지만 금지령 위반 여부를 확인하려던 조사는 곧 두 사람의 관계 전반을 파헤치는 광범위한 수사로 확대되었다.

16페이지에 달하는 필사본에는 가신단원 15명과 외부 상인 2명의 증언이 토씨 하나 빠짐없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증인 대다수는 두 청년이 자네시노의 작은 방 창가에서 입을 맞추거나, 저녁 식사 자리에서 서로를 갈구하듯 바라보던 모습을 목격했다고 진술했다. ‘저택 안의 모든 사람’이 그들이 육체관계를 맺고 있다고 확신할 정도였다. 자네시노는 그레고리오에게 비단과 공단 장갑, 모자, 칼 등을 선물하며 애정을 쏟았고, 그레고리오는 자네시노가 쫓겨난 뒤에도 밤마다 몰래 담을 넘으며 “설령 교수대가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그를 보러 가겠다”고 고집했다. 주방 소년의 증언은 명쾌했다. “이발사는 자네시노를 사랑했고, 자네시노 또한 그를 사랑했습니다.” 심문을 받은 그레고리오 역시 순순히 시인했다. “진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그를 몹시 사랑했고 그와 함께 있는 것이 즐거웠으며, 그와 여러 번 동침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관계를 맺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공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능동적인 역할을 맡았는지 혹은 수동적인 쪽이었는지를 노골적으로 캐물었음에도 그는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러면서도 그레고리오는 엉뚱하게 조각가 안토니오와는 두 차례 성관계를 가졌다고 털어놓았다.

그레고리오의 이 기묘한 부인과 시인은 여러 추측을 낳는다. 어쩌면 그레고리오와 자네시노는 아직 삽입 성교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레고리오와 방을 함께 썼던 제빵사는 그 점을 강하게 의심했지만 말이다. 혹은 그레고리오가 조각가와의 사무적인 성관계를 실토함으로써, 진정으로 연모했던 자네시노가 받을지 모를 가혹한 처벌을 홀로 짊어지려 했을 수도 있다. 수사 기록에는 그레고리오의 어머니가 보낸 편지도 등장하는데, 행실을 바르게 하고 구설에 오를 일은 하지 말라는 당부가 담겨 있었다. 이는 단순히 상투적인 훈계였을까, 아니면 걱정할 만한 전조를 읽어낸 어머니의 간곡한 당부였을까? 한 하인은 공사에게 자신이 예전에 “그레고리오가 가문의 수치가 될 것”이라 예언했던 일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그레고리오가 오스만 관리의 말을 한 번 타보는 대가로 자신의 몸을 내주려 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레고리오는 크레타섬으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그의 기록은 영원히 끊긴다. 조각가 안토니오 역시 일자리를 잃었다. 그러나 정작 자네시노는 나중에 복직되었으며, 잠시 고용이 중단된 것이 그가 받은 유일한 처벌이었다. 맬컴은 자네시노가 오스만 문화에 깊이 젖어 있었기에 이미 남색의 즐거움을 충분히 만끽하고 있었을 것이라 암시하며 글을 맺는다.

이 일련의 증거들은 지극히 이례적이고 희귀하다. 정식 재판 기록이 아닌 내부 조사 기록이기에, 행위 자체의 유무만큼이나 관계의 결(texture)과 동기에 깊이 주목하고 있다. 증인들과 피고인 중 한 명은 자신들의 언어로 직접 진실을 말한다. 동양의 심장부 이스탄불에 머물던 서구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이 스캔들은 맬컴의 논지를 뒷받침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소재다. 흥미로운 점은 증인들 중 이들의 관계 자체를 문제 삼는 이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전권공사 또한 이 관계가 가신단 외부로 새어 나가 ‘평판’을 해치지는 않았는지에만 촉각을 곤두세웠다. 어쩌면 이들이 주고받은 애정의 징표와 솔직한 사랑의 표현은, 흔히 발견되는 ‘육체적 탐닉과 정서적 교감의 철저한 분리’와는 궤를 달리하는 독보적인 사례로 분류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이 이야기가 그저 ‘남색 죄로 인한 파면 및 추방’이라는 건조한 판결문으로만 전해졌다면, 우리는 이를 흔한 역사적 패턴 중 하나로 치부하고 넘겼을 것이다. 수많은 그레고리오와 자네시노들, 그리고 그들의 진실한 사랑은 그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다.

그레고리오가 즉시 추방되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이슬람으로 개종할지도 모른다는 공사의 두려움 때문이었다. 기독교 변절자들이 오스만 제국의 관용적인 성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 개종한다는 발상은 당시 선전가들의 단골 소재였으나, 전혀 근거 없는 낭설만은 아니었다. 가장 유명하고도 치명적인 사례는 신성로마제국 대사관의 고위 관리였던 라디슬라우스 뫼르트 사건이다. 뫼르트는 주방 소년과의 불륜으로 처벌받은 뒤 1593년 개종과 함께 망명했고, 이후 대사관 습격을 주도하여 기밀 문서를 빼내 술탄에게 넘겨주었다. 뫼르트가 주방 소년 한젤에게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적혀 있다. “내가 이 나라에 머문 것은 오직 너 때문이다. 너의 복수를 위해, 나는 반드시 되갚아 줄 것이다.” 맬컴은 언급하지 않았으나, 한 목격자는 뫼르트가 습격 와중에 그 소년을 구출하려 시도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당시 개종자들은 온갖 자극적인 비방의 표적이 되었으며, ‘자연의 질서’를 거스르는 남색은 ‘종교적 진리’를 저버리는 배교를 설명하는 손쉬운 비유로 쓰였다. 이 과정에서 이슬람의 방종에 관한 허위 정보들이 논쟁의 단골 소재로 등장하곤 했다. 이에 따라 현대 학자들은 오스만 제국의 남색에 관한 보고들—설령 현지 거주자나 방문객의 기록일지라도—을 역사적 실체가 없는 문학적 허구로 간주하며 의구심을 표해왔다. 맬컴은 이러한 학계의 경향에 끼친 에드워드 사이드의 영향력을 개탄한다. 사이드의 표현을 빌리자면(비록 사이드 본인의 분석보다 훨씬 거친 방식이었지만), 유럽인의 모든 기록이 그저 ‘가공할 동방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환원되어 버린 것이다. 맬컴은 이념적 반대자들에게 그것이 얼마나 편리한 해석이었든 간에, 남성 간의 성관계가 오스만 세계에서 “널리 존재했으며, 그 존재 사실 또한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점을 결정적으로 입증해 낸다.

맬컴이 발굴한 자료의 상당수는 영어권 독자들에게조차 생소한 것들이다. 16세기의 한 파트와(fatwa, 이슬람 법령)는 이맘이 예배 중에 미소년을 맨 앞줄에 서지 못하게 금지하는 것을 허용했다. 소년의 외모가 남성들의 기도를 방해할 정도로 매혹적이라 판단될 경우에 한해서였다. 18세기의 한 시인은 선술집의 무동(dancing boys)들을 찬양하며, “수천 명의 남편을 둔 소녀 같은 메메드”, “선술집 뒷방에서 그들은 사탕수수에서 우유를 짜내곤(성행위의 비유)했다”고 묘사했다. 또한, 당시 터키 문학의 한 장르는 미소년을 뜻하는 ‘엠레드(emred)’의 뺨에 솜털이 돋아나 매력이 사라지는 것을 비탄조로 노래했다. 이른바 ‘미소년의 노화(twink death)’를 한탄하는 계보가 이토록 유구했던 셈이다.

당시 이 지역에서 남색은 도처에 만연해 있었으며, 소년을 향한 에로틱한 욕망은 ‘정상을 넘어 하나의 사회적 규범(norm)’으로 통용되었다. (물론 실제 성행위에 대한 처벌 수위는 법학자마다 견해가 갈렸다.) 쾌락 추구자들은 상대 소년의 의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어떤 시인들은 잠든 먹잇감을 향해 “전갈처럼 기어가는(dabīb)” 행위를 찬미했고, 성폭행범을 위한 지침서에는 어둠 속에서 소년을 찾기 위해 실을 치는 법이나 소리 나지 않는 부드러운 슬리퍼를 신으라는 조언까지 실려 있었다. 물론 이처럼 포식적인 욕망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소년에게서 피어나는 신성한 아름다움을 정결하게 관조할 것을 권장하는 낭만적 표현들도 남아 있다. 이러한 두 극단 사이 어딘가에는 자신의 주인이 선사한, “응축된 빛처럼 찬란한” 노예 소년들을 찬양한 에블리야 첼레비의 기록이 자리한다. 그러나 오스만 세계가 남색가들의 낙원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맬컴은 첼레비가 찬양한 그 ‘찬란한 노예’들이 실상은 “지극히 취약하고 무력한 존재”였음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또한 성인 남성 간의 욕망은 언제나 별개의 문제였다. 남성이 소년을 갈망하거나 남색을 행하는 것은 결코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으나, 삽입당하는 것에서 쾌락을 느끼는 성인 남성인 ‘마분(ma’būn)’은 위험하고 경멸스러운 병리적 상태로 치부되었다.

지중해 전역에서 유사한 성적 패턴이 감지될지언정, 그에 대한 사회적 대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동방(오스만 제국)에서는 이론적인 부정론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공개적인 문화적 찬미와 유죄 판결이 까다로운 법 체계 덕분에 ‘공공연하면서도 신중한’ 남색 문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반면 서구 기독교권에서는 도덕적 결벽주의와 가혹한 법적 구조가 결합되어 훨씬 더 은밀하고 피해망상적인 문화가 형성되었다. 사회를 타락시키는 악덕에 대한 공포와 치부가 노출될지 모른다는 불안이 지배한 것이다. 이러한 숨바꼭질과 수치심, 비밀주의의 독특한 춤사위는 오늘날 ‘커밍아웃’이라는 반전된 명령 속에서도 현대의 성적 태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러니 모국 문화에서 ‘입에 담지 못할 악덕’의 맛을 알아버린 서구 지중해인이 배교를 택하면서까지 동방에서 상대적인 자유를 찾으려 했던 이유는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르트르는 일찍이 “동성애자는 존재하는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이는 겉보기만큼 해괴한 질문이 아니다. 『성 주네』(1952)에서 사르트르가 주목한 것은 ‘정신의 선택’으로서 구현된 장 주네의 동성애였다. 즉, “스스로를 승인하고 선택하는 절대적 의식”으로서의 동성애 말이다. 악덕과 비천함을 강박적으로 추구하는 주네의 정체성이 지닌 ‘의지적 특성’은, 자신의 성적 지향으로부터 ‘비겁하게’ 거리를 두었던 프루스트의 태도보다 사르트르에게 훨씬 유망해 보였다. 프루스트처럼 동성애자를 ‘천성적인 종(種)’이나 ‘생리·심리학적 메커니즘의 산물’로 제시하는 것은, 사르트르가 보기에 주체적인 실존적 질문들을 회피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동성애가 타고난 본성인가, 아니면 사회적 힘에 의한 주관적 산물인가를 둘러싼 현대의 논쟁은 사르트르에게 부차적인 문제였을 것이다. 그는 이렇게 믿었다. “동성애가 정신의 선택이라면, 그것은 비로소 인간적인 가능성이 된다.”

하지만 실제 동성애자들은 대개 사르트르식의 우선순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들에게 ‘역사를 갖는다’는 것은 곧 실재(實在)를 증명하는 것이며,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대개 ‘게이 정체성’은 유년기에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연스럽게 습득되지 않는다. 그것은 훗날 비밀리에, 때로는 가족의 기대를 저버리면서까지 스스로 발굴해내야 하는 무엇이다. 성관계 그 자체가—그것이 숭고하든 무질서하든—자기 이해를 자동으로 담보해주지는 않는다. 모든 십 대가 자아 형성을 위해 방황하지만, 게이 청소년의 ‘교양(Bildung)’ 과정은 성인이 된 후 역사적·문화적 복원을 갈망하게 만들 만큼 독특하고 강렬한 법이다. (필자의 십 대 시절 교본이었던 데릭 저먼의 영화, 허버트 리스트의 사진, 밴드 ‘코일’의 음악, 앨런 긴즈버그의 시는 2000년대 중반 소호의 대중적인 청년들에게는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다.) 수치심과 자기혐오에 짓눌려 성장하는 이들에게, 역사 속에서 자신과 닮은 이들을 발견하거나 성적 관습의 가변성을 깨닫는 경험은 자기 수용과 성적 개화를 이끄는 결정적 촉매제가 된다.

만약 프루스트가 말한 ‘천성적 종’으로서의 동성애가 세계사 전반에서, 특히 문명의 신경증으로부터 자유로운 ‘원시’ 문화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다면, 우리는 이를 근거로 자연권과 정치적 평등, 제도적 참여를 위한 강력한 논거를 세울 수 있다. 이 경우 동성애 혐오(homophobia)는 도덕적·역사적 범주를 오판한 명백한 오류가 된다. 마르셀 프루스트와 레이디 가가의 손을 들어주자면, 우리는 진정 ‘이렇게 태어난(born this way)’ 셈이다. 이러한 방식의 ‘전략적 본질주의’는 비범죄화와 동의 연령 준수, 결혼 합법화 같은 입법적 진보를 이끌어내며 빠른 사회 변화의 동력이 되어왔다. 하지만 여기에는 불확실성과 회피 또한 뒤따랐다. 발칸 역사를 심도 있게 다뤄온 맬컴이 지적하듯, 초창기 게이 역사학자들은 정당성을 갈망한 나머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 했던 ‘신생 독립국의 애국적 사학자들’과 닮아 있었다.

역사는 때로 불편한 진실을 낳는다. 푸코가 던진 근본적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성(性)의 어떤 요소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이 자아의 근원적 진실을 대변한다고 믿게 만드는가? 그리고 그 믿음은 도대체 언제 시작되었는가? 근대 초기는 우리에게 완전히 낯설지도, 그렇다고 온전히 친숙하지도 않기에 이 질문을 파고들수록 묘한 불안감을 불러일으킨다. 만약 동성애의 전사(前史)가 소년애(pederasty)의 역사와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라면, 아카이브를 파헤치는 행위는 자칫 박해자들에게 강력한 명분을 쥐여주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물론 그들이 구실이 없어서 탄압을 멈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말이다.) 밀고와 왜곡의 가능성, 법적 기록 특유의 편향성을 고려하더라도, 이 역사의 상당 부분은 강압과 지배,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아동’이라 규정하는 소년들에 대한 성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다. 당시의 성숙에 대한 기준이 지금과 달랐음을 참작한다 해도, 그 사실이 주는 불쾌함마저 사라지지는 않는다. 맬컴은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재단하는 ‘현재주의(presentism)’에 함몰되지 않으려 애쓰지만, 독자가 마주한 이 난처한 진실들을 외면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의 동성애는 과거의 선행 모델들보다 훨씬 확장된 개념이며 질적으로도 다르다. 이는 현대의 이성애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우리의 현재 기준 또한 위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역사를 길게 내다보는 안목은 역설적으로 우리 자신의 규범을 성찰하게 한다. 우리는 모든 당사자가 자유로운 의지로 선택을 내리는 주체라고 상정하지만, 그 이면에는 종종 타협과 강요, 혹은 생존을 위한 절박함이 교묘히 숨어 있다. 또한 우리의 세련된 규범은 나이, 계급, 권력, 외모의 ‘불평등’에서 비롯되는 에로틱한 전율—의식적이든 아니든 많은 이가 내밀하게 갈구하는 그 원초적 감정—을 온전히 설명해내지 못한다.

사르트르 논리의 핵심 중 하나는 동성애가 그것을 둘러싼 더 넓은 체제, 즉 인간 정체성 전반의 범주에 근본적인 의문을 던진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통찰은 매우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장될 수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는 각 역사적 시대가 삶과 노동의 방식을 재편할 때마다, 새로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금욕과 방종의 위기를 거치며 가족과 성관계를 재구축한다고 분석했다. 이러한 억압과 해방의 변증법은 퀴어 및 페미니스트 역사학자들에게 늘 매혹적인 주제였다. 가족 구조나 성 소수자의 지위 변화를 분석함으로써 정치·경제 체제의 거시적 변화를 꿰뚫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람시를 읽는 통찰력 있는 독자라면, 흔히 ‘체제 전복적’이라 선전되는 개인주의적 향락주의 문화와 신자유주의가 추앙하는 덕목 사이의 기묘한 상동성(homology)을 결코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인과적 추론을 신뢰성 있게 입증하기란 대단히 어려우며, 때로는 희망 사항에 치우친 억측에 머물기도 한다. 대담하면서도 설득력을 갖춘 거대 서사는 극히 드물다(2020년 사후 출간된 크리스토퍼 치티의 『성적 헤게모니』가 거칠지만 야심 찬 시도를 보여준 바 있다). 특히 퀴어 연구는 소외된 정체성에 합당한 인정과 관심을 부여하려는 욕구와, 이러한 학술적 행위가 기존의 사회 질서나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해체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는 정치적 직관 사이에서 늘 갈등한다. 《스펙테이터》와 《텔레그래프》의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던 맬컴이 이러한 급진적 기획을 선호할 가능성은 낮다. 『금지된 욕망』은 광범위한 사회·경제적 선언에 대해서는 불가지론적 태도를 취하는 대신, 북유럽의 높은 미혼율과 여성 노동 인구 비중에 주목하는 등 절제된 지표를 바탕으로 한 ‘결혼 연령 비교 분석’에 집중한다.

그렇다면 여성은 어디에 있는가? 『금지된 욕망』에는 남성 중심의 성 담론 연구 끝에 흔히 덧붙여지곤 하는 ‘레즈비언 역사에 대한 죄책감 어린 부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 동성애에 관한 아카이브 기록 자체가 상대적으로 빈약하기도 하지만, 맬컴은 동성애를 하나의 단일한 현대적 개념으로 묶으려는 시도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여성은 텍스트 속에서 산발적으로만 등장한다. 때로는 ‘부자연스러운(즉, 질외)’ 성관계의 가담자로서 남색의 범주에 포함되기도 하고, 때로는 남성들에게 혐오감을 유발하여 남색으로 도피하게 만드는 부정적 원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남성성의 훼손을 암시하는 ‘여성성(effeminacy, 나약함)’은 시대를 관통하는 불안의 핵심이다. 남색을 다룬 저술가들은 여성스러운 남성에게 유독 가혹한 경멸을 보냈다. 성 역할을 조잡하게 치환하여 ‘여성스러움이 곧 성적 수동성으로 이어진다’고 단정했던 당시의 가설은 실제 현실과는 결코 부합하지 않았다.

여장(cross-dressing)이나 젠더 수행성을 해석하는 일은 여전히 난제다. 18세기 초 남성들이 사교와 성관계를 위해 모였던 술집 ‘몰리 하우스(Molly House)’의 기록은 그 복잡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곳에 모인 남성 중 일부는 여성의 옷을 입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를 댄디즘(dandyism)이나 젠더 인식의 거대한 변화와 연결하려 시도했지만, 이러한 현상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으며 주로 런던의 특정 계층—신사 계급이 아닌 이들—에 국한되었다. 여성의 옷을 입는 행위가 반드시 지속적인 ‘여성적 자아’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었다. 예컨대 ‘루시 쿠퍼’라는 가명으로 불렸던 인물은 일상으로 돌아가면 건장하기 이를 데 없는 ‘헤라클레스 같은 석탄 운반부’였다. 그러나 인간의 주관성이란 언제나 신비로운 영역이다. 이 헤라클레스는 루시로서 존재할 때 잠시나마 더 진실한 자아를 마주하거나 해방감을 만끽했을까? 화려한 가발을 벗어 던질 때마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상실감을 느꼈을까?

‘프린세스 세라피나’라는 잊히지 않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그 정체성만큼이나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법정 증언에 따르면 그녀는 “무도회와 가면무도회를 몹시 즐겼으며, 신사들과 춤추는 만족감을 누리기 위해 항상 여성복 차림으로 나타나기를 선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록이 역사에 남게 된 배경은 실로 아이러니하다. ‘공주’가—본명인 존 쿠퍼로서—자신의 남성용 옷을 훔쳐 간 사내를 어리석게도 직접 고소했기 때문이다. 이를 성급히 ‘트랜스젠더의 전사(前史)’라 명명하는 것은 희망 사항이 섞인 오독일 테지만, 그렇다고 단순히 ‘게이’라 치부하기에도 무리가 있다. 이는 공식적인 분류 체계가 허용하는 범위를 훌쩍 뛰어넘는, 성적 지향과 성별 표현 사이의 유연한 관계를 보여주는 증거이며, 오늘날의 퀴어 공간에서도 흔히 관찰되는 현상이다. 맬컴이 나열한 이름들은 현대의 예술 경연 프로그램인 〈루폴의 드래그 레이스〉에 등장해도 어색하지 않을 만큼 유희적이었던 당시 하부 문화의 단면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결코 단순한 장난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뼈 있는 농담과도 같은 인물들이다. 미스 키튼, 몰 아이언스, 플라잉 호스 몰, 포메그라네이트 몰리, 딥캔들 메리, 앤트 잉글랜드, 오렌지 뎁, 너스 미첼, 수잔 거즐, 미스 스위트 립스, 그린피 몰, 플럼프 넬리 등이 그 화려한 주역들이다.

맬컴은 법적 아카이브를 분석하는 데 있어 탁월한 감식안을 자랑한다. 하지만 동성애의 역사적 흔적을 쫓는 학자들은 대개 문학적 ‘문화’에서 그 근거를 찾으려 애쓴다. 맬컴은 희곡이나 시가 오독의 위험이 크며 사회적 일반화의 근거로 삼기엔 취약하다는 앨런 브레이의 경고를 인용하며, 학계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들을 폭로하는 데서 노골적인 즐거움을 느낀다. 이러한 오독은 대개 성경적 문해력 부족, 일차 사료에 대한 빈약한 이해, 그리고 텍스트에서 ‘오직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찾으려는’ 결연한 의지가 결합된 결과다. 맬컴의 주장에 따르면, 문학 역사학자들은 난봉꾼이 창녀에서 미소년으로, 다시 음란함의 상징인 염소로 타락해가는 풍자적 수사(trope)에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엘리자베스 시대 연극에 나타난 동성애적 갈망을 부풀리곤 한다. 또한 별 의미 없는 텍스트를 단어 연관성에만 기초해 ‘퀴어’로 냉소적으로 재포장하는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책의 끝머리에 이르면 ‘문학 역사학자’라는 용어는 맬컴에게 거의 멸칭에 가까운 뉘앙스를 풍기게 된다.

맬컴이 퍼붓는 경멸 중 일부는 분명 타당하며, 그가 예시로 든 난해한 학술적 문체(academese)는 맬컴 특유의 날카로운 문장 옆에서 초라해 보이기까지 한다. 모든 경건한 종교적 언어를 사회정치적 권력이나 승화된 리비도 같은 세속적 주제의 우회적 표현으로 환원해 버리는 것은 분명 나쁜 독해다. 그러나 맬컴이 내세운 유보 조항 중 일부는 방법론적 차이의 영역에 머물러 있다. 풍자적 수사가 사회적 실체를 보여주는 빈약한 지표일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풍자 작가가 그 수사를 즐겨 사용했다는 사실에서 아무것도 추론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인가? 존 던이 「거룩한 소네트 14번」의 결말에서 신에게 “나를 유혹하소서(ravish me)”라고 간구했을 때, 당시 독자들이 거기서 에로틱한 잔상을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라는 맬컴의 가정은 정말 타당한가? 그 시의 힘은 오히려 타락한 인간의 욕망과 신성한 변모가 한데 뒤섞여 공존하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닌가? 맬컴의 지적대로, 에로틱한 『아가서』를 탐독했던 경건한 독자들이 그것을 하느님과 교회, 혹은 그리스도와 개인 영혼의 관계에 대한 알레고리로 이해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던의 시에 대한 해설이라기보다, 오히려 그런 과감한 시적 표현을 가능하게 했던 ‘허용된 전례’에 가깝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50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방대한 연구는 필연적으로 특정 증거들을 단호하게, 때로는 독단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맬컴의 서슬 퍼런 칼날이 누군가의 소중한 ‘고전 목록(canon)’에 닿을 때면 그 서늘한 통증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르실리오 피치노의 정결한 동성애적 우정은 안젤로 폴리치아노의 적나라한 에로티시즘에 의해 균형이 맞춰져야 마땅하다. 폴리치아노는 피렌체 ‘밤의 관청’ 기록에 두 번이나 이름을 올린 인물로, 자신의 금발 소년 가니메데에게 보낸 그리스어 시에서 “그대의 혀를 나의 혀와 엮어다오”라고 애절하게 간구했다. 그가 소년을 향한 광적인 사랑에 빠져 죽었다는 일화가 사후에 조작된 비방일 수는 있으나, 결코 근거 없는 낭설은 아니었던 셈이다. 파시냐노의 그림 〈산 니콜로의 목욕객들〉(1600) 또한 마땅히 더 높게 평가받아야 할 경이로운 작품이다. 그 작품의 중심에서 남성 커플이 주고받는 그 투명하고 솔직한 사랑의 눈빛을, 단지 그들이 맬컴이 설정한 ‘지배적인 연령 차이 패턴’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현대 관찰자의 ‘환각’이라 치부하며 부정하는 것은 온당치 않아 보인다.

시는 특히나 다루기 까다로운 소재다. 맬컴은 자신의 연구 범위를 벗어난 단테를 짧게 언급하며 인문주의와 남색 사이의 연결 고리를 원천 봉쇄해 버린다. 그러나 단테가 남색가들을 다루는 방식은 맬컴이 허용하는 범주보다 훨씬 복잡하고 중의적이다. 일부 비평가들이 브루네토 라티니가 왜 남색가들의 원(Circle)에 배치되었는지 의아해하며, 그의 ‘자연에 반하는 죄’를 언어나 이성의 타락으로 재포장하려 한 것은 사실이다. 이는 『신곡』 「지옥편」의 도덕적 지형을 의도적으로 오독하려 했던 이성애자 비평가들 역시 자신들만의 ‘희망 섞인 오독’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반증할 뿐이다. 단테를 읽는 게이 독자들은 단테가 스승 라티니에게 보여준 정중하고도 복잡한 예우, 그리고 「연옥편」 제26곡에서 자신의 색욕을 정화하고 있는 구원받은 남색가들의 존재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해 왔다. 지옥에서조차 단테의 묘사는 강렬하다. 그는 남색가 무리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들 각자는
초승달 뜬 저녁 어스름 속에서
서로를 바라보듯 우리를 뚫어지게 보았네.
그들은 우리를 향해 눈썹을 치켜세우고 눈을 가늘게 떴으니,
마치 바늘귀에 실을 꿰는 늙은 재봉사 같았네.

어스름한 어둠 속에서 서로의 얼굴을 탐색하는 이 ‘눈빛’의 묘사가 당대의 공공연한 유혹(cruising) 문화를 반영하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을 품는 독자는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실제로 후대 피렌체 ‘밤의 관청’ 기록에 따르면 사건의 28%가 야외에서 발생했다.) 게이 단테 연구가인 로버트 덩컨은 이러한 정밀 독해를 바탕으로 1964년 한 편의 소네트를 썼다. 단테가 “결코 모질게 말하지 않았던” 사랑에 관해, 정교한 이중 부정의 미학을 담아낸 시다.

바늘귀에 실을 꿰려는 사람처럼
시력을 벼리며, 단테는 말하네.
그들은 타인의 눈을 시험한다고.
사랑이 그곳에 마련해 둔,
결코 쉽지 않은 결합을 위한
그 바늘귀를 향하여.

『신곡』의 초기 주석가 중 한 명인 보카치오는 단테가 (이성애적) 색욕의 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그에 대해 그토록 정교한 성찰을 남길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초기 독자들 역시 단테의 관대함을 감지하면서도, 그 이면을 의구심 어린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한 유력한 익명 주석가는 단테가 자신과 같은 죄를 지은 죄인들에게 유독 친절하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역시 “이 악덕(남색)에 물들어 있었다”고 노골적으로 암시했다. 반면 베네베누토 다 이몰라는 후대의 교화를 위해 라티니와 그 일행의 비밀을 폭로(outing)해준 것에 대해 단테에게 사의를 표했을 뿐이다. 단테가 시대를 앞서간 동성애 해방주의자는 아니었을지라도, 초기 독자들은 그가 남색가들을 다루는 방식에서 분명 이례적인 지점을 발견했다. 그의 시는 당대의 교조적 신념을 단순히 압축해놓은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동성애자 독자층이 두터웠던 셰익스피어는 맬컴의 논증에서 더욱 비중 있게 다뤄진다. 맬컴은 마를로의 『히어로와 레안드로스』에 등장하는 노골적인 동성애자 넵튠이나, 리처드 반필드의 〈가니메데 소네트〉 등 16세기 말 고전주의 양식의 남성 동성애 시들을 언급한다.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이 대열에서 제외하기란 불가능해 보이지만, 맬컴의 시각은 단호하다. “셰익스피어 작품의 전체적인 성격은 그들과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성적 결합 그 자체를 추구하는 반필드의 시와 달리,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는 (화자가 “명시적으로 회피하고자 하는”) 에로틱한 이끌림을 나이와 젊음, 시간, 후회, 자기애와 자기부정, 소유와 상실 등에 관한 철학적 명상의 전제로 삼는다는 분석이다.

수많은 연구가는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던지는 함의에 곤혹스러워했다. 1964년 판본의 서문에서 W. H. 오든은 특유의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며, “우리의 위대한 시인을 ‘호민테른(Homintern, 국제 게이 결사)5’의 수호성인으로 내어주기를” 거부했다. 콜리지는 소네트 속 남성 수신자가 단지 ‘의도적인 눈속임’에 불과하다고 치부했다. 한 예리하면서도 경멸적인 초기 독자는 자신의 책 여백에 “한 무더기 가련한 불신자들이 남긴 쓰레기”라고 휘갈겨 쓰기도 했다. 맬컴에게 있어 가장 결정적인 근거는 소네트 20번이다. “내 욕망의 여주인이자 주인(master mistress)”에게 바쳐진 이 시에서 화자는, 자연이 “여성의 즐거움을 위해 그대에게 남성기를 달아주었기에(pricked thee out)” 성적인 시도를 포기해야만 한다고 한탄한다. 물론 모든 독자가 이러한 겉치레뿐인 순진함을 곧이곧대로 믿어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셰익스피어의 성생활을 추론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며, 대개 극작가 본인의 실체보다는 비평가 자신의 투영된 성향을 드러낼 뿐이다. 하지만 맬컴은 이 소네트들이 실제 에로틱한 애착의 산물인지, 아니면 고도로 숙련된 수사적 관습의 산물인지에 대해 유독 침묵을 지킨다. 셰익스피어가 때로 자신의 극작품에서 조롱하기도 했던 ‘소네트’라는 형식을 에로티시즘을 초월한 목적을 위해 관습의 경계 너머로 확장했다는 맬컴의 지적은 분명 타당하다. 그러나 ‘남색(sodomy)’이라는 구체적 행위의 유무에만 몰두하는 맬컴의 시각, 그리고 셰익스피어에 대한 퀴어적 해석을 근대 초기의 ‘우정 문화’ 속으로 환원해버리려는 경향(이는 그가 『코리올라누스』의 동성애적 해석을 일축하는 근거이기도 하다)은 소네트가 품은 서늘하고도 강렬한 동성애적 긴장감을 가려버린다. 소네트 속 화자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노예처럼 속박된 상태에 놓여 있는데, 그는 이러한 예속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개탄한다. 정직한 독자였던 C. S. 루이스는 이 언어가 “평범한 남성 간의 우정이라기엔 지나치게 연인 같다”고 느꼈으며, “16세기 문학에서 친구 사이에 이런 파격적인 언어를 사용한 실제 사례는 찾을 수 없다”고 단언했다.

근대 이전의 성적 사고방식을 세밀하게 파헤친 『금지된 욕망』의 여정을 따라온 독자라면, 결론부에서 맬컴이 스스로를 ‘온건한 구성주의자(moderate constructionist)’라고 선언하는 것에 당혹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선 안 된다. 맬컴은 그 근거로 현대의 성적 이해와 그가 논의한 ‘동성 간 성행위자들(same-sexuals)’ 사이에 엄존하는 ‘현저한 차이’를 든다. 존 보즈웰(John Boswell)이 1980년대 자신의 저작을 향한 논쟁을 되돌아보며 관찰했듯, 순수한 본질주의자나 순수한 구성주의자는 대개 가상의 적(straw men)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의 욕망은 때로는 낯설게, 때로는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당도하며, 우리 자신을 바보나 미치광이처럼 느끼게 만든다. 욕망이 지닌 하이브리드적 성격, 즉 ‘나의 것이면서도 나의 것이 아닌’ 그 묘한 이질성이야말로 욕망의 진정한 매혹을 만들어낸다. 만약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성적 정통성도 영원불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정체성과 비정체성의 분열적인 분류 체계, (절대적이든 위선적이든) 일부일처제의 규범, 그리고 개방성을 향한 혼란스러운 실험들로 가득한 우리 시대의 성적 구조 또한, 미래 세대의 눈에는 기묘하거나 야만적인 풍습으로 비쳐질지 모른다.

이토록 방대하고 박식한 저작은 마땅히 해당 분야의 물길을 바꿀 자격이 있다. 이 책이 규명해낸 패턴들은 근대 초기 성(性) 연구의 보편적인 분석 틀(heuristic)이 될 것이며, 그간 소외되었던 그리스와 슬라브 문헌에 대한 연구를 촉진할 것이다. 이를 통해 지중해식 패턴이 고대 소년애(pederasty)에서 사회적·정서적 요소가 소거된 채 축소되어 살아남은 형태라는 맬컴의 가설이 입증될지도 모른다. (북유럽과 남유럽의 두 가지 패턴이 모두 나타나는 유일한 국가인 프랑스 또한 더 깊은 연구가 절실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이 책이 막연하고 정치적인 ‘타자성’의 상징적 가치에만 매몰되어 가던 학계에서 ‘실제 성행위’가 지닌 중심적 위치를 당당히 회복시켰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성(性)이 인간 존재의 전부일 수는 없다. 우리의 상상 속에 끝까지 남는 것은 자네시노가 사랑하는 이를 위해 준비했던 비단 옷들이며, 서슬 퍼런 조사관 앞에서도 자네시노를 사랑한다고 고집스럽게 증언하던 그레고리오의 결연한 모습이다. 앨런 브레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동성애’를 탐구하기로 했던 자신의 선구적 결정을 되짚으며, 당대의 용어들—‘가니메데, 파틱, 키나에도스, 카타마이트, 버거, 잉글, 소도마이트’—이 비속어로 연명했을지는 몰라도, 그 단어들이 지칭하던 인간 군상의 실체는 대부분 망각되었다고 술회했다. 맬컴은 근대 초기 남색가들이 지녔던 ‘제한적이고 특수한 정체성’이 우리로 하여금 ‘현대 동성애자의 다양한 분파’에 눈뜨게 해줄 것이라 제안한다. 하지만 그 유형들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왜 ‘동성애자’라는 단일 범주에 그토록 회의적이어야 하는지, 혹은 그 범주를 해체했을 때 어떤 역사적·정치적 실익이 있는지는 오롯이 독자의 상상에 맡겨져 있다. 우리는 맬컴의 회의적 지성을 감탄하며 바라보면서도, 그의 냉철한 거리두기가 자칫 거대한 개별 사례의 파편적 수집에 그침으로써 현대 게이 독자들에게 역사는 제공하되 정작 그 역사를 ‘긍정할 명분’은 앗아간 것이 아닌지 자문하게 된다.

루이스 크롬튼이 『동성애와 문명』의 서문에서 명시했듯, “성적 사실과 인간적인 사랑 및 헌신의 가능성”은 어휘의 변천과 무관하게 시대를 초월하여 불변하는 가치로 남았다. “이 ‘남색가’들은 현대 게이 남성이 형제애를 고백할 수 있는 인류였으며, 현대 레즈비언이 자매로 인식할 수 있는 존재들이었다.” 이러한 명제는 실증에 목매는 역사학자를 곤혹스럽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브레이가 그의 유작 서문에 남겼듯이, 독자들은 과거를 자신만의 것으로 전유(專有)할 수 있고, 전유할 것이며,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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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Betas (베타): 대안 우파(Alt-right) 등에서 흔히 사용하는 은어로, 우두머리 남성인 '알파(Alpha)'에 대비되는 수동적이고 나약한 남성을 비하하는 표현입니다.

  2. Freikorps (자유군단):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에서 활동한 우익 준군사 조직입니다. 사회학자 클라우스 테벨라이트는 저서 『남성적 판타지』에서 이들의 여성 혐오와 폭력성이 신체의 경계를 지키려는 강박에서 비롯되었다고 분석했습니다.

  3. Ganymede (가니메데):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독수리로 변해 납치해간 소년입니다. 서구 문학에서 미소년 혹은 동성애적 대상의 전형으로 쓰입니다.

  4. The heart in your loins: 'loins(사타구니/품)'는 종종 성적인 부위를 완곡하게 표현할 때 쓰입니다.

  5. Homintern (호민테른): 'Homosexual'과 'Comintern(국제 공산당 결사)'의 합성어로, 전 세계 동성애자들의 비밀스러운 연대를 비꼬거나 지칭할 때 쓰이던 용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