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 만들기 (번역)
Garth Greenwell 「 Making Meaning 」
최근 'relevant(유의미한)'라는 단어가 'relieve(완화하다)'와 어원을 공유한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랐다. 알고 나면 스펠링도 몇 글자 차이 나지 않아 당연해 보이지만, 두 단어의 쓰임새가 워낙 오래전에 갈라진 탓에 한 번도 연관 지어 생각하지 못했다. 어원을 찾아보는 것은 시인을 꿈꾸던 수십 년 전에 들인 오랜 습관이다. 에머슨은 "언어는 화석화된 시"라고 말했는데, 이번 경우에 옥스퍼드 영어 사전(OED)이 펼쳐 보인 시는 유독 감동적이었다. 두 단어의 공통 조상은 프랑스어 'relever'로, 원래는 '다시 똑바로 세우다', '다시 일으키다'라는 뜻이었다. 이 단어는 세월이 흐르며 변형되었고, 현대의 두 단어가 나누어 가진 여러 의미를 사방으로 뿌렸다. 통증이나 불편함 덜어주기, 두드러지게 하기, 탁월하거나 뚜렷하게 만들기, 일어서기나 반란 일으키기, 재건하기, 활력 불어넣기, 더 높이 올리기, 해방하기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 역사를 찾아본 이유는 우리가 '유의미함(relevance)', 특히 '예술의 유의미함'을 말할 때 그 본뜻을 어느 순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가 나 자신의 이해력에 있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단어를 잘못 쓰고 있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현재 이 단어는 추천사나 비평 어디에나 등장하며 찬사할 만한 자질을 넘어 필수 조건처럼 쓰인다. 반면 'irrelevant(무의미한)'는 'problematic(문제가 있는)'과 함께 상대를 완전히 배척하는 용어가 되었다. 치열하게 읽고 토론할 책이 아니라, 아예 읽을 필요조차 없는 책에 이 낙인이 찍힌다. 예술가들은 연구비나 지원금을 신청하는 철마다 이 유의미함에 대한 불안을 느낀다. 일종의 간청 의식과도 같은 이 과정에서 예술가들은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데, 적어도 나에게는 이런 방식이 예술의 진짜 창작 동기와 완전히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지원서들은 자주 "왜 지금 이 순간에 이 프로젝트가 필요한가?"라고 묻는다. 예술을 하려 할 때 머릿속에 이런 질문을 품고 있다면, 나는 단 한 글자도 더 쓰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압박은 최근 몇 년 동안 더욱 심해졌다. 2017년 초에 느꼈던 소름이 아직도 생생하다. 새로 번역된 유럽 소설을 리뷰하고 싶다고 했더니, 한 편집장은 잡지 독자들에게 유의미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트럼프와 연결 지을 만한 시각"을 찾아달라고 요구했다. 미리 정해진 시각으로 예술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모욕적인 일인데, 그 시각이 심지어 현직 대통령에 의해 결정된다면 더욱 비참한 일이다.
내가 유의미함의 뜻을 헷갈려하는 이유 중 하나는 쓰임새의 기묘한 변화 때문이다. 옥스퍼드 사전에 따르면 이 단어는 20세기 중반까지 '특정 사안에 적절하다'는 뜻이었으며, 대개 전치사구와 함께 쓰였다. 구체적인 질문이나 상황, 혹은 논쟁에 '관련이 있다'는 식으로 표현되었던 것이다. 그러다 1951년 옥스퍼드 사전 인용구에 이 단어의 새로운 의미가 처음 등장했다. 문맥을 지정하는 구조 없이 단어 혼자 쓰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어떤 구체적인 대상이나 사람에게 유의미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막연하게 허공을 떠돌며 단독으로 '유의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사전은 이 새로운 용법을 "특히 현재의 맥락이나 상황에 적절하거나 적용 가능하다"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동의어 반복처럼 "사회적, 정치적 유의미함을 지닌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가 현재 유의미함을 평가의 잣대로 쓰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 단어는 자신의 기준을 숨기고 있으며, 그 기준은 미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런 유의미함을 예술을 바라보는 여러 시선 중 하나가 아니라 관심의 전제 조건으로 삼는다면, 예술의 조건은 오직 명시적이고 논쟁적인 내용, 즉 '소재'에만 국한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작품을 예술답게 구별 짓는 본질적인 요소들을 폄하하게 된다. 바로 '형식'의 중요성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작품의 소재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예술을 논할 때 사회적·정치적 맥락을 빼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나는 20여 년 전, 소재를 무척 경시하던 학계 분위기 속에서 문학인으로 성장했다. 한 선생님은 시 창작 워크숍에서 내용에 대해서는 절대 토론하지 말고 오직 형식에만 집중하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교수법으로서는 흥미로웠고 한 학기를 보내기에 나쁜 방식은 아니었지만, 예술과 소통하는 방식으로는 가식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내용에 저항하는 태도 뒤에는 단순히 유미주의, 즉 '예술을 위한 예술'에 대한 집착 이상의 무언가가 숨어 있다고 의심했다. 그것은 학계의 문학 권력이 자신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소재에 대응하는 방식이었다. 너무 주장이 강하거나 극적이라 압도적이라고 느껴지는 소재들이었는데, 단지 오랫동안 문학적 규범에서 배제되어 왔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치부된 것이다. 이러한 작품들의 대부분은 유색인종, 퀴어, 여성, 빈민, 그리고 소외된 지역 사람들의 경험을 다루고 있었다. 소위 보편적인 인간의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경험으로 여겨졌던 것들이다.
현재 비평계에서 '유의미함(relevance)'이라는 단어가 평가의 주된 잣대로 부각된 현상은 크고도 필연적인 교정의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소외되었다고 여겨온 다양한 경험들 역시 다른 모든 인간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이해하려는 공동의 노력, 즉 예술이라는 노동에 긴밀히 결합되어 있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relevant(유의미한)'와 'relieve(완화하다)'가 어원을 공유한다는 사실, 즉 앞서 언급한 그 화석화된 시에서 내가 큰 감동을 받은 이유는 '도드라지게 하다, 뚜렷하게 만들다'라는 의미와 '고통이나 불편함을 덜어주다'라는 의미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공명 때문이다. 문학계에서 더 다양한 목소리의 가치를 증명하려는 투쟁은 보이지 않는 존재로 취급받던 오랜 상처를 치유해 주었다. 이 투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불과 몇 년 전, 아이오와 작가 워크숍의 대학원 세미나에서 내가 여전히 존경하는 한 작가는 내 작품을 두고 "하위문화의 관습에 대한 사회학 보고서 같다"고 평했다. 특정 보편성 관념이 가진 오류는 인간의 어떤 경험이 지리, 역사, 인구통계학적 우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고 착각하는 데 있다. 예컨대 아이오와 시골 지역의 조합교회 목사에 대한 이야기가 게이 남성들의 성 사랑 이야기보다 어쩐지 더 거대하며, 인류 보편의 이야기에 더 유의미하다고 믿는 식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보편성이라는 개념은 기득권의 사회적 위치를 공고히 하기 위한 정치적 책략에 불과하다. 대개 이성애자, 백인, 남성의 위치가 여기에 해당하며, 이들은 이를 통해 자신을 사회의 기본값으로 설정하고 성찰과 비판으로부터 면죄부를 얻는다.
이러한 싸움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기에, 나는 우리가 '유의미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방식이 예술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왜곡하고 있는지 명확히 밝히기가 조심스럽다. 하지만 현재의 '유의미함'이라는 관념이 과거 문학 교수들이 '보편성(universality)'이라는 용어를 적용했던 방식과 유사하게, 다소 우려스러운 특징들을 반복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단어의 쓰임새가 변한 이후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는 특정 유의미함이 '누구에게' 혹은 '무엇에' 해당하는지 굳이 밝힐 필요가 없었다. 이러한 생략은 일종의 전제가 되었고, 이 단어는 아무런 표식이 없는 기본값처럼 쓰이게 되었다. 그러나 유의미함은 결코 표식 없는 단독 상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대개 '무엇이나 누구에게' 유의미하다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며, 우리 모두는 언제나 특정 대중을 향해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모호하게 만드는 데에는 위험이 따른다. '보편성'이라는 단어의 특정 용법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결국은 타자를 배제하는 용어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정 소설의 유의미함을 찬양할 때마다, 우리는 최소한 암묵적으로 다른 소설들의 무의미함을 상정하게 된다. 그리고 종종 이러한 판단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이성애자이자 백인이며 특권을 누리는 남성이 간통을 고민하는 이야기에는 이제 지쳤다"라고 내 친구들이 말하는 것을 들을 때가 있다. 때로는 나 역시 그렇게 말하곤 한다. 우리는 유학 중인 미국인들의 이야기나 중산층의 권태를 다룬 이야기에 지쳤다. 우리는 정말 지쳤다.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아이오와시티의 '프레리 라이츠' 서점 매대를 자주 서성인다. 최근 출간된 책의 띠지를 읽으며 친구들과 "또 이런 이야기에 낭비할 시간은 없다"고 한숨을 쉬고는, 책을 펼쳐보지도 않은 채 매대에 다시 내려놓는다. 이러한 판단은 농담처럼 표현되지만 절반은 진심이다. 가끔은 스스로 생각해도 웃음이 나지만, 동시에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불의의 구조를 뒤집고 싶어 하는 마음, 즉 특권을 누려온 이들에게 그들이 과거 타인에게 가했던 무관심을 그대로 되돌려주고 싶어 하는 마음을 나 역시 충분히 이해하며 내 안에서도 느낀다. 그러나 인간의 어떤 경험이 인류 공동의 경험에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것은 언제나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일이다. 더 나아가, 이는 일종의 폭력과도 같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를 '폭력 보존의 법칙'이라고 설명했다. 폭력에 노출된 집단은 그 폭력을 다른 이들에게 가해 전가하려 한다는 법칙이다. 우리가 다른 이야기들의 유의미함을, 그리하여 타인의 삶이 지닌 유의미함을 일축할 때 바로 이 법칙이 작동한다. 이성애자 남성의 욕망 같은 인간의 경험이 가진 미학적 가치가 이제는 다 소진되었다고 치부해 버리는 것이다.
켄터키에서 자라나 이후 1990년대 학계에서 공부하면서, 나는 퀴어로서의 내 삶과 퀴어 예술가로서의 내 작업이 중심적이고 보편적인 인간 서사의 기이한 변주에 불과하다는 폭력적인 언사를 경험했다. 그러나 나는 그 폭력을 그대로 전가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그것을 분산시키거나 변화시키고 싶다. 내 생각에 우리는 모든 인간의 경험이 가치 있다고 믿거나, 혹은 믿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즉,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차이에 온전히 몰입함으로써 모든 삶이 다른 모든 삶에 진실한 무언가를 드러낼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보편성'을 믿든지, 아니면 아예 믿지 않든지 해야 한다. 나는 목소리와 이야기들의 억압이 아니라, 그것들의 풍성한 확산을 장려하고 싶다.
때로는 내가 방금 펼친 주장 뒤로 잔인한 계산법이 고개를 들기도 한다. 자원은 한정되어 있고 시간도 유한하다는 논리다. 모든 책은 다른 책의 기회를 빼앗으며 존재하고, 내가 읽는 모든 책은 대신 읽을 수도 있었던 다른 책을 포기함을 의미한다. 이 생각에 따르면 우리는 냉정한 선택을 해야 하며, 인종적·경제적 특권 구조의 혜택을 받아왔고 지금도 받고 있는 이들을 우대해서는 안 된다. 이 지적의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기는 어렵다. 세상에 나와 자리를 잡는 책은 극소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이러한 선택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 아니 사실은 선택을 해서는 안 되며 결핍이 아닌 풍요(시간의 풍요, 독자의 풍요, 목소리의 풍요)의 관점으로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끝내 정당화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신의 사랑처럼 쓰면 쓸수록 줄어들지 않고 배가되는 특정 본질이 존재한다는 옛 신학적 개념, 즉 세속화된 '은총의 보물' 같은 값싼 신비주의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내가 제안하는 바는 오천 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우리의 관심도 무한히 늘어날 수 있다는 순전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마땅히 살고자 하는 세상에 필요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비록 정당화될 수 없어 보일지라도 끝까지 고수해야만 하는 보수적 입장이 존재한다는 것 역시 사실일 수 있다.
나는 예술이 제로섬 게임이라는 생각을 견딜 수 없다. 어떤 종류의 이야기가 유의미한지, 어떤 삶이 가치를 지니는지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용납할 수 없다. 예술 작품이 오직 다른 작품의 기회를 희생해야만 존재할 수 있고, 책들이 공간을 차지하기 위해 잔혹한 경쟁에 갇혀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 어쩌면 이러한 방식으로 규정된 현실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 자체가 미덕일지 모른다. 어떤 선택들은 우리의 인격을 너무나 심하게 왜곡하기에, 그 어떤 필연성의 주장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결핍의 수사학은 흔히 과장된 것으로 드러나곤 한다. 우리의 시간과 관심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병이어의 기적을 닮았을지도 모른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언제든 넷플릭스 구독을 취소할 수 있고, 언제든 트위터 계정을 삭제할 수 있으니 말이다.
친구들과 내가 최근 출간된 책들을 단지 소재에 의거해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 버릴 때, 우리는 또 다른 종류의 가정을 하는 셈이다. 이는 내게 매우 유해해 보이는 가정으로, 바로 우리가 예술로부터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이미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태도이다. 이는 데이팅 앱에서 상대를 만날 때 특정 나이나 키, 인종을 필터링하듯, 우리가 예술과의 만남 또한 확실히 원하는 속성들로만 기획하려는 것과 같다. 데이팅 앱의 문제는 왼쪽으로 화면을 넘겨 상대를 거절하는 행위가 타인에 대한 격하라는 점에만 있지 않다. 우리가 스스로의 욕망에 대해 생각만큼 잘 알지 못한다는 점에도 있다. 욕망이 가진 위대한 선물이자 고통은, 그것이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밝혀준다는 데 있다.
이 점은 예술과 욕망이 닮아 있는 수많은 부분 중 하나다. 내가 읽을 책을 결정하는 필터로 '유의미함'을 사용할 때, 나는 진정한 예술이 언제나 선사하는 '타자성과의 진정한 조우'를 받아들일 준비를 스스로 저버리게 된다. 단지 간략한 줄거리 요약만 보고 그 책이 내 삶에 유용할지 알 수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작품을 직접 경험해 보기도 전에 내가 그 작품에서 어떤 유의미함을 발견하게 될지 어떻게 미리 알 수 있겠는가. 만남을 미리 결정지으려 한다면 예술을 통한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변화에 필요한 취약성 중 일부는 나 자신 또한 스스로에게 거대한 수수께끼 같은 존재임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내가 내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찌 미리 알 수 있겠는가.
얼마 전, 미국 서부의 한 주립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는 이성애자 친구와 점심을 먹었다. 친구는 동료 교수가 자신에게 애니 프루의 『브로크백 마운틴』을 가르친다고 핀잔을 주었을 때 무척 놀랐다고 털어놓았다. 퀴어였던 그 동료 교수는 이제 그런 이야기를 가르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비극으로 끝나는 게이 이야기는 읽을 만큼 읽었으니, 이제는 해피엔딩의 퀴어 이야기가 존재하므로 그런 작품들을 가르쳐야 한다는 논리였다. 그는 유의미함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즉, 과거의 상황을 다룬 퀴어 이야기는 오늘날 특정 지역과 집단의 퀴어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 이상 더는 적절하지 않으며, 나아가 이러한 텍스트들이 적극적으로 해를 끼칠 수도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나 역시 자주 접하는 주장이다. 심지어 내 작품을 두고도 퀴어의 삶을 충분히 긍정적으로 묘사하지 않았다며 실망감을 표하는 독자들이 있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낭독회 직후, 한 남성은 분노로 보이는 감정에 몸을 눈에 띄게 떨며 "왜 당신의 화자는 당당하게 커밍아웃한 게이 남성으로 나올 수 없습니까?"라고 내게 물었다. 내 작품이 퀴어의 존엄성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있으며, 내 화자 역시 실제로 당당하게 커밍아웃한 게이 남성이라는 점에서 그의 평가가 왜 잘못되었는지 구체적으로 구차하게 설명하지는 않겠다. 다만 소외된 공동체 출신의 수많은 작가가 특정 정치적 비전을 지지하는 이야기를 써야 한다는 책임감과 압박을 느낀다는 점만 짚고 넘어가고 싶다. 이 압박은 "작가가 인식하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세상을 보여달라"고 요구한다. 농담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사람들이 내게 해피엔딩의 퀴어 이야기가 더 필요하냐고 물으면 내 대답은 언제나 '그렇다'이다. 우리에게는 더 많은 퀴어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것이 전부다. 그러나 우리가 스스로에게 원하는 삶과 우리가 살고 싶은 세상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해서 예술이 무의미하다고 믿는 것은 예술의 작동 방식을 오해한 것이다.
내 친구의 동료 교수가 제임스 볼드윈에 대해서는 무엇이라 말할지 궁금하다. 그가 보기에 <조반니의 방> 역시 서점 매대와 대학 강의 계획서에서 퇴출당해야 마땅한 책일까. 나는 볼드윈에게 빚진 작가적 부채와 더 깊은 인간적 부채에 대해 이미 많은 글을 쓰고 말해왔다. 하지만 그 부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여전히 내게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모든 등장인물이 죽거나 파멸하는 <조반니의 방>은 단순히 퀴어의 비극적 서사를 넘어 호모포비아적 소설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성성을 지닌 남성에 대한 혐오로 가득 차 있다. 작가 부류의 게이 남성들을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원숭이에 비유한 바 장면을 읽을 때마다 나는 소름이 돋는다. 묘사된 남성들이 백인임에도 불구하고, 이 이미지는 미국 인종주의의 비유적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화자인 데이비드에게만 동성애가 저주인 것이 아니다. 소설 자체가 남성 간의 지속적인 사랑의 가능성을 원천 봉쇄한다. 그렇다면 동성애가 오직 닫힌 문으로만 존재하는 이 책이, 어떻게 나에게는 모든 문을 열어줄 수 있었을까. 열네 살 때, 문학에 대해서도 볼드윈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 채 켄터키의 한 서점 매대에서 <조반니의 방>을 집어 들었을 때,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고 내가 존재해도 된다는 허락을 내려주었다. 작품의 내용 중 어느 것도 이 현상을 설명하지 못한다. 해답은 볼드윈이 '무엇을 말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말했는가'에 있다. 힐튼 알스가 그의 "고상한 호모 스타일(high-faggot style)"이라 부른 바로 그 문체에 답이 있다. 게이 남성들이 서로의 손에 죽어 나가던 볼드윈의 소설 속 세계는, 게이 남성들이 고독과 에이즈로 죽어가던 내가 살던 세계만큼이나 나를 위한 자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의 언어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였다. 나에게 일종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자, 다른 차원의 존재 방식을 약속해 주는 세계였다.
우리가 유의미함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보면, 그것이 마치 작품이 지닌 고유한 자질이자 작가가 설계하고 성취해 낸 일종의 업적인 것처럼 여겨진다. 이 역시 내가 보기에는 잘못된 생각이다. 유의미함은 오히려 독자와 더 깊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우리가 읽는 대상의 속성이라기보다는, 적어도 우리의 독서 행위가 지닌 자질에 가깝다. 나는 문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 볼드윈을 우연히 만나는 행운을 누렸다. 덕분에 나는 아무런 방어 기제 없이 그를 마주할 수 있었다. 오늘날 내가 책을 겉핥기로 훑어보고는 나와 상관없다며 치부해 버릴 때 부리는, 그 어설픈 아는 척도 내 안에는 없었다.
유의미함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옥스퍼드 사전에 나오는 정의 속 단어 하나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사전은 이를 "특히 현재의 맥락에 적절하거나 적용 가능한 것"이라고 정의한다. 트위터 피드가 넘쳐나고 뉴스가 쉴 새 없이 쏟아지는 시대, 즉 새로운 것이 압도적으로 과잉된 시대에 접어들면서 예술과 시간의 관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감각은 무언가 어긋나 버렸다. 나는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의 속도에 맞추어 글을 쓰려는 문학적 시도들에 관심이 많다. 알리 스미스의 계절 4부작 소설이나, 성격은 조금 다르지만 카를 오베 크나우스고르의 <나의 투쟁> 같은 프로젝트가 그렇다. 그러나 예술이 가진 더 심오한 역량은 시간을 가로질러 대화하는 능력에 있다. 시간뿐만 아니라 지리, 언어, 문화, 계급까지도 뛰어넘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요소들은 오늘날 '유의미함'을 결정짓는 기준들이기도 하다. 문학은 의식을 전송하는 고도의 기술이며, 이것이 바로 문학에 삶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유다. 수천 년 전의 사포를 읽고, 언어가 다른 미시마 유키오를 읽고, 대륙이 다른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를 읽으면서 내가 전혀 모르는 이질적인 세계를 경험하는 동시에 나 자신에 대한 본질적인 진실을 마주한다는 것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최근 나는 북아프리카의 주교이자 서구 세계의 설계자인 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대학원생이자 신진 작가 시절 그의 『고백록』에 열렬히 사로잡힌 이후 처음으로 그에게 다시 돌아간 것이다. 시간, 공간, 문화, 언어 모두가 나와 아우구스티누스 사이를 갈라놓고 있지만, 우리를 가장 멀리 떨어뜨려 놓는 것은 바로 신앙이다. 나는 확고하고 적극적이며 헌신적인 무신론자다. 따라서 아우구스티누스 작품 내용의 상당 부분은 오류나 환상에 기반한 허무한 이야기, 한마디로 나와는 상관없는 '무의미한' 것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고백록』을 읽을 때 그런 사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듯하다. 이토록 나에게 활력을 불어넣고 영감을 주며, 다른 인간 존재와 이토록 강렬한 동반자 의식과 친밀감을 느끼게 해주는 텍스트는 거의 없다.
엘리자베스 비숍은 자신이 지향하는 시의 형태를 설명할 때 즐겨 쓰던 문장이 있었다. 시란 정형화된 생각이 아니라 '생각하는 마음' 그 자체를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가치를 발견하는 지점이자, 내가 사랑하는 모든 예술에서 소중히 여기는 가치다. 그것은 일련의 주장과 결론이 아니며 어떤 메시지도 아니다. 한 인간이 삶으로부터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해 고군분투할 때, 그의 마음이 형성하는 역동적인 형태 그 자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유의미한 이유는 그가 내면성을 조형하고 집요하게 질문하는 방식 때문이다. 또한 당혹감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 당혹감 자체를 탐구의 도구로 삼기 위해 그가 창조해 낸 문장 구조 때문이다. 최근 이 책을 읽으면서 그의 논증 중 상당 부분이 질문의 형태로 제시된다는 점을 발견했다. 심지어 문장 전체가 의문문으로만 이루어진 단락들도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우리가 궁극적이고 해결 불가능한 질문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흔히 막다른 골목으로 경험하는 그 무력감을 받아들여 바로 그 무력감 자체를 앞으로 나아가는 통로로 전환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세계가, 즉 그가 상상했던 '신의 도성'과 그가 알고 있던 '인간의 도성' 모두가 여러모로 나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며, 내게는 낯설거나 진부하거나 혐오스럽고, 심지어 나의 파멸을 적극적으로 도모할지라도, 그의 방식은 나에게 유의미하게 다가온다. 그것은 나에게 필요한 무언가로 느껴진다.
여기까지 쓴 모든 글이 지나치게 단순화되었으며, 온갖 반론이 제기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작품을 맥락으로부터 완전히 분리할 수 있다고 가장하거나, '유의미함'으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중립적인 공간에서 작품을 만나려 하는 태도는 작품의 독자성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일이라는 점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예술 작품이 자신의 형식을 입고 존재하는 방식은 내가 간절히 갈구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그것은 바로 또 다른 인격을 마주하는 감각이며, 다른 인간 의식의 현존을 느끼는 경험이다. 앞서 나는 예술에서 쓰이는 특정한 거짓 '보편성' 관념을 거부한다고 말했지만, 나는 여전히 보편적인 것의 존재를 믿는다. 인간 경험의 어떤 공통된 본질은 거대한 차이의 심연을 넘어 소통될 수 있다고 믿으며, 예술이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믿는다. 예술은 의미가 바래져 가는 우주 속에서, 의미를 만들어내는 동물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에 우리를 노출시킨다. 어쩌면 예술에 대한 좋은 정의는 바로 '의미를 만드는 도구를 제작하는 과학' 일지도 모른다.
단평과 논평이 판치는 이 시대에 예술 논쟁에서 소재가 핵심으로 부각된 이유 중 하나가 있다. 예술을 소재, 특히 정치적 소재로 바라보면 할 말이 많아지고 담론을 생산하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나는 어떤 예술 작품의 소재나 정치·사회적 맥락을 고려할 때는 대화를 나누고 싶어진다. 반면 작품의 형식을 고려할 때는 깊이 침잠하여 명상하고 싶어진다. 그러나 형식을 배제한 예술 비평은 거의 쓸모가 없다. 그런 비평은 대개 본질을 놓치기 마련이다. 형식이야말로 예술을 다른 것과 구별 짓는 뚜렷한 특징이자 본질적인 속성이기 때문이다. 미학적 형식은 비미학적 형식과 다르다. 감정적·지적 의미는 물론 인간의 의도까지 내포하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시나 소설을 신문 기사나 백과사전 항목과 다르게 만드는 요소다.
내 작업실 벽에는 슬레이터 브래들리라는 젊은 미국 작가의 그림이 한 점 걸려 있다. 지난 한 해 동안 그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내가 이 그림을 처음 만난 것은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던 순수한 상태여서였다. 당시 나는 작가 콘퍼런스에서 강의를 하느라 리스본에 머물고 있었고, 그곳의 한 갤러리에 걸린 이 그림을 보았다. 동행한 동료 작가가 좋아하는 사진작가의 작품을 보고 싶어 해서 함께 갔다가, 갤러리 메인 공간에 전시된 브래들리의 캔버스 작품들을 보고 둘 다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림들은 크기가 컸다. 어떤 것은 금색, 은색, 검은색의 기하학적 도형으로 분할되어 있었고, 어떤 것은 단색의 단순한 여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작품들에는 점성술과 동양 형이상학이 혼합된 정교한 상징주의가 담겨 있었다. 이는 즉각 나의 회의감을 불러일으켰고 지금도 내 흥미를 끌지 못한다. 하지만 그림들은 아름다웠다. 그중 가장 작은 그림 하나가 내 평생 몇 번 느껴보지 못한 방식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 그림은 흰색 매트 위에 장착된 표면 위의 파란색 블록으로, 전체가 황동 프레임에 둘러싸여 있었다. 시멘트 바닥과 흰 벽으로 이루어진 창고 같은 갤러리 공간이었다. 높은 창문 틈으로 리스본의 눈부신 여름 햇살이 비쳐 들었다. 멀리서 보았을 때는 그저 기묘한 질감을 가진, 매혹적인 파란색 단색화처럼 보였다. 그때 방 안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구름이 태양 앞을 가린 것이다. 그러자 그림이 가히 변신을 일으켰다. 그림이 밝아지며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결코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 효과이며, 나로서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 그림은 활력으로 가득 찬 고요함을 전해주었다. 내가 사랑하는 많은 예술에서 발견하는 자질이자, 다른 곳에서 "유리 속에 잠긴 불꽃" 같다고 표현했던 바로 그 특성이었다. 그 고요함은 나에게 고대 그리스어 '스타시스(stasis)'를 떠올리게 한다. 이 단어는 정지를 뜻하는 동시에 폭동을 뜻하기도 한다. 언제든 내전으로 분출될 수 있는, 결코 평온하지 않은 정치적 교착 상태를 의미하는 말이다.
가까이서 보면 그 고요함은 해체되거나 교란된다. 그림은 수천 개의 작은 빗금으로 이루어져 있다. 가로 띠 안에 짧은 세로 선들을 촘촘히 그어 넣은 형태다. 작가는 이를 일종의 명상적 수련 속에서 작업했다고 설명했다. 그 그림을 보며 내가 겪은 경험은 사랑과도 같았다. 프랑스인들이 '쿠 드 푸드르(coup de foudre)', 즉 날벼락 같은 첫눈에 반함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감정이었다. 나는 그 효과를 몇 번이고 다시 느끼고 싶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비록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이 그림이 어떤 방식으로든 내게 유용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갤러리 측에서 흔쾌히 수락해 준 장기 할부와 가격 흥정, 그리고 내 파트너의 관용 덕분에 그 그림은 현재 내 책상 뒤에 걸려 있다. 일을 할 때면 등 뒤에서 그림이 윙윙거리며 살아 숨 쉬는 것만 같다.
브래들리 작품의 사회적·정치적 유의미함에 대해 말하기란 내게 무척 어려운 일이다. 물론 이 작품 역시 사회적·정치적 맥락 속에 놓여 있다. 세계의 여러 조건과 안배가 있었기에 브래들리가 이 작품을 창작할 수 있었고, 내가 이를 내 집필실에 걸어둘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그 유의미함의 관념으로는, 이 작품을 말문이 트이게 하거나 명쾌하게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내가 예술의 진정한 유의미함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것은 바로 이 그림이다. 이 그림은 'relevant'와 'relieve'의 공통 조상이자 가장 오래된 어원인 프랑스어 'relever'를 생각나게 한다. 그리고 신체적이고 물리적인 본래의 의미, 즉 '다시 똑바로 세우다'라는 뜻을 상기시킨다. 그것이 바로 내가 리스본의 갤러리에서 느꼈던 감정이다. 그림을 등 뒤에 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똑같이 느낀다. 내가 회복되고 있으며, 똑바로 세워지고 있고, 내가 주파수를 맞추어 포착해야 할 어떤 영적인 진동을 다시금 떠올리고 있다는 감각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진정한 유의미함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를 들어 올리는 것, 그리고 나 스스로를 고양시키도록 도전해 오는 것 말이다. 내 등 뒤에 걸린 이 신비로운 존재는 내가 나의 작업을 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리고 내가 나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 Harper's Magazine (2020.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