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용

아버지의 모든 아들들 (번역)

원문: All My Dad’s Sons — The Paris Review (2026.4.29)

By 조 본드(Joe Bond)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를 일터에 데려가곤 하셨다. 아버지의 직장은 비행 청소년들을 위한 그룹홈이었다. 어느 오후, 창문 하나 없는 사무실 바닥에서 장난감 자동차를 쌩쌩 굴리며 놀던 기억이 난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더니 한 소년이 안으로 튕겨 들어왔다. 그 아이는 두 명의 성인 남성에게 눌린 채 매끄러운 타일 바닥 위로 거칠게 나동그라졌다. 아버지를 포함한 어른들이 아이를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었지만, 아이의 얼굴은 눈물로 젖어 발갛게 달아올랐고 연신 비명을 질러댔다.

그때 내 나이 고작 다섯 살이었다. 나는 장난감 자동차를 구석으로 슬그머니 끌어당기고는 다시 놀이에 열중했다.

그런 풍경은 내 유년의 일상이었다. 그곳엔 절박한 처지에 놓인 열두 살에서 열여덟 살 사이의 소년 열 명이 옛 결핵 병원 부지 내에서 함께 생활하고 있었다. 나무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따라 언덕 꼭대기까지 올라가면, 과거 간호사 숙소로 쓰였던 방이 여럿 딸린 빨간 벽돌집이 나타나곤 했다. 적응 기간을 거치던 신입생들은 종종 언덕 아래로 내달려 마을까지 도망치려 했다. 1980년대 켄터키주 동부의 풍경이었다. 그 집 근처에는 고속도로와 주유소, 그리고 한 남자가 자기 아내를 살해했다는 낡아빠진 모텔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다시 돌아오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찾아내는 데 꽤 능숙했다. 하지만 차를 훔치거나 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아이를 다시 받아줄 수는 없었다. 지역 사회와의 관계 문제 때문이었다. 한번은 소년 두 명이 우리 어머니의 차를 훔쳐 달아나다 배수로에 처박아 폐차시킨 적도 있었다. 또 다른 아이는 도망친 뒤 다시는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열네 살밖에 안 된 그 아이의 기록지엔 ‘매춘 종사’라고 적혀 있었다. 모두들 그 아이가 다시 그 삶으로 돌아갔으리라 확신했다. 고속도로까지 내려가 지나가는 차를 얻어 탔을 것이라고 말이다.

그룹홈보다 더 끔찍한 곳은 얼마든지 있었다. 외딴곳에 수백 명의 흉악범이 갇혀 있는 수용 시설에 보내질 수도 있었고, 그곳의 직원들은 거침없이 손찌검을 해대곤 했다. 하지만 어떤 소년들은 그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 아버지는 주 내에서 가장 젊은 치료 책임자였다. 그는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관이나 야구장에 갔고, 500마일이나 떨어진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빈민가에서 태어나 시설로 보내지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동네를 벗어나 본 적 없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루이빌이 세상의 전부였다. 아버지가 낡은 포드 이코노라인 밴에 아이들을 태우면, 소년들은 이른바 ‘과거사’라 부르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그들 틈바구니에 끼어 앉아 그 이야기들을 귀담아들었다.

아주 어린 나이에 나는 삶이 얼마나 쉽게 어긋날 수 있는지 배웠다. 덕분에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지만, 그것은 어쩌면 조금은 비틀린 시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덟 살 혹은 아홉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한 친구가 부모님의 별거 소식에 상심하여 학교에 온 일이 기억난다. 나는 그 친구를 똑바로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제레미아 위트네 엄마는 자기 몸에 불을 질렀대.”

친구는 당황하며 되물었다. “뭐? 대체 왜?”

물론 밴 뒷좌석에서 배운 건 그런 비극만이 아니었다. ‘게토 보이즈’가 누구인지, 살인 사건을 뜻하는 코드 ‘187’이 무엇인지, 그리고 맥도날드에서 일하는 것보다 크랙을 파는 게 훨씬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또한 집단 상담을 이끌고 농구 코치 노릇을 하며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던 아버지의 모습도 내 눈에 선명히 박혔다. 당시 아버지는 작은 파란색 쉐베트 해치백을 몰았고, 청바지에 하얀 리복 운동화를 즐겨 신었다. 영리하고 카리스마 넘쳤던 그는 작지만 단단한 체구에 주근깨가 밴 얼굴을 가졌는데, 성격이 어찌나 날랬는지 누군가의 코앞으로 달려들어 기세를 꺾는 일에도 거침이 없었다.

어린 시절의 나는 아버지가 그들과 ‘한통속’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 역시 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고, 그저 그들보다 몇 살 더 많았을 뿐이었다. 친할머니는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지만, 그전에 이미 아버지의 유년기를 술에 찌든 계부들과 남자친구들로 채워놓은 뒤였다. 그들은 할머니의 코뼈를 부러뜨리고 달리는 차 밖으로 내던졌으며, 부엌 바닥에서 사정없이 폭행하곤 했다. 한번은 흠씬 두들겨 맞던 할머니가 아버지에게 당장 산탄총을 가져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겁에 질려 허겁지겁 총을 가져왔지만, 아버지는 끝내 총알을 찾지 못했다.

아버지의 두 형제는 결국 교도소 신세를 졌다. 친부라고 알려진 남자는 거의 문맹이나 다름없었다. 오하이오주 맨스필드의 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플라넬 셔츠 소매가 벨트에 끼어 기계 안으로 빨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뇌를 다친 남자는 늘 침묵 속에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살았다. 아들의 성장 과정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았던 그는 몇 년 뒤 아버지의 결혼식장에 불쑥 나타났지만, 타고 온 트럭 밖으로는 끝내 발을 내딛지 않았다.

학대와 방임이라는 유년의 트라우마가 아버지에겐 일종의 기초 훈련이었던 셈이다. 아버지가 문제아들을 돌보는 일에 투신한 건, 자신이 가져보지 못한 아버지가 되어주고 싶어서였을 것이다. 동시에 그는 그런 도전을 즐겼던 것 같기도 하다. 아버지가 가장 아끼던 아이들은 가장 질 나쁜 불량 청소년들이었다. 주로 마약 밀매를 일삼으며 거친 바닥 생리에 통달한 열여섯, 열일곱 살 소년들이었는데, 세상에 완벽히 적응한 듯 보여도 결국 그들은 아이였다. 아이들은 집단 상담 시간마다 그 누구도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우리 엄마는 내가 약 파는 걸 싫어한다면서, 내가 주는 돈은 왜 받는 거래요?”

아이들은 신시내티 외곽에서, 혹은 렉싱턴과 루이빌의 공공 주택 단지에서 흘러 들어왔다. 아버지의 뿌리는 보수적인 시골뜨기 ‘힐빌리’였지만, 그룹홈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런 배경 따위는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아이들 중 일부는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었다. 어떤 아이들은 잔혹한 짓을 저지를 만큼 거칠었지만, 또 다른 아이들은—과거에 무슨 짓을 했든 간에—놀라울 정도로 인간성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 여동생이 일곱 살 때 트럭에 치이는 사고가 났다. 소년들의 소프트볼 연습이 끝나고 길을 건너려던 참이었다. 신이 난 여동생이 혼자서 앞서 달려 나갔다. 한두 차선을 채 다 건너기도 전에 날카로운 브레이크 파열음과 둔탁한 충격음이 들렸다. 여동생은 신발이 벗겨진 채 아스팔트 바닥 위를 속절없이 미끄러지고 긁히며 튕겨 나갔다.

아버지는 여동생을 향해 전력 질주했고, 그 자리에 남겨진 건 소년들과 나뿐이었다. 길 한복판에 쓰러진 여동생을 보며 다섯 살의 나는 얼어붙었다. 그때 크리스라는 아이가 나를 덥석 낚아챘다. 그를 감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음만 먹었다면 그 길로 도망을 칠 수도 있었고, 한 아이가 죽어가는 비극적인 광경을 그저 구경꾼처럼 지켜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는 나를 품에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그 끔찍한 현장에서 나를 떼어놓기 위해 공원 안쪽으로 숨 가쁘게 뛰어갔다.

여동생은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지만, 아버지는 딸이 입은 상처를 모두 제 탓으로 돌렸다. 시설 아이들에게 쏟아부은 그 수많은 시간과 정성이 정작 제 딸의 목숨을 앗아갈 뻔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버지는 일을 계속했고, 그 고집은 결혼 생활마저 파탄 직전으로 몰고 갔다.

서른한 살이 되던 해,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시설 운영을 맡기고 그룹홈을 떠났다. 더 큰 일을 해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또 다른 언덕 위에 자리 잡은, 방이 훨씬 더 많은 빨간 벽돌집을 맡았다. 시작은 가난한 시골 소년이었던 재키와 오델, 두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검정고시를 통과한 뒤 그 이름들을 새겨 넣었던 명패가 지금도 기억난다. 재키는 예전에 다른 시설에서 도망쳐 사륜 오토바이를 훔친 적이 있었다. 붙잡혔을 때 그의 주머니 한쪽에는 현금 300달러가, 다른 쪽에는 300달러어치의 마약이 들어 있었다. 도망친 지 불과 몇 시간 만의 일이었다. 하지만 재키는 참 괜찮은 녀석이었다. 오델 역시 마찬가지였다. 몇 년 뒤, 재키는 교도소에서 전화를 걸어와 모두에게 안부를 전해달라고 말했다.

두 명으로 시작했던 아이들은 어느덧 쉰 명 남짓으로 불어났고, 그룹홈은 하나의 거대한 사업체가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상급자들, 즉 이사회 위원들은 아이들의 먹을거리와 입을거리를 대는 계약권을 제 주머니 챙기듯 나누어 가졌다. 그들에게 그룹홈의 성공은 곧 금전적 이익이었고, 그런 그들의 눈에 원장인 아버지는 어딘가 세련미가 떨어지는 인물이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비즈니스 세미나에 강제로 보내는가 하면, 차부터 바꿔야 한다고 압박했다. 결국 아버지는 정든 4단 변속 쉐베트를 팔았고, 시설 명의로 리스한 폰티액 본빌을 몰게 되었다. 가죽 시트에는 쓸데없이 조절 버튼이 아홉 개나 달려 있었다. 아버지는 가끔 정장을 입었고, 콧수염을 깨끗이 밀었으며, 평생 안 하던 헤어드라이어질까지 하기 시작했다.

이사회는 아버지에게 아무도 감당하지 못하던 또 다른 시설까지 한꺼번에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아버지는 당연하다는 듯 수락했고, 아이들은 끊임없이 밀려들어 왔다. 일흔 명, 여든 명, 마침내 백 명에 이르렀다. 마약 거래 현장에서 돈을 떼먹으려다 발등에 총을 맞았던 소년이 기억난다. 그 아이는 상처가 낫자마자 도망쳤다. 농구 시합 도중에 탈영하듯 사라진 녀석도 있었다. 후보석에 앉아 있던 그 아이는 유니폼 차림 그대로 벌떡 일어나 어둠 속으로 내달렸다.

경기는 중단되었고 사방에 정적이 감돌았다. 살집이 좀 있고 늘 엄숙한 표정이었던, 뻔한 사실을 말하는 데 일가견이 있던 리치라는 소년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조지가 가버렸는데요." 그 사실이 확인되자마자 경기는 다시 재개되었다. 농구는 아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유일한 통로였다. 우리 팀이 토너먼트에서 우승해 다른 시설들을 모두 꺾었을 때, 안드레라고 부르던 형이 나를 어깨 위로 번쩍 들어 올렸다. 키가 195센티미터나 되는 거구였던 그는 최근에 전구를 씹어 먹는 기행을 벌였던 전력이 있었다. 아버지는 그를 경기에 뛰게 하려고 정신과 병동에서 잠깐 빼내 온 참이었다. 여드름이 잔뜩 난 안드레의 그 넓은 어깨 위에 앉아 코트를 누비던 그때, 나는 아래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엄마를 보았다. 엄마의 얼굴은 공포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열한 살이 되던 해, 나도 정식으로 팀에 합류했다. 우리 팀에는 기량이 뛰어난 선수들이 꽤 많았다. 그중 한 명은 장학생으로 대학에 진학해, 훗날 시카고 불스의 감독이 된 빌리 도너번 밑에서 뛰기도 했다. 우리는 정예 멤버 열 명을 꾸려 대규모 수용 캠프 팀들과 원정 경기를 치르러 다니곤 했다. 상대 팀은 수백 명의 비행 청소년들을 동원해 철제 관중석을 발로 구르며 우리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그중 막내였던 나는 좋은 표적이었다. 상대 선수들은 공을 뺏으려고 집요하게 나를 몰아붙였다. 내가 몇 차례 멋진 플레이를 선보이자 장내는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오직 우리 팀 벤치 뒤에 있던 한 아이만이 이렇게 중얼거렸을 뿐이다.

"거봐, 내가 뭐랬어. 저 쪼그만 백인 꼬맹이 실력이 보통이 아니라니까."

웨스트버지니아의 어느 소년 교도소에 우리보다 한 수 위라는 팀이 있다는 소문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왔다. 그날 아침, 아버지는 우리를 밴에 태우고 그들과 붙기 위해 200마일을 달렸다. 세일럼에 위치한 그곳은 최고 보안 등급의 청소년 수용 시설이었다. 두꺼운 철문이 육중한 기계음을 내며 열리고, 우리는 그런 문을 몇 차례나 더 통과해야 했다. 하지만 정작 체육관 문 앞에서는 가로막혔다. 안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윽고 사위가 정적에 잠기더니 문이 열렸다. 코트 한쪽 끝에서는 상대 팀이 몸을 풀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우리가 몸을 풀어야 할 반대편 바닥에서는 한 소년이 피웅덩이를 대걸레로 닦아내고 있었다.

“자, 몸들 풀어라.” 아버지가 말했지만, 우리 중 누구도 코트 위의 핏자국을 이리저리 밀어내고 있는 그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켄터키주에도 그런 소년 교도소가 있었다. 그 시절의 수용 캠프 중 상당수가 여전히 운영되고 있는데, 대부분 학대로 점철된 어두운 과거를 품고 있다. 우리는 매년 크리스마스마다 휴일 토너먼트에 참가하러 루이빌의 라이스 오듀본으로 내려가곤 했다. 그곳엔 자체 체육관이 있었다. 우리는 차디찬 바닥에서 잠을 청해야 했고, 그들은 일부러 난방을 꺼서 우리를 얼려 죽이려 들었다.

아버지에게 그 토너먼트는 주 챔피언 결정전이나 다름없었다. 내가 좀 더 자라 코치 일을 도울 때쯤, 내 임무는 아버지가 경기장에서 쫓겨나지 않게 말리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고, 늘 자신의 아이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믿었다. 우승이라도 하는 날엔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스테이크를 먹으러 갔다. 하지만 낯선 메뉴판과 천 냅킨의 위압감에 기가 죽은 아이들은 고작해야 햄버거를 주문하려 애쓰곤 했다.

어느 해 소프트볼 대회가 끝난 뒤, 아버지는 팀원들을 데리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머틀비치까지 아홉 시간을 운전해 갔다. 엄마와 여동생, 그리고 나도 동행했다. 우리 가족과 소년들이 함께 떠나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생각하는 가족 휴가였다. 허리케인 휴고가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뒤, 할머니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 소형 트레일러 한 대를 세워두셨다. 나는 그 집 베이비 테라스에서 잠을 청하던 밤을 기억한다. 열두 명 남짓한 소년들과 부서지는 파도 소리. 아버지는 방충망이 달린 문 바로 옆에 몸을 뉘었고 나는 그 곁을 지켰다. 누구라도 도망치려 문을 열면 우리를 깨울 수밖에 없도록.

가끔은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도 있었다. 우리 가족의 삶은 그룹홈, 그리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 사고와 도저히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얽혀 있었다. 한밤중에도 누군가에게서 늘 전화가 걸려 왔고, 아버지는 시도 때도 없이 일터로 달려갔다. 경력 초기만 해도 아버지는 자신이 아이들을 구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서로를 구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했을 테다. 하지만 아이들이 아무리 변하려 애써도, 결국엔 자신들을 망가뜨렸던 그 처참한 삶의 현장으로 거의 예외 없이 되돌아가곤 했다.

어느 오후, 낡은 차 한 대가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서던 광경이 기억난다. 차에서 내린 건 당시 고등학생이던 우리 팀의 농구 스타와 안토니오 샌더스라는 소년이었다. 아버지는 토니가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정성을 다해 도왔었다. 야구를 했던 토니는 영리하고 수완이 좋아서, 마음만 먹으면 제 또래 집단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그런 아이였다.

집으로 돌아갔던 두 소년은 다시 사고를 치고 우리를 찾아왔다. 농구 스타 녀석은 강제 수용 캠프로 보내질 처지였다. 녀석은 집 안으로 들어와 아버지와 한참 이야기를 나눴고, 아버지는 녀석을 적응 교육 단계로 다시 받아주기로 했다. 하지만 토니는 끝내 집 안으로 발을 들이지 않았다.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일 년 뒤, 우리는 신문에서 토니의 소식을 접했다. 복부에 총상을 입었다고 했다. 우리 모두가 아끼고 사랑했던 그 아이는 누군가의 차 뒷좌석에서 피를 쏟으며 서서히 숨을 거두었다.

토니를 잃은 슬픔은 우리 가슴 한구석을 도려냈지만,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갔던 아이들이 죽음을 맞이하는 일 말이다. 아이들을 영원히 붙잡아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느 시점이 되면 결국 놓아주어야만 했다. 누군가는 삶을 개척해나갔지만, 누군가에게는 애초에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45년이라는 세월을 아이들과 함께 보냈다. 그 과정에서 적지 않은 아이들을 잃었고, 때로는 공들여 세운 안식처를 통째로 잃기도 했다. 내가 열두 살 때, 시설 한 곳이 불타버린 적이 있다. 다행히 아이들이 외출 중이라 인명 피해는 없었지만, 그 불길 속에 아이들의 옷가지와 음식, 잠자리 등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다. 갈 곳 잃은 아이들을 두고 아버지는 소년들과 직원들, 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그리고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내겠노라고 약속했다. 그러고는 제 차로 돌아가 홀로 앉아 엉엉 울었다.

이후 아버지는 시설 재건 문제를 두고 카운티 행정 판사와 지저분한 법적 다툼을 벌여야 했다. 집은 다시 세워졌지만, 아버지는 결국 마을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지역 신문은 아버지를 사기꾼처럼 묘사했고, 이사회에서 리스해준 폰티액 본빌을 언급하며 아버지가 호사스러운 차나 챙기는 사람인 양 몰아세웠다.

그 일로 아버지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실직자가 된 아버지가 집안일을 거들며 빨래를 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한번은 아버지가 내 지갑을 넣은 채 바지를 세탁기에 돌린 적이 있는데, 그때 내가 내뱉었던 모진 말들은 지금까지도 내 가슴에 수치심으로 남아 있다. 가뜩이나 힘든 시간을 보내던 아버지를 내가 더 비참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양복을 벗어 던지고 드라이어로 만지던 머리도 그만두었다. 턱수염을 기른 그는 세 시간 거리에 있는 낡은 초등학교 건물을 찾아내 그곳에 다시 아이들의 보금자리를 꾸렸다. 새로운 터전을 일굴 때면 아버지는 사무실 간이침대에서 잠을 청하며, 아이들이 깨어 있는 모든 순간을 함께했다. 아버지는 마땅히 그렇게 일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다. 그 바람에 아버지를 볼 기회는 훨씬 줄어들었다. 아버지는 내 야구 경기를 지켜보다가 경기가 끝나면 짧은 인사만 남긴 채 곧장 시설로 차를 몰았다. 하지만 나는 서운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언가를 새로 일구고 있을 때 가장 행복해 보였고, 어쨌든 나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시설이 어디에 들어서든 지역 사회와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대안학교에 다녔지만, 아버지는 공부머리가 있거나 운동에 소질이 있는 아이들에겐 공립학교에 다닐 기회를 기꺼이 내주었다. 범죄 이력이 있는 소년들을 외부 학교로 보내는 일은 늘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사고는 기어이 터졌다. 일례로 지역 여학생 몇몇이 임신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90년대 시골 학교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여학생들은 백인이었고 우리 소년들 상당수는 그렇지 않았다는 사실이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미식축구 선수로 뛰던 우리 소년 중 한 명이 여자친구의 입을 주먹으로 때려 치아 몇 개를 부러뜨리는 일이 있었다. 여자가 소년에게 입에 담지 못할 인종차별적 폭언을 퍼부은 게 화근이었다. 체격만 놓고 보면 그 아이는 이미 성인 남성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는 아칸소주 리틀록 출신이었는데, 당시 그곳은 HBO에서 다큐멘터리로 제작할 만큼 잔혹한 갱단 전쟁이 휘몰아치던 동네였다. 점심시간을 마치고 식당을 나오니, 전교생이나 다름없는 인파가 교장실 앞에서 그 아이를 기다리며 살기등등하게 서 있었다. 하지만 아이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상담 교사가 뒷문으로 몰래 빼돌렸고, 아버지는 그런 아이에게 내릴 수 있는 가장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 바로 원래 살던 집으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지역 사회와의 긴장감은 극으로 치달았다. 우리 팀의 농구 스타가 먼저 시비를 건 것도 아닌 싸움에 휘말리면서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폭발했다. 공립학교에 다니던 우리 시설 아이들은 집단 린치를 당해 만신창이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나는 내 주변 사람들, 그러니까 내 친구와 선생님들까지 소년들에게 등을 돌리는 모습을 보며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나고 자라며 함께 지내온 여학생들조차 가세했다. 아이들이 복도를 따라 도망치려 하자, 여학생들은 지퍼를 굳게 닫은 핸드백을 휘둘러 아이들을 때려눕혔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교장을 만났지만, 그는 누구도 처벌하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러고는 아버지의 면전에서 잘라 말했다. 살다 보면 때로는 그냥 두들겨 맞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이라고.

나는 본래 조용한 아이였지만, 그 사건 이후로 더욱 입을 닫았다. 용기 있는 행동은 아니었으나, 적어도 나를 지키는 데는 도움이 되었다. 나는 모범생으로 통했다. 모두들 내가 언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그룹홈을 운영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내 꿈은 운동선수였다. 중학교 1학년 때 그 꿈에 대한 에세이를 쓴 적이 있었다. 영어 선생님은 나를 따로 불러 말씀하셨다. "이 글을 반 아이들 앞에서 발표해 보렴."

"싫어요." 내가 답했다. "그래? 그럼 내가 읽어주마."

나는 내 이름만 밝히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운동선수가 되고 싶다는 열망 자체는 특별할 게 없었지만, 몇 페이지에 걸쳐 꾹꾹 눌러쓴 그 글에는 무언가 결실을 보고야 말겠다는 순수하고도 절박한 투지가 서려 있었다. 나는 반 친구들에게 그 글을 쓴 사람이 내가 아니라고 잡아뗐다. 나에게도 나만의 열망이 있다는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다음 해, 나는 시설 아이들에 관한 첫 소설을 썼다. '챈스'라는 이름의, 내가 상상으로 빚어낸 소년의 이야기였다. 이번에는 조금 더 용기를 냈다. 중학교 3학년 전교생 앞에서 그 글을 낭독한 것이다. 청중을 올려다보던 그 순간의 감각이 지금도 생생하다. 마치 마법사가 된 기분이었다. 내가 내뱉는 문장 하나하나가 아이들에게 주문이라도 걸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운동선수를 꿈꾸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내 글쓰기를 진지하게 격려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켄터키주 동부의 시골 마을에서 자랐고, 내 주변은 용광로와 코크스 공장에서 밤낮없이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이들의 자식들로 가득했다. 우리 같은 아이들에게 학업적으로 대단한 성취를 기대하는 이는 드물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나는 심화 반이 아닌 기초 영어 수업을 들었다. 우등반 수업 시간이 야구를 하기 위해 꼭 들어야 했던 체력 단련 코스와 겹쳤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야구가 대학에 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야구를 계속하고 싶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아버지의 아이들 중 한 명도 그렇게 성공하지 않았던가.

화목한 가정에서 보낸 행복한 유년 시절이었지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릴 때는 우리 가족에게도 가혹한 시련이 닥쳤다. 또 다른 시설 하나가 문을 닫았고, 아버지는 자신이 일궈온 모든 것을—다시 한번—잃었다. 집은 물론이고 차까지 팔아야 했다. 파산을 면할 돈을 어떻게든 긁어모으려, 소년들을 태우고 다니던 밴마저 처분하려 애쓰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른다. 내가 대학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는 엄마와 함께 내 자취방에서 30분 거리인 작은 아파트를 얻어 사셨다. 종종 아버지를 찾아갔지만, 오후 한나절 시간을 내어 그를 밖으로 모시고 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가겠다고 미리 전화를 하고, 문이 부서져라 두드려야 겨우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아버지가 걱정스러웠지만, 그는 대략 8년 주기로 제 몸을 태운 재 속에서 다시 솟아오르는 불사조 같은 사람이었다. 한동안 그는 플로리다에서 비행 소녀들을 돌보는 일을 했고, 이후 오하이오로 옮겨가 보험 영업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그 일을 끔찍이도 싫어했다. 점심시간이면 그는 내게 버려진 초등학교 건물 사진들을 이메일로 보내곤 했다. 아버지는 낡은 학교나 오래된 교회 건물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머릿속에 완벽한 설계도를 그려낼 줄 알았다. 어디를 아이들의 침실로 꾸밀지, 어디서 상담을 진행할지 말이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그런 폐건물들을 수없이 거닐었다. 그리고 그렇게 아버지가 마음속으로 그린 집들은, 정말이지 몇 번이고 현실이 되어 세상에 나타났다.

어느덧 아버지의 턱수염에는 은빛 서리가 내렸고, 허리는 굽어 구부정해졌다. 너무나 자주 밑바닥에서 다시 시작했던 탓에, 이제 아버지는 그 누구도 감당하지 못해 내다 버린 아이들이나 맡아주는 처지가 되었다. 이 아이들은 예전과는 달랐다. 그들은 아버지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엄마는 속상한 마음에 내게 전화를 걸거나, 박치기를 당해 안경은 박살 나고 눈두덩이 밤탱이가 된 아버지의 사진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 연세에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아니야, 난 괜찮다.” 아버지는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다.

그에겐 도움이 필요했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나는 제발 제 손으로 시설 문을 닫으라고 애원했지만, 아버지는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마음을 붙이고 가르칠 만한 아이 하나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다시 아이들을 모았고, 2년 만에 자신이 꿈꾸던 모습의 시설을 하나 더 일구어냈다. 그의 생애 마지막 보금자리였다.

이제 아버지는 노인이 되었고,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은퇴했다. 그가 평온을 찾길 바라지만,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이에게 평화란 좀처럼 찾아오지 않는 법이다. 나의 아버지는 세상의 여느 아버지들처럼 결점투성이였다. 그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옛날 방식을 고집했다. 너무 많은 적을 만들었고, 너무 많은 위험을 감수했으며, 어겨서는 안 될 규칙을 어기기도 했다. 허가받은 인원보다 훨씬 많은 아이를—정말이지 훨씬 더 많이—몰래 받아들였고, 그 사실을 숨겼다. 나는 아버지가 단순히 선한 마음만으로 그런 일을 벌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어디까지 일굴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 집이 커질수록 더 많은 아이를 품을 수 있었지만, 그만큼 더 많은 일손이 필요했다. 공격적이고 망가진 십 대 소년들을 돌보는 일은 고되다. 아버지는 자신만큼 실력이 좋지도, 자신만큼 아이들을 아끼지도 않는 사람들을 고용했고, 그것이 화근이 되었다. 아버지는 그들을 해고했고, 그 또한 골칫거리가 되었다.

작은 그룹홈을 운영하며 자신이 직접 도울 수 있는 아이들을 돌보고, 그 정도면 충분히 도왔다고 자족하는 것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는 꿈을 꾸는 사람이었고, 타인의 꿈 위에 자신의 꿈을 덧씌우는 습관이 있었다.

“이게 다 네 것이 될 수도 있단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내게 말했다. 그의 손에 맡겨진 소년들의 생과 직원들, 그리고 그 집 전체를 두고 하는 소리였다.

나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내게는 아이들을 돕고자 하는 아버지 같은 갈망이 없었다. 그에겐 내게 없는 상처가 있었다.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버지를 가져본 적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어떻게 해야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는지 스스로 깨우친 사람이었다.

아버지의 곁에서 아이들을 지켜보던 시간들, 집단 상담에 배석하고 밴을 타고 수없이 떠났던 여행들, 그리고 끝도 없이 이어지던 이야기들. 아버지는 그 모든 과정이 나를 위한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게 그것은 조금 다른 의미였다. 아버지와 함께할 수 있는 기회였고, 그의 진심 어린 속마음을 알아가는 여정이었다.

결국 아버지도 나를 놓아주어야 할 때가 왔다. 하지만 그전에 나도 한동안은 아버지를 위해 일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아직 아이들과 단둘이 남겨지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야간 근무를 맡았다. 첫 금요일 밤이 기억난다. 종일 학교 수업을 듣고 지친 몸을 이끌고 산길을 달려 출근했다. 아버지는 근무 중에 잠들면 가차 없이 해고하는 사람이었다. 설마 아들까지 잘랐겠냐마는, 나는 아버지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른 동료와 복도에 앉아 커피를 들이켰다. 그는 쉴 새 없이 떠들어댔지만 나는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의 서류 뭉치를 뒤적이며 그들이 거쳐온 삶의 궤적과 상처들을 읽어 내려갔다. 새벽 3시쯤 되었을까. 밤은 길고 눈꺼풀은 무거워지는데 동료의 수다는 멈출 줄 몰랐다. 나는 바닥으로 내려갔다.

“뭐 하는 거야?” 동료가 물었다.

나는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다. 잠을 쫓기 위해 아버지가 제안했던 오래된 비책이었다. 윗몸일으키기와 팔벌려뛰기까지 마친 뒤, 나는 20분마다 아이들의 방을 돌며 상태를 살폈다. 살갗이 훤히 드러나도록 머리를 짧게 깎은 소년들이 두 눈을 감은 채, 저마다의 꿈을 꾸는 앳된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이제 머지않아 나의 마지막 야구 경기가 끝날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나 역시 이 울타리를 빠져나와 넓은 세상 속으로 스며들게 될 터였다.

깊은 밤, 마침내 수다스럽던 동료도 입을 다물고 일지 위에 뺨을 부비며 코를 골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꿈으로 빚어낸 현실, 이제는 아이들의 집이 된 이 낡은 초등학교 건물 안에서, 나는 카펫이 깔린 고요한 복도에 앉아 있었다. 사방의 방들에는 뿔뿔이 흩어져 있던 삶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문득 깨달았다. 이 건물 안에서 깨어 있는 영혼은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눈을 감고 그 적막한 고요에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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