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는 서른셋, 남편은 일흔일곱 – 내가 오직 연상의 남자하고만 잠자리에 드는 이유 (번역)
Daniel Felsenthal 「I’m 33 and my husband is 77 – this is why I only sleep with older men」
보통 손만 봐도 나이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레몬 조각과 칵테일 냅킨 옆, 흠집 가득한 나무 바 테이블 위에 모아 쥔 그의 두 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거칠고 검버섯이 피어난 손등 위로 듬성듬성 자란 털 사이사이에 주름이 가로세로로 깊게 파여 있었다. 게이 바에서 외로움을 달래던 또 어느 날 밤, 나는 옆자리 남자를 따라 집으로 갈까 고민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그가 세월을 감추려 애쓴 모든 흔적을 비웃기라도 하듯, 자신의 나이("난 예순다섯이야!"라고 비명을 지르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은 중년 정도로 보였는데, 분명 내 옷장 전체보다 매달 더 많은 돈을 들이는 피부 관리 덕분이었을 터다. 몸은 수년간 헬스장에서 다진 듯 탄탄했고, 옆머리를 짧게 치고 윗머리를 기른 헤어스타일은 당시 뉴욕에서 유행하던 스타일이었다. 서구 대도시의 사람들은 저마다 젊어 보이려 애쓴다. 하지만 내가 잠자리를 같이한 남자들은 하나같이 나이 든 티가 역력한 이들이었다.
당시 내 나이는 스물넷이었지만, 내가 원한 남자들은 적어도 쉰 대여섯은 된 이들이었다. 서른셋이 된 지금도 내 연인들은 대부분 환갑을 훌쩍 넘긴 노신사들이다. 남편의 나이는 일흔일곱이다. "너 그거 부성 결핍(daddy issues)이야." 이제는 연락도 안 하는 대학 동창 녀석이 졸업하고 1년쯤 지났을 때 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이다. 마치 그 진부한 표현이 자기 입을 거치면 대단히 신선하고 통찰력 있는 분석이라도 되는 양 굴었다. 이쯤 되니 이제는 아무도 나를 '할아버지 결핍(grandaddy issues)'으로 진단하려 들지 않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나는 내 성적 지향을 숨기지 않지만, 특정 틀에 갇혀 규정당하는 것은 질색이다. 그럼에도 나와 같은 취향을 가진 이들이 동성애라는 거대한 틀 안에 속해 있으면서도, 주류 동성애 문화에 가려진 독특한 성적 소수 그룹을 형성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와 같은 처지에 놓인 남성들은 두 번의 커밍아웃을 거쳐야 한다. 첫 번째는 동성애자로서, 두 번째는 오직 노신사하고만 잠자리를 갖는 동성애자로서의 커밍아웃이다. 청소년 시절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수영복 특집호에 나오는 여성 모델들을 보고도 아무런 감흥이 없었듯, 탄탄한 식스팩을 가진 젊은 미소년(twinks)이나 아직 가슴털이 희끗희끗해지지 않은 귀여운 곰 같은 덩치남(bears)들을 봐도 우리의 아랫도리는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시대를 풍미한 미남 스타들이 수없이 뜨고 졌지만, 우리는 그들의 매력을 그저 사회적 기준으로서만 인정했을 뿐 육체적인 끌림을 느끼지는 못했다. 대중적인 섹시 스타에게 무덤덤한 사람은 무수히 많다. 하지만 젊고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나의 무관심은 워낙 유별나서, 어쩌면 내가 노년의 남성들을 아예 별개의 성별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왜 나는 미국인들의 사랑을 받는 가녀린 미소년 티모시 샬라메가 아니라, 1947년생 탈모 대머리 조연 배우 리처드 젠킨스에게 늘 마음을 빼앗기는 걸까? 테스토스테론이 감소하고 에스트로겐이 조금씩 섞여 들며 변해가는 호르몬의 균형, 즉 나이 들며 바뀌는 페로몬에 이끌리는 걸까? 이 기괴한 가설은, 나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을 돈을 노리는 꽃뱀이라거나 프로이드 심리학의 비정상적인 사례 연구 대상, 혹은 노인 학대범으로 몰아가는 악의적인 편견들만큼이나 그럴싸한 이야기다.
사춘기 시절 내 성정체성을 탐색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커밍아웃을 할 이유도 없었다. 이성애자 아이들은 나를 따돌렸을 테고, 동성애자 아이들(어떻게든 찾아내기라도 했다면 말이다) 역시 나를 외면했을 게 뻔했다. 퀴어 문화에도 나름의 규칙이라는 게 존재하며, 십 대들은 그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그 누구보다 필사적이기 때문이다. 내가 매력을 느낀 남성들은 법적으로 나와 교제할 수 없는 나이였다. 내가 처음으로 마음을 빼앗긴 사람은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서른일곱이던 인문학 교사였다. 그는 이성애자였고, 가정을 꾸렸으며, 장성한 자녀까지 두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인기가 좋은 선생님이었지만, 자신의 유쾌함과 다정함이 16세 소년에게 오해를 살 수 있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 나는 학교 복도마다 그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고, 공강 시간만 나면 그의 교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 어떤 보답도 받지 못한 이 지독한 짝사랑(어른이 되고 나서도 한참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남들에게 털어놓았다)은 훗날 지금의 나를 만드는 씨앗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 나는 십 대 시절의 일과들을 적당히 열정을 흉내 내며 꾸역꾸역 버텨냈다. 파티에 가고, 부어라 마셔라 술을 들이켜고, 여고생들과 입을 맞추고, 비어퐁 게임을 했다. 코피 터지게 공부하며 친구들과 선의의 성적 경쟁을 벌였고, 함께 농구를 하거나 친구 집 지하실에 모여 시간을 보냈다. 코미디 센널 채널을 보며 낄낄거리다가도, 내 방으로 돌아와 인디 록 밴드의 음악을 들으며 눈물짓기도 했다. 농담을 던지며 자지러지게 웃으면서도, 정작 머릿속으로는 이 모든 연기를 펼치고 있는 내 모습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듯한 이물감을 느꼈다. 그리고 밤이 되면 야한 동영상 속 노신사들을 보며 욕구를 풀었고, 뒤이어 밀려오는 자괴감에 괴로워했다.
대학 생활 초반 역시 억압과 절망으로 점철된 나날이었다. 사춘기가 오기 전에는 또래들과 한집에 모여 사는 삶을 꿈꾸곤 했다. 하지만 막상 성인이 되고 나니, 성적 에너지가 넘쳐나는 동년배들로 가득한 캠퍼스는 오히려 내게 잔혹한 통과 의례와 같았다. 스무 살 무렵, 나는 친한 친구에게 남자를 좋아한다고 털어놓았다. 다만 내 취향이 오직 할아버지들에게만 향한다는 사실은 차마 말하지 못했다. 아예 거짓된 삶을 사는 것보다는, 절반의 진실이라도 고백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년배들과의 잠자리도 내 취향을 바꾸지는 못했다. 나는 주로 나와 비슷하게 미술, 음악, 문학, 영화에 미쳐 있는 사람들을 쫓아다녔다. 가끔은 이를 계기 삼아 뜨거운 감정이 싹트기도 했지만, 상대가 나와 나이대가 조금이라도 비슷하면 그 어떤 끌림도 깊은 관계의 결실로 이어지지 못했다.
늙은 남자를 사랑한다는 나의 두 번째 커밍아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내가 스물두 살 때 소설 창작 석사 과정을 밟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해 곧바로 예순한 살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많은 친구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동네 게이 바가 문을 닫을 무렵 담배 한 개비를 빌리며 그와 말을 텄고, 우리는 그의 아파트로 향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내 선생님과 비슷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호탕한 웃음소리와 연륜이 묻어나는 위트가 있었다. 처음 잠자리를 갖고 불과 몇 주 뒤 내가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그는 내 말을 쉽게 믿지 못했다. 나는 그를 친구들에게 소개했다. 친척 몇 명에게도 그에 대해 털어놓았고, 그들은 상당한 충격을 받았으면서도 겉으로는 이해해 주려는 태도를 보이려 애썼다.
내가 스물네 살이 된 직후, 우리의 관계는 여러 가지 이유로 무너졌다. 당시 내 친구들은 대부분 내 전 연인처럼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과 청년이 연애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고 고백했다. 세상에서 예순 해를 보낸 그 사람이 이미 삶에 지쳐 있을 것이고, 새로운 무언가를 향한 열망보다는 그 피로감이 늘 앞설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었다. 그 사람 역시 스스로를 그렇게 평하곤 했으니, 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에게는 경제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이미 굳어진 책무가 있었고, 다시는 풀어낼 수 없을 만큼 단단히 꼬여버린 상처와 과거가 있었다. 세상을 떠나 슬픔으로 남은 부모가 있었고, 가족과 다름없는 친구들이 있었다. 또한, 스스로를 위축하게 만든, 미련 가득한 최근의 은퇴가 있었으며, 자부심인 동시에 삶의 무게추였던 교외의 주말 주택도 있었다. 반면 나는 과거라 할 만한 것이 별로 없었고, 쉽게 버릴 수 없는 현재의 구속도 없는 너무나 젊은 나이였다. 대신 내게는 평생 처음으로, 앞으로 펼쳐질 로맨틱한 미래가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나는 브루클린 크라운 하이츠로 이사했다. 그리고 주중 밤마다 연체되고 느려터진 전철에 몸을 싣고 맨해튼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이스트 58번가에 있는 게이 바 '타운하우스'였다. 젊은 파트너를 찾으려는 노신사들이 모여들던 그곳은 지금도 여전히 성업 중이다. 그곳을 무대로 활동하는 성매매 종사자도 많았는데, 유독 흰머리에 주름진 노년층에게만 느슨한 드레스 코드를 적용하는 특이한 가게였다. 21세기에 이런 구태의연한 규칙을 따르는 이들의 보수적인 성향이 조금 꺼림칙하기도 했지만, 손님들이 억지로 소년처럼 보이려 애쓰지 않는 점은 마음에 들었다. 노신사들은 나 역시 돈을 바라고 접근한 게 아닌가 의심하곤 했다. 내가 먼저 추파를 던졌기 때문에 내 의도를 더 미심쩍어한 것이다. 하지만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노신사들과 엮이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들은 거절당해 무안해지거나 주책바가지처럼 보이기 싫어서 젊은 이들에게 먼저 다가오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덕분에 잠자리는 원 없이 가졌지만, 내가 만난 남성 대부분은 플로리다나 뉴저지에서 볼일을 보러 상경했다가 몰래 딴짓을 하려는, 자식에 손주까지 둔 유부남들이었다.
내가 잠자리를 가졌던 육십 대 남성 중 한 명에게는 다른 연인이 있었다. 로어 이스트 사이드의 갤러리에서 전시를 열던 서른아홉 살의 예술가였는데, 그는 자신과 함께 노년층 남성을 유혹하러 다닐 친구를 원했다. 나 역시 흥미가 생겨 동참했고, 그의 미술 전시회에도 찾아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내게 잠자리를 제안하더니 데이트를 신청했다. 나는 그를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대디들만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요.”
그는 그렇다고 답하면서도, 이제는 그런 사람들을 쫓는 일을 포기했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나이 든 연인을 친구들에게 절대 소개해 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친구들과의 저녁 식사에 데려갈 수도 없었고, 자신이 몸담은 미술계에 발을 들이게 할 수도 없었으며, 식당에서 손을 잡는 것도,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집에 데려가는 것도 모두 불가능하다고 그는 내게 털어놓았다. 그의 나약한 모습은 내 마음에 깊이 남았고, 나 역시 언젠가 그처럼 변해버릴까 두려워졌다.
몇 달이 흐르는 동안 나는 내게 가장 간절했던 일, 즉 사랑에 빠지는 일을 애써 미룰 핑계들을 찾아냈다. 첫 소설을 완성해 출간하기 전까지는 절대 연애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혼자 살 경제적 능력을 갖추기 전까지는 사랑에 빠지지 않겠다고도 결심했다. 하지만 내 계획이 무엇이든 간에, 스물다섯 살이 되던 해 나는 지금의 남편인 당시 예순아홉 살의 제프와 사랑에 빠졌다. 우리는 데이팅 앱인 '스크러프(Scruff)'에서 처음 대화를 나누었다. 요즘은 대중적인 앱이 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털이 많은 남성과 그런 스타일을 선호하는 이들을 위한 전용 플랫폼이었다.
처음에는 잠자리에서 어떻게 교감을 나누어야 할지 몰라, 서랍 속에 처박혀 있던 오래되어 부스러지는 대마초를 나눠 피우며 실험적인 시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그다음 주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눈앞에 닥친 재앙에 대한 두려움은 '정치적인 사람이 되겠다'는, 모호하지만 강렬한 다짐으로 굳어졌다.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다시는 타운하우스에 갈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이스트사이드 일대가 빨간 모자를 파는 잡상인들과 트럼프 타워 주변을 에워싼 삼엄한 경찰 병력으로 물들어 삭막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정장을 입고 교외에 살며 정체성을 숨긴 채 살아가는 유부남들을 모조리 '내 새로운 삶에 동참하기에는 전혀 혁신적이지 못한 인간들'이라는 쓰레기통에 쳐넣었으니, 분명 내 처사가 불공평하긴 했다. 하지만 더 이상 적과의 동침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프는 단연코 적이 아니었다. 우리가 만났을 때 그는 이미 반세기 가까이 커밍아웃한 상태였고, 지치지 않는 성소수자 인권 운동가로 활동해 왔다. 특히 1980년대에는 주간지 《빌리지 보이스(Village Voice)》의 노조 공동의장을 맡아 동성 커플에게도 사내 복지 혜택을 확대하는 성과를 이뤄냈다. 퀴어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전무하다시피 했던 1982년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승리였다. 게다가 그는 내가 좋아하는 영화 대부분을 함께 즐겼는데, 여기에는 내가 사춘기 시절 열광했던 유치천만한 코미디 영화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대중성 없는 비주류 음악 장르를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안목도 지니고 있었다. 그렇다고 속물적인 취향을 고집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나보다 경제적 여유가 훨씬 많았지만, 여전히 보헤미안처럼 살았다. 나 역시 감당할 수 있는 소박한 삶의 방식이었다. 처음에 우리는 친구로 지내려 했다. 그래서 함께 식사하거나 술을 마실 때면 나는 무조건 비용을 정확히 절반으로 나누자고 고집했다. 돈을 바라고 나이 많은 남자를 만난다는 세상의 편견에 맞서려는 행동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동성애 혐오 정서에 대항한 기특한 저항이었지만, 결국은 내 살을 깎아 먹는 자격지심에 불과했다. 세대 간의 장벽을 넘은 게이의 연애는 늘 대가성 관계가 아닌지 의심 어린 눈초리를 받는다. 탐욕스럽다는 고정관념은 양쪽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 젊은 연인은 자신이 영악한 사람으로 비칠까 전전긍긍하고, 나이 든 연인은 상대의 진심이 그저 데이팅 앱의 피싱 메일처럼 자신을 낚으려는 감언이설이 아닐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제프와 내가 이러한 선입견을 뛰어넘을 수 있었던 건, 나의 지독한 자립심 덕분이 아니었다. 서로를 향한 강렬한 이끌림, 즉 우리가 진짜 사랑에 빠졌다는 그 명백한 사실 덕분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매일 밤을 함께 보냈고, 하루에도 몇 번씩 격렬하고 황홀한 잠자리를 가졌다. 전 연인과도 비슷한 경험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었다. 제프는 여전히 전 남편을 애도하고 있었다. 그보다 열 살 연상이었던 전 남편은 우리가 만나기 불과 1년 반 전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의 슬픔 속으로 뛰어드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겉보기로만 보면 우리는 기껏해야 잠깐 스쳐 가는 불장난에 그칠 만큼 어울리지 않는 조건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보다 키가 15센티미터나 작았고, 내 과거 짝사랑 상대들은 늘 나보다 키가 컸다. 나는 키가 훤칠해야 매력을 느낀다고 믿어왔다. 제프는 목소리가 하이톤이었고, 감정이 벅차오르면 눈물을 흘렸으며, 옷차림과 내면 모두에서 자신의 여성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반면 내가 가장 매력적이라 생각했던 남자들은 전형적인 마초들이었다. 이 관계는 내 세계를 무서운 속도로 확장시켰고, 나는 내가 여전히 커밍아웃하는 과정에 있음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세대 차이는 필수 조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게이들의 이성 매력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이토록 통째로 던져버릴 수 있을 줄은 몰랐다. 동시에 이 관계 안에서 내 안의 다양한 모습들이 만개할 수 있었다. 나는 소년 같아질 수도, 바보 같아질 수도, 유치해지거나 슬퍼질 수도, 열정적이거나 집착하고 불안해할 수도 있었다. 내가 상상했던 어른의 무게 뒤로 그 어떤 모습도 숨길 필요가 없었다.
"그 사람이 아프면 어쩌려고 그래?"
우리가 만난 지 어느덧 8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사람들은 내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 속에는 비장애인 중심주의적이고 선진국 편향적인 오류가 깔려 있다. 바로 젊은이는 아프지도, 죽지도 않을 것이라는 착각이다. 그럴 때면 나 역시 이렇게 되받아치고 싶어진다.
"내가 아프면 그 사람은 어쩌고요?"
가끔 사람들은 우리를 부자 관계로 오해하곤 한다. 그것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 중 누가 부모 역할을 하고 누가 아이 역할을 하는지는 그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우리 관계가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중 누구든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거나 다른 사람과 살림을 합치더라도 서로를 존경과 지지, 위로와 보살핌을 받아 마땅한 소중한 가족으로 여기겠다는 상호 이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계약서도, 보험 증서도, 강요된 약속도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이 자유로움 덕분에 우리는 서로의 삶에서 걸어 나가고 싶다는 충동으로부터 온전히 해방된다.
지금으로서는, 그리고 부디 기한 없는 앞날 동안에도, 제프와 나는 한 공간에 살며 삶을 공유할 것이다. 둘 다 재택근무를 하기에 온종일 서로의 영역에 머물며 실망스러운 이메일에 함께 한탄하고, 다음 끼니를 고민하며, 한낮에 산책하러 나갈 핑계를 쥐어짜 낸다. 우리는 팔레스타인, 흑인, 퀴어, 그리고 이주민의 인권을 위해 함께 거리로 나가 연대한다. 저녁이 되면 갤러리 오프닝이나 콘서트, 클럽, 영화관, 낭독회를 찾는다. 집으로 돌아와 술을 한잔 마시고, 대마에 취해 웃음을 터뜨린다. 우리는 기존의 친구들을 한데 모으고 새로운 친구들을 사귄다.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는 사랑스러운 이들이 우리 주변을 채우고 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나도 참 조심스러웠지.” 그 시절을 돌이켜봐 달라는 내 말에 제프가 답한다. “이렇게 엉덩이도 처지고 깜빡깜빡하는 늙은이한테 어떻게 매력을 느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거든. 하지만 정말 놀라운 건 말이야, 체크무늬 파자마 바지를 입고 대형 쿠션에 앉아 큰 눈으로 나를 보며 웃고 있는 너를 볼 때면, 우리가 정확히 같은 나이로 느껴진다는 거야. 아무런 차이도 없어.”
나는 어떤 특정한 라이프스타일을 권하려는 것이 아니다. 후기 자본주의가 70대 노인과의 섹스와 사랑을 '최신 트렌드'로 포장해 팔아먹으려면 아직 몇 년은 더 걸릴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모든 성 정체성과 성적 지향을 통틀어, 자신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사람과 함께할 때 영혼과 육체 모두에서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거나 앞으로 깨닫게 될 이들이 분명 많이 존재한다. 절망할 필요 없다. 설령 절망에 빠진다 해도 그것 역시 괜찮다. 나 또한 치열하게 그랬으니까.
우리가 만난 지 몇 달 안 되었을 무렵, 제프와 나는 관계를 어떻게 지속해야 할지를 두고 밤새 싸우느라 잠도 못 자고 잔뜩 예민해진 채 눈을 떴다. 우리는 무작정 산책을 나섰다. 온 세상이 우리를 반대하는 것만 같았다. 거리를 걷는 내내 행인들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고, 우리는 블록마다 멈춰 서서 말다툼을 하거나 서로를 끌어안았다. 헤어진다면 우리는 불행해질 것이 뻔했다. 함께 남는다면, 우리는 존재의 불확실성 속으로 조금 더 깊숙이 서로의 동반자가 되어 걸어갈 터였다. “오늘은 우선 다정하게 지내자. 그리고 내일은 또 어떻게 될지 지켜보자.”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하듯, 우리는 그렇게 뜻을 모았다. 그러고는 손을 잡고 거리를 거닐었다. 오래된 길인 동시에, 우리에게는 마냥 새로운 길을 함께 그려나가면서.
— The Guardian (2024.1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