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용

경성지연(傾城之戀): 상하이의 결혼 시장 (번역)

Becky Zhang 「Love in a Fallen City: Shanghai’s Marriage Market」

크리스마스를 일주일 앞둔 지난 12월의 어느 일요일, 다행히 미세먼지가 적어 상쾌했던 그날 나는 상하이 난징루에 있는 인민광장으로 향했다. 이른바 '중매 시장'이라 불리는 곳을 가보기 위해서였다. 공원 북서쪽 모퉁이에 자리 잡은 산책로와 잔디밭에는 주말마다 수백 명의 부모가 모여 결혼하지 않은 성인 자녀의 짝을 찾는다. 하필 그날은 동지였다. 이모가 31명이 모인 우리 가족 위챗 단체 대화방에 '하늘과 땅이 다시 만나는 날'이라며 유독 길한 날이라고 메시지를 보낸 바로 그날이었다.

아침에 비가 내린 탓에 공기는 눅눅하고 서늘했다. 어릴 적 부모님 손을 잡고 공원을 지나 도심으로 갈 때, 이곳에서 서성거리던 중매인들, 즉 '이모'와 '삼촌'들을 어렴풋이 본 기억이 났다. 나 역시 이제 결혼 적령기가 되었지만, 오랫동안 낯설게만 느껴졌던 이 도시에서 남편감을 찾을 수 있을 리 만무했다. 홍콩에서 자란 나는 매년 상하이의 친척들을 방문하곤 했으나, 10여 년 전 해외로 이주한 뒤로는 발길이 뜸했다. 상하이 출신 구혼자와 나 사이에 존재할 문화적 차이만 생각해도 진정한 교감이 생기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익숙했던 '플러팅'이나 데이팅 앱 화면을 넘기는 방식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이곳만의 대리 구혼 방식에서 어쩌면 배울 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의 반려자를 찾기 위한 올바른 조건은 과연 무엇일까? 오랫동안 로맨티시스트로 살아온 나는, 최근 들어 사랑이란 필연적인 파국을 맞이할 때까지 환상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노력해서 쟁취해야 하는 결과물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니 배우자를 만나기 전에 미래의 시부모나 장인장모가 될 사람들을 먼저 검증하는 방식도 제법 합리적으로 보였다. 이 시장은 대단히 실용적이었다. 가족 간의 화합이 관계에 도움이 된다는 엄연한 현실을 인정하고 있었다. 게다가 재정 상태나 유전 질환 같은 민감한 문제를 빙빙 돌리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언제나 친구나 남자친구의 부모님을 만나는 일을 즐겨왔다. 특히 중국인 부모님들은 우리 부모님의 기묘한 변형처럼 느껴져 흥미로웠다. 자녀의 안녕과 성공에 종교적일 정도로 집착하면서도, 어딘가 독특하고 예스럽도록 투박했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마음속 깊은 확신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타고난 본능 탓에, 그들의 정중한 예의가 무색해지기도 했다. 늘 어른들 말씀에 순종하는 아이였던 나는 중국 어르신들의 칭찬에 쉽게 마음이 약해지곤 했다. 어릴 때 중국 본토에서 몇 달 동안 지낸 덕에 부드러운 태도로 유창한 표준어를 구사하면 어르신들의 경계심은 금세 사르르 녹아내렸다. 뉴욕 차이나타운의 슈퍼마켓에서 끈질기게 말을 거는 선교사들에게도, 주소 변경만 하러 간 뱅크오브아메리카에서 굳이 신용카드를 새로 만들라고 설득하던 중국계 직원에게도 나는 늘 쉽게 넘어가곤 했다.

서쪽 문을 통해 공원으로 들어서자, 옆에 있는 스타벅스에서 머라이어 캐리와 윌리 네슨의 캐럴이 흘러나왔다. 중매 시장은 갑작스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중년의 중국인들이 바닥에 깔아두거나 휴대용 접이식 카트, 악보대에 집게로 꽂아둔 코팅된 광고지 주변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평소에는 고요했을 수천 평방피트 남짓한 이 공간이 중매인들과 방문객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플리스를 입은 이모들이 수풀을 따라 줄지어 서 있었고, 우비 차림의 삼촌들은 벽오동 나무 아래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나는 정원을 빙 둘러싸고 차양 달린 보도를 따라 움직이는 한산한 사람들의 흐름에 슬그머니 합류했다.


내가 처음 발견한 삼촌은 시장 초입, 안쪽 깊숙이 이어지는 긴 아치형 통로를 불과 몇 야드 앞둔 외곽에 서 있었다. 대머리에 체구가 다부진 그는 트레이닝 바지에 등산화를 신고 있었다. 한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다른 한 손으로는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의 발밑에는 십여 장의 프로필이 펼쳐져 있었다. 그 안에는 성별, 학력, 출생 연도로 확인하는 나이, 키와 몸무게, 고용 형태와 직업, 소득, 해당 지역의 거주권과 의료, 교육, 주거 혜택을 보장하는 호구(戶口) 상태, 부동산 소유 여부(자가인지 전월세인지, 방은 몇 개인지, 차가 있는지), 부모 프로필(연금을 받는지, 건강한지 편찮으신지), 채무 여부, 흡연이나 음주 같은 유해한 취미가 있는지 등 핵심 정보가 건조한 글자로 요약되어 있었다. 몇몇 프로필에는 취미나 띠가 적혀 있기도 했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이 조건의 주인공들은 아마 지금쯤 집에서 비디오 게임을 하거나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자녀들은 부모가 꾸미는 이 중매 계획에 전혀 관여하지도, 관심도 없다는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상하이의 젊은이들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가리지 않고 온갖 방식으로 알아서 연애를 하고 있으니 말이다.

"찾는 사람 있어요?" 삼촌이 나를 향해 턱짓을 했다. "몇 년생? 학력은?"

"99년생이요. 학사는 마쳤어요." 내가 답했다.

"여자치고는 차고 넘치지."

이 삼촌은 프로필 등록비로 한 달에 100위안, 소개팅이 성사될 때마다 추가로 50위안을 받았다.

그는 여자는 모름지기 자신보다 학력과 소득 수준이 높은 남편을 골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연히 아파트도 한 채 있어야 했다. 이곳 인민공원에 광고된 남성 대부분은 최소 석사 학위 소지자였다. "학사밖에 없는 총각들은 여기 명함도 못 내밀어." 그가 중국어로 짐짓 진지하게 말했다.

중국에는 일가구 일자녀 정책 시절 자행된 여아 낙태와 유기 여파로 결혼하지 못한 남성이 여성보다 3,000만 명이나 더 많다. 하지만 결혼 시장에서 남성에게 요구되는 기준은 오랫동안 훨씬 더 엄격했기에, 정작 이 시장에 매물로 나온 이들은 여성이 훨씬 많다. 교육을 받지 못했거나, 농촌에 살거나, 가난한, 즉 다른 조건은 괜찮을지 몰라도 이 엄격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 수많은 젊은 남성은 아예 예선에서 탈락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중매 문화는 결혼이 가문을 위해 이루어지는 명백한 경제적 계약이었던 황제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랑 측이 신부 측에 주는 지참금인 '차이리(彩禮)'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당연한 상식으로 통하며, 능력이 있는 부모는 자녀가 결혼할 때까지 집에 데리고 살면서 결혼 비용을 대고, 신혼부부를 위한 부동산까지 마련해 주어야 한다. 상하이 중매 시장은 2004년 공원에 모인 은퇴자들이 자녀들의 짝을 찾아주자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삼촌은 90년대부터 이미 존재했다고 말했다. 비록 상하이의 규모가 가장 크지만, 전국 주요 도시마다 이와 유사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다.

삼촌의 말에 따르면, 이 시장은 주로 자녀가 너무 늦기 전에 가정을 꾸리기를 간절히 바라는 나이 든 부모들을 위한 곳이라고 했다. 20대 대학생들은 주로 초기 부담이 적은 온라인 데이팅 앱을 이용한다. 중국판 틴더인 '탄탄(Tantan)'이나, 라이브 스트리밍과 동네 소모임 기능이 있는 사교 플랫폼 '모모(Momo)', 그리고 반드시 대학 학위가 있어야 가입할 수 있는 '지아이위안(Jiayuan)' 같은 앱들 말이다. 하지만 데이팅 웹사이트보다 더 인기를 끄는 것은 텐센트의 '왕자영요(Honor of Kings)' 같은 멀티플레이어 역할수행게임이다. 이 게임의 일일 이용자는 1억 명이 넘는다. 내 사촌 중 한 명도 조금 더 매니아층이 깊은 '도타 2(Dota 2)'라는 게임을 통해 남편을 만났다. 그러나 최근 들어 온라인 가짜 프로필이 급증하는 추세다. 유서 깊은 데이팅 플랫폼 중 하나인 '전아이(Zhenai)'는 지난해 가짜 프로필을 게시한 혐의로 170만 위안의 벌금을 부과받기도 했다. 게다가 오프라인에서 파트너의 실제 얼굴을 처음 보고 곧바로 헤어지게 된다는, 이른바 '견광사(見光死, 빛을 보면 죽는다)'의 만연한 위험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이런 조건들을 따져가며 만나는 게 어찌 보면 딱 맞는 사람을 찾기 더 쉽지." 삼촌이 앞에 놓인 전단지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중매 시장의 성공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모두의 눈이 너무 높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싱글들의 대부분은 30대나 40대였다. 체육 교사, 제대 군인, 공무원, 외국계 기업 기술자 등이 보였다. 연봉은 5만 위안에서 100만 위안까지 다양했다. 이름 대신 화려한 수식어들이 가득했다. '피부가 희고 깔끔함', '날씬하고 우아함', '예의 바르고 체격이 매우 뛰어남'. 여성들은 책임감 있는 남성을 원했고, 모두가 상하이 호구를 가진 배우자를 찾았다. 어떤 남성은 연애 경험이 전혀 없는 여성을 원하기도 했다. 만약 재혼일 경우, 자녀는 딸인 편을 선호한다고 적혀 있었다.

삼촌에게 자녀가 있느냐고 묻자, 그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그의 외아들은 서른 살인데 아직 혼자였다.

"걱정 안 해." 그가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지만, 어딘가 쓸쓸함이 묻어났다. "잔소리 안 할 생각이야. 알아서 제 길 가겠지. 벌써 여자애들도 많이 만나봤고. 내가 늘 좀 쉬어가면서 하라고 해. 연애 한 번 하려면 돈이 수천 위안씩 드니까!"

우리 대화는 딸의 짝을 찾으러 온 한 여성의 등장으로 중단되었다. 그들은 내가 대머리독수리처럼 옆에 서서 엿듣고 있는 것을 개의치 않았다. 몇 분 후 내가 작별 인사를 건넸을 때, 삼촌은 여전히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내가 차도 한 대 사줬어. 디디(중국판 우버) 운전을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그랬지. 운전대 잡지 말고 연애나 해라, 어차피 돈도 안 되는데!"


비행기를 타고 오면서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을 다시 보았다. 시장 안쪽으로 더 깊숙이 들어가자, 영화 속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중매쟁이를 연상시키는 여성들이 공원 잔디밭을 마치 보병 부대처럼 에워싸고 있었다. 뮬란이 첫 만남에서 실수를 연발하며 가문의 명예를 망칠 뻔하게 만든 바로 그 중매쟁이 말이다. 이 이모들은 묘하게 닮은 강렬한 인상을 풍겼다. 밀가루처럼 하얗게 화장한 얼굴, 양털 모자, 호피 무늬 코트. 앵두처럼 붉은 입술에서는 달콤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를 보며 "미인, 미인이네!" 하고 외쳐댔다.

첫 번째 이모는 자두색 립스틱을 바르고 줄무늬 유리병에 담긴 과일차를 마시고 있었다. 무엇을 찾느냐고 그가 물었다.

나는 미국에서 잠시 방문한 길이라고 말했다.

"미국도 괜찮지." 그가 파일을 뒤적이며 말했다. "외국인 처자를 특별히 찾는 남자가 있어." 토박이 여자애들한테 호되게 당하고 돈만 뜯겼다는 뜻이었다.

"여기선 조건이 그리 안 좋아."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경제적 역학 관계를 몸짓으로 가리꼈다. "외국 여자애들이 훨씬 마음이 편해."

왜 프로필에 사진을 포함하지 않느냐고 묻자, 당사자들에 대한 예의 때문이라고 답했다. 물론 사진은 따로 있었다. 내가 충분히 관심을 보이자 중매인은 마치 선물이라도 주듯 사진들을 슬그머니 보여주었다. 스튜디오 조명 아래에서 팔짱을 끼고 정장을 입은 남성의 사진이 보였다. "썩 잘생긴 건 아니지만 인상이 참 따뜻하잖아." 중매인이 설명을 덧붙였다. 카메라를 향해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는 또 다른 사진도 있었다. "훈훈하지 않나? 어때 보여?"

두 번째 이모는 접이식 의자에 앉아 있었고, 그 뒤로 빨랫줄에 널린 블라우스처럼 이력서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그는 바로 이 모퉁이에서 딸의 남편을 찾았다고 자랑했다. 사위가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라 했다. 양가 모두 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결혼 사진 한번 볼 거냐고 그가 물었다.

"여자가 너무 많아." 이모는 분홍색 긴 패딩을 입은 채 팔짱을 끼며 투덜거렸다. 그가 가진 프로필 중 남성은 30명인 반면 여성은 50명이 넘었다. "여기 오는 남자들은 다 부끄럼이 많아. 슬쩍 들르긴 하는데, 아주 순둥이들이야..."

세 번째 이모는 열여섯 살 때 안후이성에서 상하이로 이주했다고 했다. 한때 상하이의 어느 공장에서 비닐봉지를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으나, 이제는 이 시장에서 10년째 중매업을 이어오고 있었다.

"틱톡 해요? 여기 젊은 애들은 다 틱톡을 하더라고. 그것 때문에 애들 연애관이 다 망가졌어." 중매결혼을 앞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남성에 관한 틱톡 영상이 크게 화제가 되었다며 그가 설명했다. "요즘 애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 자식이 그러면 부모는 어떻게 살라고?"

그는 개인 이력서 대신 요약된 후보자 프로필을 스프링 제본 책자로 인쇄해 두고 있었다. 나는 '여성 - 최신 정보'라는 책자를 지나쳐 '신규 및 업데이트: 우수 화이트칼라 남성 '87~'97'을 들추어 보았다. 줄줄이 빼곡하게 정리된 이름, 나이, 직업, 연락처가 담긴 수십 페이지 중 한 장을 사진으로 남기려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사진 찍으면 안 돼!" 그가 내 손에서 책자를 확 가로채며 소리쳤다.


홀로 온 아버지들은 딸의 스펙이 담긴 서류를 가슴에 꼭 껴안은 채 벤치에 곧게 앉아 졸고 있었다. 더 적극적인 이들은 주인을 찾는 강아지처럼 깃에 이력서를 집게로 꽂거나 목걸이 끈에 매단 채 부지런히 공원을 돌았다. 공원 북문 근처, 가장 붐비는 광장에 들어서자 부모들과 중매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그들은 내 뒤를 쫓아오다가도, 조건이 맞지 않는다는 내 신분과 정체를 알아차리고는 이내 발길을 돌렸다.

나는 나를 유난히 빤히 쳐다보던 빨간 조끼 차림의 50대 여성에게 다가갔다.

"외국에서 살다 왔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까?

"눈빛이 다르잖아." 그가 말했다. "독립심과 비판적 사고가 아주 깃들어 있어."

그녀와 옆에 있던 남성은 자신들과 친구들의 자녀를 홍보하기 위해 나와 있었다. 이들은 주말마다 교대로 당번을 정해 자리를 지킨다고 했다.

"그저 아이들이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났으면 좋겠어." 여성이 말했다. 그의 아들은 스물일곱, 그녀의 딸은 서른다섯이었다.

"우린 버티는 거지." 남성이 말했다. 그들은 3년째 이곳에 나오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들어온 자리가 좀 있느냐고 내가 물었다.

"있었으면 우리가 여기 왜 나와 있겠어!"

"신쿠(辛苦)," 내가 말했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혹은 직역하자면 "참 고되네요."라는 뜻이었다.

"밍쿠(命苦)지!" 그녀의 친구가 내 말을 바로잡았다. "인생이 고된 법이야!"

과연 그랬다. 중국의 연간 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5.6명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하며 한국, 대만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다. 결혼율은 10년째 감소세였고 이혼율은 치솟고 있었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장려책들, 이를테면 아기 한 명당 최대 1,500달러 상당의 보조금 지급, 피임약에 대한 13%의 소비세 부과, 두 자녀에 이어 세 자녀 제한까지 확대한 조치 등은 거의 효과가 없었다. 1980년에서 2015년 사이에 태어난 중국의 독자 세대가 이제 성인이 되어 가문을 이어야 한다는 막중한 의무를 홀로 짊어지고 있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 남성의 아들은 최근 박사 학위를 가진 여성의 구혼을 거절했다고 했다. 자신은 석사 학위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남성은 그것이 너무 위협적이라고 설명했다. 서로 격이 맞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오후 3지가 넘어서자 중매 시장의 열기는 한층 뜨거워졌다. 벤치마다 다리를 꼬고 앉아 서로를 향해 상체를 바짝 기울인 부모들이 눈에 들어왔다. 연애를 거부하거나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자녀들을 대신해 대리 스피드 데이팅을 벌이는 중이었다. “키 169센티미터 여자는 179센티미터 남자를 만나야 해.” 한 어머니가 두 아버지 앞에서 사뭇 진지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옆에서는 또 다른 이가 말을 받았다. “지방 출신이라도 배운 여자가 최고야. 처가가 너무 잘살면 그것도 그것대로 골치 아프거든.” “실력 없는 의사들이나 석사 학위로 퉁치지.” “몸무게가 85킬로나 나간다고? 우리 딸은 75킬로도 안 되는데.” “딸이에요, 아들이에요?” 여기저기서 새 부리처럼 입을 모아 재잘거렸다. “딸? 아들?”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호탕하게 웃으며 바닥에 침을 뱉었다. 어머니 두 명은 서른다섯 살에 임신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열띤 토론을 벌였고, 한 삼촌은 누구라도 들으라는 듯 자신의 전화번호를 소리 높여 외쳐댔다. 또 다른 삼촌은 공원의 겨우 한 평 남짓한 자리를 마치 연단이라도 되는 양 차지하고 서서 장황하게 설교를 늘어놓았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몸을 굽히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원하는 조건이 있으면 뭐든 말만 해요.”

나는 해외에 살고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야. 여기서 짝을 찾으면 안 되지, 그건 격에 안 맞아.”

옆에 있던 여성이 그 말을 듣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나 같으면 당장이라도 이민을 갔을 게요.” 그는 이제 고함을 치다시피 했다. “트럼프를 지지해야 해. 가장 위대한 사람들과 어울려야지. 기회가 있을 때 하루빨리 여기를 떠나요.”

“안 그러면 부모가 자식을 잘못 키운 거지!” 옆에 있던 여성이 거들었다.

“미국은 가장 문명화된 민주주의 국가야. 지난 수십 년 동안 중국이 이룩한 모든 성장은 미국이라는 본보기가 있었기에 가능했지. 미국이 없었다면 이런 혁신의 절반도 이루지 못했을 게요. 여기는 표현의 자유가 없어. 문화대혁명 이후로 줄곧 말이야...”

그는 문득 우리가 여기 왜 모여 있는지 기억해 낸 듯했다. “이봐요,” 그가 나를 보며 말했다. “원한다면 여기서 사람을 찾을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든 미국으로 데려가는 게 좋을 게요. 여기 계속 남으면 평생 후회할 테니까.”

여성은 여전히 낄낄거리고 있었다. “떠날 수만 있다면 우리도 벌써 떠났지.”

두 사람의 조언에 감사를 표하고 다음 중매인 무리를 향해 걸어가는데, 한 남성이 다급히 따라붙으며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여기 출신이 아니신가 봐요?”

“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쪽은요?”

그는 가슴에 맨 검은색 크로스백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뜸을 들였다.

“누구를 찾으러 오셨어요?” 내가 물었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양반이었다.

“맞춰봐요.”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나는 짐짓 웃어넘겼다. “하하. 상하이 분이세요?”

“장시성 출신입니다. 우리, 그러니까 잘해볼 생각 없어요?”

나는 거절의 뜻을 담아 완곡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나이가 한 세대는 더 많긴 하죠...” 그가 한숨을 쉬었다.


모퉁이를 돌자 야구 모자에 보건용 마스크, 선글라스까지 착용한 남성과 정면으로 마주쳤다. 겨울철인데도 피부가 타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하는 탓에, 시장의 많은 이들이 얼굴을 빈틈없이 가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어딘가 불길하면서도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묘한 신비감을 풍겼다.

“이봐요.” 그가 속삭였다. 선글라스 테 위로 그의 흰자위가 번득였다. “95년생 남자가 하나 있는데, 한번 볼래요? 내 고객들은 대부분 키가 최소 185센티미터는 됩니다.”

그는 기념품 가게로 보이는 곳에서 한 남성이 미소를 짓고 있는 빛바랜 세피아톤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남성의 등 뒤 선반에는 카피바라 인형이 가득 쌓여 있었다.

“저 인간들 믿지 마요.” 그가 길 아래쪽에서 내가 방금 대화를 나누었던 중매인 두 명을 가리키며 말했다. “위챗 아이디도 함부로 알려주지 말고. 저것들은 개인정보를 통째로 모아서 6,000위안이나 8,000위안에 팔아넘긴 다음, 소개비를 받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사기꾼들이니까.”

“나는 여기서 잔뼈가 굵은 사람입니다.” 그는 2000년대에 이미 이곳에서 여동생의 남편을 찾아주었다고 했다. “보아하니 그쪽은 풋내기 같아서 하는 말인데, 나는 정보 이용료 같은 거 안 받아요.”

내가 미국에 살고 있다고 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우리 상하이 사람들은 서양인이라고 덮어놓고 우러러보지 않아요. 관심도 없고. 하지만 다른 지방에서 올라온 이방인들은 어떻게든 서양인과 결혼하고 싶어 안달이 났지!”

그는 뜬금없이 북한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몇 년 전에 북한을 방문했는데 너무 마음에 들어서 돌아오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고 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해 떠드는 나쁜 말들은 전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주택도 무상이고, 의료도 무상에다, 직장까지 보장되더군. 먹고 싶은 건 뭐든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말이야!”

그의 옆에서 보잉 선글라스에 검은 마스크를 쓴 앙상하고 노쇠한 여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상하이에는 직장 보장 같은 건 없어요.” 참전 용사 출신이라는 그 남성이 말했다. “병원 한번 가기도 하늘의 별 따기지.”

“북한 사람들은 중국인을 아주 좋아합니다. 우리를 정중하게 대접해 주더군. 자기네 땅을 한 뼘이라도 지키기 위해 우리가 대신 싸워주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게요.” 문득 한국전쟁 당시 중국 공산당이 강력한 출산 장려 정책을 펼쳤던 기억이 스쳤다. 당시 다섯 명 이상의 자녀를 둔 어머니는 국가로부터 ‘영광스러운 어머니’로 칭송받았고, 열 명이 넘으면 ‘영웅적 어머니’라는 칭호를 얻었다.

“상하이 양로원에 들어가면 결국 죽음을 맞이할 뿐입니다.” 남성이 폭로를 이어갔다. 양로원에서 고용한 간병인들은 철저한 개인주의자이자 자본주의자라는 것이었다. 새로 온 간병인이 첫 달에는 성실할지 몰라도, 결국 돈을 더 벌기 위해 다른 환자들을 추가로 맡으면서 자꾸만 붉은 봉투, 즉 뒷돈을 요구하기 마련이라고 했다.

노쇠한 여성이 모래가 서걱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거들었다. “걸을 수도 없고 몸을 움직이지도 못하는 데다가, 간병인을 감시할 자식마저 없으면 아주 대놓고 구박을 해요. 환자 밥을 지들이 뺏어 먹는다니까.”

남성이 어깨를 으쓱했다. “개인주의 사회라는 게 원래 그렇게 돌아가는 법이지.”

자조색으로 파마를 한 여성이 내 나이를 물었다. 이십 대 후반에 접어든 터라 이곳에서는 결혼 시장에서 소외된 이른바 ‘솅뉘(剩女, 골드미스 혹은 결혼 적령기를 놓친 여성)’ 취급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그저 “완전 아기네!” 하고 받아칠 뿐이었다.

“서양 사람들은 우리와 달라.” 여성이 말했다. “베이징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 상하이 사람을 만나고 싶은지 물어보면, 그런 건 상관없다고 하더군. 집도 차도 필요 없고, 그저 예쁜 사람이면 최고라는 식이야!”


중매 시장 안에는 저마다의 특색을 가진 소규모 시장들이 여럿 존재했다. 노인 코너에서는 내 어머니 또래의 여성이 나이 지긋한 남성과 선을 보고 있었다. 바로 옆 이혼자 구역에서는 프로필에 ‘깔끔하게 정리됨’이라고 적어둔 이들이 ‘가급적 빨리’ 재혼할 상대를 구하고 있었다. 무슬림 코너와 대대로 상하이에서 살아온 붙박이 자녀들을 위한 ‘옛 상하이 코너’를 지나쳐 마침내 내가 속할 만한 곳에 다다랐다. 상하이 외의 지역에 기반을 둔 중국인들이 모이는 ‘해외파 코너’였다.

옥스퍼드 대학에서 왔다는 남학생 교환학생 무리가 이모 두 명에게 자신들의 프로필 조건을 불러주고 있었고, 이모들은 그것을 휴대폰에 부지런히 받아 적었다. 그 옆으로 한 인솔자를 따라 어린 호주 아이들이 떼를 지어 지나갔다. 한 삼촌이 아이들 중 한 명을 바라보며 영어로 쾌활하게 소리쳤다. “참 예-쁘-네(You’re so pr-etty)!”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초록색 우비를 입은 한 여성이 진지한 눈빛으로 전단지를 훑어보고 있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충칭에서 올라온 삼십 대 후반의 여성이었다. 제일 친한 친구 손에 이끌려 이런 중매 시장에는 처음 와본 것이라 했다.

연애는 딱 한 번 해봤지만 잘 풀리지 않았다고 했다. 요즘은 좋은 사람 만나기가 참 쉽지 않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어떤 사람을 찾느냐는 질문에 구체적인 조건은 잘 모르겠지만 “나보다 키만 크면 좋겠다”라고 답했다.

“온라인 데이팅 앱은 써본 적 없어요.” 그녀가 털어놓았다. “그냥 그런 쪽으로는 마음이 내키지 않더라고요.” 예쁘고 심성도 고와 보여서 말을 더 섞으며 응원해 주고 싶었으나, 화완이라는 어머니가 끼어드는 바람에 대화는 뚝 끊기고 말았다. 화완은 도쿄에서 사업을 하는 아들을 위해 상하이나 자신의 고향인 저장성 출신의 참한 여성이 지나가기만을 해외파 코너에서 호시탐탐 기다리던 참이었다.

화완은 내 옆에 착 달라붙어서 산책로를 따라 나를 이끌었다. “다른 사람들한테 사진을 보여줄 때는,” 그녀가 비결을 전수했다. “얼굴이 뚜렷하게 안 나오도록 옆모습으로 찍은 걸 줘요. 어디 사는지도 절대 먼저 말하지 말고.”

그녀는 지나가던 한 아버지를 붙잡고 내 신랑감 후보를 함께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이 친구 한번 봐봐.” 남성이 뉴욕에 사는 남자의 이력서를 보여주었다. 87년생이었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난다고 화완과 내가 입을 모았다. 남성은 이 정도 나이 차이는 궁합도 안 본다며 우겼지만, 이내 다른 선택지들을 들이밀었다. 멜버른은 어때? 오클랜드는? 프랑크푸르트? 톈진?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이 친구는 어떤가? (“거기가 뉴욕에서 많이 먼가?” 그가 물었다.) 구글에서 솔루션 엔지니어로 일하는 청년인데, 마침 그의 아버지가 오늘 공원에 나와 있다고 했다. 화완이 저 멀리 정자 아래에 정장 모자를 쓰고 앉아 있는 한 남성을 가리켰다.

또 다른 후보는 커네티컷에 살고 있었고 내 나이와 열 살도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키가 170센티미터밖에 되지 않았다.

“그쪽보다 작네.” 화완이 지적했다.

내가 키가 너무 큰 편이라고 자책하자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북부 지방이나 해외, 특히 동북 지방으로 가면 전혀 큰 키도 아니야!”

내가 해외에서도 마땅한 짝을 찾기 힘들어 보이자 화완은 “인연이 아니면 어쩔 수 없는 거지.”라며 혼잣말을 하더니, “우리 아들이랑 전화나 한번 해보는 게 어때?” 하며 위챗 아이디를 교환했다. 나는 그녀와 헤어져 작은 연못가로 걸어갔다. 축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 바위 위에서 프랑스계 캐나다인 두 명이 자신들의 남사친 네 명을 홍보하고 있었다. 아침에 챗GPT를 이용해 친구들의 데이팅 앱 프로필을 중매 시장 스타일의 이력서로 번역해서 인쇄해 왔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지금 위챗 알림이 폭발하고 있다며 그들이 들떠서 말했다. 금발의 청년은 스물두 살의 나이에 최근 약혼을 했고, 다른 한 명은 솔로라고 했다.

나는 몰려든 군중을 위해 통역사로 나섰다. 네, 여기 광고된 친구들은 의대생들입니다. 아니요, 아직 정식 의사는 아닙니다. 네, 내년까지 중국에 체류할 예정입니다. 아니요, 여기 서 있는 청년들이 본인은 아닙니다. 네, 중국인 여자친구를 찾고 있습니다. 아니요, 중국어는 못 합니다. 네, 이 금발 친구는 임자가 있습니다. 아니요, 제가 그의 약혼녀는 아닙니다.

캐나다 청년들은 이제 곧 자리를 떠나야 한다는 말을 군중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오늘 밤 우한으로 가야 하는데 기차 출발 시간이 두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현지 여성 두 명은 그들의 옷소매를 붙잡고 오늘 저녁에 정말 시간이 없느냐며 간곡하게 매달렸다. 그중 한 명은 외쳤다. “저 우한 사람이에요!”


다섯 시 무렵이 되자 중매인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고, 공원 주변을 둘러싼 마천루처럼 잿빛 어둠이 공원 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시장의 남쪽 끝자락에서 마지막으로 한 아버지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아들은 도심 한복판에 새로 인테리어를 마친 아파트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혹시 동영상으로 확인해 보겠느냐고 그가 물었다.

오늘 수확이 좀 있으셨냐고 내가 묻자, 그가 답했다. “본인이 완벽하지 않다면 어느 정도 타협을 해야 하는 법이지. 옛날에는 우리 모두 아무것도 모른 채 눈 감고 결혼했어도 다들 잘만 살았어!”

그가 말을 이어갔다. “자식들이 지금 혼자 지낼 때는 아무 문제 없어 보이지. 하지만 늙으면 모두에게 무시당하고 구박받게 마련이야. 이웃들도 영감탱이가 이러고 절뚝거리며 걸어 다니면 대놓고 비웃는다고.” 그는 지팡이를 짚고 걷는 흉내를 내보였다.

나는 이 부모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했다.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자녀가 동반자도 없이 홀로 늙어가거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돌봐줄 자식 하나 없을지도 모른다는 뼈저린 두려움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유년 시절에 겪었던 농촌의 지독한 가난은 이제 몰라보게 발전한 도시화로 대체되었지만, 그 화려함 이면에 약속되었던 경제적 안정은 아직 찾아오지 않았다. 도시의 청년 실업률은 몇 달 전 19퍼센트라는 정점을 찍으며 치솟고 있었고, 생활비는 나날이 가중되는 실정이었다. 사회 복지 제도가 미처 채우지 못한 빈틈을, 이 노인들은 효도라는 전통 가치가 메워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올해는 다들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어. 월급 봉투가 비어 있는데 어떻게 연애를 하겠나? 경제가 좀 나아질 때쯤이면... 한 5년 뒤에는... 애들 나이가 벌써 마흔 줄에 접어들 텐데.”

그는 마지막 시도로 내게 사진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자연광 아래에서 찍은 셀카 속에는 금테 안경을 쓰고 턱선이 날카로운 한 남성이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쓸어 넘긴 채 서 있었다. 괜찮은 청년이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 The Paris Review (2026.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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