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이 가르침을 줄 수 있는가? (번역)
David S. Wallace 「Can Art Teach?」
또 한 명의 환자가 응급실로 실려 온다. 이번에는 인공심박동기(pacemaker) 고장이다. 의사들이 환자의 가슴에 도관을 삽입하는 복잡한 시술을 시작하자, 주고받는 질문과 답변이 이어진다. "지금 왜 풍선을 부풀리지?" 한 의사가 묻자, 수련의가 답한다. "우심실로 흘러 들어가게 하려고요."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나지만, 의사들은 쉴 틈도 없이 곧바로 다른 환자들에게 불려 간다. 먼저 수은 수치가 높다는 사실을 전해야 하는 환자에게, 그다음에는 익사 직전에 구조된 환자에게로 향한다. HBO의 메디컬 드라마 <더 피트(The Pitt)> 시즌 1의 중반부쯤 오면, 비록 심장 수술을 하는 법까지는 배우지 못하더라도 또 다른 교훈 하나는 확실히 얻게 된다. 치프 레지던트인 랭던 박사가 동료에게 던지는 말처럼 말이다. "응급실 의사들은 보통 3분에서 5분 주기로 하던 일을 멈추고 계속 다음 일로 넘어가야 하거든."
<더 피트>에는 이처럼 대본의 의도에 맞추어 캐릭터의 자연스러운 대사가 메시지 전달을 위해 살짝 틀어지는, 일종의 '미니 교육'의 순간들이 가득하다. 우리는 간호사 부족이 어떻게 병상 확보를 제한하는지, 환자들이 간호사를 폭행하는 비율은 얼마나 되는지, 골반의 일부인 '레치우스 공간(space of Retzius)'이 19세기 스웨덴 해부학 교수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사실 등을 배우게 된다. 지독하리만큼 진지하고 때로는 신파조로 흐르는 이 드라마는 1990년대와 2010년대에 어디서나 볼 수 있었던 연속극 형태의 메디컬 드라마를 연상시킨다. 주인공 로비나비치 박사를 연기한 노아 와일은 어떤 면에서는 과거 드라마 에서 보여준 의사 역할을 재현하고 있는 셈이다.
당시 드라마들은 환자들의 사례 속에 매끄러운 사회적 메시지를 자연스럽게 녹여내곤 했다. 하지만 <더 피트>는 그 어떤 전작들보다도 자신이 가진 문제의식을 화면에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각 시즌이 단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다 보니, 병원이 주는 모든 교훈이 빽빽한 시간표 속에 압축된다. 백신 반대주의자인 부모가 자녀의 척수 천자(spinal tap) 시술을 거부할 때, 그 부모가 틀렸다는 점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민세관집행국(ICE) 요원들이 자신들이 구금한 여성을 데리고 병원에 나타났을 때, 그들이 악역이라는 점 역시 모호하지 않다. 이러한 명백한 연출 외에도 드라마가 주는 교훈은 차고 넘친다.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신속하게 제공해야 하는 시급성, 의료진이 겪는 정신적·감정적 고통, 그리고 의사들의 노력을 가로막는 수술실 밖의 정치적 역학 관계 등이 그렇다. 이 드라마는 엄청난 인기와 더불어 평단의 극찬을 받았다. 지난해에는 에미상 13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최우수 드라마상을 포함해 5관왕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본질적으로 현재는 대중에게 외면받는 형식인 '교훈적 예술(didactic art)'의 전형이기도 하다.
요즘 무언가를 '교훈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차 없는 비판의 이유가 되곤 한다. '집요하다', '훈계조다', '너무 빤하다'라는 말을 고상하게 표현한 동의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최근 뉴욕타임스는 '오늘의 단어' 코너에서 2025년 한 해 동안 자사 기사에서 이 단어가 58회나 사용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영화 평론가 마놀라 다기스가 티모시 샬라메 주연의 영화 <마티 슈프림(Marty Supreme)>을 호평한 구절을 인용했다. "이 영화는 유대인의 정체성, 가족, 공동체, 계급, 동화와 성공 같은 묵직하고 거대한 주제들을 다루지만, 결코 교훈적이지 않으며, 많은 미국 독립 영화들이 짐짓 엄숙한 태도로 삿대질하듯 늘어놓는 인생의 교훈 따위는 던지지 않는다." 버라이어티지에 실린 영화 <잇따른 전투(One Battle After Another)>—급진적 정치를 얼마나 정확하고 충실하게 재현했는가를 두고 논쟁이 뜨거웠던 작품—의 리뷰 역시 이 영화의 가벼운 터치를 칭찬하며 "눈앞에서 가르치려 드는 황당한 교훈극이 아니다"라고 썼다. 또한 최근 뉴욕타임스의 아동 도서 리뷰에서도 "이 책들은 교훈적인 저작물이 아니다. 영혼을 울리는 깊이와 울림을 지닌 예술이다"라는 주장이 등장했다. 오늘날에는 두 살에서 여덟 살짜리 아이들조차 무언가를 가르치려 드는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까다로워진 모양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교훈적'이라는 말에 눈살을 찌푸릴지 모르지만, 과거에는 예술이 가르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기원전 700년경에 쓰인 헤시오도스의 장편 시 <노동과 나날(Works and Days)>은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오래되고 널리 읽힌 시 중 하나인 동시에, 본질적으로는 농사 교본이었다. 한 세기 뒤, 이솝 우화의 토끼와 거북이는 클리셰가 된 지금까지도 수천 년 동안 이어지는 교훈적인 이미지를 남겼다. 기원전 3년에 나온 오비디우스의 <사랑의 기술(Ars Amatoria)>은 독자들에게 어울리는 연인을 찾는 법을 안내했다(다만 그의 지침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던 탓에, 오비디우스 본인의 주장으로는 이 책 때문에 로마에서 추방당했다고 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욕망을 전제로 한 위대한 작품의 예는 20세기까지 이어진다. 홀로코스트의 공포를 기록한 알랭 레네의 <밤과 안개>, 장뤽 고다르의 독창적이고 혼란스러우며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영화들, 혹은 미술가 한스 하케가 부조리한 뉴욕 부동산 업자의 기록과 거래 문서를 꼼꼼하게 제시한 설치 미술 <샤폴스키 등등의 맨해튼 부동산 보유 현황, 1971년 5월 1일 기준의 실시간 사회 시스템> 등이 좋은 예다.
오늘날 교훈적 예술이 여전히 번창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장르 중 하나가 바로 과학소설(SF)이다. 이 분야의 가장 유명한 작가들은 모두 우리에게 메시지를 던진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소설들은 성별, 젠더, 인종 간의 경계를 노골적으로 탐구하며, 킴 스탠리 로빈슨의 <미래부(The Ministry for the Future)>는 기후 변화에 대처하지 않았을 때 맞이할 암울한 미래를 경고한다. 가장 위대한 SF 작가 중 한 명인 어슐러 K. 르 귄의 <외손(The Dispossessed)>은 두 행성을 배경으로 한다. 한 곳은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사회이고, 다른 한 곳은 척박하지만 무정부주의적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회다. 처음에는 이 이분법이 다소 노골적으로 다가올지 모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소설은 풍부한 상상력으로 그려낸 캐릭터와 사회상을 통해 그 청사진을 채워나간다. 인물들이 겪는 작은 깨달음들은 곧 독자들의 교훈이 되며, 대조와 비교를 통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왜 이 체제를 유지하는 선택들이 내려지는지 고민하게 만든다.
물론 어떤 작품은 교훈적이고 어떤 작품은 그렇지 않다고 이분법적으로 선을 긋기는 어렵다. 거의 모든 예술 작품은 어느 정도 특정 관점을 전제하고 옹호하며, 그 과정에서 가르침의 색채를 띠게 마련이다. 평론가 바바라 로즈가 1967년 <아트포럼>에 기고한 영향력 있는 에세이에서 썼듯, "당연히 모든 가치 있는 예술은 무언가를 가르치지만", 오직 일부 작품만이 "가르침 자체를 최우선 목적으로 삼는다." 진지하고 어쩌면 더 폐쇄적인 순수 문학의 영역에서, 이러한 의도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은 극히 드물다. 눈에 띄는 사례로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J. M. 쿤체의 2003년작 소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가 있다. 이 소설의 상당 부분은 강연의 형태를 띤다. 강연을 수행하는 인물은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존경받는 노년의 소설가 코스텔로다. (그녀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속 주인공의 아내인 몰리 블룸을 연상시키는 인물의 시점으로 서사된다.) 소설의 한 장은 공장식 축산으로 매년 수십억 마리씩 도살당하는 동물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코스텔로의 열정적이고 품격 있는 연설로 거의 채워져 있다.
쿤체는 관객을 가르치려 들 때 감수해야 할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독자가 교훈에 동의하지 않거나, 더 최악의 경우 지루해할 위험 말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의 넓은 서사적 품 덕분에 그는 육식의 도덕성을 둘러싼 상충되는 시선들을 작중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코스텔로의 연설을 들은 그녀의 아들과, 코스텔로가 도덕적 우월감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하는 며느리의 반응을 보게 된다. 연설이 끝난 후, 아들은 그녀에게 이런 운동으로 정말 무엇인가를 바꿀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느냐고 묻는다. 코스텔로는 그렇지 않다고 답하는데, 이러한 확신의 부재야말로 독자가 스스로 그 질문을 고민해볼 수 있도록 여백을 남겨둔다. 쿤체는 형식, 상상력, 논증을 통해 우리를 시험대에 올리며, 21세기의 서사 예술이 어떤 모습으로 진화할 수 있을지 상상하도록 돕는다.
첫 시즌만큼의 짜임새나 명확함은 다소 부족했던 <더 피트> 시즌 2에서도, 특히 강렬하게 다가온 가르침의 순간이 하나 있었다. 교훈적 예술이 나쁜 평판을 얻는 이유는 대개 그것이 너무 얄팍하게 실패하기 때문이다. 캐릭터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틀에 박힌 교훈은, 가공되지 않은 현실의 기묘한 반전들 앞에서 힘을 잃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가르침'이라는 개념 자체를 재조정해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7화에서는 독립기념일 파티에서 성폭행을 당한 환자가 응급실로 실려 온다. 수간호사인 데이나는 프리셉터로서 신입 간호사인 에마에게 자신이 직접 환자를 검사하겠다고 설명한다. 공휴일이라 '세인(SANE)'이 오려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인'이 무엇인지 의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 출근을 한 에마 덕분에 독자들 역시 'SANE'이 '성폭행 전문 간호사(Sexual Assault Nurse Examiner)'의 약자라는 설명을 듣게 된다. 일부 시청자들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모든 정보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새롭게 다가갈 수는 없으므로—대다수는 흔히 '강간 키트(rape kit)'라 불리는 증거 수집 장비에 증거를 채취하는 특수한 절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증거 채취 키트를 채우는 과정에서는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까? 드라마의 설명은 일부 사실적인 절차를 차분하게 나열하는 방식이지만, 동시에 극의 흐름에 숨 쉴 틈을 부여한다. '일라나'라는 이름의 환자는 검사받기를 주저하고, 데이나 간호사는 그 과정이 끝날 때까지 방을 떠날 수 없다. 매 초가 급박하게 돌아가며 24시간을 밀도 있게 다루던 이 긴박한 드라마 속에서, 시청자들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종류의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바로 신체의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과연 이 상황에 어떤 치유책이라도 존재할 수 있을지를 지켜보며 '기다리는 시간'이다. 의구심과 감정적 모호함이 전면에 부각된다. 우리는 일라나가 옷을 벗고 진술을 하면서 서서히 커져가는 불편함을 목격하고, 데이나가 중립을 지키며 기민하게 대응하려는 노력을 본다. 가해자로 지목된 이는 친구였고, 일라나는 검사 도중 마음을 바꾸어 더 이상 진행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아무 의미 없는 일이었어요"라고 그녀는 말한다.) 데이나가 방을 지키는 동안 일라나는 검사를 잠시 중단했다가, 결국 끝마치기로 결심한다. 이 장면은 극적이면서도, 당혹스러울 정도로 평범하고 일상적이다. 수술실 안에서 의사들이 보여주는 영웅적인 활약상으로 유명한 이 드라마에서, 이 사건은 인내에 대해, 그리고 우리가 얼마나 쉽게 외면해버릴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은 가르침을 남긴다.
일라나의 검사가 진행됨에 따라, 드라마는 강간 키트(rape kit) 채취 과정의 철저함을 정밀하게 묘사한다. 증거 확보를 위해 일라나가 입었던 옷가지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보존하고 포장해야 한다. 일라나의 몸에 남은 멍 자국들을 사진으로 남기고, 이를 저장한 SD 카드는 증거 봉투에 넣어 밀봉한다. 몸 위로 블루 라이트를 비추고, 피부에서 샘플을 채취한다. 손톱 밑은 물론 체내 세포까지 면밀히 긁어낸다. 자칫 추상적으로 느껴지거나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 쉬운 경험이 고통스러운 매 순간을 통해 생생한 현실로 다가온다. 이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도, 의료진은 경찰이 과연 이 키트를 수거하러 오기나 할지 주저하며 애를 태운다. <더 피트>는 우리가 평소라면 굳이 파헤치고 싶지 않았을 문제를 직시하고 고민하게 만들 때 가장 빛을 발한다. 이 드라마는 단순한 청소년 계도용 특집 극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관심을 담아낸 격조 높은 실천이다.
예술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줄 수 있다는 생각이 이토록 오래된 전통이라면, 어쩌다 오늘날에는 교훈이라는 개념이 이처럼 금기시되었을까? 정답은 하나가 아니다. 우선 1790년 저서 《판단력 비판》에서 미(美)의 자율성 이론을 정립한 임마누엘 칸트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칸트에 따르면 아름다운 것은 그 자체로 아름다울 뿐 다른 목적을 지니지 않는다. 꽃이 우리의 발길을 붙잡는 이유는 우리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형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기 때문이다. 이 예술 이론은 19세기를 거치며 점차 탐미주의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사상으로 무르익었다. 20세기에 접어들자 교훈주의를 비판하는 목소리는 더욱 거세졌다. 작가의 직접적인 메시지보다 모호함을 더 세련된 것으로 여기는 대학 미술 교육의 전통, 소비가 가치의 척도가 된 유한계급과 문화 산업의 부상, 그리고 동구권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예술을 퇴행적이고 권위주의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미국식 시각이 맞물렸다. 즉, 누군가 생각을 주입하려 든다면 그것은 곧 타인을 지배하려는 시도라고 여기게 된 것이다.
오늘날 교훈적 예술을 경멸하는 태도는 우리가 받는 교육의 근본적인 목적에 대한 새로운 불안감을 반영하기도 한다. 지난 수십 년간 대학은 배움의 터전이라기보다 학위를 취득하고 노동 시장에 진입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러한 불안감은 거대 언어 모델(LLM)의 등장으로 전 세계 교육자들을 당혹스럽게 만들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학생들이 직접 고민하지 않고도 그럴듯한 답을 뚝딱 만들어낼 수 있다면, 대체 숙제를 내주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소셜 미디어 시대에는 사실에 수동적으로 노출되는 방식에 기반한 새로운 형태의 지식 습득이 자리 잡았다. 유튜브의 설명 영상이나 틱톡의 짧은 하우투(How-to) 영상이 대표적이다. 이는 일종의 가공된 지적 충족감일 뿐, 우리를 진정으로 채워주지 못한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의 특성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이용자가 진짜 만족을 느끼고 떠나는 것은 플랫폼의 이익에 상반되니 말이다.) 소셜 미디어 피드는 단편적인 예술의 파편들로 넘쳐난다. 지친 몸을 뉘었을 때 우리 손길이 가는 것은 즉흥적이고 자극적이며 노력도 들지 않는 클릭뿐이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드라마 <슈츠(Suits)>의 본편을 보는 대신 유튜브 쇼츠로 잘려 나간 에피소드만 멍하니 넘겨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처럼 문화가 '캔디크러시' 게임처럼 단순화되면서 작품 하나의 가치는 퇴색하고 쉽게 소비된 뒤 버려진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대중이 예술에서 어떠한 가르침이나 경외감을 기대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우리는 예술이 자신을 변화시키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저 침대에 누워 스트리밍 영상을 틀어놓은 채, 현실을 잊거나 감각을 마비시키기 위해 화면을 응시할 뿐이다.
최근 예술에서 교훈적 성격이 허용되다 못해 오히려 권장되는 유일한 영역은 바로 '정치적 올바름의 과시(political signalling)'다. 어떤 이들은 교훈적 예술이 이미 'PC(Political Correctness) 주의'라는 위험한 탈을 쓴 채 우리 주변을 포위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리버럴한 서사 구조를 충실히 따르는 <더 피트>야말로 그 전형적인 예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이 드라마가 특정 정파의 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가? 그렇다. 시즌 1의 2화에서 비명을 지르며 실려 온 흑인 환자는 구급대원들에게 홀대를 받는다. 하지만 사명감 있는 유색인종 의사인 모한 박사가 사건을 맡으면서, 그녀가 아프리카계 아메리칸에게 주로 나타나는 鎌狀(겸상) 적혈구 빈혈증을 앓고 있음을 밝혀낸다. 당연하게도 모한 박사는 의료계 내의 인종적 편견을 연구하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역시 시청자에게 사회적 부조리와 그 해결책을 동시에 가르치기 위해 정교하게 배치된 장치다. 시즌 1의 핵심 사건은 인근 음악 축제에서 발생한 총기 난사 사건이며, 시즌 2에서는 인공지능(AI) 도입의 맹점을 다룬다. 수석 의사는 레지던트들에게 AI가 차트 작성 시간을 80%까지 줄여줄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동화 시스템이 잘못된 병력을 출력하는 바람에 환자가 위험에 처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과거의 예술가들이 '도덕'이라 불렀던 가치를 오늘날 우리는 부끄러워하며 입에 담지 못한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것은 '정치'뿐이다. 리버럴의 관심사와 주장을 전면에 내세우는 작품들이 끊임없이 등장하면서 대중의 피로감과 반발심도 만만치 않게 쌓였다. 우파 진영에서는 영화와 TV라는 매체를 통해 '정체성 정치'와 엄숙주의가 대중에게 강요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의도적인 설득 행위인지, 아니면 예술이 시대를 반영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는 작품마다 다를 것이며 여전히 논쟁적인 주제다.) 좌파나 리버럴 성향의 예술가와 평론가들 사이에서 정치적 주제를 다룰 때 모호함을 극대화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 역시 이러한 반발에 대한 대응으로 볼 수 있다. 요즘에는 시사적인 화두를 던지면서도, 작중 묘사되는 정치적 갈등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작품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최종적인 해석은 관객의 몫이지만, 작품 속에는 언제나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식의 은밀한 암시가 깔려 있다. 지난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을 거머쥔 아리 에스터 감독의 <에딩턴(Eddington)>과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잇따른 전투>가 대표적이다. 두 작품 모두 사회적 양극화와 혁명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소환하지만,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않음으로써 이러한 거대 담론들을 단순한 기호의 소용돌이로 환원시켜 버린다. (이러한 방식은 스트리밍 플랫폼 입장에서도 환영할 만한 일이다. 해석의 모호함은 댓글 창과 왓챠, 레터박스(Letterboxd) 같은 리뷰 사이트에서 끊임없는 논쟁을 유발해 사용자 참여도를 높여주기 때문이다.)
흔히 교훈적이라고 여겨지는 작품 중 상당수는 실제로는 대중이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다시 확인시켜 주며 비위를 맞추는 수준에 그친다. 영화 <바비>에서 대중문화 속에 간간이 등장하는 교훈의 순간들, 예컨대 현대 여성이 직면한 모순된 기준을 성토하는 아메리카 페레라의 독백이나, 기후 변화 불감증을 정면으로 풍자한 아담 매케이 감독의 <돈 룩 업>을 보며 리버럴 성향의 관객들은 자신이 '올바른 청자'라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자신은 성차별주의자도, 기후 변화 부정론자도 아니기 때문이다. 대책 없는 부유층의 어리석음을 폭로해 큰 인기를 끌었던 HBO의 또 다른 히트작 <석세션>이나 <화이트 로투스>를 보라. 이 작품들은 인물들의 치졸한 사치를 보여주며 은근한 정치적 긴장감을 자아내지만(물론 이러한 묘사가 결과적으로 초부유층에 대한 대중의 동경을 더 자극하는 면이 있긴 하지만), "저 한심한 엘리트들!"이라는 근본적인 전제는 대중에게 조금의 타격도 주지 않는다. 이 드라마들이 던지는 사회 비판적 시선은 우리가 무언가 가치 있는 작품을 보고 있다는 면죄부를 주지만, 대다수 관객에게 이는 새로운 배움의 경험이 아니라 기계적인 복습에 불과하다. 진부한 통념을 그대로 거울처럼 비추어 관객의 세계관을 확인시켜 주는, 이른바 '마음 편한 밥벌이 콘텐츠(comfort watch)'라는 오늘날의 독특한 현상이다. 이는 철저히 알고리즘의 창작 논리를 따른다. 대중이 이미 수용한 지혜와 좋아요, 싫어요를 기록한 뒤 똑같은 결과물을 끊임없이 재생산해내는 방식이다.
'교훈적 예술'과 동의어처럼 쓰이는 단어로 소련의 정치 선전 활동에서 유래한 '아지트프로프(Agitprop, 선동 프로파간다)'가 있다. 이 단어 역시 극히 부정적인 의미로 통용되지만, 명확한 관점을 제시하면서도 작품의 섬세함과 우아함을 유지하는 것이 과연 불가능한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때로는 관객에게 모호하고 희미한 기호의 그물을 던지는 것보다, 명확한 사상으로 정면 승부를 거는 것이 훨씬 더 대담한 시도일 수 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지닌 궁극적인 교훈을 완벽하게 밝혀낸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바로 그 점이 작품을 위대하게 만든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지적 허영을 즐기는 이들(필자 역시 포함된다)은 오랫동안 형식과 개념 모두에서 상상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이른바 '난해한 예술'의 가치를 옹호해 왔다. 하지만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이러한 작품들은 대개 작품의 맥락과 역사, 특정 신호를 이해하는 소수의 엘리트 집단만을 위해 제작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예술은 자칫 그들만의 리그로 고립될 위험이 있다. 교훈주의의 통로를 열어둔다는 것은, 우리 자신과 타인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하고 다 함께 성장하기를 바라는 희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더 피트>의 응급실로 끔찍한 사건들이 쉴 새 없이 밀려들 때마다, 시청자는 이곳이 교육 병원이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하게 된다. 이 드라마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이야기인 동시에, 수련의들이 진짜 의사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다룬 작품이다. 대다수의 시청자는 의사가 아니며 앞으로도 의사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의학 지식이 없는 일반 관객들은 이 병원의 풍경을 수련의들의 눈을 통해 바라보게 된다. 극이 전개됨에 따라 시청자들은 응급의학의 끝없는 복잡성을 엿보게 되고, 이 직업이 요구하는 방대한 지식의 무게를 체감한다. 대동맥 내 풍선폐쇄소생술(REBOA)이 정확히 무엇인지 완벽히 기억하진 못하더라도, 미국의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거대하고 복잡하게 얽혀 있는지, 그리고 한 인간의 건강을 지켜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의 헌신이 필요한지 깊이 공감하게 된다.
확실히 <더 피트>는 시사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혼란과 붕괴 속에서 미국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웅변하는, 우리 시대의 교묘한 '사회주의 리얼리즘(혹은 중도 좌파적 리얼리즘)' 작품으로 볼 수도 있다. 드라마는 의사들이 겪는 불안과 자만, 성공과 실수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죽음에 맞서 삶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투쟁, 신체의 무력한 붕괴 앞에서도 끝내 인간성을 지켜내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일을 해내기 위해 필요한 공동체의 연대를 다룬다. 의료라는 숭고한 기획에 대한 믿음을 숨기지 않으면서도, 그 과정에 도사린 고단함을 시청자에게 온전히 전달하고자 노력한다. 이 작품은 분명 대중적인 오락물이지만, 그 이면에 깔린 진지한 야망 덕분에 극적 긴장감이 한층 높아지며 결과적으로 시청자를 강력하게 사로잡는 수작이 되었다.
20세기 교훈적 예술의 거장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현대 기계화 사회의 억압에서 관객을 해방시킬 수 있는 연극을 꿈꿨다. 그는 예술가와 관객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정의하는 희곡들을 발표하며 연극사의 패러다임을 바꿨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익을 탐하다 결국 파멸에 이르는 상인의 이야기를 다룬 <억척어멈과 그의 자식들>, 도그마에 빠진 권력에 맞서 진리를 추구하는 지식인의 고뇌를 그린 <갈릴레이의 생애> 등의 작품에서 브레히트는 대중이 기대하던 사실적인 환상을 과감히 걷어냈다. 의도적으로 낯선 몸짓과 대사를 도입하고 '제4의 벽'을 허물었다. 그는 우리에게 익숙한 도덕적 질문들을 던지며 삶을 낯설게 바라보도록 유도했다. '왜 누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도 풍족하게 먹고살고, 누구는 굶주려야 하는가?', '왜 우리는 새로운 생각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가?', '우리의 생사를 결정할 권리는 대체 누구에게 있는가?' 브레히트의 연극은 관객들이 현실에 주목하고, 스스로 연극에 개입하며, 한 번 더 깊이 생각하도록 자극했다.
이러한 접근법은 자칫 난해하고 지루한 처방처럼 보일 수 있지만, 브레히트는 자신의 이론서에서 예술은 반드시 '재미있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관객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오는 지혜를 통해, 약자에 대한 실질적인 연민의 표현인 분노를 통해, 인간을 존중하는 이들에 대한 경의를 통해 즐거움을 얻어야 한다. 요컨대, 무언가를 창조해내는 이들을 기쁘게 하는 모든 것 속에서 연극적 희열을 느껴야 한다.
브레히트는 관객이 작품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는 관객을 수동적인 구경꾼이 아니라 작품의 주체적인 참여자로 만들고자 했다. 우리 역시 소셜 미디어가 쏟아내는 수많은 콘텐츠를 영혼 없이 소비하고, 무분별한 AI 쓰레기 정보에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삶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참여하고 싶지 않은가? <더 피트>가 <억척어멈>만큼 형식적으로 기괴하거나 미학적으로 급진적인 작품은 아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나름의 방식으로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배움의 과정이란 늘 낯선 것들과 마주하는 과정이다. 아직 이해하지 못한 세계를 알아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병원이라는 공간이 금융 시스템의 작동 방식부터 우리가 죽음에 얼마나 가까이 닿아 있는지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의 단면을 고스란히 비추는 하나의 프리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끔 가르치려 드는 엄숙주의적 연출에 눈살을 찌푸릴 때도 있지만, 그것이 작품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도대체 왜 방해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극 중의 수련의들처럼, 우리가 자신의 직무를 다하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며, 더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의 양은 실로 방대하다. 우리 삶을 생동하게 만드는 배움의 가치가 무한하듯, 그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 역시 끝이 없다. 그러나 그 배움의 여정이 결코 지루하거나 따분할 필요는 없다.
— The New Yorker (2026.5.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