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용

One Hundred Lyrics and a Poem 머리말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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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혹은 가사를 쓰는 일은 아홉 살 무렵부터 내게 일종의 습관이자 소일거리였고, 본능이었다. 악기를 다루기도 전의 일이다. 비틀스와 그 동시대 음악가들이 풍미하던 시대에 성장한 나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수놓았던 그 짜릿하고도 끊임없는 팝 음악의 물결에 매료되었다. 당시에는 <마이 페어 레이디>, <사운드 오브 뮤직>, <올리버!> 같은 대작 뮤지컬의 전성기이기도 했다. 초등학생 시절, 나는 한 여자 친구와 함께 고양이를 괴롭히다 곤경에 처한 아이의 이야기를 다룬 <꼬리를 잡아당기는 소녀>라는 제목의 뮤지컬을 직접 써보기로 했다. 어느 오후, 친구네 뒷마당에서 고작 세 명 남짓한 관객을 앉혀두고 공연을 올렸는데, 그때 머릿속으로 즉흥적으로 지어낸 것이 내 생애 첫 곡이었다.

내 고양이를 본 사람 있나요

꼬리가 아주 긴 고양이인데

내가 기억하는 건 이게 전부다. 나머지 '악보'들은 시간의 안갯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반주도 없는 노래였지만, 다행히 내 친구는 출연자로서 자신감이 넘쳤다. 물론 그 자신감만으로 어수선하고 어린 관객들의 주의를 붙들기엔 역부족이었지만 말이다.

열두 살 크리스마스 때 기타를 선물 받았고, 독학으로 연주를 익혔다. 수많은 영국 기타리스트를 배출한 버트 위던의 『하루 만에 배우기(Play in a Day)』와 BBC TV 시리즈와 병행된 존 피어스의 『코드 잡기(Hold Down a Chord)』가 나의 교본이었다. 두 책에서 코드를 배웠고, 특히 존 피어스에게서는 핑거 피킹 기법을 조금 익혔다. 그는 미국의 블루스 음악가 빅 빌 브룬지의 열렬한 추종자였다. 기타 학원에도 몇 번 가보았지만 이내 지루해졌다. 사이먼 앤 가펑클의 'The Boxer'나 밥 딜런의 'Don’t Think Twice, It’s Alright' 정도는 이미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실력이 붙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다 레논과 매카트니의 곡집을 구해 한 곡씩 섭렵해 나갔고, 피아노 위에는 <메리 포핀스> 삽입곡 악보집이 놓여 있었는데, 그걸 모른 척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그 곡들도 연습하곤 했다.

그 후로는 악보 가사 위에 적힌 기타 코드의 운지법을 건반 위로 옮겨보며 피아노를 독학했다. 또한, 거의 본능적으로 나만의 곡을 쓰기 시작했다. 남의 노래를 배우는 건 직접 곡을 만드는 즐거움에 비하면 고역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화성과 코드의 변화는 나를 완전히 매료시켰고(그 매혹은 지금도 여전하다), 'E 마이너 7' 같은 새로운 코드를 하나 배울 때마다 그것을 중심으로 곡을 써 내려갔다. 처음에는 어쿠스틱 기타를 주로 쳤고 존 피어스의 영향도 있었던 터라, 내가 쓴 곡들은 다분히 포크 음악 같은 색채를 띠었다. 아직도 당시의 코드 진행과 가사가 적힌 낡은 학교 연습장이 남아 있다. 가사들은 대체로 전형적인 로맨틱함이 묻어났지만, 간혹 냉소적인 유머를 시도한 흔적도 보인다.

내가 자란 뉴캐슬에는 '피플스 씨어터(People’s Theatre)'라는 유서 깊은 사회주의 기반의 아마추어 극단이 있었다. 열한 살 때 그곳의 청소년 극단에 들어갔고, 매주 토요일 오전마다 모임을 가졌다. 세월이 흐르며 그곳은 내 사교 생활의 중심지가 되었고, 결국 몇몇 작품의 곡을 쓰는 작업까지 맡게 되었다. 시작부터 나는 연극적 맥락 안에서의 음악에 깊은 관심을 두었던 셈이다. 한 친구의 어머니가 소장하고 있던 앨범 <노엘 카워드1 인 뉴욕>을 접했을 때, 나는 그가 보여준 기지와 감수성의 절묘한 조화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겼다.

청소년 극단에서 만난 가장 친한 친구 역시 기타를 쳤는데, 우리는 여자 친구 두 명과 함께 포크 그룹을 결성하기로 했다. 그룹명은 우리가 심취해 있던 '인크레더블 스트링 밴드2'의 노래 구절(“강물의 먼지는 속삭이며 울고 있네”)에서 따와 '더스트(Dust)'라고 지었다. 그 밴드는 사이키델릭 포크와 프린지 연극의 요소를 결합한 독보적인 팀이었다. 1971년, 우리는 BBC 라디오 뉴캐슬에서 다섯 곡을 녹음했다. 그중 네 곡이 내가 쓴 곡이었는데, 거기엔 내가 스스로의 첫 '제대로 된' 노래라고 여기는 곡도 포함되어 있었다. 열다섯 살에 쓴 그 곡의 제목은 미술 시간에 초현실주의 그림을 그린 친구가 붙인 제목에서 따왔다. "새벽이 밝아오는 소리가 들리니?"라는 제목이었다. 음악은 내가 아끼던 E 마이너 7 코드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그대여, 새벽이 밝아오는 소리가 들리나요?

태양이 흔들리는 게 보이나요?

당신이 오니 나는 떠나가네요

부서지는 그 소리가 들리나요?

그대여, 달이 이지러지는 소리가 들리나요?

지난밤 느꼈던 그 마음을

당신도 여전히 느끼고 있나요?

저 달이 이지러지는 소리가 들리나요?

그대여,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나요?

별들이 눈물 흘리는 게 보이나요?

별들은 저 하늘에, 당신도 그곳에 있네요

심장이 뛰는 그 소리가 들리나요?

그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나요?

나는 점차 포크 음악에 흥미를 잃었고, '더스트'는 해체됐다. 마크 볼란과 데이비드 보위가 지배하던 시대, 나는 어쿠스틱 기타로 파워 코드를 연주하려 애쓰며 좀 더 팝이나 록의 색채가 짙은 곡들을 썼다. 그러다 노래를 부르는 두 명의 소녀, 그리고 봉고를 치는 한 소년(T. 렉스의 미키 핀 같은 역할이었다)과 함께 수명이 짧았던 또 다른 그룹을 결성했다. 이 활동은 내가 뉴캐슬을 떠나 노스 런던 폴리테크닉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게 되면서 끝이 났고, 크리스 로를 만나기 전까지 나는 그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았다.

1973년, 나는 런던의 몇몇 음반 소속사에서 오디션을 보았다. 그들은 내가 쓴 싱어송라이터 풍의 피아노 발라드에 관심을 보였다. 엘튼 존의 '로켓 레코드'에서도 오디션을 보았는데, A&R 담당자의 사무실에 앉아 기타와 피아노를 치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난다. 비록 실질적인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흥미로운 경험이었고, 나와 내 노래에 보여준 짧은 관심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었다. 당시 나의 피아노 연주 스타일은 내성적이고 시적이었으며, 약간의 자기 연민이 섞여 있었다. 열일곱 살에 쓴 '텔레폰 블루스'가 그 예다.

끝이 없는 텔레폰 블루스…

텔레폰 블루스는 계속되고…

당신은 내 영혼을 가져가

연금술사의 돌로

황금빛으로 바꿔놓았지만

정작 남겨진 건 차디찬 온기뿐

1975년 역사학 학위를 마치자마자 나는 마블 코믹스의 런던 지사 제작 에디터로 취업했다. 이후 두 곳의 도판 전문 비소설 출판사에서 경력을 이어갔지만, 저녁이면 취미로 곡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70년대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내 음악 스타일은 당시 유행하던 '뉴웨이브'풍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나의 레코드 수집 목록에는 데이비드 보위, 섹스 피스톨즈, 패트릭 피츠제럴드, 라몬즈, 더 클래쉬, 엘비스 코스텔로가 자리 잡았다. 그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형편이 안 되어 사지 못했던 조니 미첼과 비틀스의 앨범들, 그리고 저가형 클래식 음반들도 가득했다. 첼시 공공도서관의 음반 목록을 섭렵하며 클래식, 재즈, 록 앨범은 물론, 당시의 계관시인 존 베처먼이 짐 파커의 음악 위로 자신의 시를 낭송한 앨범까지 빌려 들었다. 가사에는 여전히 사랑에 괴로워하는 한탄이 섞여 있었지만, 어조는 점점 더 단단해지고 풍자적으로 변했다. '그녀는 참 절충적이야(She's so eclectic)' 같은 뉴웨이브 스타일의 제목이 등장한 것도 이때였다.

그녀는 장 폴 사르트르와 그 여자 친구의

저작들을 모조리 섭렵했지

취향은 또 어찌나 광범위한지

지난 주말엔 해럴드 로빈스의 소설을 통독했대

아침에 눈을 뜨면

그녀는 할 일이 없어 고민하는 법이 없지

신문을 꼼꼼히 살피고

옷을 고르고

'러프 트레이드'에서 레코드를 사고3

최신판 프랑스 보그지를 사니까

아, 그녀는 정말이지 너무나 '절충적'이야

나는 정말이지, 너무나

진저리가 나는데

나의 유일한 관객은 첼시의 원룸 아파트에서 내 노래를 들어주던 몇몇 친구뿐이었다. 그들은 진심 어린 짝사랑 노래(내가 게이였을까?)나 난해한 가사의 노래보다는 위트 있는 곡들을 선호하는 듯했다. 1981년 초, 퇴직금을 털어 브릭스턴의 한 스튜디오에서 네 곡을 녹음했다. 순진하게도 여러 레코드사에 데모 테이프를 보냈지만 답장은 한 통도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나는 작곡가로서 발전하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고, 이 시기에 쓴 몇몇 곡은 훗날 펫 숍 보이즈의 곡으로(혹은 더스티 스프링필드가 부른 'Nothing has been proved'로) 편곡되어 발표되었다. 1981년 무렵, 나는 새로운 팝의 사운드인 전자음악에 빠져들었다. 크라프트베르크, 휴먼 리그, 소프트 셀 등에 매료된 나는 저렴한 합성장치인 '코그(Korg) MS10'을 구입했다. 그리고 같은 해, 지금까지 함께 곡을 쓰고 있는 크리스 로를 만났다.

싱어송라이터로서 댄스곡을 쓴다는 건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내 스타일은 그저 유행을 따라 인크레더블 스트링 밴드와 마크 볼란에서 데이비드 보위로, 다시 뉴웨이브에서 신스팝으로 옮겨갔을 뿐이다. 하지만 코그 합성장치의 도입과 크리스 로와의 만남은 나를 댄스 음악의 세계로 인도했다. 크리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명확한 사람이었다. 중간 지대란 거의 없었다(지금도 그렇다). 그에게 내 데모 테이프를 들려주었을 때, 그는 노래 자체보다 내가 스튜디오에 직접 가서 데모를 만들었다는 사실에 더 깊은 인상을 받은 듯했다. 그가 내 신시사이저를 만지작거리기 시작하면 나는 기타를 집어 들고 반주를 맞췄다. 당시 버즈콕스의 피트 셸리가 휴먼 리그의 앨범 의 프로듀서 마틴 러셴트와 함께 'Homosapien'이라는 싱글을 냈는데, 어쿠스틱 기타와 신시사이저를 결합한 그 방식이 우리가 모방할 수 있는 길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큰 성과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우리는 끈기 있게 매달렸다. 크리스는 내 가사가 너무 내성적이라며 좀 더 '섹시'해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가 가장 좋아했던 곡은 이매지네이션의 'Body Talk'와 소프트 셀의 'Bedsitter'였다. 나는 우리가 꽤 많은 시간을 보내던 런던 웨스트엔드의 거리 풍경에 대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첫 '제대로 된' 곡은 전자음악 스타일도, '섹시'한 느낌도 아니었다. 크리스가 주말을 보내러 블랙풀 본가에 다녀오더니, 돌아와선 자신이 쓴 피아노 연주곡이라며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무심하게 건넸다. 아주 드라마틱한 곡이었다. 에디트 피아프가 노래하는 모습이 절로 그려질 정도였는데, 나는 그걸 듣자마자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당시 뉴캐슬 시절부터 단짝이었던 내 친구는 내가 '크리스 로'라는 인물과 붙어 다니는 시간이 길어지자 무척 예민하게 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의 연주곡에 연극적인 비탄을 담아 '질투(Jealousy)'라는 제목의 노래를 입혔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이 곡은 훗날 우리가 정식으로 녹음하고 발표하게 될 첫 번째 작업물이 되었다.

낯선 이들이 누군가와 함께 돌아갈 집을 찾아

거리를 헤매는 깊은 밤

나는 홀로 누워 있네, 시계는 세 시를 알리고

나를 찾으려 마음먹는다면 누구든 닿을 수 있을 텐데

이 깊은 밤부터 동이 틀 때까지

끝없는 생각과 질문들이 나를 깨어 있게 하네

시간은 이미 너무 늦어버렸어

어디에 있었어?

누구를 만났어?

전화한다더니 왜 하지 않았어?

거짓말 하는 거야?

연락을 하려 노력은 하고 있어? 할 수 있다는 걸 알잖아

너의 입장을 이해해 보려 애썼지만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어

이 질투 때문에

1982년, 나는 잡지 <스매시 히츠(Smash Hits)>에 뉴스 에디터이자 연간 특별호 편집자로 채용되었다. 공짜 레코드가 넘쳐나고 팝스타들을 인터뷰하는 짜릿한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이다. 홍보와 저널리즘의 관점에서 팝 음악계를 경험하던 시절이었다. 낮에는 음악에 관한 글을 썼고, 밤과 주말에는 크리스와 함께 곡을 썼다. 이때부터 음악은 내 평생의 전업이 되었다.

사람들은 흔히 그런 성공적인 팝 잡지사에서 일한 것이 내 창작 세계에 엄청난 영감을 주었으리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그 영향은 주로 실무적인 부분에 가까웠다. 잡지에 인쇄되기 전 수많은 히트곡의 가사를 검수하며 읽었고, 매일 책상 위로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음반들 덕분에 평소라면 절대 듣지 않았을 음악들에 노출되었다. 덕분에 막연히 화려하고 멀게만 느껴졌던 음악 비즈니스가 실재하는 현실로 다가왔다. 게다가 이전의 단행본 에디터 경력 덕분에 텍스트를 더 명료하고 집중도 있게 다듬는 데 익숙해져 있었는데, 이를 작사와 작곡 과정 전반에 적용할 수 있었다.

우리의 작곡 실력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르자 우리는 데모를 만들기로 했다. 나는 주간지 <멜로디 메이커> 광고에서 본 캠던 타운의 한 스튜디오를 빌려 짧은 세션 비용을 지불했다. 세 시간 동안 세 곡을 녹음했는데, 앞서 말한 'Jealousy'와 유치하지만 귀에 쏙 박히는 일렉트로 팝 'Bubadubadubadum', 그리고 내가 약간 '캠프(Camp)4'스러운 구절을 읊조린 경쾌한 연주곡 'Oh dear'였다.

한밤중에 번화가를 걷고 있었지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는데,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

길을 건너와 내 귀에 은밀한 비밀을 속삭였고

이제 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지, 어머나!

엔지니어이자 뮤지션인 레이 로버츠가 스튜디오 주인이었는데, 그는 우리를 위해 트랙을 녹음하고 믹싱해 주었다. 작업이 끝나고 그는 우리 노래가 꽤 인상적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우리가 성공할 경우 음악 출판 권리의 일부를 나누는 조건으로 스튜디오에서 곡을 쓸 수 있게 해주었다. 전문 뮤지션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 좋은 일이었다. 이후 2년 동안 우리는 일주일에 한두 번씩 그의 스튜디오를 찾아가 최소 한 곡을 쓰고 녹음한 뒤, 저녁을 먹고 펍이나 클럽으로 향하는 루틴을 만들었다. 이 시기 우리는 엄청난 다작을 했는데, '헤븐(Heaven)'이나 '캠던 팰리스' 같은 클럽에서 들은 전자 댄스 음악과 뉴욕의 프로듀서 보비 올랜도5의 음악에서 깊은 영감을 받았다. 크리스는 클럽에서 보비가 프로듀싱한 더 플러츠(The Flirts)의 'Passion'을 들었고, 나는 <스매시 히츠> 사무실로 배달되는 수많은 이름 모를 음반들 중에서 이 다작 작곡가가 만든 곡들을 발견하곤 했다.

당시 런던은 세계 팝 음악의 수도였고, 댄스 음악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게이 클럽과 바를 비롯해 수많은 공연장과 클럽이 즐비했다. 뉴욕에서 태동한 힙합(그랜드마스터 플래시, 아프리카 밤바타, 플래닛 패트롤 등) 역시 우리를 매료시켰다. 뉴 오더나 프리즈 같은 영국 그룹들은 밤바타의 프로듀서 아서 베이커와 협업하기 위해 뉴욕으로 건너가기도 했다. 또한 조르조 모로더와 크라프트베르크에서 기원하여 당시 게이 씬의 사운드로 자리 잡은 유로디스코도 있었다. 실베스터의 프로듀서였던 패트릭 카울리와, 확고한 이성애자였음에도 드래그 전설 디바인을 위해 게이 댄스 히트곡을 만들어낸 보비 올랜도가 이 씬을 지배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영감을 준 음악들이었다.

캠던의 데모 스튜디오에서 크리스는 몇 대의 키보드를 연주하고 원시적인 '닥터 리듬(Dr Rhythm)6' 드럼 머신을 프로그래밍했다. 그동안 나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치며 녹음 콘솔을 만지작거렸고, 리버브(잔향) 수치를 잔뜩 올리곤 했다. 우리는 유로디스코 특유의 4/4박자 비트에 아름다운 코드 변화와 통통 튀는 베이스 라인을 결합한 우리만의 스타일을 구축해 나갔다. 그 선율 위에 나는 가사를 얹었는데, 나의 본능인 '시적인 느낌'을 유지하면서도 크리스가 요구한 '섹시함'을 동시에 담으려 애썼다. 때로는 도발적이면서도 아련하고, 그러면서도 풍자적인 날 선 감각을 가미했다. 가끔은 4/4박자 비트를 완전히 걷어내고 진심 어린 갈망을 담은 비극적인 발라드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렇게 '테넌트/로(Tennant/Lowe)' 작곡 팀이 탄생했다. 이 시기에 우리는 'It’s a sin', 'Rent', 'Opportunities (Let’s make lots of money)', 'Later tonight', 'I want a lover', 'Love comes quickly'를 포함해 수십 곡을 썼다. 그러다 <스매시 히츠> 업무차 뉴욕으로 떠났을 때 우리의 음악적 영웅 보비 올랜도를 만났고, 그에게 데모 몇 곡을 들려주었다. 한 달 후, 우리는 뉴욕의 '유니크 스튜디오'에서 그가 프로듀싱한 우리의 첫 레코드를 만들고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었다. (물론 더 좋아질 수도 있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지만, 우리에게 시작할 기회를 준 그에게는 깊이 감사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다른 책에서 다뤄야 할 이야기다.)



(ii)

노래 가사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오는가? 이 책을 위해 가사들을 엮다 보니, 내게 몇 가지 전략과 영감의 원천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로는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다가 멜로디나 새로운 음악 마디가 그저 가사를 툭 던져줄 때가 있다. 종종 길을 걷다가 방금 보거나 듣거나 생각한 무언가를 바탕으로 아이디어가 머릿속에 툭 떨어지기도 한다. 예전에는 아이디어를 적어두기 위해 수첩을 들고 다녔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는 휴대전화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오래전에 깨달은 사실인데, 방금까지 혼자 자신 있게 흥얼거리던 아이디어도 즉시 기록해두지 않으면 너무나 쉽게 잊히기 마련이다. (휴대전화의 '음성 메모' 기능은 새로운 음악적 아이디어를 몰래 흥얼거려 저장해두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내 뇌의 일부분은 노래 아이디어를 찾기 위해 나의 생각과 대화를 끊임없이 여과하고 있는 듯하다. 언젠가 연인에게 "당신은 술에 취했을 때만 사랑한다고 말하네(You only tell me you love me when you’re drunk)"라고 다소 서글픈 불평을 늘어놓은 적이 있는데, 내 뇌의 작곡 담당 구역은 그 즉시 이 말을 저장했고 나는 곧바로 메모했다. 때로는 운이 좋으면 어떤 구절이 멜로디와 한 몸이 되어 머릿속에 도착하기도 한다.

일상적인 관용구들은 나를 포함한 작곡가들에게 언제나 풍요로운 영감의 원천이었다. "정중히 사과하고 자리를 떴어(I made my excuses and left)", "어떻게 사람들이 당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줄 거라 기대해?(How can you expect to be taken seriously?)", "평소라면 이런 짓은 안 할 텐데(I wouldn’t normally do this kind of thing)", "내 마음대로 내버려 둔다면(Left to my own devices)", "내가 꼭 그래야 해?(Do I have to?)" 같은 말들 말이다. 이들은 모두 특유의 격식(Properness)을 갖춘 전형적인 영국식 표현들인데, 음악적 설정 안으로 들어오면 묘한 비애감이나 유머를 획득한다.

옷을 다 벗어 던지고

<봄의 제전7>에 맞춰 춤을 추고 싶어라

평소라면 이런 짓은 안 할 텐데

성장 환경은 한 사람이 생각하고 말하고 쓰는 방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나는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고, 네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가톨릭 학교에 다녔다. 몇 년 동안 복사(Altar boy)를 서기도 했고 여덟 살 무렵에는 라틴어 미사문을 암송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가톨릭적 경험은 내게 연극적인 의식(Ritual)에 대한 감각과 종교적 전례 및 음악에 대한 무의식적 저장고를 남겨준 듯하다. 그 결과 내가 쓴 가사에는 종교적 관념이나 참조들이 불쑥 등장하곤 하는데, 죄를 씻기 위해 고해성사를 보러 가던 기억을 떠올리며 쓴 'It’s a sin'이 가장 대표적이다.

신부님, 저를 용서하소서

그러지 않으려 애썼습니다

새 페이지를 넘겼지만(새사람이 되어보려 마음먹었지만)

이내 그 페이지를 찢어버리고 말았네요

자신의 사적인 삶과 감정 세계가 커다란 주제가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사실 오늘날 많은 젊은 작곡가들에게는 그것만이 유일한 주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Ego music'("자아의 음악 / 오직 나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라는 노래로 이를 풍자하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 역시 '나'를 조금 숨기려 애쓰면서도 자주 '나'에 대해 쓴다. 사랑에 빠지는 과정은 황홀할 수도 있지만 때로는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기도 하다. 그에 대한 노래를 쓰는 것은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 되짚어보는 치유의 과정이 된다. 어느 날 나는 "사랑은 파국이다(Love is a catastrophe)"라고 느꼈고, 크리스의 음악 위에 얹어진 이 말은 우리 노래 중 가장 황량한 곡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가사는 내 주변 환경 속의 나를 있는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나는 'You choose'에서 사랑에 빠지는 과정을 철학적으로 고찰하며 고통스러운 경험을 합리화하려 시도했다.

노력해도

당신은 지고 말 거야

우연히 사랑에 빠지는 게 아냐

당신이 선택하는 거지

이 가사에 곡을 붙이던 중, 크리스는 이 논리가 80년대 초반에 쓴 'Love comes quickly'와 정반대라는 점을 지적했다.

사랑은 순식간에 찾아오지

당신이 무엇을 하든

빠져드는 걸 멈출 순 없어

어찌 된 일인지, 나는 이 두 가지 상반된 사실을 모두 믿고 있는 듯하다.

나는 에이즈(AIDS) 위기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았고 여러 친구의 죽음을 지켜봤다. 이 문제를 다룬 나의 첫 가사 'It couldn’t happen here'는 몇 년 전 뉴캐슬 시절의 단짝 친구와 나누었던 안일한 대화를 기록한 것이다. 당시 우리는 미국에서의 에이즈 발생 초기 보고를 보며, 영국에서는 그만큼 치명적인 타격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기사를 읽었다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내가 틀렸을지도 몰라

우린 생각했었지

이곳에선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이 가사를 쓸 무렵, 내 친구는 이미 병마와 싸우고 있었고 2년 뒤 세상을 떠났다. 나는 우리의 우정에 관한 자전적인 가사를 썼다. 제목인 ‘Being boring’은 어느 일본 잡지의 비평에서 인용한 문구였지만, 이는 나를 어느 파티의 기억과 그 파티를 열었던 친구에게로 데려다주었다. 각자의 삶이 어떻게 다르게 흘러왔는지, 그리고 그의 삶은 왜 그토록 일찍 멈춰야 했는지에 대한 회상이었다.

죽음의 그림자는 우리의 많은 노래에 드리워져 있다. ‘Your funny uncle’, ‘The survivors’, ‘Requiem in denim and leopardskin’은 모두 친구들의 장례식에서 영감을 얻은 곡들이다. ‘Leaving’은 겉보기엔 연인과의 이별을 다루는 듯하나, 사실은 근래 겪은 부모님의 죽음을 투영하고 있다.

우리의 사랑은 죽었지만

죽은 이들은 여전히 살아 있네

기억과 사유 속에서

그리고 그들이 남긴 맥락 안에서

나의 작사법과 우리의 작곡 철학에서 핵심적인 원칙 중 하나는, 팝 음악의 영역 밖에서 아이디어와 개념을 가져오려 노력하는 것이다. 나는 한 번도 ‘사랑은 부르주아적 구조물(Love is a bourgeois construct)’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지만, 학술적이거나 마르크스주의적인 언어를 팝송에 끌어들이는 아이디어를 좋아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구성하다 보니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기쁨)’ 같은 단어를 사용할 명분이 생겼다. 이 곡은 데이비드 로지의 소설 『좋은 일(Nice Work)』의 한 장면에서 영감을 받았는데, 이번 책을 위해 가사들을 정리하다 보니 생각보다 많은 책이 내게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때로는 단순히 책 제목을 빌려오기도 했다. 앤서니 트롤로프의 『그녀를 용서할 수 있을까?(Can You Forgive Her?)』나, 중고 서점에서 본 펠리컨 페이퍼백 시리즈인 D. J. 웨스트의 『영 오펜더(The Young Offender)』가 그랬다. 하지만 가사의 세부적인 서사가 책에서 비롯되는 경우도 꽤 많다. 나는 역사서를 즐겨 읽으며 그 안에서 많은 곡의 아이디어를 얻는다. 그 시작은 루도빅 케네디의 『스티븐 워드 재판』을 읽고 쓴 ‘Nothing has been proved’였다. 이 곡은 악명 높은 ‘프로퓨모 사건8’ 이면에 숨겨진 개인의 비극을 조명했다. 그다음은 아마도 데이비드 프라이스 존스의 『제3제국 치하의 파리』에서 읽은 프랑스 청년 하위문화에 관한 곡 ‘In the night’이었을 것이다. 이 외에도 여러 사례가 있으며, 이는 각 가사 하단의 주석에 설명해 두었다. 소설 역시 자주 영감이 되었다. 앞서 언급한 데이비드 로지의 소설 외에도, 프레데릭 롤프의 『하드리아누스 7세』의 주인공이 떠오른다. ‘Delusions of grandeur’를 노래하는 화자 역시 그와 비슷한 인물이다.

나는 러시아와 구소련의 역사와 문화에 언제나 매료되어 왔다. 그 아름다움과 잔혹함, 이데올로기와 현실의 괴리 같은 것들 말이다. (이는 종종 크리스를 질리게 만들기도 한다.) 이 선집에 수록된 ‘Silver age’, ‘My October symphony’, ‘The dead can dance’가 그러하며, ‘London’에서는 일자리를 찾아온 두 러시아 청년의 이야기를 다뤘다. 정치적 이슈도 자주 등장한다. 80년대 영국은 대처주의(Thatcherism)9가 지배하던 시기였고, 우리의 초기 곡 중 하나는 이를 잊지 못할 만큼 신랄하게 풍자했다.

나에겐 두뇌가 있고

당신에겐 외모가 있으니

우리 돈을 아주 많이 벌어봅시다

여기에는 토니 블레어에 관한 두 곡 ‘I’m with Stupid’와 ‘Legacy’가 실려 있으며, 점점 권위주의적으로 변해가던 신노동당(New Labour) 정부가 영국에 신분증(ID Card) 제도를 도입하며 내세운 핑계들에서 영감을 얻은 ‘Integral’ 같은 정치적 테마의 곡들도 있다.

잘못한 게 없다면

두려워할 것도 없지

숨길 게 있다면

애초에 여기 있어선 안 되고

나는 또한 정치적인 것과 개인적인 것을 결합해 공적인 문제가 사적인 공명을 일으키도록 만드는 방식을 즐긴다. ‘Twentieth century’가 대표적인데, 지금 읽으면 유럽 연합에 잔류하자는 호소처럼 들리지만, 동시에 위태로운 개인적 관계 속의 희망을 표현하기도 한다.

때로는 해결책이

문제 자체보다 나쁠 때가 있지

그러니 우리 계속 함께합시다

특정한 캐릭터를 설정하고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상상하며 글을 쓰는 것은 매우 해방감을 주는 일이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하나의 방식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여성의 관점에서 글을 쓰려 시도하며(성공했는지는 내가 판단할 수 없지만), ‘Rent’가 그 예다. 또한 자주 이성애자 남성의 페르소나를 빌리기도 한다(예컨대 ‘Only the wind’). ‘Delusions of grandeur’에서 나는 과대망상에 빠진 공상가이고, ‘Electricity’에서는 드래그 퀸, ‘Legacy’에서는 신노동당 정치인, ‘Odd man out’에서는 1961년 런던의 퀴어 미용사, ‘Shameless’에서는 90년대 초반의 연예인 지망생, ‘The dictator decides’에서는 비참한 독재자, ‘My October symphony’에서는 글라스노스트10 시기의 소련 작곡가, ‘The theatre’에서는 런던의 노숙인, ‘Single’에서는 스페인에 있는 친유럽 성향의 사업가, 그리고 ‘Your early stuff’에서는 뒷좌석에 펫 숍 보이즈 멤버를 태운 런던 택시 기사가 된다.

음악 산업(그리고 그 안에서의 우리의 위치)에 대한 풍자적 비판은 1990년 ‘How can you expect to be taken seriously?’를 발표한 이래 작업 전반을 관통하는 하나의 줄기가 되었다. 이번 선집에 포함된 ‘Ego music’, ‘How I learned to hate rock ’n’ roll’, ‘Miserablism’, 그리고 ‘Yesterday, when I was mad’가 그 대표적인 예다.

… 누군가 말했다. ‘두 분이 아직까지 활동하시니 참 보기 좋네요.

가진 건 별로 없으면서 정말이지 용케도 오래 버티셨어요.’

1972년부터 런던에 거주하며, 나는 이 도시의 거리와 그곳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끊임없는 영감을 얻었다.

서쪽 끝 동네, 막다른 골목 같은 세상에서

동쪽 동네 소년들과 서쪽 동네 소녀들

도시는 압박감을 만들어내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수단 또한 제공한다. 나는 런던을 사랑한다. 하지만 80년대에 쓴 ‘King’s Cross’에서 이곳은 절망적인 장소로 묘사되었고, 30년이 지난 후 ‘Twenty-something’에서는 ‘탐욕의 시대에 놓인 타락한 도시’로 그려졌다.

다행히도, 우리는 언제나 춤을 추러 나갈 수 있다. 나는 상처받은 마음이나 위험한 춤 같은 상투적 표현을 굳이 피하지 않는다. 그런 작곡가는 거의 없다. 이러한 상투성이 게으름의 산물일까? 아니면 과거의 노래들을 반향하며 대중음악이라는 긴 연속성—사랑, 희망, 자유, 즐거움, 섹스, 춤, 그리고 기억하거나 때로는 잊고자 하는 끊임없는 갈망의 표현—을 이어주는 고리일까? 이번 선집에는 싣지 않았으나, 춤에 관한 우리의 노래 ‘Vocal’의 한 구절을 인용해 본다.

오늘 밤의 모든 것이 옳고, 더없이 젊게 느껴지네

목소리 높여 말하고 싶은 그 무엇이든 노래가 되어 흐르리

음악 속에 깃들어 있네

노래 속에 살아 있네

우리를 감싸는 온기의 감각은

이토록 강렬하네

이 책에 실을 곡과 제외할 곡을 고르면서, 나는 페이지 위에서 텍스트로 읽었을 때 가장 좋은 가사들을 선별했다. 하지만 사실 이곳은 가사가 머물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서식지는 아니다. 자신의 가사를 책으로 엮는 작곡가라면 누구나 방어적으로 이렇게 덧붙일 것이다. 이 글들은 시로서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과 함께 불리기 위해 쓰였다고 말이다. 또한 모든 작사가는 저마다 부끄러운 비밀을 하나씩 품고 있다. 때로는 단어의 의미보다 그 단어가 내는 소리 자체가 훨씬 더 중요할 때가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결국 불리기 위한 노래를 쓴다. 모쪼록 즐겁게 읽어주기를 바란다.

2018년 2월 런던에서 닐 테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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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Noël Coward" (노엘 카워드): 20세기 영국의 극작가, 배우, 작곡가로 위트 넘치는 대사와 세련된 대중음악으로 유명.

  2. "Incredible String Band": 1960년대 중반 결성된 스코틀랜드 출신의 사이키델릭 포크 그룹.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음악 세계로 당대 히피 문화와 지식인 층에 큰 영향을 주었다.

  3. "Rough Trade": 런던의 전설적인 독립 음반점이자 레이블. 당시 뉴웨이브와 펑크 문화를 향유하던 젊은이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

  4. "Camp" (캠프): 과장되고 인위적이며, 때로는 우스꽝스럽거나 화려한 미학적 스타일. 성소수자 문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유의 유희적 태도를 일컫기도 한다.

  5. "Bobby Orlando" (보비 올랜도): 80년대 하이 에너지(Hi-NRG) 댄스 음악의 거물. 펫 숍 보이즈의 초기 사운드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실제로 그들의 데뷔 싱글 'West End Girls'의 첫 버전을 프로듀싱하기도 했다.

  6. "Dr Rhythm": 1980년대 초반 널리 쓰인 보스(BOSS) 사의 초기형 드럼 머신.

  7. "The Rite of Spring" (봄의 제전): 스트라빈스키의 혁명적인 발레 음악.

  8. "Profumo affair" (프로퓨모 사건): 1963년 영국을 뒤흔든 대형 정치 스캔들. 육군 장관 존 프로퓨모가 소련 측 스파이와 연루된 모델 크리스틴 키러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은 사건으로, 맥밀런 내각이 붕괴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9. "Thatcherism" (대처주의): 1980년대 마거릿 대처 총리가 추진한 신자유주의적 정책 기조. 개인의 책임과 시장 경쟁을 강조했는데, 'Opportunities'의 가사는 이러한 시대적 물신주의를 냉소적으로 풍자한 것.

  10. "Glasnost" (글라스노스트): 80년대 후반 소련 고르바초프가 추진한 '개방' 정책. 'My October symphony'는 이러한 격변기 속에서 예술가가 느끼는 혼란을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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