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에 매혹되다 (번역)
Garth Greenwell 「 Enamored of the Abyss 」
이 짧은 소설의 결말에서 인물들이 맞이한 파멸을 돌아보라. 화자인 데이비드는 약혼녀 헬라에게 버림받은 채 프랑스 남부의 텅 빈 셋집에서 홀로 밤을 지새운다. 그는 이 시간을 인생에서 가장 끔찍한 밤이라 부르며, 자신이 배신한 남자 조반니를 떠올린다. 데이비드는 그를 분명 사랑했다고 주장하며, 조반니 역시 그를 온 마음으로 사랑했다. 헬라는 며칠 동안 게이 바에 처박혀 폭음하던 데이비드를 찾아냈다. 당시 그는 어느 해군의 품에 안겨 있었고, 그 해군은 헬라를 보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폭소를 터뜨렸다. 이제 헬라는 미국으로 돌아가는 증기선에 몸을 실었다. 어쩌면 그녀는 독신 생활에서 마주할까 봐 두려워하던 무분별한 성적 방종에 벌써 빠져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작가 볼드윈에게 이러한 방종은 도덕적 혼란과 타락을 의미할 뿐이었다. 그의 작품은 종종 노골적인 성적 묘사 때문에 외설이나 포르노라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작가 커리어의 시작부터 끝까지 사실상 엄격한 성적 도덕주의자였다. 데이비드와 조반니가 처음 만났던 바의 주인인 귀족 기욤은 조반니에게 살해당했다. 한때 자신의 직원이었던 조반니를 기욤은 끈질기게 교제를 강요했고, 마침내 그를 손에 넣은 뒤에는 모욕을 일삼았다.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조반니는 완벽한 욕망의 대상이자 지극히 남성적이고 당당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가난과 데이비드의 결별로 무너진 뒤 성매매의 길로 빠져들고 만다. 볼드윈에게 성매매 역시 타락과 혼란으로만 간주되는 행위였다. 결국 조반니는 여성화되었고, 자신이 예전에 '혐오스러운 동성애자 무리'라 부르며 멸시했던 이들의 처지로 전락했다. 현재 조반니는 죄를 짓고 감옥에 갇혀 있으며, 새벽이 오면 단두대로 끌려가 처형당할 자기 운명을 알지 못한 채 서서히 종말을 향해 가고 있다.
나는 지난 20년 동안 『조반니의 방』을 수없이 가르쳤다. 앞서 요약한 내용을 생각하면, 최근 몇 년 사이에야 이 책에 대한 반발이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다. 만약 이 소설을 쓴 작가가 우리 시대의 성인(聖人)과도 같은 존재인 볼드윈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자주 문제 제기를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가장 깊이 있게 다가온 반발은 몇 년 전, 한 명문 대학원의 문예창작과 세미나에서 퀴어 미학을 주제로 이 책을 가르쳤을 때 나왔다. 문제를 제기한 학생은 나이지리아 출신의 천재적인 시인이었는데, 자신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의견을 냈다. 동성애가 여전히 불법이고 성소수자들이 일상적인 폭력에 노출된 나라에서 온 독자에게, 비극과 끊임없는 부정함으로 가득 찬 볼드윈의 소설은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말이었다. 나는 이 지적의 진지함에 감탄했고 큰 감명을 받았으며, 이 글은 여러 면에서 그 학생의 의견에 답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나는 이 학생의 반발이 우리가 읽는 책으로부터 어떤 확신과 긍정을 얻고자 하는 열망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예술을 논할 때, 특히 퀴어 예술가나 퀴어에 관한 예술을 다룰 때 '긍정적'이라는 단어는 자주 쓰인다. 우리가 흔히 '담론'이라 부르는 거대한 여론의 장에서는 이 단어가 찬사와 권유의 의미로 널리 통용된다. 하지만 다른 수많은 비평 용어와 마찬가지로, 이 단어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파악하기는 다소 어렵다. 삶에 대한 긍정도,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도 아닌, 목적어 없이 모호한 분위기처럼 떠도는 긍정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실재하며 작가들에게 실질적인 압박으로 다가온다. 나를 비롯해 내가 아는 다른 작가들도 그런 압박을 느껴왔다. 우리의 작품이 너무 슬프다거나, 지나치게 퇴행적이라거나, 학자 헤더 러브가 말한 '낙후된 감정'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는 불만 속에서, 나는 긍정을 바라는 이 열망을 고스란히 느낀다.
하지만 ‘긍정’이란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가? 옥스퍼드 영어사전에서 정의한 ‘affirm’의 맨 마지막 조항인 7b(미국 영어 한정)만이 이 질문에 유용한 답을 준다. (1번부터 6번까지의 정의는 주로 법률적이거나 논리적인 성격을 띤다.) 거기에는 ‘정서적 지지나 격려를 보내는 것’이라고 적혀 있으며, 관련 인용문은 1970년부터 등장한다. 오늘날 우리가 쓰는 방식은 이보다 조금 더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긍정하는 예술’이 ‘정서적 지지나 격려를 느끼게 해주는 예술’을 뜻한다면, 여기서 ‘느끼는 주체’는 대개 특정 정체성, 특히 소위 소외된 정체성 범주와 밀접하게 연결되거나 일치하기 마련이다. 문화계 일각에서는 이를 두고 ‘치유 중심 사회’라며 코방귀를 뀌고 경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가 나타내는 열망, 즉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재현되고 싶다는 열망을 가볍게 치부하고 싶지 않다. 내 학생은 이 열망이 지닌 현실적인 무게가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 열망을 충족할 수 있는 더 풍부한 방법을 찾는 일이다. 내가 『조반니의 방』에 대한 학생의 반발을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인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 역시 동성애가 범죄로 규정된 곳에서 자랐고, 에이즈 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시절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견딜 만한 미래는 차단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다소 신파조로 들릴지 모르지만 다른 표현을 찾기 어려운데, 바로 그런 상황에서 볼드윈의 소설이 내 삶을 구원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공개적인 자리에서 너무 자주 반복해 온 탓에, 이제는 그 안에 담긴 진실을 되찾으려 애써 노력해야 할 정도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미국 남부에서 자란 열네 살의 게이 소년이 서점 책장에서 우연히 볼드윈의 소설을 뽑아 들었을 때, 그 책이 존엄성에 대한 나의 관점을 어떻게 근본적으로 뒤바꾸어 놓았는지에 대한 진실 말이다. 이 소설을 더 많이 읽고 가르칠수록 그 이유를 설명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학생들이 가끔 제기하는 반발에는 충분한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어디에서도 게이들이 온전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암시는 나오지 않는다. 책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은 결국 죽거나 파멸을 맞이한다. 인물들, 특히 게이 인물들의 존엄성을 이토록 철저히 빼앗으려는 책에서 나는 어떻게 존엄성을 찾았을까? 심연에 이토록 매료된 책에서 나는 어디서 긍정을 발견했을까? (실제로 텍스트는 ‘동굴’, ‘갈라진 틈’, ‘공허’, ‘상처’처럼 존재하지 않는 것들의 저장소인 어둡고 텅 빈 공간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수많은 세대의 퀴어들, 특히 게이 남성들은 『조반니의 방』에서 자신들에게 꼭 필요했던 어떤 확신과 긍정을 발견해 왔다.
따라서 이 글은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탐구이며, 나는 여기에서 두 가지를 수행하고자 한다. 첫째, 학생들의 반발로부터 『조반니의 방』을 변호하기는커녕, 오히려 그들보다 더 나아가 이 소설의 밑바탕에 깔린 혐오적 논리를 증명해 보이고 싶다. 내가 느끼기에 이 소설은 게이 남성과 그들의 삶을 묘사할 때 동성애 혐오적 논리를 구조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둘째, 동성애를 가치가 전혀 없고 지속적인 사랑이나 우정, 혹은 그 어떤 가치 있는 삶도 지속할 수 없는 것으로 표현한 이 소설이 어떻게 내게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주었는지 이해해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예술이 주는 긍정이란 무엇인지, 즉 예술이 우리 삶에 어떤 방식으로 도움을 주는지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소설의 후반부를 여는 매우 유명한 문단을 살펴보자. 볼드윈의 현대적 계승자이자 훌륭한 옹호자 중 한 명인 힐턴 알스는 이 대목을 "소설에서 가장 강력한 구절 중 하나"라고 불렀다. 또한 "볼드윈이 자신과 주인공에게 사랑이 얼마나 평온하고 충만한 것인지를 처음으로 느끼게 해 준 장면"이라고 평가했다.
그 방에서의 삶은 마치 바다 밑에서 일어나는 일 같았다. 시간은 우리 위로 무심히 흘러갔고 시간과 날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처음에는 함께하는 삶 속에 매일 새로운 기쁨과 놀라움이 있었다. 물론 그 기쁨의 밑바닥에는 고통이 있었고, 놀라움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고통과 두려움은 우리의 찬란했던 시작이 혀끝에서 쓴맛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때쯤 고통과 두려움은 우리가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바닥이 되어 버렸고, 그 위에서 우리는 균형과 존엄과 자존심을 잃었다. 수많은 아침과 낮과 밤 동안 내가 기억해 두었던 조반니의 얼굴은 내 눈앞에서 굳어 갔고, 은밀한 곳부터 무너지며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눈빛은 번득이는 광채로 변했고, 넓고 아름다운 이마는 그 아래 숨은 해골을 연상시키기 시작했다. 관능적이던 입술은 마음에서 넘쳐흐르는 슬픔을 감당하느라 안으로 말려 들어갔다. 그것은 낯선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아니, 그를 바라보는 내 마음에 너무나 큰 죄책감이 일어 그것이 차라리 낯선 사람의 얼굴이기를 바랐다. 내가 그의 얼굴을 아무리 기억해 두었어도, 그 기억이 불러오는 데 일조한 이 비극적인 변모에는 전혀 대비할 수 없었다.
이 구절은 그야말로 기교가 돋보이는 눈부신 성취다.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는 젊은 작가의 흥분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하지만 이곳에서 '평온하고 충만한' 구석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직 세 번째 문장 안에서 시작되고 끝난다. 인정하건대 그 문장이 담고 있는 주장은 놀랍고, 이 소설 전체를 통틀어 독보적이다.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기쁨과 놀라움'이라는 표현은 근원적인 긍정이다. 이는 두 남자의 결합, 그리고 그들이 조반니의 방에서 잠시나마 이룩한 가정생활에 특별한 가치를 부여한다. 모든 혐오적 논리가 동성애를 불모의 것으로 치부하는 것과 달리, 이들의 결합에 무언가를 새로이 만들어내고 번창하게 하는 이성애 고유의 원초적 특권을 부여한 것이다.
하지만 그 긍정은 단지 주장일 뿐이며, 책 속 그 어디에서도 입증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마주하는 데이비드의 행복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 그의 기쁨에는 언제나 양가감정이 짙게 베여 있다. 바로 다음 문장은 볼드윈이 던진 근원적 긍정을 곧바로 거두어 가고, 문단의 나머지 부분은 부정을 거듭 쌓아 올린다. 고통과 두려움, 그리고 ‘균형과 존엄과 자존심’의 상실이 이어진다. 뒤이어 등장하는 조반니의 얼굴 이미지는 매우 강렬하다. 마치 공포 영화의 타임랩스처럼 그의 얼굴은 균열이 가며 변모하고, 이내 해골과 흡사한 모습으로 바뀐다. 이는 소설 속에서 언제나 동성애 및 여성화와 결부되어 나타나는, 살아있는 죽음을 형상화한 기괴하고 방대한 고딕풍 이미지 연작의 일부다. 아울러 이 타임랩스는 그들의 공동 생활을 소개하는 바로 이 문단에서조차, 데이비드가 조반니에게 느끼는 감정이 이미 죄책감으로 변해 버렸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문단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마지막 문장이다. 기억(memorizing), 변모(metamorphosis), 기억(memorizing)으로 이어지는 청각적 기교가 너무나 눈부셔 그 안에 담긴 함의를 간과하기 쉽다. 이 문장은 데이비드와 조반니의 연애가 기쁨에서 고통으로, 경이에서 죄책감으로 흘러가는 과정이 우연이 아님을 시사한다. 그것은 마치 사랑의 첫 행위, 즉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바라보는 일이 필연적으로 사랑의 종말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는 듯이 단단히 고정되어 있다. 그들의 관계가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 훗날 조반니가 ‘파멸’이라 부르게 될 그 예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데이비드와 조반니가 겪는 고통은 단순히 환경에 따라 우연히 일어난 일이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동성애 혐오적인 논리가 실현된 예정된 운명이다. 데이비드와 조반니의 사랑이 파멸을 맞이한 이유는 시대와 장소, 즉 사회적으로 형성된 동성애 혐오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이 책도 그러한 사회적 혐오를 인지하고는 있다. 하지만 볼드윈의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은, 남성 간의 지속적인 사랑이라는 개념이 역사적으로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논리적으로도 모순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논리는 데이비드 개인의 자기혐오나 빈약한 상상력에서 비롯된 독특한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이 소설의 세계관 전반에서 여과 없이 실현된다.
이러한 논리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곳은 두 장에 걸쳐 길게 이어지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데이비드와 조반니가 만난 바에서 시작해 조반니가 가장 좋아하는 레알의 식당을 거쳐, 마침내 조반니의 방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일련의 과정은 소설에서 가장 가볍고 달콤한 순간들을 담고 있다. 조반니와 데이비드가 나누는 장난스럽고 설레는 대화, 그리고 서로에게 끌리는 흥분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하지만 동시에 게이 남성에 대한 가장 신랄하고 고통스러운 묘사도 함께 나타난다. 데이비드는 여성성을 극도로 혐오하며, 기욤의 바를 가득 채운 '폴(folles)
'폴(folles)'은 프랑스어로 '미친 여성들'을 뜻하는 형용사 'fou'의 여성 복수형 명사다. 이 소설의 배경인 1950년대 파리의 퀴어 하부문화에서는 성별 규범을 따르지 않고 여성적인 기질을 드러내는 게이 남성들을 속되게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영어의 'queen'이나 'sissy', 한국어의 '끼순이'와 유사한 맥락을 지닌다. 화자인 데이비드는 이들을 보며 깊은 혐오감을 느낀다. 그는 이성애자 남성은 진짜 여자를 원할 것이고, 동성애자 남성은 남성적인 남자를 원할 테니, 여성성을 흘리는 이들은 그 누구에게도 성적 선택을 받지 못할 가련하고 무용한 존재라고 단언한다. 이는 당대 사회의 지독한 동성애 혐오가 퀴어 당사자의 내면에 어떻게 투사되었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데이비드는 보통 이들을 뚜렷하게 구별하지 않고 자주 동물에 비유한다. 한 문단 안에서 그들은 앵무새나 공작새로 묘사되며, 그들의 수다는 '가축 우리'의 소음으로 치부된다. 여성성에 대한 이러한 혐오는 볼드윈의 소설과 에세이 전반에 걸쳐 반복된다. 에세이 『거리의 부랑자(No Name in the Street)』의 한 기이한 대목에서 볼드윈은 엘드리지 클리버가 자신에게 퍼부은 악의적인 동성애 혐오적 공격을 나름대로 변호한다.
엘드리지 클리버(Eldridge Cleaver, 1935~1998), 1960년대 급진적 흑인 해방 운동 단체인 블랙 팬서당(Black Panther Party)의 핵심 지도자이자 사상가. 엘드리지 클리버가 자신의 책 『감옥에서 보낸 편지』(1968)에서 볼드윈을 '거리의 부랑자' 같은 존재라며 동성애 혐오적으로 격렬하게 비난했으나 몇 년 후, 제임스 볼드윈은 자신의 책 『거리의 부랑자(No Name in the Street)』(1972)를 쓰면서, 클리버가 썼던 표현을 책 제목으로 가져와 사용했다.
나는 그가 나를 남성의 말할 수 없는 타락과 혼동했다고 느꼈다. 감옥에서 그를 몇 번이고 구토하게 만들었을, 그 수많은 동성애자, 얼치기, 겁쟁이들과 나를 똑같이 본 것이다.
데이비드와 마찬가지로 볼드윈에게도 '그릇된 부류의 동성애자'가 되는 것은 압도적이고 본능적인 혐오의 원천이었다. 단 하나의 예외를 제외하면, 『조반니의 방』에 등장하는 퀴어들의 사회적 연대는 예외 없이 파괴적이다. 그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중독적인 수다와 정복의 암시, 그리고 서로에 대한 경멸'뿐이다. 게다가 그들이 기욤의 바에 모여드는 공통의 열망과 성적 충동은 데이비드가 보기에 필연적으로 실패와 무용함으로 귀결될 뿐이다.
나는 그들이 누군가와 잠자리를 같이한다는 사실을 늘 믿기 어려웠다. 여자를 원하는 남자라면 당연히 진짜 여자를 찾을 것이고, 남자를 원하는 남자라면 결코 그들 같은 부류를 원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에게 남성 간의 이끌림이란 오직 남성미와 남성미의 결합일 때만 성립한다. 이 점은 볼드윈의 다른 작품 전반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여성스러운 기질은 언제나 성적 욕망을 사그라뜨린다. 데이비드와 조반니가 서로에게 끌릴 수 있었던 이유는 데이비드의 멘토 역할을 하는 연상의 게이, 자크가 말한 그들의 '결점 없는' 남성성 덕분이었다. 즉 이성애자로 보일 법한 겉모습을 가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데이비드에게는 약혼녀 헬라가 있었고, 조반니 역시 이탈리아에 아내를 두고 왔다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진다. 두 사람이 몇 달 동안 함께 지낸 끝에 관계의 종말을 맞이했을 때도, 데이비드는 조반니가 사실 이성애자라고 단언한다. 데이비드는 그에게 진정으로 원하는 여성을 쫓아갈 용기가 없어서 자신을 선택한 것뿐이라며 몰아세운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역학 관계 때문에 남성 간의 헌신은 서로를 나약하게 만들 뿐이다. 데이비드와 조반니가 그의 방에서 이루려 했던 가정이 바로 그러했다. 데이비드는 조반니가 자신을 조그만 여자아이 취급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자신은 남자라며, 우리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느냐고 외친다.
인간의 존엄성을 가장 강력하게 주장하는 소설 속 장면에서조차, 남성 간의 사랑은 덧없이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 주장 역시 조반니와 데이비드의 첫 만남을 다룬 긴 장면에서 나온다. 뜻밖에도 그 말을 꺼낸 이는 자크다. 그는 인간적인 절망을 드러내며 데이비드를 놀라게 한다. 자신의 절망을 또렷하게 직시하는 그의 모습은 이 순간만큼은 강력한 도덕적 권위를 갖는다. 기욤의 바가 문을 닫은 뒤, 조반니가 일행을 데려간 식당에서 자크는 데이비드에게 그를 사랑하라고 격렬하게 외친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조건을 덧붙인다. 둘 다 남자이고 아직 갈 길이 먼 처지이니, 아무리 좋아 봐야 그 사랑이 얼마나 오래가겠느냐는 냉소다. 자크는 길어야 고작 5분일 뿐이며, 슬프게도 그 시간의 대부분은 어둠 속에서 흘러갈 것이라 확언한다.
너희는 둘 다 남자이고, 아직 어디든 갈 수 있는 처지이니까.
데이비드가 실제로 경험한 이성애는 파탄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 경험 속에서도 이성애적 삶에 대한 생각만큼은 온전히 유지되었다. 이성애는 인간적 가치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애착까지 담아낼 수 있는 안식처로 여겨졌다. 조반니와 관계를 맺은 지 몇 달이 지났을 때, 데이비드는 미국인 지인인 수라는 여성과 약탈적이고 서로에게 모욕감을 주는 성적 접촉을 가졌다. 그런 일을 겪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그는 이성애적 결합이 보장하는 '안전의 그물망'을 환상처럼 떠올렸다. 그는 속으로 아이들을 원했다. 빛과 안전함 속에서 자신의 남성성을 의심받지 않은 채, 아내가 아이들을 재우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시 그 안전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볼드윈이 게이의 삶을 묘사할 때 가득 채웠던 물의 이미지("그 방에서의 삶은 마치 바다 밑에서 일어나는 일 같았다")와 달리, 데이비드는 이성애를 메마르고 변함없는 땅으로 인식했다. 그는 여성이 자신에게 대지처럼 견고한 기반이 되어 주기를 바랐고, 그곳에서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기를 원했다.
데이비드에게, 어쩌면 이 소설 전체에게도 게이의 욕망이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종말은 방종이라는 악몽뿐이다. 데이비드와 조반니가 어느 봄날 체리 한 봉지를 나누어 먹으며 함께 걸었던 가장 아름다운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스쳐 지나가는 해군을 향해 문득 일어난 욕망의 고통은 데이비드를 도덕적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조반니가 내 안에서 깨운 야수는 다시는 잠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언젠가 나는 더 이상 조반니와 함께하지 않게 될 터였다. 그렇다면 나도 다른 모든 이들처럼, 신만이 아는 그 어두운 길을 따라, 그 어두운 공간 속으로 온갖 소년들을 뒤쫓아 가며 헤매게 될 것인가?
이는 반복되는 두려움이다. 이러한 두려움은 게이가 갈망하는 대상을 대체 가능한 존재, 즉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 뿐만 아니라 그 욕망의 주체마저도 무의미하게 만든다. 데이비드는 자신의 미래를 그러한 대상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과정으로 상상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잠시 후 담배 연기처럼 일어나 사라져 버릴, 어젯밤의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의미한 소년"에 불과한 존재들이다. 게이 남성들은 모든 구성원이 동일한, 즉 각자가 "다른 모든 이들과 다를 바 없는" 집단이다. 체리를 나누어 먹던 장면에서 데이비드는 자신의 동성애적 미래를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인다. 비록 나중에 헬라를 통해 그 미래에서 도망치려 애쓰지만, 그 미래에 조반니의 자리는 없다. 데이비드는 "이 두려운 예감과 함께, 내 안에서 조반니를 향한 증오가 피어올랐다. 그 증오는 내 사랑만큼이나 강렬했고, 사랑과 같은 뿌리에서 자라났다"라고 말한다. 이는 동성애적 욕망이 걸어갈 수밖에 없는 단 하나의 외길을 보여주는 또 다른 치명적인 이미지다. 그 길에서 사랑은 필연적으로 증오로 변하고 만다.
자크는 긍정의 순간에 데이비드에게 조언한다. 만약 조반니를 향한 사랑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어둠 속에서의 그 5분은 "결코 더러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며 "서로에게 두 사람 모두를 영원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남성 간의 사랑이 어떤 방식으로든 인간을 발전시킬 수 있음을 암시하는 소설 속 유일한 대목이다. 소설의 세계관뿐만 아니라 1950년대 중반의 미국 문화 전반을 고려할 때도 이는 매우 주목할 만한 선언이다. 그러나 이 역시 결국에는 공허하게 느껴진다. 소설이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어떠한 증거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에 깔린 가장 가혹하고 끊임없는 동성애 혐오적 시선이다. 소설은 모두의 운명이 똑같이 비참하고, 모두의 미래가 차단된 게이의 삶을 보여준다. 자크가 조언을 건네기 전, 데이비드는 나이 든 고객과 함께 있는 젊은 성매매 남성을 바라보며 그들의 삶에서 모든 가능성을 앗아가는 방식으로 두 사람을 정의한다.
세상의 모든 더러움과 질병을 담아둔 그릇처럼 보이는 노인, 그리고 그 노인의 흐릿한 눈빛에서 미래라는 실재하는 무언가를 읽어낼 수만 있다면 언젠가 그 노인처럼 변해버릴 붉은 머리의 젊은 소년.
이 마지막 구절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모른다. 소설은 이 주장을 끊임없이 증명해 보인다. 볼드윈의 소설에서 이성애는 결혼, 부모 됨, 조부모 됨처럼 의미 있는 단계들로 이어지는 삶을 선사한다. 비록 그것이 하나의 순환을 이룰지라도, 최소한 그럴듯한 만족감과 온전함을 만들어내는 삶이다. 반면 동성애자의 삶은 결실 없는 정체와 메마른 반복의 연속일 뿐이다. 데이비드와 결별한 후 조반니가 가난과 여성화 속으로 추락하는 모습을 지켜본 기욤을 두고, 데이비드는 이렇게 생각한다. "기욤과 그의 무리는 잘 알고 있었다. 조반니의 새로운 자유와 연인 없는 상태가 결국 방탕과 소란으로 변하리라는 것을. 그들 모두에게 예외 없이 일어났던 일이었다." 『조반니의 방』에서 동성애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가 이미 쓰여 있고 그 결말 또한 예정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데이비드가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미래는 결국 미래가 없는 삶이다. 매일 밤 정체를 알 수 없고 무의미한 소년을 만나는 끝없는 성적 방종의 다양성은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다양성도 주지 못한다. 그 삶 속에서는 모든 것이 오직 같고, 같고, 같고, 같을 뿐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 소설의 동성애 혐오적 논리를 이토록 오랫동안 상세히 파헤치는 과정은 흡사 기소장을 읽어 내려가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내 의도는 결코 『조반니의 방』을 규탄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이 오늘날 예술을 둘러싼 수많은 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종의 긍정을 어떻게 선사하는지 이해하기 위함이다. 앞서 말했듯, 나는 긍정을 향한 열망을 사소하게 보지 않으며 예술을 훼손하는 일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충분히 엄격한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정서적 지지나 격려'는 수많은 영적·철학적 활동의 핵심에 자리한 치유의 목표와 맞닿아 있다. 그것이 기둥 위에서 고행하던 사막 교부
초기 기독교 시절 신과 더 가까워지고 세속의 유혹을 끊기 위해 높은 기둥 꼭대기에 올라가 수년에서 수십 년 동안 내려오지 않고 수행했던 수도사들을 뜻한다.
그러나 '긍정적'이라고 찬사받는 오늘날의 수많은 현대 예술은 기이할 정도로 이러한 엄격함과 진지함에 미치지 못한다. 특히 특정 정체성의 맥락에서 '긍정의 문학'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긍정적 재현'이라는 개념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이 개념은 최근 몇 년 동안 수많은 논쟁을 거치며 나름의 정교함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소설 속 인물이 흠잡을 데 없이 깨끗해야 한다거나, 그들의 행동이 특별히 존경할 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긍정적'이라는 찬사를 받는 수많은 예술은 결국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회복 불가능하지는 않다는 세계관을 보여주는 듯하다. 아무리 가혹한 시련에 직면할지라도, 그리고 비록 그 잘못을 바로잡는 데 여러 세대가 걸릴지라도, 결국 모든 것은 극복될 수 있다는 세계관 말이다.
우리가 예술로부터 필요로 하는 진정한 긍정은 이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상실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회복 불가능한 현실 속에서 삶에 "예라고 말할 수 있도록"(볼드윈이 『조반니의 방』을 비롯한 여러 글에서 사용한 표현이다) 도와줄 예술이 필요하다. 이는 특정 정체성에 대입되거나 역사적으로 결정되는 종류의 '정서적 지지나 격려'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론적 조건 자체에 내재된 격려이며, 독특할 정도로 냉정하면서도 가슴을 뛰게 하는 격려다. 회복 불가능함을 배제하는 예술은 내가 여기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진정한 긍정의 가능성 또한 배제한다. 그러한 예술은 그저 삶을 위한 선전에 불과하며 우리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내가 예술을 논하는 자리에서 쓰이는 '긍정적'이라는 단어가 자칫 놓칠까 봐 우려하는 지점도 바로 이것이다. 우리 삶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한계와 유한함, 취약함, 그리고 뜻하지 않은 운명 앞에서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힘이 얼마나 보잘것없는가에 대한 인식 말이다.
예술이 건네는 "예"라는 대답이 설득력을 얻고 우리에게 유용하려면, 그것은 반드시 "아니오"를 통과한 대답이어야 한다. 즉 부정함을 내포한 긍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예술이 우리가 삶에 진정으로 "예"라고 말할 수 있도록 도우려면, 실패의 가능성과 죽음의 필연성을 반드시 인정해야 한다. 볼드윈이 『다음에는 불이다(The Fire Next Time)』에서 정의한 현실의 개념이 떠오른다. 그는 우리의 모든 신화가 결국 이 현실을 방어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 보았다. 그가 말한 현실이란 다음과 같다.
삶이 비극적이라는 사실이다. 삶이 비극적인 이유는 단순히 지구가 돌고 태양이 거침없이 뜨고 지기 때문이며, 언젠가 우리 모두에게 태양이 아주 마지막으로 저물 날이 오기 때문이다. 우리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근원은 어쩌면 단 하나의 확실한 사실인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우리 삶의 모든 아름다움을 희생시키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이라는 사실. 이 얼마나 평범하고 진부한 결론인가. 하지만 『조반니의 방』에서 데이비드가 말하듯, 삶의 진짜 문제 중 하나는 인생이 너무나 진부하다는 점이다.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의 의미는 무엇인지와 같은 인류의 영원한 질문들은 모두 진부하다. 그 질문에 답하려는 우리의 모든 시도 역시 진부하기는 마찬가지다.
때로 예술의 주된 역할은 이러한 질문과 시도들을 비추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은 그것들을 진부함이라는 무기력한 소음 속에서 건져내어, 우리가 존재론적 절박함으로 느끼도록 만든다. 내가 예술 창작의 핵심이자 진정한 가치라고 주장하고 싶은 '긍정'을 선사하기 위해서, 예술은 회복 불가능한 현실을 부정하는 주류 문화에 동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예술은 우리가 볼드윈이 말한 현실을 직시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수용하도록 도와야 한다. 파멸의 그림자, 혹은 파멸의 빛 속에서도 우리가 삶에 "예"라고 말할 수 있도록 지탱해 주어야 한다.
대학원 강의실에서 나온 학생의 지적은 이 글을 쓰게 된 하나의 계기였다. 또 다른 계기는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6년 내가 《가디언》지에 기고했던 『조반니의 방』에 관한 에세이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그 글이 발표되었을 때도 나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내 글에 단순한 오류를 넘어 자기기만적인 부분이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볼드윈의 소설에서 내 스스로 외면하려 했던 요소들이 분명히 존재했다.
따라서 이번 글은 앞서 상세히 분석한 동성애 혐오적 논리로부터 소설을 구원하고자 했던 과거의 주장을 철회하는 중요한 반론이기도 하다. 당시 나는 조반니라는 인물을 통해 소설의 동성애 혐오가 상쇄된다고 주장했다. 그가 데이비드를 괴롭히는 수치심으로부터 자유롭기에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이러한 자유와 수용성이 게이의 삶을 비극적으로 바라보는 이 책의 시선이 절대적이지 않음을 증명한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면서 나는 조반니라는 인물을 충분히 정독하지 못했다. 또한 소설이 묘사하는 '조반니의 방'의 의미도 제대로 읽어내지 못했다.
데이비드는 그 방이 "둘이 쓰기에는 좁다"고 묘사한다. 조반니는 창문에 하얀 광택제를 발라 밖이 보이지 않게 가려두었다. 누군가 지나갈 때면 그는 "사냥개처럼 몸을 뻣뻣하게 굳힌 채 완벽한 침묵을 지키곤" 했다. 방 안은 공구와 페인트붓, 깨진 벽돌 조각들로 가득하다. 데이비드와 조반니는 폭력이 폭발할 것 같은 비극적인 대치의 순간에 이 벽돌 조각들을 쥐기도 한다. 방에는 더러운 빨랫감과 식기, 짐가방, 낡은 바이올린도 널려 있다. 이 모든 것은 "조반니가 게워낸 인생의 파편들"이다. 그 방에서 처음 깨어난 순간부터 데이비드는 이 방의 무질서가 "처벌과 슬픔의 문제"임을 직감한다. 이는 경이로움과 기쁨으로 가득 찬 "찬란한 시작"이라는 생각과 완전히 배치되는 깨달음이다. 그는 이 방을 "치명적이고 피할 수 없는 위험"으로 받아들인다. 갑자기 분위기와 어조가 바뀌면서 창문은 "얼음과 불로 된 거대한 두 눈"으로 변한다. 그가 처음 깨어난 그날 오후, 방은 천장이 "악마들이 말을 걸어올 것 같은 먹구름처럼" 내려앉는 문자 그대로의 지옥도로 변해버린다.
방에 대한 데이비드의 이러한 느낌은 소설 극후반부에 사실로 확인된다. 우리는 여기서 조반니가 왜 아내와 행복했던 고향 마을을 떠났는지 알게 된다. 아이가 사산되자 조반니는 신을 저주하고 십자가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아기를 묻은 뒤 도망쳤다. 조반니는 그날을 "내가 죽은 날"이라 부른다. 그 이후로 그는 "신께서 내 모든 죄와, 주님의 거룩한 아들에게 침을 뱉은 죄를 분명 벌하고 계신 것"이라 말한다. 조반니의 삶은 데이비드 때문에 망가진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그의 삶은 이미 파탄 나 있었다. 조반니는 그토록 활기차고 열정적인 인물이었음에도, 결국 이 소설에서 살아있는 죽음을 보여주는 가장 극단적인 사례로 드러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조반니가 동성애로 돌아선 것은 소설의 동성애 혐오적 논리를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 조반니가 맞이한 결말 역시 마찬가지다. 앞서 말했듯 조반니는 데이비드가 떠난 뒤 여성화되어 "비굴하고 타락한 존재"가 된다. 비록 노골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그가 성매매로 흘러들었음은 명백하다. 이러한 변모는 소설 말기에 조반니가 겪는 몰락의 일부다. 그의 운명은 다른 모든 동성애자들의 운명과 다를 바 없다. 그는 동성애자의 삶이 보여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정해진 결말을 그대로 증명할 뿐이다.
하지만 조반니는 완전히 그렇지만은 않다. 그는 소설의 동성애 혐오적 논리에서 도망치는 대신, 오히려 그것을 완성함으로써 이야기의 흐름을 바꿀 방법을 찾아낸다. 소설의 결말 무렵, 데이비드는 언론에 숨 가쁘게 보도된 세부 정보를 바탕으로 조반니가 기욤을 살해하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는 매우 충격적인 장면이다. 소설 자체도 이 장면에 불안해하는 듯 현재 시제와 과거 시제를 불안하게 넘나든다. 데이비드의 상상 속에서 기욤은 조반니에게 성관계를 강요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고도 조반니에게 바의 일자리를 돌려주지 않는다. 기욤은 조반니의 굴욕을 즐기며 까불거리다가 마침내 선을 넘고 만다. 기욤의 살해는 조반니의 구원, 적어도 그가 잃어버렸던 남성성의 회복으로 묘사된다. "그 손길과 매번 가해지는 타격으로 그의 가슴 깊은 곳에 자리한 참을 수 없는 무게가 걷히기 시작했다. 이제 조반니가 즐거워할 차례였다." 조반니는 로브의 끈으로 기욤의 목을 졸라 죽이면서, 기욤이 무거워질수록 매 순간 가벼워짐을 느낀다. 이는 소설에 깔린 동성애 혐오적 논리의 가장 순수한 실현이자 그 논리의 정수다. 동성애는 오직 남성성의 타락만을 의미할 뿐이다. 그렇다면 상처 입은 남성성을 치유하는 가장 오래되고 확실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바로 동성애자를 도살하는 것이다.
아마도 긍정적 예술을 요구하는 목소리에서 가장 해로운 부분은 예술을 단순히 소재나 주제로 축소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주장은 예술이 주는 정서적 지지와 격려가 우리의 실제 삶과 예술 속 재현을 일대일로 매칭하는 방식에서 나온다고 본다. 나는 이 접근법이 예술을 격하시킨다고 생각한다. 예술이 서로 다른 차이를 넘어 소통하는 능력을 근본적으로 과소평가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의미와 감정으로 가득 찬 예술의 비지시적인 측면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즉 미학적인 측면, 곧 예술 작품이 내용뿐만 아니라 그 매체 자체를 어떻게 의미의 원천으로 삼는지 간과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술을 말로 요약할 수 있는 내용으로만 환원한다면, 예술을 진정한 예술로 만드는 본질에서 멀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예술이 우리 삶을 돕는 방식의 핵심인, 더 견고한 의미의 긍정을 주는 강력한 원천으로부터 차단되고 만다.
만약 우리가 『조반니의 방』을 단순히 그 소재로만 축소한다면, 이 소설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성소수자들에게 사랑받아 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더 나아가 이 책을 계속 읽어야 할 이유나, 그저 무지했던 과거의 슬픈 기록 외에 다른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예술을 소재로만 환원한다면, 잘못된 믿음에 기반한 과거의 문학 작품들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할 근거도 사라진다. 실제로 이런 맥락에서 고전 문학들을 배척하자는 목소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오판이라고 생각한다. 예술의 가치는 단순히 이야기의 세부 사항이나 등장인물의 운명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예술의 진정한 가치는 오직 예술만이 가진 고유한 영역, 즉 감정과 의미가 가득 찬 형식과 스타일에 있다. 이는 소재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작품의 핵심 요소가 아니라는 뜻이 아니다. 형식과 내용이 본질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내용을 요약하고 명제에만 치중하는 환원주의적 독해야말로 형식과 스타일을 무대 뒤로 밀어내며 둘을 갈라놓는 행위다. 강조하고 싶은 점은 예술의 형식적 요소가 작품이 말하는 바를 넘어선 고유한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사실이다. 또한 형식과 스타일은 종종 작품이 표방하는 명제적 내용과 반어적인 관계를 맺기도 한다.
볼드윈의 문체는 단순히 황홀한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문체는 이 소설이 그토록 소외시켰던 여성적이고 규범을 벗어난 동성애자들, 즉 '폴(folles)'들을 오히려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황홀하게 빛난다. 동시에 데이비드가 그토록 갈망했던 잘 정돈되고 사회적으로 용인된 평온한 이성애적 환상을 완전히 불태워 버린다. 힐튼 알스는 볼드윈의 문체를 '고급스러운 동성애자 스타일(high-faggot style)'이라고 평했는데, 이는 매우 정확한 지적이다. 볼드윈의 문체를 퀴어 스타일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질주의적인 접근이 아니다. 그가 퀴어적인 것으로 암호화되거나 인정받아 온 스타일적 효과들을 활용했다는 의미다. 여기에는 감정의 과포화, 장르적 다양성, 때로 바로크 양식에 비견될 만큼 화려한 문장 구조, 그리고 '고상한 취향'의 규범을 무시하는 태도가 포함된다. 무엇보다도 미(美)를 전면에 내세우는 것이 핵심이다. 볼드윈의 스타일은 모든 면에서 과잉이다. 그의 어휘 선택과 헨리 제임스를 연상시키는 복잡한 문장 구조, 그리고 갑작스러운 어조의 변화를 보고 있으면 한 가지 생각이 든다. 영어라는 언어의 볼륨 조절 다이얼이 10까지 있다면, 볼드윈은 회로를 개조해서라도 그것을 11이나 12까지 끌어올리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러니 볼드윈이 커리어 내내 지나치게 미문(美文)을 쓴다는 비판을 받은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랭스턴 휴즈
1920년대 미국 뉴욕의 흑인 거주지 할렘을 중심으로 일어난 흑인 문화·예술 부흥 운동인 ‘할렘 르네상스(Harlem Renaissance)’를 이끈 미국의 대표적인 흑인 시인이자 소설가, 극작가. 그는 볼드윈이 흑인 민중의 날것 그대로의 현실을 담기보다, 백인 지식인 사회에 어필할 만한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시적인 서구적 문체를 구사한다고 비판했다.
내 생각에는 그 '벨벳 가방'이야말로 이 소설의 본질이다. 앞서 인용했던 문장을 다시 살펴보자. "기쁨의 밑바닥에는 물론 고통이 있었고, 경이의 밑바닥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그 감정들은 우리의 찬란한 시작이 혀끝에 닿은 쓰라린 알로에가 되기 전까지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나는 이 문장을 두고 깊이 고심했다. 내가 찾아본 바로는, 마지막 구절에 어떤 직접적인 인용이나 전고가 숨겨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볼드윈은 어린 시절 목사로 활동했고, '알로에(침향)'는 성경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식물이다. 특히 휘트먼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 미국의 민주주의 정신과 역동성을 자유로운 형식에 담아내어 '미국 현대 시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19세기 대표 시인. 시를 통해 동성 간의 깊은 영적·육체적 유대감과 사랑을 숨김없이 노래했다. 특히 『풀잎』에 수록된 '창포(Calamus)' 연작 시들은 남성 간의 애틋한 동지애와 사랑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퀴어 텍스트로 꼽힌다.
혹은 니고데모가 그리스도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몰약과 알로에를 가져오는 요한복음의 대목도 연상된다. 이 문장이 자아내는 서정적인 효과와 아름다움은 단순히 성경을 닮은 어조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복의 미학에서 비롯된다. '밑바닥에'라는 표현이 두 번 반복되고, 앞 문장에 나왔던 '기쁨'과 '경이'라는 단어가 고스란히 이어지면서 변주된다. 나아가 단어를 반복하되 점층적으로 강조하는 볼드윈 특유의 기법도 눈에 띈다. '시작'이라는 단어가 '찬란한 시작'으로 심화하여 반복되는 식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음악적 장치들이며, 말로 요약할 수 있는 문장의 표면적 의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 의미와 정면으로 대치된다. 이 문장이 전하는 문자 그대로의 내용은 데이비드와 조반니의 로맨스가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비극이다. 하지만 그 비극적인 의미는 황홀경을 노래하는 음악적 선율에 실려 흐른다.
내가 볼드윈의 문장을 처음 접했을 때, 그 문장들이 선사한 존엄성은 내용이 아니라 스타일에 있었다. 이 등장인물들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언어가 가진 힘을 한계까지 쥐어짜야 한다는 것을 문체 자체가 보여주었다. 시적 예술의 모든 자원과 성경의 운율을 끌어오고, 가장 극적이고 고결한 어휘를 찾아내야만 했다. '기쁨', '경이', '고통'. 볼드윈은 이것이야말로 퀴어라는 존재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남성 간의 사랑은 이토록 풍성하고 거대한 표현을 요구하며, 또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나에게 매우 중요했다. 어린 시절 내가 동성애 혐오를 겪으며 느꼈던 가장 큰 고통은 나의 모든 것이 세상의 규격에 맞지 않는다고 여겨진 데 있었기 때문이다. 나의 신체, 몸짓, 감정 모두가 부적절해 보였다. 나는 단단하고 날렵하며 근육질인 남성성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했고, 모든 면에서 늘 과한 아이 취급을 받았다. 미국 남부의 남성성과 이성애 중심주의라는 의미 체계 안에서, 나의 존재는 도무지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었다. 그때 알게 된 오페라와 더불어, 볼드윈이 구사하는 화려하고 넘치는 산문은 내게 대안적인 의미 체계와 전혀 다른 삶의 척도를 약속해 주었다. 『조반니의 방』은 스토리가 아니라 그 스타일과 소리를 통해, 나라는 존재가 마침내 이해받을 수 있는 세상을 약속했다. 그 소설이 보여준 세계는 비극적이었고 죽음에 열려 있었으며, 뜻하지 않은 운명과 도덕적·존재적 실패의 위험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내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세계이기도 했다. 그 약속이 바로 내게 필요했던 구체적인 긍정이었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긍정을 필요로 한다.
예술과 긍정을 둘러싼 오늘날의 담론이 간과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술이 선사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긍정은 아름다움이라는 점이다. 왜 이 말을 꺼내는 것이 이토록 어렵고 당혹스러운 일이 되었을까. 내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가능한 한 풍부하고 복잡하게 정립된 개념이다. 릴케가 말한 ‘무시무시한 천사들’과도 같다. 이러한 아름다움은 특정 부류의 인간을 부정하는 시선에 맞설 뿐만 아니라, 존재의 유일한 종말인 죽음이라는 거대한 부정에 맞서 내놓는 긍정이다. 내게 『조반니의 방』은 예술이 지닌 이 장엄하고도 두려운 아름다움을 깨닫게 해준 첫 경험이었다. 또한 부정을 통과하고 그 부정을 내포한 진정한 긍정을 마주한 첫 순간이기도 했다. 볼드윈의 소설은 파멸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동시에, 내가 그 파멸 속을 항해할 수 있는 도구를 쥐여주었다. 책이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가는 언제나 개인적이고 은밀한 영역이다. 그렇기에 지금의 나처럼 이 이야기를 대중 앞에 꺼내는 것에는 다소 민망한 구석이 있다. 청소년 시절의 나에게 ‘아니오’는 삶과 내가 서로에게 던질 수 있는 유일한 대답처럼 보였다. 나는 부정적인 현실에 완전히 집어삼켜져 있었다. 당시 동성애 혐오란 숨 쉬는 공기와 같았고, 자아를 형성하기 위해 쥘 수 있는 유일한 재료였다. 게다가 당시 번지던 질병은 동성애 혐오가 낳은 가장 악랄한 주장이 사실임을 증명하는 듯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매일 같이 보았던 스티커에는 ‘에이즈는 동성애자를 확실히 죽인다’라고 적혀 있었다. 내가 커밍아웃을 한 바로 다음 주, 내 사물함 옆 칸 문 안쪽에 붙은 문구였다. 볼드윈은 자신에게 그토록 고통스럽고 스스로의 간절한 희망을 짓밟는 세계관을 마주했다. 전기 작가들의 기록에 따르면, 그가 『조반니의 방』에서 불가능하다고 상상했던 그 사랑이야말로 그가 평생 절박하게 갈구했던 사랑이었다. 그럼에도 그 부정을 생산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켰다는 사실은 내게 엄청난 저항으로 다가왔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느껴진다. 나는 이 저항에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다. 『조반니의 방』이 내 삶을 구원했다고 말할 때, 그 진짜 의미는 이 책이 내게 예술을 선물했다는 뜻이다.
— Harper's Magazine (2025.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