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용

런던 지하세계에 발을 들인 한 십대 소년의 비극적인 죽음 (번역)

A Teen’s Fatal Plunge Into the London Underworld — The New Yorker (2024.2.5)

By Patrick Radden Keefe

잭 브렛틀러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부모는 아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그 미스터리를 풀기 위해 처절한 사투를 벌였다. 부모는 잭이 변하기 시작한 지점을 정확히 짚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3년 전, 열여섯 살이던 잭이 런던 북부의 밀 힐 학교에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잭은 런던의 조용하고 부유한 동네인 메이다 베일에서 성장했다. 아버지 매튜는 소규모 금융 서비스 회사의 이사로 재직 중이며, 어머니 라셸은 프리랜서 언론인이다. 어린 시절 잭은 영리하면서도 독특한 구석이 있었다. 곱슬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에, 목소리는 허스키하면서도 놀라울 만큼 저음이었다. 잭은 남의 흉내를 곧잘 내곤 했는데, 여러 가지 말투와 억양을 따라 하며 부모님과 형 조를 즐겁게 해주었다. 형 조는 잭보다 두 살 위로, 햄스테드에 있는 명문 사립학교인 유니버시티 칼리지 스쿨에 다녔다. 하지만 잭은 유니버시티 칼리지 입학시험을 치를 당시 수학 영역에서 고전했고, 결국 불합격했다. 잭은 분명 총명하고 창의적인 아이였지만, 형인 조만큼 학업에 몰두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다른 학교 두 곳에서도 연이어 고배를 마신 잭은 결국 열세 살의 나이에 밀 힐 학교에 통학 학생으로 입학했다.

1807년 설립된 밀 힐(Mill Hill) 학교는 150에이커에 달하는 광활한 교정을 자랑한다. 학비는 상당하지만, 여타 명문 사립학교들에 비해 학구적인 명성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잭이 자라온 부르주아 사회에서 밀 힐 출신이라는 말은 곧 학업 기준이 더 엄격한 학교에서 낙방했다는 의미로 통용되곤 했다. 2013년 잭이 이곳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의 주변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중국 등지에서 온 부유층 자제들로 가득했다. 밀 힐에서 잭과 가깝게 지냈던 안드레이 레종바른은 당시를 떠올리며 "올리가르히(신흥 재벌) 자식들의 집합소였다"라고 회상했다. 아이들은 명품을 휘두르고 호화 호텔에서 파티를 즐겼다. 추운 날이면 기숙사에서 교실까지 8분 남짓한 거리조차 걷지 않고 우버를 불러 타고 다녔다. 런던은 해외 부호들의 제2의 거점이었기에, 도시 전체가 화려한 소비주의의 요새가 된 지 오래였다. 물질적 가치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잭에게 급우들이 뽐내는 부는 낯설고도 매혹적이었다. 어머니 라셸은 "포르쉐와 성형수술, 이비자로 상징되는 그들의 세상은 우리와는 완전히 딴판이었다"라고 말했다. 한 번은 학교 관계자가 전화를 걸어 잭이 방금 전용 기사가 운전하는 리무진을 타고 하교했다고 알려온 적도 있었다. 잭은 부모에게 직접 사비를 들여 그런 사치를 부렸다고 털어놓으며 이렇게 덧붙였다. "그게 어떤 기분일지 궁금했어요."

메이다 베일에서 밀 힐까지의 통학 거리는 편도로만 거의 한 시간이 걸렸다. 결국 잭은 주중에만 학교에 머무는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의 눈에 잭은 학교생활에 꽤 잘 적응하는 것처럼 보였다. 성적도 나쁘지 않았고, 테니스와 크리켓에는 발군의 실력을 보였다. 가끔 집으로 데려오는 친구들도 하나같이 예의 바른 아이들이었다. 그러나 잭의 내면에서는 부에 대한 집착이 서서히 고개를 들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자동차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제 가족이 타는 소박한 마즈다 차량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여느 사춘기 소년들처럼 잭 역시 갱스터의 세계에 매료되었다. 그는 런던 암흑가의 악명 높은 살인마 레지널드와 로널드 크레이 형제 같은 인물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탐독했다.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나, 플로리다의 두 청년이 국제 무기 밀매상으로 거듭나는 실화를 담은 <워 독>처럼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성공을 쫓는 남성들의 영화에 열광했다.

2018년에 접어들자 기숙사 생활에 신물이 난 잭은 고등학교 마지막 학년을 앞두고 집에서 가까운 켄싱턴의 애슈본 칼리지로 전학했다. 여전히 잡티 하나 없는 피부와 불그스레한 뺨을 가진 앳된 얼굴이었지만, 행동거지만큼은 영락없는 성인이었다. 수업 시간에는 몽클레르 패딩 조끼를 입고 나타났으며, 서류 가방에 과제물을 넣고 다녔다. 그는 부모에게 자신이 관여하고 있다는 비즈니스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자동차나 고급 부동산을 매매하는 거래들이 주된 내용이었다. 부모는 아들의 이런 주장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종잡을 수 없었다. 그저 조숙한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역할극에 빠진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잭은 본래 성격이 서글서글한 데다 습득력도 빨랐다. 부모는 아들의 이런 자질이 젊은 사업가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브렛틀러 부부는 아들의 기를 꺾거나, 자칫 관계가 멀어지는 일은 피하고 싶었다. 부와 화려함에 집착하는 아들의 모습이 미심쩍었을지언정, 그들은 그저 묵묵히 곁을 지켜주며 완만한 지지를 보낼 뿐이었다.

2019년 초 고등학교 졸업반이던 잭은 부모에게 새로운 인맥을 자랑했다. 런던의 최고급 주거지인 메이페어에 거주하며 사업을 하는 40대 자산가 악바르 샴지와 친해졌다는 소식이었다. 샴지는 '알파 네로'라는 이름의 검은색 바이마라너 종 대형견을 키우고 있었는데, 잭은 종종 마운트 스트리트에 있는 샴지의 아파트를 방문해 이 개를 산책시키곤 했다. 어머니 라셸은 잭이 메이페어 한복판에서 이 우아하고 값비싼 개를 마치 제 것인 양 데리고 다니며 그 분위기를 만끽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러나 잭은 단순한 심부름꾼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부모에게 자신과 샴지가 사업 파트너가 되었다고 말하며, CBD 성분이 함유된 스킨케어 브랜드 런칭부터 카자흐스탄 광산 투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사업 구상을 늘어놓았다. 잭은 '오메가 스트래튼'이라는 법인까지 설립했는데, 공시 자료에는 사업 목적이 '보안 및 상품 계약'이라는 모호한 문구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는 가끔 자신의 비즈니스 이메일 계정으로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하기도 했다. 2019년 여름, 잭은 한 달 남짓한 기간 동안 핌리코 지역의 고급 아파트인 '리버워크'로 거처를 옮겼다. 템스 강변 보홀 다리 인근에 새로 들어선 화려한 단지였다. 룸메이트가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고 부모의 방문조차 허락하지 않았지만, 영상 통화를 통해 세련된 집 내부를 보여주기도 했다. 여러 대학에서 합격 통지서를 받았음에도 잭은 이제 진학을 포기할 고민을 하고 있었다. 여러 사업을 통해 리버워크의 월세를 감당할 만큼 충분한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잭은 핌리코에서의 생활이 외롭다며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매튜와 라셸 부부는 잭이 나아가는 방향을 지켜보며 커다란 불안감에 휩싸였다. 아들은 지나치게 빨리 어른이 되려 했고, 때때로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다. 집 안을 쿵쾅거리며 돌아다니거나 문을 거칠게 닫아버리는가 하면, 어떤 때는 신체적인 위협이 느껴질 만큼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했다. 아들이 약물에 손을 댄 것은 아닐까 두려워진 부부는 단골 의사에게 다음 진료 때 몰래 혈액 검사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다. 한번은 부부가 오만으로 휴가를 떠나며 집에 혼자 남을 잭을 감시하려고 거실에 비디오카메라를 숨겨둔 적도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에 담긴 모습은 그저 동네 테니스 클럽 친구들과 모여 텔레비전으로 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평범한 풍경뿐이었다. 라셸의 간곡한 권유로 잭은 정신과 전문의에게 진단까지 받았으나, 의사는 특별한 장애 증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매튜가 운영하는 회사는 글로벌 기업이었고, 2019년 11월 28일 목요일 당시 그는 미국 출장 중이었다. 잭은 어머니 라셸에게 이번 주말 동안 샴지와 함께 컴퓨터와 휴대폰을 멀리하는 ‘디지털 디톡스’를 하러 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날 밤, 집 안을 살피던 라셸은 잭이 지갑과 열쇠를 그대로 두고 나간 사실을 발견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라셸은 아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엄마는 네가 조금 걱정되는구나. 재킷이랑 코트, 신용카드까지 전부 여기 두고 갔는데 며칠 동안 어떻게 지내려는 거니?” 그녀는 “사랑하고 또 사랑한다”라는 말로 편지를 맺었다. 새벽 2시 3분, 잭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다 괜찮아요. x(키스).”

21분 뒤, 템스강 연안에 자리한 영국 정보국 MI6 본부의 보안 카메라에 강 건너편 건물 외벽의 급격한 움직임이 포착됐다. 그곳은 잭이 그해 여름 머물렀던 '리버워크' 아파트였다. 템스강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곡선형 발코니가 특징인 이 건물에서, 새벽 2시 24분 카메라에는 환하게 불이 켜진 5층 아파트 밖으로 걸어 나오는 잭의 모습이 찍혔다. 그는 발코니 한쪽 끝으로 갔다가 다시 반대편 끝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중앙으로 돌아와 몸을 던졌다.

총 길이 215마일에 달하는 템스강 중 서런던의 테딩턴 웨어부터 북해에 이르는 구간은 바닷물의 유입으로 조수가 드나든다. 그날 목요일 밤은 만조였으나, 아침이 되자 수위가 약 9피트가량 낮아지며 리버워크 앞바다의 진흙투성이 강변이 넓게 드러났다.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길을 지나던 행인이 강바닥에 쓰러진 창백한 시신 한 구를 발견했다. 신고를 받은 런던 구급대가 곧 도착했다. 구급대원은 시신이 "손을 대자 차갑게 식어 있었고 몹시 경직된 상태였다"라고 기록했다. 오전 7시 36분, 공식적으로 사망 판정이 내려졌다.

매년 수많은 이들이 템스강에 몸을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하려 한다. 대개는 다리 위에서 뛰어내리는데, 추락 충격에서 살아남아 구조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추락이 죽음으로 이어지면 시신은 대개 조류를 타고 떠내려가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경찰은 잭의 시신을 발견했을 당시, 그가 바로 위 발코니에서 추락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강물에 휩쓸려 핌리코 강변까지 떠내려온 것이라 짐작했을 뿐이다. 경찰은 시신을 배에 실어 검영소로 옮겼다. 그날 밤 잭이 입고 있던 트레이닝복 바지 어디에도 지갑은 없었고, 경찰은 그의 신원을 파악할 길이 없었다.

북서쪽으로 4마일 떨어진 메이다 베일, 라셸은 아들 걱정에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다. 계속해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수신음도 없이 곧장 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다. 오전 9시 30분쯤 초인종이 울렸다. 브렛틀러 가족이 사는 곳은 붉은 벽돌이 인상적인 아파트의 1층과 지하층이었다. 문을 연 라셸 앞에는 머리를 매끈하게 밀고 맞춤 제작한 푸른색 오버코트에 보라색 넥타이를 맨 건장한 체격의 운전기사가 서 있었다. 그는 귀에 휴대전화를 대고 있었다.

그가 물었다. "잭은 어디 있습니까?"

"모르겠어요. 누구시죠?" 라셸이 되물었다.

"그쪽은 누구십니까?"

"잭의 엄마예요."

남자는 전화기 너머 상대방이 대화 내용을 들을 수 있도록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다. 수화기 너머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여자가 엄마일 리 없어. 잭의 엄마는 지금 두바이에 있단 말이야."

그 남자는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뜻인지 설명하기는커녕, 그대로 레인지로버에 올라타 자리를 떠나버렸다. 현관에 홀로 남겨진 라셸은 깊은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날 저녁, 그녀는 경찰 핫라인에 전화를 걸어 잭의 실종 사실을 알렸다. 아들이 사라진 지는 전날 오후부터 고작 하루 남짓이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엔 이미 불길한 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라셸은 지인을 통해 사설 탐정의 연락처를 확보했다. 미국에 있던 매튜에게도 상황을 전했고, 그는 즉시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로 했다. 그사이 라셸은 잭의 친구를 수소문해 악바르 샴지의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그에게 만남을 제안했다.

12월 2일 월요일, 경찰은 템스강에서 발견된 신원 미상의 변사체와 메이다 베일의 실종 신고 건을 여전히 연관 짓지 못하고 있었다. 훗날 매튜가 회상했듯, 그 무렵 부부는 아들이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은 채 그를 찾고 있었다. 라셸과 매튜 부부는 피카딜리에 위치한 르 메르디앙 호텔로 향했다. 샴지가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투숙객 전용 라운지에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제안했기 때문이다. 마흔일곱 살의 샴지는 매부리코에 숱이 많은 검은 머리, 화려한 무늬가 수놓인 몸에 딱 붙는 정장을 차려입은 세련된 미남이었다. 그는 자신 또한 잭의 안위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샴지는 나흘 전 잭이 챙겨 나갔던 검은색 여행용 가방을 브렛틀러 부부에게 건넸다. 그러면서 지난 목요일 저녁, 리버워크 아파트에서 잭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설명했다. 그 자리에는 해당 아파트에 거주하는 쉰다섯 살의 친구 데이브 샤르마와 그의 20대 초반 딸인 도미니크 샤르마 클라크도 동석했다고 덧붙였다. 샴지의 말에 따르면 그날 밤 분위기는 매우 침울했다. 잭이 자신이 헤로인 중독이라는 사실을 고백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브렛틀러 부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아들에게서 헤로인을 복용한 흔적이라곤 추호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샴지의 설명은 구체적이었다. 잭이 수년 동안 남몰래 마약에 손을 대왔다고 고백했다는 것이다. 그날 목요일 저녁, 자신과 샤르마는 잭을 치료 프로그램에 보내기로 약속했다고 덧붙였다. 그 후 샴지는 도미니크와 함께 자리를 떴고, 잭은 샤르마와 단둘이 남겨졌다. 샴지는 이튿날인 금요일 아침, 샤르마로부터 잭이 사라졌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샴지는 부부에게 "우리도 걱정하기 시작했다"라며, "아무래도 약을 구하러 나간 게 분명해 보였다"라고 말했다. 이에 샤르마는 자신의 측근인 운전기사 칼튼을 보내 메이다 베일 아파트에서 잭의 행방을 찾게 했다는 것이었다.

샴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부부에게 더욱 충격적인 사실을 털어놓았다. 자신과 샤르마는 아들을 '잭 브렛틀러'가 아닌, 러시아 신흥 재벌의 부유한 자제인 '잭 이스마일로프'로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약 8개월 전, 당시 러시아 억만장자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소유했던 첼시 FC의 관계자 마크 폴리가 잭을 소개해 주었다고 했다. 폴리는 샴지에게 잭이 가문의 자산 일부를 투자하고 싶어 한다고 전했다. 샴지는 라셸과 통화하기 전까지만 해도 잭의 아버지가 최근 세상을 떠났으며, 어머니는 형제들과 함께 두바이에 거주하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잭은 가족이 나이츠브릿지의 초호화 아파트이자 베일에 싸인 자산가들의 거처로 유명한 '원 하이드 파크'의 펜트하우스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메이다 베일 아파트는 잠시 혼자 머물고 있는 투자용 부동산일 뿐이라고 둘러댔던 것이다.

샴지는 신뢰할 만한 인물처럼 보였다.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재원인 데다 매너 또한 흠잡을 데 없었다. 게다가 잭의 말에 따르면, 샴지의 사무실은 런던에서도 손꼽히는 부촌인 버클리 스퀘어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아내 다니엘라 카너츠 역시 메건 마클이나 미셸 오바마가 즐겨 입는 유명 패션 브랜드 ‘사피야(Safiyaa)’를 운영하는 성공한 사업가였다. 하지만 샴지가 늘어놓는 이야기는 도무지 현실감이 없었다. 매튜는 샴지가 부부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해하는 기색을 포착했다. 그러면서도 샴지는 자신과 샤르마가 어떻게든 잭을 찾아 부모의 품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양측은 연락을 유지하며 계속해서 수색을 이어가기로 합의했다.

이튿날, 라셸은 집 거실에서 아들 조와 통화하던 중 창밖으로 경찰차 한 대가 멈춰 서는 것을 목격했다. 훗날 그녀는 당시를 떠올리며 “경찰이 왜 왔는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라고 술회했다. 제복을 입은 여성 경찰관 두 명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한 명이 라셸의 손을 맞잡았고, 이내 잭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지난해 가을, 차가운 빗줄기를 뚫고 브렛틀러 부부의 집을 찾았다. 여름 무렵 처음 인연을 맺은 뒤로, 우리는 아들에 관한 길고도 고통스러운 대화를 수차례 이어오던 참이었다. 메이다 베일에 위치한 아파트는 간결하고 현대적인 분위기였다. 공예와 디자인 분야를 취재하는 언론인인 라셸의 안목 덕분인지, 집안 곳곳은 우아한 소품과 화사한 유리 화병들로 생기가 돌았다. 책장 한편에는 어린 시절 잭과 조 형제가 학교 축제에서 분장을 한 채 찍은 사진이 액자에 담겨 있었다. 라셸은 잭을 "귀엽고 장난기 가득했던 아이"로 기억했다. 예순한 살 동갑내기인 부부 중 남편 매튜는 안경을 쓴 다부진 체격의 민머리 신사였다. 명석하고 분석적인 사고방식 뒤로 정중하면서도 강렬한 에너지를 풍기는 인물이었다. 그는 자식을 잃은 참담한 슬픔을 견뎌내기 위해, 아들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파헤치는 데 모든 기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아내 라셸은 아담한 체구에 생기 넘치는 눈빛을 지녔는데, 슬픈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따금 미소를 짓는 습관이 있었다. 우리가 대화를 나누는 동안 스물다섯 살이 된 조가 거실을 오갔다. 나선형으로 말린 곱슬머리가 인상적인 그는 부모에게 스스럼없이 애정을 표현하는 다정한 청년이었다.

잭이 세상을 떠나고 4년이 흐르는 동안, 가족은 자신들이 잘 안다고 믿었던 아들이 철저히 이중생활을 해왔다는 사실을 뼈아프게 마주해야 했다. 잭에게는 언제나 '월터 미티' 같은 구석이 있었다. 친구들에게 자신의 운동 실력이나 사업 전망을 부풀려 뽐내곤 했고, 리버풀 FC의 주장 버질 반 다이크를 안다는 식의 거짓말로 유명인과의 인맥을 과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브렛틀러 가족 중 그 누구도 잭이 런던 시내를 누비며 아예 다른 사람인 척 연기하며 살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매튜는 "잭은 상대방의 무엇을 공략해야 하는지 아주 잘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상대의..."라고 운을 뗐다.

라셸이 그 말을 가로채며 덧붙였다. "가장 약한 고리, 즉 급소를 파고드는 법을 알았죠."

"사람을 읽어내는 능력이 탁월했거든요." 매튜가 말을 이었다. 영화 <워 독>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는 상대방이 자신에게 바라는 모습이 무엇인지 파악한 뒤, 정확히 그 사람으로 변신했다." 브렛틀러 부부는 이제야 깨달았다. 잭이 마치 까치처럼 여기저기서 거짓의 조각들을 물어와 정교한 허구를 쌓아 올렸음을. 그는 삶의 한 구석에서 건져 올린 진실의 파편을 다른 곳에서 소설의 소재로 재활용했다. 부부의 집 건너편에는 벤틀리를 몰고 다니는 화려한 외모의 러시아 여성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거리에서 먼저 말을 건 잭과 친해졌고, 요리를 할 때면 잭에게 음식을 나눠주기도 했다. 그녀의 이름은 자미라 이스마일로바였다. 라셸은 "잭이 그녀의 성을 가져다 쓴 것"이라고 짚었다.

최근 이스마일로바를 만났을 때, 그녀는 잭을 '타이마스'라는 또 다른 가짜 이름으로 알고 있었다. 그녀는 잭을 혼자 사는 카자흐스탄 청년으로 굳게 믿고 있었다. 브렛틀러 부부의 아파트는 여러 세대가 공용 현관을 사용했기에, 잭이 부모와 함께 살고 있다는 의심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잭과 영어로 대화했지만, 잭은 종종 기초적인 러시아 단어를 섞어 쓰며 분위기를 조성했다. 런던에는 해외에서 건너온 가문의 부를 배경으로 성장했으나 겉모습은 철저히 영국인으로 자라난 아이들이 흔하다. 이스마일로바는 "그가 하는 말을 단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라고 회상했다. 그녀가 진실을 알게 된 것은 잭이 세상을 떠난 뒤였다.

샴지는 잭이 허언증이 있었다는 점에서는 정곡을 찔렀을지 모르나, 매튜와 라셸 부부는 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아이가 아니었다고 단언한다. 잭은 단 한 번도 자살을 언급한 적이 없었으며, 우울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성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하고 싶어 안달이 난 듯, 온갖 계획과 야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상을 떠나던 날 저녁 7시 직후만 해도 잭은 라셸에게 이메일을 보내 운전면허 시험 비용을 엄마 카드로 결제했다고 알리며, "괜찮겠죠? x"라고 덧붙였다. 내가 브렛틀러 부부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 라셸은 잭의 방으로 들어가 샴지가 돌려주었던 여행용 가방을 들고 나왔다. 잭이 발코니에서 몸을 던지기 불과 몇 시간 전에 챙겼던 짐이었다. 그녀는 정갈하게 접힌 옷가지들을 하나하나 꺼내 보이며 말했다. "이건 자살을 결심한 사람의 짐이 아니에요. 속옷도 여러 벌이고 티셔츠도 챙겼죠. 데오도란트까지 들어있잖아요."

2019년 7월, 잭은 리버워크로 거처를 옮기며 부모에게 인도 출신의 고무 재벌인 '베린더 샤르마'로부터 아파트를 임대했다고 말했다. 당시 라셸은 구글에 '베린더 샤르마', '인도', '고무' 등의 키워드를 검색해 보았으나 이렇다 할 정보가 나오지 않았다. 사실 베린더는 샴지의 친구인 데이브 샤르마의 본명이었다. 런던 사교계에서 그는 '인디언 데이브'라는 별칭으로 통했다. 그는 고무 재벌이 아니었다. 갱스터였다.

잭의 신원이 확인된 날 아침, 브렛틀러 부부가 고용한 사설 탐정 클라이브 스트롱은 리버워크에 있는 샤르마를 찾아갔다. 날카로운 인상에 단단한 체구를 지닌 샤르마는 평소 복싱을 즐겼는데, 스트롱을 만난 자리에서도 방금 스파링을 마치고 돌아온 참이라고 말했다. 스트롱의 조사 기록에 따르면, 샤르마는 잭이 자신을 '올리가르히의 아들'이라 소개했다고 전했다. 또한 잭은 두바이에 사는 어머니 및 네 명의 형제와 갈등이 너무 심해, 어머니가 런던에 있는 여러 채의 호화 저택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다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즉, 엄청난 부자임에도 당장 갈 곳 없는 신세라는 논리였다. 샤르마는 스트롱에게 "그 젊은이가 참 안타까웠다"라며 "그래서 내 아파트(리버워크)에 머물러도 좋다고 제안했다"라고 덧붙였다.

잭을 마지막으로 본 인물인 샤르마는 샴지와 거의 일치하는 증언을 내놓았다. 지난 목요일 저녁 잭과 샴지가 리버워크를 찾아왔고, 자신의 딸 도미니크도 합류했다는 것이다. 몇 시간 뒤 샴지와 도미니크가 떠났고, 자신은 잠이 들었다가 오전 8시쯤 깨어보니 잭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고 말했다. 샤르마는 잭이 "자살 징후를 보이던" 문제아였다는 견해를 밝혔다. 또한 자신이 사설 탐정인 스트롱의 조사에는 흔쾌히 응하겠지만, 과거에 겪은 "좋지 않은 기억" 때문에 경찰과는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샤르마는 그 '기억'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히지 않았으나, 실제로 그는 수사 기관과 끈질긴 악연이 있었다. 2002년 그는 헤로인 밀반입 혐의로 체포된 전력이 있었다. 이후 2003년에는 보디가드 출신 클럽 운영자인 데이브 '머슬' 킹의 살해 사건에도 연루되었다. 당시 킹은 허트포드셔의 한 체육관을 나서던 중 달리는 차에서 쏜 총에 맞아 숨졌는데, 이는 영국 살인 사건 역사상 자동소총인 AK-47이 처음으로 사용된 사례였다. 세간의 이목이 쏠린 재판에서 판사는 이 암살 사건을 "철저히 계획되었으며 무자비하고 잔인하게 집행된 범죄"라고 규정했다. 당시 총을 쏜 범인과 운전사는 각각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샤르마는 마약 거래를 하며 ‘머슬’ 킹과 가깝게 지내던 동료였으나, 결국 사이가 틀어졌다. 2002년 헤로인 검거 작전 당시 당국에 체포된 용의자 중 유독 머슬만이 기소를 피했는데, 이를 두고 샤르마는 공개 재판장에서 목격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를 향해 ‘그래스(밀고자)’라며 분노를 쏟아냈다. 머슬이 총격으로 살해된 직후, 암살자는 프랑스에 있는 누군가와 휴대전화로 통화했다. 경찰 조사 결과 그 번호는 샤르마와 연결되어 있었다. 당시 수사에 참여했던 전직 관계자는 샤르마를 극도로 위험한 인물로 기억했다. 살인 사건 재판 당시 당국은 샤르마를 심문하기 위해 프랑스 내 소재를 파악하려 했으나, 그는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전직 관계자는 “샤르마가 그 암살 사건의 기획에 관여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라며, “다만 그를 기소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영국으로 돌아온 샤르마는 채권 추심업에 종사했다. 런던 암흑가의 생리에 밝은 한 소식통은 샤르마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물리력을 행사하는 데 거침이 없는 인물이라고 전했다. 돈을 빌리고 갚지 않는 이들을 추적해 옥상 난간에 매달아 버린다는 ‘인디언 데이브’의 악명 높은 일화가 파다했다. 탐정 클라이브 스트롱이 리버워크 아파트를 방문했을 때, 그는 문제의 발코니를 살피고 싶어 했다. 샤르마가 벽면의 스위치를 누르자 유리문이 매끄럽게 열렸고,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 템스강을 내려다보았다. 스트롱은 그 유리문이 아파트 내부에서만 여닫을 수 있는 구조라는 점을 기록으로 남겼다.

2019년 12월 5일, 잭의 신원이 확인된 지 이틀 만에 데이브 샤르마와 악바르 샴지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샤르마는 진술을 거부했으나, 대신 자필 진술서를 제출했다. 그는 사건 당일 밤 잭 다니엘 위스키를 마시고 진정제까지 복용해 "심하게 만취한" 상태였으며, 새벽 12시 30분쯤 정신을 잃었다고 주장했다. 또한 자신이 아침 8시에 깨어나기 전, 잭이 발코니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샤르마는 "나에게는 책임이 없으며, 여전히 이 일로 큰 충격을 받은 상태다"라고 강조했다.

경찰은 잭의 시신을 처음 발견했을 당시 리버워크 건물과의 연관성을 즉각 파악하지 못했기에, 추락 사고가 발생하고 나흘이 지나서야 샤르마의 아파트를 수색했다. 현장을 조사한 경관 두 명은 집 안이 "티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고 회상했다. 잭이 투신한 지점으로 추정되는 발코니 유리 난간에서는 무언가를 닦아낸 듯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나, 그곳에 무엇이 묻어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한 경관이 샤르마에게 그날 아침 일어났을 때 발코니 문이 열려 있었는지 닫혀 있었는지 묻자, 그는 문이 닫혀 있었다고 답했다.

샤르마의 얼굴과 손에는 눈에 띄는 상처가 있었다. 콧등에 베인 자국이 있었고, 오른손 엄지와 검지 사이에도 상처가 나 있었다. 하지만 경찰 보고서 어디에도 이 상처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샤르마에게 물었다는 기록은 없었다. 바닥을 훑던 수사관들의 눈에 뜻밖의 물건이 포착됐다. 잭의 소유였던 이른바 ‘대포폰(선불폰)’의 뒷면 덮개가 발코니 슬라이딩 도어의 레일 틈에 끼어 있었던 것이다. 전화기 본체 앞부분은 소파 밑에서 발견됐다. 기기가 두 동강 나 있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상당한 충격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음을 암시했다.

부검 결과, 잭의 몸에서는 샴지의 주장과 달리 헤로인 성분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 법의학 조사에 따르면 잭은 템스강으로 거의 곧장 추락했으나, 그 과정에서 둔부가 강변의 낮은 돌담에 부딪힌 것으로 드러났다. 왼쪽 팔꿈치에 생긴 복합 골절은 수면에 닿을 때의 충격 때문인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부검의는 추락만으로는 명쾌하게 설명되지 않는 부상 하나를 더 기록했다. 잭의 오른쪽 턱뼈가 골절되어 있었다.

가장 극적인 단서는 수사관들이 샴지와 샤르마의 휴대전화를 분석했을 때 드러났다. 흥미롭게도 샴지는 잭이 사망하기 전 몇 주 동안 샤르마와 주고받은 왓츠앱 메시지를 모두 삭제한 상태였다. 반면 샤르마는 그런 치밀함을 보이지 않았고, 덕분에 그의 전화기에는 샴지가 보낸 메시지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경찰은 이 데이터와 리버워크 단지 주변의 CCTV 영상을 대조 분석하여, 사건 당일 밤 두 남자의 동선과 통화 내역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밤 9시가 조금 넘은 시각, 카메라에는 잭과 샴지가 샴지의 붉은색 메르세데스를 리버워크 밖에 주차하는 모습이 잡혔다. 그들은 샴지의 반려견 알파 네로와 함께 504호로 올라갔다. 두 시간쯤 뒤, 샤르마의 딸 도미니크가 지하 주차장에 차를 대고 아파트로 들어섰다. 새벽 1시 25분, 샴지와 도미니크는 알파 네로를 데리고 집을 나섰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두 사람은 도미니크의 차 안에서 한참 대화를 나눴고, 1시 56분 도미니크가 샴지와 개를 메르세데스 앞에 내려주자 두 차량은 각각 현장을 떠났다.

밤 12시 30분에 잠들었다던 샤르마의 말은 거짓이었다. 새벽 2시 12분, 잭이 어머니 라셸에게 "다 괜찮아요 x"라는 이메일을 보낸 지 불과 9분 만에 샤르마는 집에서 샴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메이페어 자택으로 향하던 샴지는 그와 9분 동안 통화했다. 그런데 통화 내용 중 무엇이 샴지를 자극했는지, 그는 차를 돌려 다시 리버워크로 향했다. 2시 24분, 영국 정보국(MI6) 건물의 보안 카메라에 잭이 추락하는 순간이 포착됐다. 밤늦은 시각 먼 거리에서 촬영된 탓에 화면은 거칠었지만, 발코니에는 분명 잭 혼자였다. 다시 말해 누군가 잭을 밀어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잭이 뛰어내린 직후의 영상을 보면, 아파트 안에서 움직이는 누군가의 실루엣이 선명하게 나타난다.

잭이 강물로 추락하고 2분 뒤, 샤르마는 딸 도미니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는 3분 30초 동안 이어졌다. 새벽 2시 34분, 샴지의 메르세데스가 CCTV 화면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반려견 알파 네로를 데리고 다시 504호로 올라갔다. 20분 후 건물 밖으로 나온 그는 차로 돌아가 개를 태웠다. 하지만 샴지는 운전석에 앉는 대신 건물을 가로질러 템스강 산책로 쪽으로 걸어갔다. 이후 경찰이 증언한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샴지 씨는 잭이 추락한 바로 그 지점에서 강벽 너머를 살피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약 120센티미터 높이의 벽 위로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인 채 강물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던 그는, 이내 몸을 꼿꼿이 세우더니 차로 돌아가 현장을 떠났다.

런던은 너무나 아름답기에 이 도시의 상당 부분이 제국주의의 약탈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자칫 잊기 쉽다. 세련된 겉모습과 그 이면에 요동치는 불길한 힘 사이의 부조화는 최근 수십 년 사이 한층 극명해졌다. 제국을 잃은 영국이 전 세계 부패 권력자들을 위한 안락한 은신처라는 새로운 역할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올리버 불로는 저서 ‘세계의 집사: 영국은 어떻게 세계 최악의 인물들이 돈을 세탁하고 범죄를 저지르며 법망을 피하도록 돕는가’에서 느슨한 규제와 관대한 법 집행, 원고에게 유리한 명예훼손법, 비밀스러운 회계사들과 파렴치한 변호사들을 원인으로 지목한다. 여기에 고급 부동산과 유서 깊은 사립학교라는 요소까지 결합하면서, 런던은 돈 많은 악당들의 메카이자 현대판 카사블랑카로 변모했다. 런던의 부동산 시장은 출처가 불분명한 자금을 묻어두려는 이들에게 무궁무진한 기회를 제공한다. 벨그레이비어나 리젠트 파크 주변을 거닐다 보면 수백만 달러를 호가하는 저택들이 블라인드를 내린 채 비어 있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어떤 집은 격변하는 산업에 종사하는 거물의 금고 역할을 하고, 또 어떤 집은 부패한 광산부 장관의 보험 증권 대용이다. 런던은 티 없이 깨끗한 외관의 수도이며, 이 건물들은 대개 웨딩케이크를 연상시키는 크림색이나 상아색으로 칠해져 있다. 이 도시를 지배하는 미학은 문자 그대로 '화이트워시(세탁과 은폐)'인 셈이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 하우스가 2021년 보고서에서 지적했듯, 영국은 '검은 돈을 위한 안락한 보금자리'가 되었다.

돈이나 평판을 세탁한다는 것은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뒤섞는 행위다. 런던이 '24시간 가동되는 대형 세탁소'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되면서 생긴 결과 중 하나는, 합법의 가면을 쓴 사기꾼과 어딘가 수상쩍은 구석이 있는 사업가들이 도시를 가득 메우게 되었다는 점이다. 악바르 샴지는 돌도 채 되지 않았던 1972년, 가족과 함께 런던에 왔다. 그의 아버지 압둘은 우간다 내 인도인 가문 출신으로, 그곳에서 '곰바(Gomba)'라는 번창한 무역 회사를 일구었다. 하지만 1971년 정권을 잡은 이디 아민 우간다 대통령은 국가 경제 불평등의 원인을 성공한 아시아계 소수 민족 탓으로 돌렸고, 1972년 모든 아시아인을 추방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90일이었다. 영국에 발을 들인 압둘은 사업을 재건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매달렸다. 자이르에 조니워커 위스키를 수출하는 일부터 시작해 운송, 광산, 호텔업으로 세를 불렸다. 블랙번에는 핸드백 공장을, 말레이시아에는 악어 농장을 두기도 했다. 새롭게 태어난 곰바는 역외 조세 피난처인 저지섬에 법인을 두었으며, 사무실은 런던 파크 레인에 자리를 잡았다. 압둘은 부를 쌓을수록 보수당에 거액의 정치 자금을 기부했다. 악바르가 유년 시절을 보낸 서리주의 호화로운 튜더 양식 대저택에서 열린 모금 행사에는 마거릿 대처 총리가 직접 참석할 정도였다.

압둘의 자산은 머메이드 극장과 개릭 극장을 포함해 런던의 유서 깊은 여러 공연장으로 뻗어 나갔다. 한때는 웸블리 스타디움의 공동 소유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1980년에 개봉한 스릴러 영화 <롱 굿 프라이데이>에는 정당한 부동산 재벌로 거듭나려는 런던의 범죄 조직 두목(밥 호스킨스 분)이 등장한다. 그는 우아한 백색 유람선을 몰고 템스강을 가로지르며 화려한 파티를 연다. 영화 제작진의 증언에 따르면, 당시 촬영에 쓰인 이 배의 실제 주인은 압둘 샴지였으며 그는 ‘어마어마한’ 대여료를 받고 배를 빌려주었다고 한다. 압둘의 승승장구는 1985년 그의 주요 자금줄이었던 존슨 매슈 은행이 파산하면서 추문에 휘말렸다. 곰바 그룹은 해당 은행에 막대한 빚을 지고 있었고, 그중 500만 파운드는 압둘이 개인 보증까지 선 상태였다. 법정에서 자산 규모를 심문받던 그는 스위스 은행 계좌는 단 하나도 없다고 단언했다. 하지만 곧이어 그가 무려 6개의 비밀 계좌를 보유했다는 사실이 들통났다. 한 국회의원은 그를 ‘사기꾼’이라 맹비난했다. 압둘은 자신이 희생양일 뿐이라며 결백을 주장했으나, 결국 위증죄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았다. 판사는 “지독할 정도로 뻔뻔하게 거짓말을 늘어놓았다”라고 일갈하며 그에게 징역 15개월을 선고했다. 당시 아들 악바르의 나이는 열일곱 살이었다.

1993년,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갓 졸업한 악바르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자신의 ‘모노폴리 판’을 동아프리카로 옮겼다고 언급했다. 비록 부친인 압둘 샴지가 런던의 머메이드 극장만큼은 여전히 소유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악바르는 스물한 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이 극장의 총지배인 자리에 올랐다. 그는 대학 시절 연기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학생 연극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정직한 아크메드’라는 이름의 사기꾼 역할을 맡기도 했다. 샴지 일가는 머메이드 극장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당시 예술감독이었던 마크 신든에 따르면, 정작 극장 무대에 올린 공연은 거의 없었다. 가족은 극장 내에 새 레스토랑을 짓고 스테인리스 주방 시설까지 갖추었으나 이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신든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했다. “머메이드 로고가 새겨진 커틀러리 뭉치와 도자기 접시들이 상자째로 가득 쌓여 있었죠. 마치 모든 장비를 완벽히 갖추고도 정작 환자 받는 것을 잊어버린 병원에 발을 들인 기분이었습니다.”

샴지 일가는 전설적인 복서 무함마드 알리의 삶을 다룬 1인극을 짧게나마 무대에 올렸고, 초연에 맞춰 알리가 직접 런던을 방문하도록 비용을 지불했다. 신든은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극장 곳곳이 알리와 함께 찍은 악바르의 사진으로 도배되었고, 그가 극장을 구하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죠. 하지만 실상은 그가 극장을 아주 박살 내놓기 직전이었어요.” 공연은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 공연의 주 투자자였던 전직 복서 토니 브린은 샴지 일가에게 결국 3만 5천 파운드를 떼였다고 털어놓았다. 브린은 이 극장이 사실상 ‘자금 세탁 통로’가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었다. (이에 대해 샴지 측 변호사는 ‘터무니없는 주장’이라며 부인했다.) 당시 악바르는 롤스로이스 코니쉬를 몰고 런던 시내를 누볐다. 상황이 꼬이기 시작하자 브린은 채무 대신 그 차라도 넘기라고 요구했지만, 악바르는 아버지 소유라 그럴 수 없다며 거절했다. 신든은 악바르를 두고 “아버지의 삶을 어설프게 흉내 낸 아류였다”라고 평했다. (부친 압둘 샴지는 2010년에 사망했다.)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며 샴지는 음악 산업으로 눈을 돌려 미국에서 몇몇 평범한 레이블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 후 수십 년간 그는 이 업계 저 업계를 부지런히 옮겨 다녔다. 그의 링크드인 페이지는 이력이라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듬성듬성하며, 경력란에는 자신을 '생각의 자극제(thought provoker)'라 명명해 두었다. 인도의 재생 에너지 분야를 선도한다고 자처하는 'CPEC'라는 업체의 웹사이트에는 그가 나렌드라 모디 총리와 악수하는 사진이 걸려 있으며, 샴지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이 회사의 회장 겸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과거 주주 명부를 살펴보면 CPEC의 이사회는 주로 샴지 본인과 그의 형제자매 두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온라인에서 찾아낸 다른 기록에 따르면, 패션 디자이너인 그의 아내 다니엘라 카누츠 역시 고위 임원진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최근 들어 그는 가상화폐 사업에 열성적으로 몰두하고 있다.

살인 혐의로 체포된 샴지는 채링 크로스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경찰이 샴지의 당일 동선을 파악하고 있음을 밝히자 상황은 반전됐다. 그가 사건 직후 곧장 메이페어 자택으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다시 리버워크로 돌아와 20분간 머물다 강물을 살피러 내려갔다는 사실을 들이민 것이다. 그러자 샴지는 사건이 발생한 지 겨우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 시간대의 기억만 깨끗이 잊고 있었다고 발뺌했다. (이어진 조사에서 한 수사관은 그에게 "내가 그런 밤을 보냈다면 절대 잊지 못했을 것"이라며 직격탄을 날렸다.)

샴지는 잭이 투신하기 3분 전에 끝난 샤르마와의 통화 내용에 대해서도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저 그날 밤늦게 주고받은 전화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고 버텼다. 다시 아파트로 돌아간 이유를 묻자 그는 작별 인사를 하러 갔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누구에게 인사를 했느냐는 질문에 샴지는 처음에는 집 안에 샤르마와 잭이 함께 있었고, 셋이 포옹을 나눈 뒤 떠났다고 우겼다. 하지만 수사팀은 이미 진실을 알고 있었다. 샴지가 건물에 들어선 시점은 잭이 템스강에 떨어진 지 10분이 지난 뒤였기에 그의 말은 성립될 수 없었다. 이 모순이 지적되자 샴지는 다시 말을 바꿨다. 두 번째 방문 때는 잭을 직접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며, 기억이 안개 속에 있는 듯 가물가물하다고 둘러댔다.

수사관들은 샴지가 리버워크 건물을 돌아 템스강을 내려다보았던 그 기묘한 공백기에 대해 해명을 요구했다. 샴지는 “강줄기가 참 예쁘지 않으냐”라며, “가끔 거기 앉아 있곤 한다”라고 답했다. 고요한 장소, 그림 같은 풍경. 새벽 3시에 담배 한 대 피우며 쉬어가기에 그만한 곳도 없으리라. 그는 “밖에서 시간을 많이 보내는 편”이라고 덧붙였다.

경찰의 추궁은 계속됐다. 그토록 긴 산책로 중에서 하필 잭이 추락한 바로 그 지점으로 다가간 이유가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한 경관은 “내 눈에는 엄청난 우연으로 보이는데, 난 우연 따위는 믿지 않는다”라고 쏘아붙였다. 강물에 떠 있는 잭의 시신을 보았느냐는 질문에 샴지는 만약 그랬다면 즉시 경찰에 신고했을 것이라고 답변했다.

샴지는 그날 밤 어떠한 불미스러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사람처럼 계속 행동했다. 또 다른 경관이 “보이는 것만큼 상황이 나쁜 게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말하지 못하는 건가?”라고 물었으나, 샴지는 끝까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 사이 경찰은 데이브 샤르마가 숨긴 또 다른 거짓말들을 하나씩 찾아냈다. 오전 8시까지 잠들었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 아니었다. 그는 이미 깨어 있었고, 6시 50분부터 샴지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리버워크의 수석 컨시어지 아나 누네스가 오전 8시 근무를 위해 도착했을 때, 로비 창밖으로는 이미 수색 중인 경찰 보트들이 보였다. 동료는 누네스에게 샤르마가 이미 안내 데스크로 전화를 걸어, 혹시 건물에서 누가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있는지 물었다고 전했다. 8시 10분, 데스크 전화가 다시 울렸다. 이번에 전화를 받은 누네스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진술했다. "샤르마는 '아나, 혹시 누가 발코니에서 뛰어내렸나요? 알려줄 수 있어요?'라고 물었습니다."

샤르마는 504호 안에서 전화를 걸고 있었다. 그가 발코니로 한 발짝만 나갔거나 창밖을 내다보기만 했어도, 아래에 방치된 시신을 충분히 발견했을 터였다. 어쩌면 그가 누네스에게 전화를 건 의도는 경찰이 시신과 이 건물 사이의 연관성을 이미 파악했는지 떠보기 위함이었을지 모른다. 혹은 샤르마가 아주 희박한 확률에 기대를 걸고, 저 아래에 있는 시신은 다른 사람이며 잭은 기적적으로 추락에서 살아남았다고 믿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날 아침, 그가 운전기사인 칼턴을 메이다 베일에 있는 잭의 아파트로 급히 보낸 이유도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통화 기록을 보면 샴지와 샤르마는 그날 하루 동안 여러 차례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그럼에도 샴지는 사흘 뒤 르 메르디앙 호텔에서 브레틀러 부부를 만났을 때, 잭이 실종되고 불과 몇 시간 뒤에 리버워크 건물 밖에서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입에 담지 않았다. 샤르마와 샴지 중 누구도 피해자가 샤르마의 집 발코니에서 추락했을 가능성을 경찰에 알리지 않았다. 만약 그들이 제때 사실을 알렸다면, 경찰은 잭의 신원을 확인하고 수사에 착수하는 데 걸린 나흘이라는 시간을 아낄 수 있었을 것이다.

경찰 조사 과정에서 샤르마는 수십 가지의 날카로운 질문에 그저 퉁명스럽게 "노코멘트"라고 답할 뿐이었다. 샤르마와 샴지 두 사람 모두 살인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곧 보석으로 풀려나 평소처럼 일상을 보냈다. 매튜와 라셸 부부가 느끼기에 초기에 반짝 활기를 띠던 수사는 점차 동력을 잃어가는 듯 보였다. 라셸은 "경찰이 가속 페달에서 발을 뗐다"라며 허탈해했다. 잭이 사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된 팬데믹의 여파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브레틀러 부부 역시 사건을 외부에 크게 알리지 않고 조용히 수습하려다 보니, 본의 아니게 런던 경찰청의 수사 의지를 꺾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했다. 아들의 죽음 자체가 비밀은 아니었다. 라셸은 페이스북에 "너무나 슬픈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아들 잭이 세상을 떠났습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골더스 그린에 있는 유대인 묘지인 후프 레인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수많은 가족과 친구들이 모였다. 하지만 평소 젊은 백인의 의문사에 그토록 굶주려 있던 런던 언론은 이상하리만큼 이 사건을 다루지 않았다. <데일리 메일>의 자극적인 특집 기사도, 잭의 생전 모습과 리버워크 건물을 대조한 화려한 사진 한 장도, 경찰의 무능을 비판하는 대대적인 보도도 없었다. 결국 수사 기관을 압박할 지속적인 여론 형성이 이루어지지 않은 셈이다. 브레틀러 부부는 적어도 초기에는 당국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서런던 출신의 열아홉 살 청년이 의문사했다면, 당연히 철저한 수사가 뒤따를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법 집행 기관과 사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리라는 믿음은 오늘날 그 어디에서도 순진한 생각으로 비칠 수 있지만, 특히나 이곳 런던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난 2014년, 52세의 런던 거주자 스콧 영은 잭 브레틀러의 사건과 기이할 정도로 흡사한 상황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메릴본에 있는 4층 아파트에서 추락해 연철 울타리에 몸이 꿰여 사망했다. 영은 평소 질 나쁜 러시아 사업가들과 얽혀 있던 부동산 개발업자였다. 죽기 전 그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하지만 런던 경찰청은 그의 죽음을 타살 혐의점이 없는 사건으로 종결했다. 아파트에서 지문 채취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 공교롭게도 그가 죽기 불과 한 달 전, 영의 친구인 조니 엘리차오프가 베이스워터의 한 쇼핑센터 지붕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경찰의 결론은 자살이었다. 런던에는 마치 잔혹한 연쇄 살인마가 배후에서 활개 치는 듯 보였다. 그 살인마의 이름은 바로 '중력'이었다. 2013년에는 러시아 올리거키 보리스 베레조프스키가 버크셔주 자택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그를 제거하려던 정적들의 숱한 시도 끝에 내려진 자살 판결이었다. 그 전해에는 영의 또 다른 친구인 로비 커티스가 지하철 선로로 추락해 사망했다. 그 역시 수상쩍은 러시아 세력과 얽혀 고전하던 중이었다. 그보다 2년 전에는 영의 지인이자 영국 부동산 개발업자인 폴 캐슬마저 지하철에 치여 숨졌다. 이 모든 죽음은 그저 비극적인 사고나 자살로 처리되었다.

모든 사건에는 채무나 마약, 이혼, 우울증처럼 자살이라 믿을 만한 그럴싸한 정황이 늘 뒤따랐다. 하지만 짧은 기간 동안 러시아와 결탁해 승승장구하던 런던의 사업가들이 이토록 줄지어 급사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의구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언론은 이 의문의 죽음들을 두고 ‘죽음의 고리’라 불렀으나, 런던 경찰청(스코틀랜드 야드)은 그저 불운한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을 뿐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2017년, <버즈피드 뉴스>는 러시아에 강력한 정적을 둔 뒤 "영국 땅에서 의문사한 남성 14명"의 정체를 밝혀낸 파격적인 심층 보도를 내놓았다. 이 보도에 따르면, 미국 정보 당국은 영국 경찰이 자살로 결론 내린 수많은 죽음이 실제로는 살인이었음을 시사하는 증거를 공유했다. 하지만 영국 법 집행 기관 내부에 만연한 소심함과 다년간의 예산 삭감으로 약화된 수사 역량이 결합하면서 수사는 매번 가로막혔다. 일각에서는 더욱 암담한 견해를 내놓기도 했다. 영국이 러시아 올리거키들이 뿌리는 막대한 자금에 너무 의존한 나머지, 런던의 새로운 마피아 계층을 처벌하지 않기로 수뇌부 차원에서 이미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결국 이들에게 영국 땅에서 아무런 처벌 없이 적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일종의 특혜를 베푼 셈이다. 당시 영국 정부의 한 국가안보 보좌관은 <버즈피드>와의 인터뷰에서 각료들이 "러시아인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고" 필사적이었다고 전했다.

브레틀러 부부는 잭의 죽음이 거대한 국제적 음모의 일환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다만 명백한 살인이 아닌 의문사라면 일단 자살로 분류하고 보려는 런던 경찰청의 타성에는 두려움을 느꼈다. 라셸과 매튜는 내게 자신들이 자살이라는 행위 자체에 편견을 갖고 있지 않으며, 잭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리 없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수많은 단서가 훨씬 불길한 진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부부는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아들의 친구들을 수소문하고 경찰을 끈질기게 독촉하며 정보를 모으던 중, 잭이 위험에 처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추가 정황을 포착했다. 그들은 잭이 죽기 이틀 전 그를 만났던 한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잭의 ‘올리거키 페르소나’를 전혀 모르던 이 친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했다. 함께 차를 타고 가던 잭이 겁에 질린 표정으로 자꾸 뒤를 살폈다는 것이다. 잭은 당국에 넘길 정보가 있다며 증인 보호 프로그램 신청을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최근 필자와 만난 이 친구는 익명을 요구하며 당시 잭이 누군가에게 협박을 당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가족을 해치겠다는 위협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물론 평소 극적인 이야기를 지어내기 좋아하던 잭의 성격상 이 말을 어디까지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지는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경찰이 수거한 잭의 유품 중 아이패드에는 그가 사망하기 이틀 전 ‘영국 증인 보호(witness protection uk)’를 검색한 기록이 선명히 남아 있었다.

부모조차 그 깊이를 온전히 가늠하지 못했을 뿐, 잭의 허구적인 이중생활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예전 급우들은 입을 모아 잭이 늘 무언가를 지어내곤 했다고 증언했다. 열세 살 때 밀 힐 스쿨에서 처음 잭을 만났던 한 친구는 "그는 정말 많은 것을 만들어냈다"며, "심지어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말하고 다니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친구의 추측에 따르면 잭은 아마 동정이나 관심을 끌기 위해 이런 거짓말을 꾸며냈을 것이다. 원치 않던 학교에 들어가 불안감을 느끼던 신입생 시절, 타인의 연민이 친밀감을 쌓는 지름길임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끔찍한 상실을 겪었다는 낯선 이의 고백에 대다수 사람이 마음의 문을 연다는 사실을 말이다.

잭은 동급생들에게 자신이 엄청난 부잣집 아들이라는 거짓말도 일삼았다. 밀 힐 스쿨의 기숙사 룸메이트였던 안드레이 레욘바른은 "거짓말 대부분이 부와 관련되어 있었다"고 떠올렸다. 잭은 가족이 런던의 초호화 아파트인 '원 하이드 파크'에 살며, 아버지는 레인지로버 두 대를 소유한 무기 중개상이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하루는 잭의 테니스 복식 파트너였던 레욘바른을 데리고 가기 위해 아버지 매튜 브레틀러가 차를 몰고 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도착하기 전, 잭은 레욘바른에게 "레인지로버 두 대가 모두 수리점에 들어갔다"고 선수치며, 아버지가 어쩔 수 없이 마즈다를 몰고 오는 것에 "매우 예민한 상태"이니 절대 차 이야기를 꺼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냉혹한 무기 중개상을 기대했던 레욘바른은 차에 올라탄 뒤 매튜의 다정하고 조심스러운 태도에 내심 놀랐다. 그는 "매튜 아저씨는 정말 좋은 분이었다"고 회상하며, 잭에 대해서는 "거짓말이라는 게 빤히 보일 정도였다"고 덧붙였다.

한번은 잭이 밀 힐 스쿨 친구들에게 뉴발란스가 자신을 크리켓 선수로 후원하고 싶어 한다고 떠벌린 적이 있었다.

“헛소리 좀 그만해!” 친구 중 한 명이 쏘아붙였다.

“잭, 너는 정말 구제 불능인 거짓말쟁이야.” 레욘바른도 거들었다.

순간 잭은 진심으로 가책을 느끼는 듯 보였다. “알아. 나도 내가 병적인 거짓말쟁이라는 거.” 하지만 곧이어 그는 어릴 적 끔찍한 사고를 당한 뒤로 이런 문제가 생겼다며 또 다른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안 돼, 잭! 또 시작이네!” 레욘바른이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잭의 기만적인 행동이 얼마나 광범위하고 오래되었는지 전해 들은 매튜와 라셸 부부 중, 아버지 매튜는 자식을 잃은 부모의 마음을 담아 이를 애처롭게 감싸 안았다. 그는 아들이 언제나 “이야기를 지어내는 데 약간은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말했다. 매튜는 기숙사 생활을 한다는 것이 “처음 부모를 떠나 대학에 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진단했다.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만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죠. 일종의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백지 상태에서 인생을 재설정할 기회를 얻는 셈입니다. 이전에는 없던 편집 권한이 자신에게 조금 생겼다고 느끼게 되죠. 잭에게 일어난 일도 바로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막대한 자산가들과 기숙사에서 함께 지내면서, 잭은 문득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공간을 발견했던 겁니다.”

또 다른 밀 힐 스쿨 친구는 잭이 사람들과 빠르게 유대감을 쌓다가도, 상대가 자신의 이야기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곤 했다"고 회상했다. 잭이 사망하기 직전 런던에서 그를 만났던 친구는 이렇게 덧붙였다. "친구들에게까지 거짓말을 해야 한다면, 그 삶이 얼마나 외롭고 고립된 곳이었겠어요?"

잭 브레틀러가 급우들에게 공상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던 수준을 넘어, 성인들이 부대끼는 런던의 위험천만한 현장에서 '가상의 자아'를 시험하기 시작한 시점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필자가 접촉한 고교 시절 인물 중 그 누구도 잭이 러시아나 카자흐스탄 재벌의 아들 행세를 했던 모습은 기억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연극은 대체 언제 시작된 것일까? 필자는 최근 마크 폴리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오랫동안 첼시 축구 클럽의 컨설턴트로 일하며 부동산 관리를 맡아온 인물이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2019년 초 어느 날 저녁 첼시 아츠 클럽의 오프닝 행사에 참석했다가 한 청년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그 청년은 자신이 러시아의 유력 자산가 가문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두 사람은 며칠 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샴지는 폴리가 자신에게 잭을 '잭 이스마일로프'라는 이름으로 소개했다고 주장했다.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20년 가까이 첼시 구단을 소유했음을 고려할 때, 구소련 출신 신흥 재벌인 올리거키들의 생리에 정통할 폴리가 잭의 가짜 신분을 보증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폴리는 내게 "러시아 투자자들은 대개 비밀이 많은 부류"라며, "자신들의 정보를 온전히 공개하지 않고 패를 숨긴 채 움직이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그가 보기에 잭 역시 "딱 그런 부류" 중 하나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잭의 마지막 1년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소설 속 인물이자, 타인의 순진함을 교묘히 파고들어 갈망하던 삶을 쟁취하는 소시오패스 사기꾼 '톰 리플리'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러시아에 휴가조차 가본 적 없는 런던의 십 대 소년이 노련한 폴리를 감쪽같이 속였다는 사실은 놀라움을 넘어 당혹스럽기까지 하다. 잭이 자신의 실체를 단번에 꿰뚫어 볼 법한, 올리거키 주변부에서 잔뼈가 굵은 이들을 상대로 그토록 무모한 도박을 벌였다는 점 또한 믿기 힘든 대목이다.

지난해 12월, 나는 악바르 샴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잭의 죽음은 다시 꺼내고 싶지 않은 사건"이라며 전화 통화나 대면 인터담을 모두 거절했다. 내가 재차 취재를 요청하자 그는 잭이 "비범할 정도로 정교한 거짓말의 그물을 짜놓았다"고 답했다. 그러면서 잭의 "부모에게 더 깊은 상처를 주는 일"이 "불편하다"며, 이 비극적인 사건을 다시 들추는 나의 시도가 부적절하다는 넌지시 비쳤다. 하지만 이후 몇 주 동안 내가 이메일로 여러 질문을 던지자 그는 답변을 보내왔다. 대답은 늘 요리조리 빠져나갔고 까다로운 질문은 아예 무시하기 일쑤였지만, 태도만큼은 과할 정도로 시종일관 정중했다.

샴지는 2019년 초, 친구이자 때때로 사업 파트너로 일하던 존 코니스-랭과 함께 리스본의 부동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고 밝혔다. 자금 조달이 절실했던 차에 폴리가 새로운 친구 잭을 소개해 주겠다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잭을 만나기 전 그의 이름을 구글에 검색해 보지도 않았느냐는 나의 질문에 샴지는 이렇게 답했다. "런던에서는 소셜 미디어보다 지인의 개인적인 소개를 훨씬 더 신뢰합니다. 특히 신분을 노출하지 않아야 하는 동유럽 출신이라면 더더욱 그렇고요." 이에 대해 코니스-랭은 이메일을 통해 다음과 같이 입장을 전했다. "마크는 올리거키 세계에 인맥이 두터운 인물이었기에, 잭이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의심할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샴지의 설명에 따르면, 그와 코니스-랭은 세인트 존스 우드의 한 카페에서 잭을 처음 만났다. 그 자리에서 잭은 인근 해밀턴 테라스에 있는 호화 저택을 막 사들이려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당시 잭은 편안한 차림이었지만, 샴지는 그가 부잣집 아들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 냈다고 회상했다. 샴지는 경찰 조사에서 잭이 "런던의 젊은 부호들이 선망하는 삶을 그대로 살고 있었다"며, "고가의 시계와 자동차, 전용기 등 부의 상징이라 할 만한 것들을 늘어놓았다"고 진술했다. 정작 샴지 본인이 그 자동차나 시계를 직접 목격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단지 잭이 부를 과시하지 않는 담백한 성격일 뿐이라고 짐작했다. 둘의 관계가 돈독해지면서 잭은 샴지의 강아지 산책길에도 동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로 '원 하이드 파크' 앞에서 만났는데, 잭이 건물 안에서 나오는 모습은 한 번도 볼 수 없었다. 그는 언제나 건물 밖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리스본 프로젝트를 위해 잭의 가문으로부터 지원받기로 했던 자금은 끝내 입금되지 않았고, 사업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하지만 잭과 샴지는 그 뒤로도 함께 다른 기회를 모색했다. 구체적인 사업 내용을 묻는 필자의 질문에 샴지는 말을 아꼈지만, 다른 경로를 통해 세부 사항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중 하나는 인도의 광섬유 케이블 매각 사업이었다. 잭은 케이블을 보유하고 구매처를 찾던 한 친구의 삼촌을 샴지에게 소개해 주었다. 세 사람은 런던의 부유층이 지위 과시를 위해 즐겨 찾는 초호화 호텔, 도체스터에서 만났다. 하지만 당시 잠재적 사업 파트너였던 인물(익명을 요구했다)의 말은 달랐다. 그는 자리에 앉은 지 단 몇 분 만에 샴지가 "완전 엉터리"라는 강한 인상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차와 스콘이 채 나오기도 전에 샴지는 휴대폰을 꺼내 모디 총리와 악수하는 사진을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그 남자는 한숨을 내쉬며 "나는 악바르 같은 부류를 너무나 많이 봐왔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가 더 인상 깊게 본 인물은 잭이었다. "정말 무서운 점은, 만약 잭이 실제로 몇 건의 거래만 성사시켰더라면 결국 업계의 거물이 되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또 다른 사례로, 잭은 가족 지인이자 2015년 자신이 설립한 스킨케어 업체를 유니레버에 매각했던 안토니 벅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당시 잭과 샴지는 CBD(칸나비디올) 성분을 함유한 스킨케어 라인을 출시한다는 구상에 꽂혀 있었다. 잭은 벅에게 보낸 왓츠앱 메시지에서 "서로 독립된 두 시설에 총 2,000만 달러 규모의 R&D 투자가 진행 중"이라고 호언장담하며, 자신의 "파트너 악바르"도 회의에 동석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만남에서 샴지는 말을 아끼며 잭이 주도권을 잡도록 내버려 두었는데, 벅 역시 잭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벅은 "잭은 매우 침착하면서도 설득력이 있었다"며, "마치 아버지 정장을 빌려 입고 나온 철부지 같은 느낌이 전혀 아니었다"라고 회상했다. (벅은 당시 조언을 해주러 나간 자리였기에 R&D 투자 운운하던 잭의 주장을 전형적인 과장 광고 정도로 여겼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후 흐지부지 중단된 이 프로젝트에 더는 관여하지 않았다.)

잭이 본인의 인맥으로도 충분히 그런 자리를 만들 수 있었다면, 왜 굳이 정체를 숨기는 번거로움을 감수했을까. 아마 평범한 인물보다는 화려하고 흥미로운 배경을 가진 인물로 비칠 때 비즈니스 세계에 더 빠르게 발을 들일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생각은 적중했다. 잭이 동경하던 세계에서 마크 폴리의 추천은 그 자체로 통용되는 화폐와 같았기 때문이다. 잭의 친구 몇몇은 그가 자신들에게 "러시아 인맥"을 과시하곤 했다고 전했다. 사실 '성공할 때까지 성공한 척하라'는 전략을 취한 기업가가 잭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매튜와 라셸이 아들의 거짓말을 하나하나 짚어보기 시작하자, 잭이 단순히 이국적인 배경을 이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막대한 부를 가진 것처럼 행세해 왔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샴지는 잭의 배경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는 질문에 매번 앞뒤가 맞지 않는 답변을 내놓았다. 필자에게 보낸 이메일에서는 폴리가 잭을 "아버지를 여읜 부유한 청년"으로 소개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2019년 경찰 조사에서는 잭을 처음 만났을 당시 그 올리거키 아버지는 살아 있었다고 진술했다. 그러다 알고 지낸 지 몇 주가 지나자 아버지가 "심장에 갑작스러운 문제"가 생겨 잭이 급히 스위스로 날아가야 했다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샴지의 말에 따르면 가상의 아버지가 사망한 것으로 설정되자, 잭은 두바이에 있는 어머니가 유산을 물려주지 않는다며 갑자기 가난한 처지인 양 연기하기 시작했다. 이제 와서 되짚어볼 때 가장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는 이렇다. 잭은 첼시 아츠 클럽에서 우연히 폴리를 만났을 때 충동적으로 올리거키의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던졌고, 폴리가 이를 곧이곧대로 믿으면서 잭은 단숨에 런던 사교계의 상류층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후 샴지를 만났을 때는 가짜 성씨까지 붙여 이 가공의 인물을 완성했다. 잭이 샴지나 샤르마에게서 큰돈을 갈취한 정황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함께 지낸 몇 달 동안 그는 공짜 숙식과 다양한 사업 기회라는 실리를 챙겼다. 여느 십 대들과 마찬가지로 잭은 대체로 현재만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더 큰 사기를 치기 위해 필요한 장기적인 전략이나 치밀한 계산까지는 미처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잭이 정말로 사기극을 벌인 것이라면, 이는 전형적인 인터넷 피싱 수법인 이른바 '나이지리아 왕자' 사기와 궤를 같이한다. 막대한 가문의 자산에 일시적으로 접근할 수 없게 된 왕자로 위장해, 자금 동결을 푸는 데 필요한 소액의 돈을 가로채는 방식이다. 때때로 이 기만술은 인간의 선의를 이용하기도 한다. 왕자가 처한 고난을 듣고 연민을 느낀 피해자가 관용을 베푸는 식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사기를 움직이는 동력은 탐욕이다. 피해자는 훗날 해방될 유산의 일부를 챙길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어 선뜻 돈을 내놓는다. 이런 기만행위가 온라인상에서 기승을 부리는 이유는 사이버 공간 특유의 익명성 덕분에 리스크가 낮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얼굴을 맞대고 아는 사람을 속이는 일은 그보다 훨씬 위험하다.

아버지 매튜를 끊임없이 괴롭힌 의문은 과연 샴지가 이 연극에 속아 넘어간 것인지, 아니면 어떤 방식으로든 공모한 것인지였다. 샴지는 브레틀러 부부와 경찰, 그리고 필자에게 잭이 죽고 나서 그의 부모를 직접 대면하기 전까지는 잭을 올리거키의 아들로 굳게 믿고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잭이 세운 회사 '오메가 스트래튼'은 그의 법적 본명으로 등록되어 있었고, 필자는 잭이 샴지에게 보낸 이메일 중 발신인이 '잭 브레틀러'로 명시된 주소를 사용한 것을 확인했다. 더욱이 마크 폴리는 누군가에게 잭을 '잭 이스마일로프'라고 소개한 사실을 부인하며, 자신은 그를 오직 잭 브레틀러로만 알고 있었다고 내게 말했다. 샴지에게 잭이 두 가지 신분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추궁하자, 그는 "생명의 위협 때문에 아버지가 가끔 다른 이름을 쓰라고 했다며 잭이 설명했다"라고 답했다. 브레틀러는 흔한 성씨가 아니지만, 샴지는 '잭 이스마일로프'를 구글에 검색해 본 적이 없듯 '잭 브레틀러'에 대해서도 최소한의 신원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샴지는 내게 "잭은 내 주변에 있을 때면 늘 약하지만 분명한 러시아 억양을 썼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필자가 안토니 벅과 도체스터 호텔 모임에 참석했던 남성을 인터뷰했을 때, 두 사람은 잭의 배경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의 정체를 전혀 오해하지 않았다고 입을 모았다. 그들 앞에서 잭은 어떤 억양도 쓰지 않았으며, 만약 억양을 섞어 썼다면 매우 기괴하게 느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도체스터 모임에 있었던 그 남성은 이렇게 외쳤다. "악바르는 잭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잭 브레틀러였으니까요!"

샴지는 2016년경 북런던의 한 헬스장에서 데이브 샤르마를 처음 만났다고 당국에 진술했다. 겉보기엔 접점이라곤 없어 보이는 두 남자는 이내 친구가 되었다. 매튜와 라셸 부부는 샴지가 당시 겨우 열여덟 살이던 아들을 갱단 총격 사건에 연루된 마약 밀매 용의자에게 소개해 주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샴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다. 넓은 아파트에 혼자 사는 샤르마가 당시 임시 거처가 필요했던 '러시아 후계자'에게 머물 곳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샴지에 따르면 샤르마와 잭은 급격히 가까워졌다. 두 사람은 공동 사업까지 구상했던 것으로 보이나, 구체적인 내용을 묻는 필자의 질문에 샴지는 다시 입을 닫았다. 그러나 경찰이 수집한 통화 기록을 보면, 샤르마가 잭이 가진 것으로 알려진 막대한 재산에 집착했으며 그중 일부가 자신의 몫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음이 명백히 드러난다. 잭이 사망하기 직전, 샤르마의 뒤틀린 보상 심리는 극에 달했다. 잭이 생을 마감한 2019년 11월 28일 아침, 샤르마는 샴지에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그 애송이 녀석, 그냥 엿이나 먹으라지."

세 남자가 남긴 디지털 기록에는 위기가 고조되던 순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터키에서 비즈니스를 마치고 런던으로 갓 돌아온 샴지는 자신의 일정을 단축한 이유 중 하나로, 잭이 자살하고 싶다며 도움을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잭이 이 연상의 남자들에게 죽고 싶다는 말을 꺼냈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부모의 생각은 다르다. 잭이 단순히 동정을 얻으려 그런 말을 내뱉었으리라 믿는다. 거짓말로 점철된 상황에 너무 깊이 빠진 나머지 겁에 질린 잭이 학생 시절 그랬던 것처럼 타인의 연민을 구하려 했다는 분석이다. 그가 헤로인을 투약하는 척 연기했던 이유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건 당일인 목요일, 샤르마는 샴지를 부추겨 잭이 "생활비로 얼마를 받고 있는지" 캐물으라고 종용했다. 심지어 "계좌를 확인하자"라거나 "잭의 카드를 들고 현금 인출기에 가보자"라고 제안하기까지 했다. 이들이 실제로 이 계획을 실행에 옮긴 정황은 없지만, 만약 그랬다면 커다란 충격에 빠졌을 것이다. 잭이 사망한 뒤 아버지 매튜가 확인한 아들의 통장 잔고는 고작 4파운드뿐이었다. 샤르마는 또 다른 메시지에서 "악바르, 나는 그 2억 500만 달러 중 5%만 챙기면 그만이야"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말의 의미를 묻는 필자의 질문에 샴지는 "그 친구들이 큰 액수의 돈과 사업 거래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은 있지만, 세세한 내용까지는 정말 기억나지 않는다"라며 발을 뺐다. 메시지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잭은 가공의 잃어버린 유산을 되찾는 과정에 샤르마를 끌어들였고, 샤르마는 그 대가로 거액의 수수료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재하지도 않는 그 유산의 허상이 샤르마의 눈앞에서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은, 바로 잭이 숨을 거둔 그날 밤이었다.

이 메시지들은 리버워크에서의 그날 밤이 자신들과 샤르마의 딸 도미니크가 잭의 헤로인 중독 치료를 돕기 위해 정성 어린 대화를 나눴던 시간이었다는 샴지와 샤르마의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증거였다. 당시 상황은 훨씬 위태롭고 험악했다. 밤 10시 35분, 샴지는 머빈 실리라는 친구에게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막 칼을 달구고 피를 닦아냈어." 몇 분 뒤, 그는 머빈에게 음성 메시지를 다시 보냈다. "농담 아니야, 임마. 당장 핌리코로 와서 이 빌어먹을 차 좀 가져가고 나 좀 집에 데려다줘. 상황이 엉망진창이 되기 직전이라고. 진짜 최악이야!"

경찰이 이 메시지들을 브레틀러 부부에게 공개했을 때는 이미 잭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가까이 흐른 뒤였다. 그동안 부부는 고통 속에서 철저히 고립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어머니 라셸은 "내 머릿속에서 나는 잭과 함께 그 발코니에 살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아들이 죽고 몇 달 동안은 정말로 배가 아팠다. 슬픔을 억지로 소화해 내야 했기 때문이다."

당국은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는 것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주기 시작했지만, 매튜와 라셸 부부는 자신들만의 가설을 세워가고 있었다. 부부가 보기에 잭은 발코니에서 밀쳐진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아니었다. 잭은 강탈할 재산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격분한 샤르마와 리버워크 아파트에 단둘이 남겨졌다. 아파트 안에 치명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고, 잭이 현관문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리라는 사실은 부부에게 너무나도 고통스럽고 명백해 보였다.

얼마 전 어느 날 밤, 나는 리버워크 건물과 템스강 사이에 난 산책로를 찾았다. 강물 위로는 영국 비밀정보국(MI6) 건물의 불빛이 일렁였고, 복솔 다리 위로는 차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 나는 불이 꺼진 504호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산책로 위로 툭 불거진 곡선형 발코니가 보였다. 그 순간, 브레틀러 부부가 설명했던 시나리오가 한층 더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 발코니 끝부분은 강물로 곧장 뛰어내릴 수 있을 만큼 길게 뻗어 있지 않았다. 강에 닿으려면 적어도 2~2.5미터는 밖으로 힘껏 도약해야 했다. 5층 높이를 고려하면 불가능한 거리는 아니었다. 매튜와 라셸 부부는 아들의 마지막 순간을 이야기할 때면, 어린 시절 잭이 얼마나 활기차고 운동신경이 좋았는지,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려 오던 그 대담한 몸짓을 가끔 떠올리곤 했다. 만약 잭이 정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산책로 바닥으로 곧장 떨어지는 것이었을 터다. 하지만 잭은 그 긴 발코니에서도 강과 가장 가까운 지점에서 몸을 던졌다.

매튜는 언젠가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 출신 남성과 나누었던 대화를 내게 들려주었다.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해병대는 자기 가슴이 총알도 튕겨낼 거라 믿는 열아홉 살짜리 애들로 가득하다’고요. 자신은 절대 다치지 않을 거라는 근거 없는 무적의 자신감 말입니다. 그 나이대 아이들은 성숙한 어른처럼 위험을 온전히 체감하지 못하죠.” 잭의 부모는 아들이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발코니에서 뛰어내렸다고 결론지었다. 그것은 절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시적인 몸짓이었다. 마치 영화 ‘미션 임파서블’에서나 볼 법한 탈출 방식이었다. 만약 잭의 골반이 강둑에 부딪히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정말 할리우드 영화처럼 멋지게 탈출에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브레틀러 부부는 아파트 안에서 잭을 기다리고 있었을 그 무언가가, 5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공포보다 훨씬 더 끔찍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만약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데이브 샤르마는 수많은 질문에 답하며 응당한 책임을 져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2020년 말, 샤르마 역시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리버워크는 1990년 주식 사기 사건과 관련해 공모, 허위 회계 처리, 절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던 영국의 부동산 거물 제럴드 론슨 경이 세운 건물이다. 그는 교도소 복역을 마친 뒤, 2012년 자선 활동 공로를 인정받아 대영제국 훈장(CBE)을 받기도 했다. 2016년 완공 당시 그는 《이브닝 스탠더드》와의 인터뷰에서 "이곳에서 얼마나 멋진 파티를 열 수 있을지 상상해 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504호에서 추락해 사망한 소년에 대한 언론 보도가 전무했듯, 1년 뒤 같은 아파트에서 발생한 두 번째 죽음을 알리는 기사 역시 인터넷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2020년 12월의 어느 날, 메이다 베일의 자택에 있던 매튜는 잭의 사건을 담당하던 주무 수사관 로리 윌킨슨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버린더 샤르마가 본인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윌킨슨의 말에 매튜는 정황을 캐물었다. 자살이었을까? 아니면 타살? 그것도 아니라면 자살로 위장한 타살이었을까?

윌킨슨은 샤르마의 죽음이 약물 과다복용에 의한 것으로 보이며 자살일 가능성이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그의 사건은 '타살 혐의점 없음'으로 처리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매튜가 구체적인 정황을 캐묻자, 윌킨슨은 기묘한 대답을 내놓았다. 매튜의 기억에 따르면 그는 "나는 이번 조사에서 배제된 상태(kept sterile)"라고 말했다. 잭의 죽음을 조사하던 이들이, 동일한 장소에서 발생한 유력 용의자의 사망 사건을 너무 깊이 파고드는 것은 '이해 상충'의 소지가 있다는 논리였다. 라셸은 당시를 떠올리며 분노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은 우리에게 '샤르마 유가족의 사생활을 존중해 줘야 한다'고 하더군요." 매튜는 샤르마의 죽음이 오늘날까지도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고 강조했다. "부검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검시 조사는 있었는지조차 알 길이 없습니다." 당국은 답변을 거부했다. 필자가 접촉한 전직 수사관들은 이러한 사건 전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샤르마의 죽음을 둘러싼 투명성 결여가 매우 이례적이며, 일반적인 수사 원칙으로는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라고 입을 모았다.

샤르마의 죽음으로 잭 사건의 핵심 증인이 사라졌다. 팬데믹의 기세가 꺾인 2022년 무렵, 브레틀러 부부는 당국의 부실한 수사 방식에 극심한 불만을 느끼고 있었다. 매튜는 "말할 필요도 없이 나는 중범죄 수사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이라며 운을 뗐다. "하지만 이번 사건에서 경찰이 보여준 태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다." 수사관들 역시 샴지가 잭의 죽음에 이르게 된 정황을 분명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파악하고 있다고 인정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그가 진실을 털어놓도록 압박할 그 어떤 수단도 동원하지 않았다. 검찰은 그를 사법방해죄로 기소할 수도 있었지만, 샴지의 뻔뻔한 위증이 반복되는 상황에서도 그저 어쩔 수 없다는 듯 방관하는 태도를 보였다.

실제로 경찰은 이 사건을 그저 방황하던 한 소년의 자살로 서둘러 매듭지으려는 기색을 거듭 내비쳤다. 잭이 사망하고 일주일 뒤 리버워크 아파트를 수색했을 당시, 경찰은 침실 한 곳과 세면대에서 혈흔으로 보이는 얼룩을 발견했다. 그러나 "명백한 신체적 폭행의 흔적이 없다"는 결론을 이미 내려놓은 상태였기에, 그 흔적에 대한 감식조차 진행하지 않았다. 의혹이 다분한 문자 메시지를 확보하고도 그 이면을 파헤치기 위한 기초적인 수사 단계조차 밟지 않았다. 경찰은 메이다 베일에 나타났던 운전기사 칼턴은 물론, 잭을 샴지에게 소개해 준 마크 폴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심지어 사건 당일 밤늦게 귀가한 샴지를 집 문앞에서 맞이했다던 그의 아내 다니엘라 카누츠조차 조사 대상에서 제외했다.

매튜는 이번 시련에서 가장 기이했던 점 중 하나로 수사 당국의 의뭉스러운 태도를 꼽았다. 그것이 단순한 무능의 소치인지, 아니면 더 어두운 이면이 숨겨져 있는지를 가려내는 일 자체가 고역이었다는 뜻이다. 영국에서 체포 기록은 공공 문서로 분류되지 않는다. 가족들이 샤르마의 전과 기록 사본을 요청했을 때도 당국은 제공을 거부했다. 필자가 런던 경찰청에 샤르마의 죽음에 관한 정보를 요청했을 때 돌아온 답변 역시 '타살 혐의점 없음'이라는 짧은 문구뿐이었다. 과거 샤르마가 '머슬스' 총격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언론 보도를 찾아낸 매튜는 그가 혹시 경찰 정보원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만약 그렇다면 잭의 죽음을 둘러싼 수사가 이토록 석연치 않게 축소된 이유도 설명이 된다. 악명 높은 총격 사건에 가담했음에도 샤르마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 버젓이 영국으로 돌아왔고, 기소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매튜는 경찰이 늘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수사할 것이라 믿어왔지만, 이번 사건에서 보여준 그들의 행태는 "그러한 믿음과 도저히 양립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2022년 2월, 매튜와 라셸은 해머스미스 경찰서에서 윌킨슨 수사관과 그의 동료를 만났다. 매튜는 허가를 받고 이 회의 내용을 녹음했다. 샤르마가 경찰 정보원이었느냐는 매튜의 질문에 윌킨슨은 "모르는 일"이라고 답했다. 만약 사실이라 해도 그건 철저히 격리된 기밀 사안이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다만 그는 수사 과정에서 그와 관련된 외압을 받은 적은 없다고 선을 그었다.

브레틀러 부부는 세세한 질문지까지 준비해 왔고, 윌킨슨은 마치 법정 심문을 방불케 하는 매튜의 집요한 추궁에 눈에 띄게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우리는 수많은 인력을 투입해 이 사건에 공을 들여왔다"고 항변했다. 급기야 윌킨슨은 자신이 도리어 취조를 당하는 기분이라며 뼈 있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매튜는 샴지가 "칼을 달구고 피를 닦아냈다"는 메시지를 보냈던 대상인 머빈 실리를 조사했는지 물었다. 윌킨슨은 머빈이 사건 현장에 없었기 때문에 조사하지 않았다고 답했다.

"정말 놀랍군요." 매튜가 말을 이었다. "그 친구를 아예 조사조차 안 했다는 겁니까?"

"문제는 그 친구가 상황을 전혀 모른다는 겁니다." 윌킨슨이 반박했다.

"그걸 어떻게 압니까!" 매튜가 소리쳤다. "물어보지도 않았으면서 말입니다!"

라셸은 비교적 침착한 태도를 유지했으나, 그녀 역시 사건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기에 분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윌킨슨과 그의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1년여간 우리는 아들을 잃은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2년째에 접어든 지금, 우리는 제대로 된 답변을 듣고 싶습니다."

어떤 면에서 윌킨슨 수사관은 브레틀러 부부가 세운 가설을 인정하는 듯 보였다. 잭이 주변 사람들에게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을 것"이라는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었고, "그 거짓말이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했다"는 점 말이다. 그는 샴지가 수사관들에게 거짓말을 했다고 믿는다는 사실도 부부에게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부부는 경찰이 피해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경향이 있다고 느꼈다. 잭이 어떤 식으로 죽었든, 결국 본인이 자초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식의 태도였다. 매튜는 내게 "잭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깊이 발을 들인 건 맞다"라고 인정하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그런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해도 마땅하다는 뜻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윌킨슨은 결국 자살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다시금 내비쳤다. 그러면서 그가 확실히 아는 단 한 가지는 살인 혐의로 기소할 만한 증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뿐이라고 말했다. 슬픔에 잠긴 부모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만, 경찰은 그날 밤 일어난 일의 모호함을 어느 정도 묵인할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윌킨슨은 "우리는 누구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라는 무력한 결론을 내렸다. 런던 경찰청은 이 사건에 관한 구체적인 질의에 답변을 거부했다. 경찰 대변인은 이메일을 통해 잭의 가족에게 "깊은 애도"를 표하면서도, 수사관들이 "가능한 모든 가설을 검토했으나 더 상세한 답변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라는 입장만을 되풀이했다.

12월의 어느 오후, 나는 런던 중심가에서 라셸을 만나 차를 마셨다. 차를 다 마신 후 그녀는 메이페어 주변을 산책하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샴지의 이전 사업장 주소지로 알려진 버클리 스퀘어 52번지로 향했다. 그곳은 철제 울타리가 앞을 장식한 매력적인 5층 건물이었다. 입구에 다다르자 라셸은 건물에 입주한 25개의 서로 다른 업체 이름이 적힌 초인종 패널을 가리켰다. 내부 공간이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하거나, 아니면 이 모든 것이 눈속임일 터였다. 즉, 화려한 주소지만을 빌려 우편물 수령지로 활용하는 전형적인 방식 말이다.

우리는 코노트 호텔을 지나 마운트 스트리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국 귀족 사회의 호화로운 유산이었던 이 호텔은 이제 카타르 왕실 소유가 되었다. "팬데믹 기간에 자전거를 꽤 많이 탔는데, 이 길을 따라 자주 지나다녔어요." 라셸이 말했다. "한번은 저 호텔 밖에서 전화를 붙들고 있는 악바르를 본 적도 있죠." 나는 그녀에게 의식적이든 아니든 그를 찾아다녔던 것인지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인정했다. 잭이 세상을 떠난 뒤 수년간 그녀는 런던의 이 주변을 배회하며 시간을 보냈다. "가끔은 다니엘라를 마주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샴지와 함께 두 아이를 키운 카누츠를 두고 한 말이었다. "그녀를 만나면 무슨 말을 할지도 이미 정해두었죠." 라셸의 목소리가 떨리며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내가 잭의 엄마예요. 같은 어머니로서, 그날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게 해줄 수 있는 말이 단 하나라도 없나요?'라고 묻고 싶었어요." (카누츠는 수차례에 걸친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영국에서는 원인이 불분명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사망 사건이 발생할 경우, 당국은 의무적으로 공적 검시 조사를 실시해야 한다. 2022년 12월 13일, 라셸과 매튜 부부는 다소 음침한 분위기의 벽돌 건물인 포플러 검시 법원에 들어섰다. 입구에는 '침을 뱉지 마시오'라는 문구와 함께 벌금 40실링을 부과한다는 낡은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부부 곁에는 라셸의 남동생 데이비드와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기 위해 동행한 세 명의 친구가 함께였다. 그해 초, 왕립검찰청은 샴지에 대해 공식적으로 불기소 처분을 내린 바 있다. 근본적인 범죄 사실을 입증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사를 방해했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에게 부수적인 혐의를 물어 기소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논리였다. 브레틀러 부부는 카프카의 소설처럼 부조리한 소송 절차 속에서 '피해자의 재심 청구권'을 행사하며 항소하려 했으나, 이마저도 거부당했다. 그들이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부부가 거부 사유를 논의하고자 검찰 측에 면담을 요청하자 돌아온 답변은 더욱 처참했다. "안타깝게도 면담은 불가능합니다. 면담은 오직 살인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에게만 제공되기 때문입니다."

잭이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흘렀다. 검시 조사는 검시관의 주재로 진행되었으나, 그는 사실상 판사처럼 증거를 검토하고 판결을 내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절차는 양측의 주장이 맞서는 대심 구조를 띠었다. 브레틀러 부부 곁에는 증인 신문을 담당할 알렉산드라 탐파코풀로스 변호사가 배석했다. 경찰관들의 증언이 이어졌고, 현장에 출동했던 구급대원과 리버워크 문지기의 진술서가 낭독되었다. 한 병리학자는 부검을 시작했던 의사가 잭의 턱뼈 골절을 비롯한 부상 부위에서 타살 흔적을 발견했다는 소견을 낸 뒤에야 자신이 투입되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그는 턱뼈 골절이 강한 충격 때문에 발생했다는 점만 인정할 뿐, 그 원인이 수면과의 충돌인지 누군가의 주먹인지는 단정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라셸은 서면 진술서를 통해 아들을 회상했다. “잭은 세상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애쓰던 열아홉 살 소년이었습니다. 신분과 부, 권력으로 가득한 화려한 삶을 꿈꿨죠. 안타깝게도 아이는 거짓된 삶을 살며 스스로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 매튜 역시 진술서를 제출하며 2020년 2월, 리버워크의 한 직원을 만났던 일을 기술했다. 입단속을 최고의 서비스로 여기는 그곳에서, 그 직원은 동료 한 명이 강바닥에 누워 있는 잭의 시신을 알아봤지만 “절대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고 털어놓았다. (필자 또한 해당 동료와 접촉을 시도했으나 끝내 응답을 받지 못했다.)

이 무렵 데이브 샤르마는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으나, 그의 딸 도미니크가 증인으로 채택되어 화상으로 증언에 나섰다. 런던에서 부동산 관련 일을 해온 도미니크(필자의 인터뷰 요청은 거절했다)는 검시관에게 "아버지는 저나 형제들의 삶에 있어 사실상 그리 자상하거나 활동적인 부모는 아니었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아버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그 과정에서 잭을 소개받았다. 그녀 역시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잭이 ‘러시아의 대단한 자산가 가문 자제’라고 믿고 있었다. 샤르마는 단기간에 잭과 유대감을 쌓았고, 때때로 일요일 가족 오찬 자리에 그를 초대하기도 했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도미니크는 잭이 리버워크 아파트에서 헤로인 투약 사실을 시인했다는 샴지의 주장과 동일한 진술을 내놓았다. 그녀는 그날 저녁이 어떤 험악한 분위기도 없이 마무리되었다고 강변하며, 본인이 아파트를 떠날 당시 아버지는 잠들어 있었다고 덧붙였다.

잭이 몸을 던진 직후 그녀에게 걸려온 전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도미니크는 이를 '포켓 다이얼(주머니 속에서 실수로 걸린 전화)'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 경관은 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해당 통화는 3분 28초 동안 지속되었다. 실수로 눌렸거나 상대방이 받지 않은 전화라고 보기에는 통화 시간이 너무 길다."

그 통화가 종료되고 약 30분이 지난 뒤, 도미니크는 아버지 샤르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받지 않았다. 탐파코풀로스 변호사가 물었다. "새벽 2시 59분에 아버지에게 전화를 건 이유가 무엇입니까?"

"글쎄요, 아마 그냥 좀... 걱정이 돼서 그랬던 것 같아요." 도미니크가 답했다.

잭의 시신이 발견되기 30여 분 전인 오전 6시 41분, 아버지가 그녀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에 대해서도 질문이 이어졌다. 샤르마는 "돔(도미니크의 애칭), 내 주변에선 다들 조심해서 행동하는 게 좋을 거라고 전해라"라며,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도 살려두지 않겠다(take no prisoners)"라고 썼다. 도미니크의 지적대로 샤르마는 평소 앞뒤 맥락 없이 횡설수설하는 문자를 자주 보내긴 했다. 하지만 이 메시지의 요지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자신은 두려운 존재이며, 앞길을 가로막는 자는 누구든 가만두지 않겠다는 경고였다.

도미니크는 짧게 답했다. "그런 메시지는 기억조차 나지 않네요."

검시관이 잭의 정신 건강 상태를 묻자, 도미니크는 그가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답했다. 이 발언은 브레틀러 부부의 분노를 샀다. 리버워크에서 벌어진 사건에 관한 도미니크의 증언 자체가 의구심 투성이인 마당에, 그녀의 신뢰성은 이미 바닥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검시관은 잭의 심리 상태에 대해 비전문가이자 이해관계자인 그녀의 주관적인 의견을 구하고 있었다. 매튜는 도미니크의 증언을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헛소리뿐"이라고 일축했다. (도미니크는 변호사를 통해 자신의 증언이 모두 진실이라고 《뉴요커》에 전해왔다.)

2018년 1월 잭을 진단했던 정신과 의사 로저 하웰스의 진술도 이어졌다. 그는 필자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앞서 라셸과 매튜는 잭이 자신들에게 거칠게 대항하거나 위협적인 태도를 보인 적이 있다고 말했지만, 하웰스는 잭이 실제로 물리적인 폭력을 행사한 사례가 여러 번 있었다고 언급했다. 그중에는 잭이 "말다툼 도중 이성을 잃고 어머니의 목을 졸랐던" 사건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자 필자는 브레틀러 부부가 자녀의 상황이 얼마나 심각한지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는지 다시금 의문이 들었다. 그들이 부주의했던 것일까. 잭의 형 조 브레틀러는 동생과의 관계가 경쟁적이었고 때로는 까칠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역시 부모와 마찬가지로 잭을 그저 가벼운 '허풍쟁이'로 여겼을 뿐, 병적인 사기꾼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보통 형제들은 부모가 모르는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기 마련이지만, 조조차 잭이 '이스마일로프'라는 가짜 정체성을 꾸며내고 있었다는 사실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브레틀러 부부와 가슴 아픈 대화를 나누며 내가 깊은 인상을 받았던 점은, 체면을 차리려 애쓰지 않고 아들 잭과 그가 안고 있던 문제들을 가감 없이 털어놓는 솔직한 태도였다. 정신과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라셸은 잭이 "진심으로 해치려 했다기보다 분노에 휩싸여" 자신의 목을 졸랐다고 진술했다. 내가 그 사건에 관해 묻자, 그녀는 잭과 단둘이 있을 때 벌어진 일이라며 상황을 설명했다. 가족이 더 좋은 차를 사고 더 좋은 집으로 이사해야 한다는 잭의 억지에 그녀는 늘 그렇듯 말다툼을 벌이던 중이었다. 그녀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며 "버릇없게 굴지 마라"고 딱 잘라 말하자, 잭의 손이 갑자기 그녀의 목을 조여왔다. 라셸은 당시를 떠올리며 말했다. "제 키는 160cm 정도인데 잭은 180cm가 넘었어요. 그 분노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이해할 수 없었죠. 몸도 좋지 않았고, 무엇보다 공포를 느꼈습니다." 그 일이 있은 뒤 그녀는 잭에게 정신과 진료를 강권했다. 그녀는 그 진료가 "곪았던 무언가를 터뜨리는 계기(lanced something)"가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 후로 잭은 다시는 어머니에게 폭력을 쓰지 않았다.

샴지가 내게 보낸 이메일 답변 속에서, 그가 브레틀러 부부에게 느낀다는 공감은 때때로 그들을 언급할 때 묻어나는 날 선 말투에 가려 빛이 바랬다. 그는 "사실 잭은 부모와 자신의 삶에 너무나 고통받은 나머지, 탈출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기세였다"라고 적었다. 또 다른 대목에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잭이 부모를 얼마나 증오했는지, 새로운 자아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부모가 받아들이기 힘들 것이라는 점은 잘 안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과 그가 쌓아온 거짓말을 더 이상 견뎌낼 수 없었던 것이다."

잭은 정신과 상담 당시 부모가 자신을 '통제하려 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그 반대였던 것으로 보인다. 브레틀러 부부는 아들에게 엄청난 자유와 신뢰를 주었으며,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지나칠 정도였다고 후회한다. 잭이 부모를 향한 증오 때문에 가짜 정체성을 만들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샴지의 암시는 악의적이며 자신에게 유리한 변명일 뿐이다. 하지만 이 비극은 부부로 하여금 아들이 품었던 불안과 원망의 뿌리가 어디인지 깊이 고민하게 만들었다. 라셸은 "나는 평생을, 우리 아이들의 삶을 위해 내가 고쳐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고치며 살았다"라고 내게 털어놓았다. 잭이 열세 살 무렵 급우들에게 엄마가 죽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전했을 때, 나는 그녀가 상처를 입지 않을까 우려했다. 여느 모자 관계처럼 부침은 있었다고 라셸은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잭과 가까운 사이였고, 적어도 스스로는 그렇게 믿어왔다. 여름 방학이면 함께 뉴욕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우리는 즐거웠다"라고 그녀는 회상했다. 도시 곳곳에서 자전거를 타고, 랜들스 아일랜드에 가서 테니스를 치기도 했다.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아이가 나를 미워한다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분명 진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검시 조사의 핵심 증인은 악바르 샴지였다. 그는 더 이상 런던에 거주하지 않았으며, 가상화폐 기업인 ‘비트제로(Bitzero)’의 CEO로 변신해 있었다. 2022년 봄, 그는 노스다코타주 네코마에 있는 냉전 시대의 미사일 격납고 단지를 가상화폐 채굴 시설로 개조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기자회견 당시 샴지는 비트제로의 북미 본부를 이 지역에 세우겠다며, “파고와 비스마르크 중 어디로 정할지 고민 중”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요즘 정확히 어디에 머무느냐는 필자의 질문에 그는 모호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업무상 미국, 캐나다, 스칸디나비아를 자주 오가며, 런던에서도 시간을 보낸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의 가상화폐 채굴 시설 계획은 아직 결실을 보지 못한 듯하다. 비트제로의 새로운 임시 CEO인 칼 아그렌은 샴지가 지난 9월 사임 권고를 받고 물러났다고 전했다. 최근 보도자료를 보면 샴지는 ‘다크바이트(DarkByte)’라는 또 다른 기업의 대표로 소개되어 있다. 이 회사는 도저히 해석이 불가능할 정도로 전문 용어가 뒤섞인 문구들을 나열하며 인공지능(AI) 관련 사업을 표방하고 있다. 1993년 머메이드 극장에서 샴지 가문에 고용되었던 마크 신든은 악바르의 전형적인 수법을 이렇게 요약했다. “요란하게 발표하고, 결과는 쥐뿔도 없는 식이죠.”

잭을 알고 지냈던 샴지의 자녀들은 소셜 미디어 활동이 활발하다. 라셸은 때로 자학에 가까운 심정으로 그들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훑으며 환하게 웃고 있는 가족사진을 지켜본다. 심지어 그들이 키우는 바이마라너 종 반려견 ‘알파 네로’ 전용 계정도 따로 있을 정도다. 물론 소셜 미디어란 또 다른 가공된 정체성이 연출되는 무대일 뿐이지만, 샴지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상을 이어가는 모습은 라셸에게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샴지는 내게 보낸 이메일에서 이 사건은 자신에게 이미 “종결된 사안”이라며, 마치 아주 오래전 과거사라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잭이 세상을 떠날 무렵의 나이가 된 악바르의 아들은 현재 성공한 모델로 활동 중이다.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 속 악바르는 가죽 재킷을 입고 만면에 미소를 띤 채 어느 백화점 향수 매장에 서 있다. 그는 톰 포드 향수 광고판에 크게 걸린 아들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있었다.

샴지는 어느 호텔 방에서 검시 조사 현장을 화상으로 연결했다.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길게 자란 머리가 눈에 띄었다. 그는 진실만을 말하겠다고 선서한 뒤, 예의 그 주장을 다시금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나는 이번 사건의 주요 당사자가 아니다”라고 단언하며, “그 아파트는 내 소유도 아니었고, 마약 중독 문제 역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라고 강변했다.

탐파코풀로스 변호사가 입을 뗐다. "유가족이 원하는 것은 당신이 진실을 말해주는 것뿐입니다. 샤르마 씨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샴지는 여전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그는 본인이 보낸 문자 메시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잭이 숨진 당일 오후 4시 30분, 샤르마가 샴지에게 보낸 메시지 중에는 잭을 언급하며 "이제 도망 못 가. 우리랑 엮여 있으니까"라고 적힌 대목이 있었다.

이에 대해 샴지는 "그건 그냥 샤르마가 말하던 방식일 뿐"이라고 답했다. "그가 쓴 '우리'라는 표현은 일종의 '군주 복수형(Royal we)'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와 그를 뜻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과 세상 전체를 의미했던 거죠."

다른 답변들은 실소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황당했다. 머빈에게 보낸 "피(blood)를 치우고 있다"라는 문자의 의미를 묻자, 샴지는 이렇게 해명했다. "그건 혈관에서 나오는 그런 '피'를 말한 게 아닙니다." 그는 설명을 이어갔다. "'블러드(Blood)'는 '형제(bro)'를 뜻하는 좀 더 투박한 거리의 은어예요." 즉, 그가 피를 닦아내고(clearing up blood) 있었던 것이 아니라, "형씨, 나 지금 정리 중이야(clearing up, blood)"라고 말했다는 주장이다. (머빈은 필자의 인터뷰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샴지는 장시간 증언을 이어갔다. 목소리는 낭랑했고, 말투에는 은근히 귀족적인 기품이 묻어났다. 때때로 그는 잭의 부모와 형제에게 연민을 느끼는 듯한 태도를 보였으나, 한편으로는 지루한 절차에 가벼운 짜증을 드러내기도 했다. 검시관 메리 해슬 역시 이 모든 과정을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탐파코풀로스 변호사의 말을 수시로 끊으며 이렇게 말했다. "잭의 부모님이 풀리지 않는 수많은 의문을 품고 있다는 점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잭이 몸을 던지기 전 아파트 안에서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는 사람은 단 두 명뿐이며, "그들 중 누구도 오늘 이 자리에 없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때 매튜가 말을 끊고 들어왔다. 잭이 투신한 지 불과 몇 분 뒤에 샴지가 아파트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매튜는 "살아있는 사람 중 그날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 라셸과 내게 말해줄 능력이 있는 단 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샴지 씨입니다"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절차는 형사 재판이 아닌 검시 조사였고, 검시관은 브레틀러 부부가 이 제도의 권한 밖의 것을 얻어내려 한다고 암시했다. 그간 영국 당국의 완고하고 냉담한 태도에 진저리를 쳐온 매튜와 라셸에게 검시관의 반응은 그야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그들에게 이번 조사는 진실을 규명할 마지막 기회였기 때문이다. 이틀간의 증언 끝에 검시관은 '미결정(Open)' 평결을 내렸다. 사망 원인이 자살인지 타살 의심인지를 가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녀는 "추측할 수는 없습니다"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잭의 죽음은 공식적으로 여전히 미해결 미스터리로 남았으나, 이번 검시 조사는 사건의 몇몇 핵심적인 의문을 둘러싼 모호함을 걷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검시관은 샴지가 잭이 발코니에서 추락했다는 사실을 거의 확실히 알고 있었으며, 그가 강둑 너머를 살핀 행위 역시 "잭을 찾기 위함"이었음을 증거가 뒷받침한다고 밝혔다. 또한 증언과 복구된 문자 메시지를 토대로 "잭이 죽기 전 분명히 공포에 질려 있었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조사 과정에서 샴지는 무심결에 실언을 내뱉기도 했다. 샤르마가 "악바르, 그 2억 500만 달러 중 5%는 내 몫이다"라고 보낸 메시지에 대해 묻자, 샴지는 "잭이 약속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이어 "잭은 늘 거액의 돈을 주겠다고 장담하곤 했다"라며, "나는 샤르마에게 그 무지개 끝에 황금 단지 따위는 없다고 한두 번 말한 게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리버워크에서 벌어진 그날 밤의 진실을 규명하기가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비단 잭뿐만 아니라 그 아파트에 있던 모두가 가짜였기 때문이다. 데이브 샤르마는 인자한 스승의 가면을 쓴 해결사였고, 악바르 샴지는 성공한 사업가 행세를 하는 어설픈 한량이었다. 그리고 잭은 올리가르히의 아들인 척 연기하던 런던의 평범한 청년에 불과했다. 저마다 본모습이 아닌 무언가를 가장한 채, 현대 런던의 화려하고도 속물적인 성공 지향적 문화에 매몰되어 있었던 셈이다. 어느 추운 날 아침, 나는 매튜와 함께 리전츠 파크를 산책했다. 그는 공식 수사 결과에 대한 실망감을 토로하며, 지난 4년이 자신과 라셸에게는 고통스러운 발견의 여정이었다고 회상했다. 끝없는 추적과 시간이 흐른 뒤에야 부부는 아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고, 자신들이 살던 도시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라셸은 "정말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이었다"라며 "우리 집 문턱 바로 앞에 이런 지하 세계가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라고 털어놓았다. 매튜는 걷는 내내 "가끔은 런던이라는 도시 자체가 정말 혐오스럽다. 이곳을 떠나고 싶을 정도다"라고 나직이 읊조렸다.

잭이 벌인 기만행위들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매튜는 불쑥 밥 딜런에 관한 팟캐스트를 들었던 기억을 꺼냈다. 그는 "딜런이 열세 살 때 서커스단에 들어가려고 가출했다는 거짓말을 사람들에게 하고 다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물론 잭의 재능을 딜런과 비교하려는 건 아니다"라고 덧붙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세상에는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수없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결국 현실에 발을 내디뎠을 때,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는 능력이 결여된 것은 아니지 않나."

2019년 여름의 어느 날, 브레틀러 가족은 런던 남부에서 열린 매튜 어머니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다. 조와 잭도 함께한 그 자리는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그러다 잭이 먼저 자리를 떠나야겠다고 말을 꺼냈다. 최근 리버워크로 거처를 옮긴 그는 부모님에게 나중에 귀가하는 길에 복솔 다리를 건너기 직전 전화를 달라고 부탁했다. 파티가 끝나고 매튜와 라셸, 조는 차를 몰아 북쪽으로 향하며 잭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리에 들어선 그들이 리버워크 건물을 올려다보자, 5층 발코니에 홀로 서서 손을 흔드는 잭의 작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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