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렉스 리드 (1938~2026) [번역]
Merin Curotto 「The Rex Reed I Knew (1938–2026)」
렉스 리드
주: 미국의 영화 평론가이자 문화 저널리스트, 작가, 배우.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는 데만 거의 한 시간이 걸렸고, 엘리베이터를 잘못 타고 길을 헤매고서야 겨우 그의 병실을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는 마음을 추스려야 했다. 언제나 세상 누구보다 당당하고 커 보였던 그가 너무나도 왜소해 보였기 때문이다.
몇 주 뒤 우리는 전화로 다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다녀간 후로도 그는 수혈을 받고 간 합병증을 앓는 등 또다시 입원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몇 년 전 주유소에서 넘어져 발을 다친 이후로 온갖 건강 악화가 도미노처럼 밀려온 탓이었다. 그는 내게 말했다. "나아지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겠지. 어떻게 되든 자네한테 알려주겠네."
날카로운 재치와 타협 없는 안목, 특유의 문체로 60년 동안 미국 문화 저널리즘을 이끈 전설적인 영화 평론가 렉스 테일러 리드가 2026년 5월 12일 뉴욕에서 향년 8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킨 친구 캡퍼가 임종 소식을 전했다.
2018년부터 지금까지 옵저버의 편집장으로 그와 소통하는 동안, 우리는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는 남몰래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내가 알던 렉스 리드는 대중이 생각하는 까칠한 노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그런 면도 분명 있었지만, 그게 그의 전부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야기꾼 렉스
내가 렉스에게서 가장 사랑했던 면은 그의 남다른 이야기솜씨였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아무런 감흥이나 극적인 요소 없이 덤덤하게 늘어놓았을 일상적인 일화도, 그를 거치면 결코 잊지 못할 이야기로 탈바꿈했다. 그는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 기회를 놓치는 법이 없었다. 단어 하나를 고를 때도 신중을 기했으며, 군더더기 없이 명확하게 자신만의 색깔을 담아냈다. 렉스는 듣는 이를 순식간에 이야기 속 한 장면으로 이끌었다. 자신이 목격하고 깨닫게 해 준 세상의 황당함을 온전히 함께 느끼게 만들었으며, 마치 그 자리에 같이 있었던 것처럼 웃으며 추억하게 했다.
렉스는 좀처럼 소리 내어 웃지 않았지만, 세상을 늘 흥미진진하게 바라보았다. 반면 나는 그의 곁에 있을 때면 웃음이 끊이지 않았고, 주로 "설마요!" 하고 외치거나 "아, 렉스" 하며 탄식을 내뱉곤 했다.
그는 내 사생활을 먼저 묻는 일이 드물었지만, 내가 무심코 건넨 말은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가 꼭 기억하고 있음을 내비치곤 했다. 렉스에게는 유명 인사를 포함해 친구가 아주 많았다. 그런 그가 내 남편의 직업이나 우리가 사는 곳, 아이들의 나이, 그리고 내가 좋아한다고 했던 소소한 취향까지 전부 기억해 준다는 것—그렇게 마음을 써주는 온정은 내게 참 크게 다가왔다.
내가 뉴욕에 갈 때면 우리는 미드타운의 '마이클스(Michael's)'나 타임스스퀘어의 '사디스(Sardi's)'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는 언제나 콥 샐러드에 블루치즈를 빼고, 아이스티를 곁들여 똑같이 주문했다. 식당에 핫 퍼지가 있다면(그는 핫 퍼지와 초콜릿 소스의 차이를 꼼꼼하게 따졌는데, 식당 주방을 향해 이 점을 명확히 짚고 넘어가는 모습을 셀 수 없이 보았다) 마무리는 늘 아이스크림이었다. 우리가 함께한 마지막 점심은 그가 처음으로 크게 넘어진 지 몇 달 뒤였다. 그날 전까지는 그를 택시 타는 곳까지 바래다주거나 차 안으로 타도록 도와줄 일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후 부상이 너무 빠르게 겹치면서 나중에는 헤아릴 수조차 없게 되었다.
지난 1월 병원에서 형편없는 병원식과 파업 중인 간호사들의 늑장 대응을 한바탕 꼬집고 난 뒤, 렉스는 겨우 고개를 돌려 내게 이 모든 일을 어떻게 다 해내느냐고 물었다. 내가 말을 돌리기도 전에 그는 "어린아이 둘에 남편까지 있으면서 어떻게 이 일을 다 감당하는 건가?"라며 채근하듯 물었다.
보통 남성들에게는 잘 던지지 않는 질문이고 어떤 여성들에게는 민감한 주제일 수 있지만, 나는 그의 질문이 고마웠다. 무엇보다 내가 차마 스스로에게 허락하지 못했던 경외감 어린 어조로 물어봐 주어서 더욱 고마웠다. 나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뜨리며 나도 잘 모르겠다고 답했다.
그게 바로 렉스였다. 언제나 유심히 살피고, 모든 것을 기억하며, 상대가 참 소중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 주는 것.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한결같았다.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간 남부 소년
렉스 테일러 리드는 1938년 10월 2일 텍사스주 포트워스에서 어머니 주얼 스미스 리드와 정유회사 관리자였던 아버지 제임스 M. 리드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가족은 남부 전역을 끊임없이 떠돌아다녀야 했다. 렉스는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무려 13개의 학교를 거쳤다. 이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던 어린 시절, 그는 장소나 우정 대신 영화에서 평온함과 영원함을 찾는 법을 배웠다.
그는 두 살 때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았다. "가장 또렷하게 기억나는 건 어린아이에게 충격을 줄 만한 장면들이야. 보니가 말에서 떨어져 죽는 장면에서는 자지러지게 울었지." 비슷한 시기에 <타잔의 뉴욕 모험>도 보았다. "영화에서 끔찍한 폭풍우가 몰아치자 나는 어머니 옷자락을 계속 잡아당기며 '차 창문 올려야 해요!'라고 소리쳤어. 어머니는 '그냥 영화일 뿐이란다'라고 하셨지만, 내가 얼마나 감수성이 예민하고 몰입을 잘하는 아이였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지."
렉스는 입양아였다. 나는 지난 1월 병문안을 가서야 이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에게는 형제가 없었지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내게도 여동생이 생길 뻔했어." 그는 다소 후회가 섞인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부모님께 다른 아이를 또 입양하면 가출해 버리겠다고 협박했지. 진심이었어. 그래서 부모님도 포기하셨고."
그의 어머니는 달튼 갱단(Dalton Gang)을 먼 친척으로 둔 오클라호마의 방대한 가문 출신이었다. 어머니는 당시의 시대상과 남부라는 지역적 한계를 고려하면 이례적일 정도로 외아들의 독특함을 다 받아주었다. 렉스는 이렇게 회상했다. "남부 사람들은 보수적이라 걸핏하면 충격을 받았고, 금서도 많았어. 도서관에는 대출 제한 구역이 있었는데, 어머니는 나를 위해 그 책들을 대신 빌려다 주셨지. 덕분에 열두 살 때 <지상에서 영원으로>를 읽었어. 어머니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가져오렴, 같이 얘기해 보자'라고 하셨지만, 그럴 필요는 없었어. 난 이미 다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렉스는 어머니를 깊이 존경하며 이야기했다. 언젠가 부모의 유형을 '정원사형'과 '건축가형'으로 나누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정원사형 부모는 아이에게 필요한 것을 주며 자라는 대로 돌보는 반면, 건축가형 부모는 아이만의 고유한 특성을 파악해 이를 바탕으로 재능을 쌓아 올려 준다. 렉스의 어머니는 건축가였다. 일찍이 아들을 빛나게 만드는 자질을 알아보고 이를 아낌없이 키워주었다.
군인 집안의 후손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연예계에 대해 전혀 몰랐지만, 아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현명함을 지니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한 번도 꺾으려 하지 않으셨어. 그게 정말 대단한 일이지. 수많은 부모가 자식이 남들과 다르거나 재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평범한 삶을 살게 하려고 자식과 싸우잖아. 우리 부모님은 그러지 않으셨어."
혼자 극장에 갈 나이가 되자 렉스는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특히 바버라 스탠윅의 필모그래피를 통째로 외웠는데, 덕분에 몇 년 뒤 뉴욕에서 그녀를 실제로 만났을 때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렉스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녀에게 무엇을 질문해야 할지 정확히 알고 있었어. 그녀가 흥미를 느낄 만한 질문만 던졌으니까."
새로운 평론가의 탄생
렉스는 1960년 루이지애나 주립대학교 저널리즘 학과를 졸업했다. 대학 시절 이미 학생용 신문인 <더 데일리 레벨리(The Daily Reveille)>와 <배턴루지 모닝 애드보킷(Baton Rouge Morning Advocate)>에 영화와 연극 평론을 기고하고 있었다. 당시 그는 영화를 찍으러 남부로 내려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찾아가 인터뷰했는데, 마침 그 시절에는 미시시피와 루이지애나의 대농장 저택을 배경으로 한 로케이션 촬영이 활발했다.
안제라 랜즈베리, 폴 뉴먼, 리 레믹, 조앤 우드워드, 오손 웰스가 영화 <길고 긴 여름날(The Long, Hot Summer)>을 찍으러 배턴루지에 내려왔을 때, 렉스는 학교 신문에 실을 기사를 쓰기 위해 매일 촬영장을 찾았다. 당시 대학 여자친구였던 엘리자베스 앤 콜은 제발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졸랐다. 이때 연기의 매력에 지독하게 빠진 그녀는 결국 대학을 자퇴하고 뉴욕으로 건너가 이름을 '엘리자베스 애슐리'로 바꾸었으며, 1년도 채 되지 않아 <라이프(Life)>지 표지를 장식했다. 렉스는 "우린 오랜 친구야. 내 인생은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라고 덤덤하게 회상했다.
졸업 후 렉스는 배우의 꿈을 품고 뉴욕으로 향했다. 하지만 정작 그가 들어간 곳은 20세기 폭스사의 홍보 부서였다. 그곳에서 그가 맡은 일 중에는 "빳빳하게 다려진 셔츠를 입고" 증기 욕탕으로 들어가, 스튜디오 수장인 스파이로스 스쿠라스에게 가십 기사를 소리 내어 읽어주는 일도 있었다. 영화 <클레오파트라>의 제작비 초과로 회사가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렉스는 가장 먼저 정리해고 대상이 되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주급 75달러를 받던, 회사에서 가장 없어도 그만인 피라미"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고는 그에게 해방이었다. 아직 20대였던 그는 <뉴욕 타임스>와 <뉴욕> 매거진에 유명 인사들의 프로필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스튜디오 홍보 담당자들이 보여주고 싶어 하는 가공된 모습이 아니라, 스타들의 가식 없는 진짜 모습을 담아내는 새로운 저널리즘 형식을 개척한 것이다.
톰 울프는 "렉스 리드는 솔직한 시선과 사회적 세부 묘사를 포착하는 안목으로 스타 인터뷰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그는 인터뷰라는 상황 자체에서 서사를 이끌어내는 대가였다"라고 평했다. 렉스는 톰 울프, 트루먼 카포티, 케네스 타이넌, 해리 크루스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한때 가십거리로 치부되던 장르를 문학의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그가 1968년에 출간한 작품집 <나체로 주무시나요?(Do You Sleep in the Nude?)>에는 대스타가 되기 직전의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영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Bonnie and Clyde)>를 막 끝마친 워런 비티, 버스터 키튼의 마지막 인터뷰, 그리고 황혼기를 맞은 에바 가드너의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이 인물 묘사 글은 당대 가장 많이 인용되고 재발행된 스타 프로필 기사 중 하나가 되었다.
"나는 저널리즘에서 가장 하찮게 여겨지던 스타 인터뷰를 가져와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냈어." 렉스는 이렇게 돌아보았다. "돈도 없고 유명한 인맥도 하나 없던 시골 소년이 뉴욕에 상경해 언론계에 이름을 떨쳤다는 건, 결코 작은 성취가 아니지."
다코타 아파트와 상상 그 이상의 삶
1969년, 렉스는 로즈메리의 아기(Rosemary’s Baby)로 고딕풍의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던 센트럴 파크 웨스트의 전설적인 아파트, 다코타(the Dakota)로 이사하며 오랜 꿈을 이뤘다. 당시 그가 방 두 개짜리 집을 사는 데 들인 돈은 단돈 3만 달러였다. 맨해튼 부동산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힐 만큼 놀라운 파격가였다.
이사 첫날 밤, 그에게 있는 것이라곤 침낭 하나와 책, 음반을 가득 담은 쇼핑카트, 그리고 노란색 골덴 소재의 퀸 앤(Queen Anne) 스타일 의자가 전부였다. 마침 초인종이 울렸고, 렉스는 수건 한 장만 걸친 채 문을 열었다. 문앞에는 할리우드 대배우 로버트 라이언이 서 있었다. 라이언은 "다코타 입주자대표회의 회장입니다. 입주를 환영하러 왔어요"라며 인사를 건넸다. 라이언이 노란 의자에 편하게 자리를 잡는 동안 렉스는 인스턴트 커피를 탔고, 자신은 침낭 위에 걸터앉았다.
렉스는 이 아파트에서 50년 넘게 살았다. 수십 년 동안 보리스 칼로프("쓰레기통에서 그의 팬레터를 발견하곤 했는데, 정말 꿈만 같았어"), 로런 바콜 같은 인물들이 그의 이웃이었다. 그는 코네티컷주 리치필드 카운티에도 18세기에 지어진 전원주택을 한 채 가지고 있었는데, 그곳에는 알렉산더 칼더가 그린 욕조가 있었다. <천국, 지상, 그리고 지옥(Heaven, Earth and Hell)>이라는 제목의 이 욕조에는 빨간 선글라스를 낀 뱀이 그려져 있었다.
다코타 아파트로 이사하던 해, 렉스는 고어 비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마이라 브레킨리지(Myra Breckinridge)>로 스크린에 데뷔했다. 그는 성전환 수술을 받는 인물인 '마이런'을 연기했는데, 수술 후의 모습은 라켈 웰치가 맡았다. 이 영화에는 메이 웨스트와 파라 포셋도 출연했다. 하지만 렉스를 포함해 제작에 참여한 모두가 이 영화를 부끄러워하며 외면했다. 당시 촬영장 분위기에 대한 그의 회고는 특유의 비꼬는 재치가 돋보였다. "메이 웨스트는 오직 신하고만 대화했어. 라켈은 영화사 사장하고만 얘기했지. 영화사 사장은 또 신하고만 대화했고, 신이 그 메시지를 다시 메이 웨스트에게 전달하는 식이었어."
릭
한 달 전쯤 가졌던 마지막 통화에서, 나는 렉스의 사생활에 대해 아주 직접적으로 물었다. 평소 우리는 이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그는 수년간 문을 완전히 닫지도, 그렇다고 활짝 열지도 않은 채 이 주제 주변을 맴돌곤 했다. 나는 남편의 헤어 디자이너인 찰리 이야기를 꺼냈다. 유명 영화감독의 동생이기도 한 찰리는 X세대 동성애자다. 그는 어릴 적 연예계에서 자신처럼 '남다른' 사람 중 우러러볼 만한 인물이 단 한 명도 없었는데, TV에서 렉스를 보고서야 처음으로 자신과 닮은 사람을 찾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렉스는 진심으로 놀란 눈치였다. "아니, 나를 롤모델로 삼은 사람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어."
나는 동반자에 대해 물었다. 함께한 사람이 있었는지 말이다. 수년 전 그가 "매일 아침 같은 얼굴을 마주하며 깨어난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라고 했던 말을 상기시키며 정말 그랬는지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한숨을 내쉰 그는, 그동안의 정신없는 모습이 연기였나 싶을 정도로 너무나도 또렷하게 답했다. 평소의 렉스라면 혼잣말을 늘어놓거나, 빙빙 돌려 말하거나, 극적인 효과를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 질문은 그를 진지하게 만들었다. 그는 평생 딱 한 사람뿐이었고, 그 관계가 25년 동안 이어졌다고 털어놓았다. 상대는 DRG 레코드사를 운영하며 라이자 미넬리의 <더 액트(The Act)> 등을 제작한 릭 윈터였다. 릭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내게 사생활은 그리 많지 않아. 내가 쓰는 글과 대상을 사랑하는 데 온전히 나를 던지니까."
2018년에 그는 이를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했었다. "사랑은 내가 잘하는 분야가 아니야. 사람들은 주관이 뚜렷한 사람을 어려워하거든. 이 나이에 이제 와서 아내나 남자친구를 어떻게 찾겠어? 너무 늦었지. 그래도 휠체어를 잘 밀어줄 만한 사람을 만나면 좋겠네. 언젠가 그런 날이 올 테니까."
이제야 이해가 갔다. 렉스는 사랑을 몰랐던 게 아니었다.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사별의 아픔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남겨진 삶 동안 일을 동반자로 삼아 살아왔던 것이다.
옵저버 시절
렉스는 <뉴욕 타임스>, <뉴욕 매거진>, <뉴욕 데일리 뉴스>, <뉴욕 포스트> 등 이름에 '뉴욕'이 들어간 거의 모든 주요 매체는 물론, <GQ>, <에스콰이어>, <보그>, <우먼스 웨어 데일리(Women’s Wear Daily)>에도 글을 실었다. 베를린과 베네치아 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했다. 하지만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을 장식한 것은 <옵저버(Observer)>와 함께한 40년 가까운 세월이었다.
1987년, 렉스가 마흔아홉 살이 되기 나흘 전 아서 카터가 그를 영입했다. 당시 그는 문화 기자로서 바랄 수 있는 명예는 이미 다 누린 상태였지만, 지친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게 벌써 40년 전 일이다.
렉스는 마지막 통화 중 한 번에서 "이제 옵저버에 바친 세월이 몇 년이나 됐는지도 모르겠어"라며, "하지만 정말이지 지난 수년간은 오직 옵저버만을 위해 글을 썼지"라고 말했다.
어느 해 여름 발목이 부러졌을 때의 일이다. 옵저버 일은 잊고 회복에만 전념하라는 신신당부에도 불구하고, 렉스는 거의 매일 자신이 맡은 기사 상황을 업데이트해 보내왔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마흔아홉 살 때만큼이나 일을 진지하게 대했다. 25년 만에 처음으로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마침내 인정했을 때, 그가 보낸 메시지에는 괴로운 심경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아직도 발 때문에 아주 고생하고 있어." 그가 내게 보내온 글이다. "정상 크기보다 두 배나 부어올랐네. 걸을 수는 있지만, 한쪽 발로 공항 두 곳을 거치고, 택시를 타고, 호텔을 잡은 다음, 토론토에서 몇 블록씩 떨어진 상영관까지 매일 서너 번씩 가방과 보도자료, 노트를 끌고 걸어 다닐 엄두가 안 나네. 25년 동안 한 번도 빠짐없이 취재했던 영화제라 정말 놓치고 싶지 않지만, 무리하다가 화를 자초할까 봐 겁이 나네. 넘어지기라도 해서 캐나다 병원 신세를 지고 싶진 않거든."
숨을 거두기 전 마지막 몇 주 동안 수혈과 간 합병증으로 고통받으면서도, 그는 원고를 넘기지 못해 계속 미안해했다. 참다못한 내가 마침내 한마디 했다. "한 사람만 더 저한테 전화해서 '렉스가 글을 못 써서 미안하다고 전해달라더라'고 하면 저 정말 소리 지를지도 몰라요. 저한테 지금 글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렉스가 괜찮은지가 중요하죠."
그는 "그래, 뭐, 이런 상황치고는 잘 버티고 있어"라고 답했다.
그는 내가 여태껏 함께 일한 사람 중 최고라고 말해주었다. 그러고는 "나 정말 내로라하는 거물급 편집장들과 일해본 사람이야"라는 말을 덧붙였다. (당시 독한 약을 많이 복용하고 계시긴 했다. 내가 피터 카플란 같은 대단한 편집장 비할 바는 아니니까.)
렉스의 편지들
렉스가 보낸 이메일 제목은 언제나 '렉스의 편지(a note from Rex)' 아니면 '렉스 리드가(from Rex Reed)' 둘 중 하나였다. 내용은 주로 네 가지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마감한 평론 원고, 특정 영화가 평할 가치도 없을 만큼 끔찍한 이유, 내가 고른 사진에 대한 타박(나는 늘 사진을 못 고르는 편집자였다), 그리고 우리와의 협업에 대한 다정한 격려와 내 아이들의 안부를 곁들인 자신의 불행에 대한 파란만장하고도 유쾌한 독설이었다.
"마이웬(Maïwenn)의 툭 튀어나온 덧니가 잘 드러난 사진을 쓰지 않았더군. 그러니 그녀를 마담 뒤 바리에 비유한 내 글이 전혀 안 맞아떨어지잖아. 사진 바꿀 생각 있어?"
"흰 정장을 입은 남자 사진은 데니스 퀘이드가 아니라 닉 오덴커크야. 그리고 데니스 퀘이드라고 올린 사진은 도저히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어. 퀘이드가 맞긴 하겠지만 전혀 퀘이드 같지 않단 말이지. 이 모든 게 영화계가 완전히 말아먹었다는 내 말의 완벽한 증거야."
또 다른 기사를 두고는 이렇게 보냈다. "그 사진은 정말 최악이야. 이목구비가 하나도 안 보이잖아. 사진 속 인물이 너무 작아서 사라질 지경이라 아무런 인상도 안 남고, 그냥 누구라도 상관없을 수준이야. 지난번에 조지 클루니 사진을 그따위로 썼을 때도 경악했는데, 이번 것도 만만치 않군. 멋진 사진이 널렸는데 하나도 못 찾아?"
사진을 둘러싼 설전이 이메일 여러 통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사진을 바꾸자 그가 다시 답장을 보냈다. "새로 바꾼 사진은 처음 것보다 더 엉망이야. 평론에서 언급조차 안 한 주변 인물들까지 나와 있어서 독자들은 그게 누군지도 모를걸." 내가 다시 한 번 바꾸자 이런 답이 왔다. "세 장 중에 이게 제일 최악이네. 이렇게 형편없는 사진 모음은 처음 봐. 니콜라스 홀트 사진은 단 한 장도 없고 말이야. 그냥 맨 처음 사진으로 돌아가지. 적어도 그건 주드 로 얼굴은 보이니까. 까탈스러운 나 맞춰주느라 고생이 많네."
언젠가 한 번은 영화 리뷰를 제안하자 딱 한 마디가 돌아왔다. "아니, <퓨리오사>는 안 쓸 거야."
이유를 길게 설명할 때도 있었다. "어젯밤에 <스페인>을 보러 갔는데 극장이 너무 추웠어. 에어컨 바람이 내 머리 위로 직격하는데, 옷을 세 겹이나 껴입고 앉아 있으려니 고문이 따로 없더군. 결국 30분 만에 나왔어. 내가 본 30분은 완벽한 쓰레기였고 단 한 마디도 이해할 수 없었으니, 리뷰는 없을 줄 알게."
특히 렉스가 영화를 혹평할 때면 그 독설이 너무나 다채롭고 화려해서 오히려 그 영화가 보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그게 그의 재능이었다. 어떤 작품을 너무나 처참하게 짓밟아 놓아서, 도저히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만드는 것 말이다. 내가 몇 번이고 "그렇게까지 욕하시니까 더 보고 싶잖아요"라고 설명하면, 그는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도통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투덜거리곤 했다. 마치 내 밀레니얼 세대의 감성은 평생 가도 이해하지 못할 영역이라는 듯이. 어떤 면에서 렉스는 오랫동안 곁에 두고 그 가치를 깊이 음미할 수 있었던 조부모 같은 존재였다.
그가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편집을 내가 감행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자네가 고쳐 놓은 바람에 글이 전보다 더 엉망이 됐어." 그가 보냈다.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엘리엇 페이지(Elliot Page)’라고 쓰면 안 돼. 아니, 난 그렇게 안 써. 성전환 ‘이전’을 언급하는 거니까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엘렌 페이지(Ellen Page)’가 맞지. 지금 수정된 문장은 옵저버(NYO)나 드러지 리포트, 로튼 토마토에서 보기엔 너무 우스꽝스러워. 그냥 내가 쓴 원문대로 되돌려 주게. 그래야 내가 의도한 맥락에도 맞고 완벽히 이해가 되니까. 하지만 지금 엘렌 페이지였던 그 남자를 ‘사랑스럽고 매력적인 엘리엇 페이지’라고 부를 수는 절대 없는 노릇이야."
기술은 늘 그의 주적이었다. "이놈의 디지털 기술 때문에 정신이 나갈 지경이야." 그가 썼다. "맙소사, 이 기술이 주는 스트레스는 끝이 없군." 자동 업데이트가 실행된 후에는 아예 사보타주라며 울분을 토했다. "이게 다 마이크로소프트 워드 탓이야." 또 어떤 이메일은 그저 이렇게 시작하기도 했다. "컴퓨터 문제에 파묻혀 지내는 중."
자신의 건강 상태를 전할 때도 늘 그렇듯 특유의 연극적인 화법을 구사했다.
"내 슬프고 가련한 이야기를 좀 들려주지. 허리 통증으로 세 주 동안 집안에만 박혀 지내다가 겨우 통증이 좀 가라앉았어. 그래서 리뷰할 영화 노트를 챙겨 들고 글도 쓰고 쉬기도 할 겸 시골 집으로 내려갔지. 그런데 도착하자마자 오래전에 때운 이가 툭 빠져버렸고, 입안에 구멍이 뚫리더니 곧바로 통증이 밀려왔어. 결국 급히 뉴욕으로 돌아와 다음 날 아침 9시에 치과로 달려갔지. 의사가 한번 보더니 ‘보철물 아래가 너무 빨리 썩어서 엑스레이에도 안 나타났네요. 입안을 살리려면 뽑아야 합니다’ 하더군."
그는 말을 이어갔다. "내 치아는 내 외모에서 가장 큰 자랑거리였는데, 큰 충격을 받고 결국 의사 뜻에 따랐어. 이가 두 조각으로 쪼개져 있어서 수술을 두 번이나 해야 했지. 게다가 잇몸 뼈 밑에 낭종까지 있어서 그것도 제거하고 뼈 이식까지 받았어. 진통제 퍼코셋과 항생제를 처방받아 먹었을 때는 내 평생 가장 끔찍한 고통을 느꼈지. 남은 하루는 진통제에 의지한 채 따뜻한 소금물로 가글을 하며 침대에서 보냈어. 밤이 되니 랄프 로렌 침구 사방에 피가 흥건했고 침 삼키기도 힘들었지."
그는 이렇게 편지를 끝맺었다. "얼굴이 너무 부어서 록키처럼 보여. 입을 움직일 수가 없네. 턱선에는 꼭 딕 트레이시(Dick Tracy)에 나오는 악당처럼 새까만 멍이 들었어. 미안하지만 지금 내 삶은 그리 유쾌하지 못하네."
그 후로 그의 편지에는 "괴물 영화에 나오는 몰골을 하고 있어"라는 말이 후렴구처럼 등장했다.
그의 이메일이 늘 건강 걱정뿐인 것은 아니었다. 친구들과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온 뒤에는 이런 감상평을 남겼다. "그 친구들은 정말 요리에 소질이 없어. 닭다리를 달라고 했더니 너무 딱딱하게 타서 도저히 먹을 수가 없었지. 그래서 대신 가슴살을 달라고 했더니 물기가 쫙 빠져서 아무 맛도 안 나더군. 방울양배추는 시커멓게 탔고, 크랜베리 소스는 말 그대로 물처럼 출렁거리는 액체였어. 내가 만드는 것처럼 알갱이가 살아있는 소스가 아니었단 말이지. 그린빈은 너무 안 익어서 날것 같았고, 펌킨 파이는 설탕 넣는 걸 깜빡했는지 씁쓸하고 아무 맛도 없었어. 그나마 옥수수빵 스터핑과 칠면조 그레이비소스는 괜찮아서, 소스 국자로 크랜베리 국물을 좀 끼얹어 그것만 먹었네. 평소에는 내가 직접 요리를 하고 늘 기가 막히게 맛있었는데, 올해는 추수감사절에 넘어진 통에 허리가 너무 아파 서서 냄비를 저을 수가 없었어. 추수감사절만큼은 전통을 엄격히 따지는 편인데, 이번 식사는 우리 집안 요리사들이 봤다면 당장 쓰레기통에 처박았을 만한 식사였지. 식탁에서 가장 훌륭했던 건 내가 사 간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이었어. 그래도 오랜만에 친구들과 어울린 시간만큼은 즐거웠네."
그 모진 고통 속에서도 그는 늘 타인을 먼저 배려했다. 내 딸아이가 지독한 기저귀 발진으로 며칠 동안 어린이집도 못 가고 집에 머물렀을 때(그 바람에 평론 발행이 늦어졌다), 렉스는 "아이는 좀 어때?"라며 안부를 물었다. "아이 걱정이 많이 되네." 2023년 연말에는 이렇게 쓰기도 했다. "요즘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군. 부디 일은 조금 내려놓고,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는 평온한 크리스마스 주말을 보내길 바라네. 더 행복할 2024년을 위해 잔을 들어 올리자고. 자네와 함께 일한 것이 내게는 2023년 가장 큰 기쁨이었네. 내 진심이 전해지길 바라며." 1년 뒤, 그는 또 이렇게 보내왔다. "올해는 다들 귀찮아서 크리스마스카드를 안 보내는 해인 것 같지만, 자네가 보내준 카드를 받아서 정말 기뻤네. 두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더군. 딸아이는 아주 복스럽고, 아들은 당장 영화계로 진출해도 되겠어. 아이들이 얼마나 자랑스러울지, 자네 부부를 생각하면 참 행복해지네. 아이들을 위해 멋진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겠지. 그 많은 업무를 다 소화하면서 어떻게 시간까지 내는지, 정말 대단할 따름이야."
색다른 시선
세상을 남다르게 바라보는 법을 누군가에게 배웠냐고 묻자, 그는 망설임 없이 답했다. "내 안에 늘 존재하던 거였어. 영화나 재즈, 노래에 대해서는 누구에게도 배운 적이 없네. 설명하긴 어렵지만, 난 언제나 남달랐어."
그의 취향은 강렬했고 당당했다. 위대한 공포 영화를 만들 줄 아는 이들이 이제는 사라졌다며 아쉬워하긴 했지만, 그는 공포 영화, 즉 "사람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것들"을 사랑했다. 뱀파이어, 드라큘라, 벨라 루고시를 동경했고, 나치에 매료되기도 했다. 그는 나치를 두고 "내 생애 목격한 악의 현상 중 가장 흥미로운 형태"라고 표현했다. 반면 서부극에는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서부 영화는 전부 끔찍하게 싫어해. 내 삶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들이니까."
그는 과거에 "영화에 악어가 나온다면 무조건 본다"라고 쓴 적이 있다.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루이지애나에서는 늪지대를 비롯해 사방에 악어가 널려 있었어. 내게는 공포의 상징이 되었지." 인도에 갔을 때도 타지마할보다 관광객들에게 독을 뿜어대는 코브라에 더 관심을 가졌다. "나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것들에 언제나 마음을 빼앗기곤 했어."
그가 대학 시절 유일하게 C학점을 받은 과목은 기획 기사 작성(feature writing)이었다. 규칙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AP 통신 스타일의 제1원칙은 첫 단락에 누가, 무엇을, 왜, 언제, 어디서라는 육하원칙(5W)을 담는 것이었다. 렉스는 말했다. "그게 정말 싫었어. 나는 벽지 색깔이 어땠는지부터 쓰며 이야기를 시작했지." 편집자들은 그의 글을 무척 좋아했다. 그는 단 한 번도 채택 여부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미리 원고를 쓰는 일(on spec)이 없었다.
오해에 대하여
렉스는 까칠한 노인으로 기억되는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왜 그랬는지 충분히 이해가 간다. 사람들이 그에 대해 가장 먼저 던지는 질문은 늘 "정말 그렇게 못됐어요?"였고, 그다음은 "정말 그렇게 화가 나 있나요?"였다. 한 인간을 그런 식으로 단편화하기는 참 쉽다. 하지만 그것이 렉스의 전부가 아니었다.
"사람들이 나를 심하게 오해하고 있어." 그가 내게 말했다. "나를 괴물로 보더군. 본인들도 똑같이 행동하면서 나를 비난해. 내 글이 아니라 내가 싫다는 이유로 공격하는 거지. 난 절대 그러지 않았어. 내가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건 작품의 질이 떨어질 때뿐이야. 우리는 지금 평범함의 홍수 속에 빠져 있네. 내가 자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온통 평범하고 지루한 것투성이야."
그의 평론 중 몇 편은 실제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영화 <아이덴티티 도둑>(Identity Thief)에 출연한 멜리사 맥카시를 두고 그가 남긴 평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언급되기도 했다. 마지막 통화에서 렉스는 특유의 자기 객관화가 돋보이는 어조로 이 일을 꺼냈다. "어쩌면 내가 실베스터 스탤론에 대해 썼던 글들이 업보로 돌아오는 걸지도 모르겠어."
나는 평소 품어왔던 생각을 그에게 말해주었다. 사실 모두가 속으로 생각하지만, 렉스만이 용기 있게 입 밖으로 꺼냈을 뿐이라고 말이다.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한다는 사실조차 좀처럼 인정하지 않으며, 누군가 이를 대변하면 다들 들고일어난다. 그래야만 하니까.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발언이 아니니까 말이다.
"난 남을 함부로 재단하지 않아." 그의 평론에 난도질당해 본 사람이라면 기절초풍할 말이었겠지만, 그를 개인적으로 아는 이들에게는 완벽히 납득이 가는 고백이었다.
앤절라
렉스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은 앤절라 랜즈베리였다. 두 사람은 팬과 스타의 관계를 넘어 가족에 가까운 유대감을 나누었다.
렉스가 뉴욕에 막 상경해 <뉴욕 타임스>에 글을 쓰기 시작했을 무렵, 랜즈베리는 브로드웨이 역사상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히던 뮤지컬 <마임(Mame)>의 개막을 앞두고 있었다. 신문사는 렉스에게 이 기사를 맡겼다. 하지만 마침 배턴루지에 계시던 그의 어머니가 백혈병으로 위독해져 렉스는 뉴욕을 떠나야만 했다. 편집장들이 다른 기자에게 기사를 넘기려 하자 랜즈베리가 만류했다. "그 친구가 겪고 있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해요. 기사는 나중에 써도 됩니다."
렉스가 칸 영화제 취재를 마쳤을 때는 아일랜드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와서 지내라며 등을 떠밀었다. 본인이 집을 비울 때도 그가 쓸 수 있도록 열쇠를 맡겨둘 정도였다. 렉스의 아버지가 심장마비로 쓰러졌으나 아일랜드에서 출발하는 비행편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는, 랜즈베리가 직접 아일랜드 항공사(Aer Lingus) 사장에게 전화해 배턴루지행 비행기 좌석을 마련해 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만나면 무엇을 했을까? "내가 카드 게임을 가르쳐줬어. 같이 고전 영화도 보고, 맛있는 식당도 찾아다녔지. 화려한 세상에서 벗어나 조용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함께 즐겼어. 그렇게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지."
2022년 랜즈베리가 세상을 떠났을 때 렉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 말년에 그는 이렇게 털어놓았다. "이제는 친구가 없는 기분이야. 다들 떠나고 없네."
"곧 끝이 다가오고 있어"
"있잖나, 내 수정구슬에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말이야, 이제 곧 끝이 다가오고 있어." 렉스는 수년 동안 내게 이 말을 참 많이도 했다. 듣고 싶지 않은 서글픈 고백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내게 그런 속내를 털어놓아 준다는 사실이 고맙게 다가왔다. 고전적인 맨해튼 억양이 섞인 그의 느릿한 말투에는 날카로우면서도 연극적인 세련미가 묻어났다. 단어 하나하나마다 재치와 권위가 담긴 특유의 리듬감이 실려 있었다. 그는 자신이 쓰는 글뿐만 아니라, 자기 인생이라는 무대에서도 스스로가 주인공임을 잘 아는 평론가였다.
"이제 다 끝날 거야." 그는 버릇처럼 말했다. "마지막 순간에 '영화 평론가, 컴퓨터 앞에서 삼류 영화 리뷰를 쓰다 숨진 채 발견' 같은 기사로 기억되고 싶진 않거든."
수화기 너머로 더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목이 메어와 눈물이 터질 것만 같다. 그가 맞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유한하며, 그가 떠나고 나면 그의 까칠함과 다정함 그 모든 면면이 사무치게 그리워질 것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마지막 통화에서 우리는 아카데미 시상식 이야기를 나눴다. 렉스는 시상식을 챙겨 보았고, 아주 끔찍해했다. "젊은 관객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다들 너무 애를 쓰더군." 그가 말했다. "젊은 애들이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면서 억지로 맞춰주려는 노인네들이 결국 모든 걸 망쳐놓는 법이야. 농담도 한심했고, 수상 소감도 하나같이 유치했어. 예술성을 기리는 품격 있고 권위 있는 시상식에는 이제 아무도 관심이 없어. 그저 라스베이거스의 쇼 무대처럼 만들려고 혈안이 돼 있을 뿐이지."
무엇이 가장 마음에 걸리는지 물었다. "예술을 두고 순위를 매겨서는 안 돼. 예술이 경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네."
과거에는 나쁜 영화보다 좋은 영화가 더 많았던 시절이 있었을까? "그랬지." 그가 인정했다. "하지만 내가 글을 쓰던 시절은 아니었어. 60년대에는 경이로운 영화들을 많이 봤고, 70년대에도 몇 편 있었지. 하지만 최고의 영화들은 40년대에 나왔어. 시대적으로는 전 세계가 불행했던 암흑기였지만, 영화만큼은 더 높은 차원의 사유를 담아냈거든."
어떤 영화가 좋은 영화일까? "진짜 사람들이 진짜 삶을 살아가며, 서로에게 진심 어린 말을 건네는 영화지. 난 그런 작품에 마음이 움직여. 요즘 나오는 영화는 온통 판타지, 공포, 잔혹극, 학살극뿐이야.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그런 끔찍한 것들을 떠올리며 눈을 감고 싶진 않네."
기억되고 싶었던 모습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참 많이 애썼던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네." 렉스가 내게 말했다. "적어도 좋은 작품이 나왔을 때 기꺼이 찬사를 보낼 줄 알았던 사람으로 말이야. 까칠한 노인 말고. 실제 내 모습은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
생의 마지막 자락에서 렉스는 일을 줄이고 사파리 여행처럼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일들을 경험하고 싶다고 했다. 그는 "글 쓰는 게 이제 너무 지치는군" 하고 털어놓으면서도, 평론 원고를 계속 보내왔다. 글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그였다.
마지막 통화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내 인생이 이런 결말을 맞이할 줄은 몰랐어. 예전의 찬란했던 시절에 비하면 참 비참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서 속상하네. 마음이 몹시 괴롭지만, 이미 쥐어진 패를 가지고 묵묵히 버텨내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겠나."
2025년 1월,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NYFCC)는 연례 만찬에서 그의 협회 가입 50주년을 기념하는 공로상을 수여했다. 그는 자신과 앞선 세대의 모든 평론가보다도 오랫동안 현역을 지켰다. 스타들은 수상 소감에서 그의 이름을 언급하며 과거 그가 써준 평론을 추억했다. 그는 유일무이한 존재였다.
내가 옵저버(Observer)에 그의 인물평 기사를 실었을 때, 그는 곧바로 답장을 보내왔다. "내가 너무 독선적이거나 자기연민에 빠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군. 하지만 자네가 놀라울 정도로 길게 인용한 내 말들은 모두 사실이었네. 나라는 사람을 이토록 정확하게 묘사한 글은 처음이야. 그러니 누군가 이 글을 두고 뭐라 하더라도 결국 다 내 탓이겠지." 그는 기사에 쓰인 사진들을 어디서 구했는지 궁금해했다. 특히 앤절라 랜즈베리와 함께 찍힌 사진은 생전 처음 보는 것이라 했다. "앤절라와 같이 찍은 사진은 참 많지만, 이 사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네. 어디서 찍힌 건지도 모르겠어." 그는 그 사진을 한 장 구해다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결국 렉스는 소원을 이루었다. 삼류 영화 리뷰를 쓰다 컴퓨터 앞에서 숨진 채 발견되는 비극은 없었다. 그는 남부의 시골 소년 시절부터 늘 동경해 마지않았던 도시 뉴욕에서 눈을 감았다. 그 어떤 기준으로 보아도 경이로움 그 자체였던 삶 속에서, 그가 만난 모든 사람과의 추억과 그가 목격한 모든 역사의 기억에 둘러싸인 채 말이다.
유족은 없지만 그가 세상에 남긴 유산, 즉 8권의 저서와 수천 편의 평론, 셀 수 없이 많은 스타 프로필 기사 등 문화 저널리즘의 패러다임을 바꾼 수많은 업적은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또한 TV 속 그의 모습을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았던 한 세대의 젊은 성소수자들에게, 그는 '남들과 다르다는 점이 인생의 가장 큰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하지만 내가 영원히 기억할 기억은 훨씬 소박한 것들이다. '마이클스'에서 함께했던 점심 식사, 블루치즈를 뺀 콥 샐러드, 초콜릿 소스가 아닌 진짜 핫 퍼지, 그리고 언제나 내가 참 소중한 사람임을 느끼게 해 주었던 따뜻한 친구의 모습.
아, 렉스.
— Observer (2026.5.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