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에덴의 동쪽》, 원작을 해치지 않으면서 ‘악녀’ 캐시를 탁월하게 재해석하다 (번역)
Judy Berman 「Netflix’s East of Eden Brilliantly Reinterprets ‘Evil’ Cathy—Without Betraying Steinbeck」
존 스타인벡이 ‘위대한 미국 소설’의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에덴의 동쪽》을 출간했던 1952년 당시, 이야기의 중심 여성 인물인 ‘캐시 에임스’를 향한 세간의 반응은 사실상 만장일치에 가까웠습니다. 스타인벡의 묘사를 호평하든 혹평하든, 20세기 중반의 비평가들은 캐시를 그저 ‘순수한 악 그 자체’이자 ‘스타킹을 신은 사탄’으로 단정 지었습니다. 평론가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남성 비평가들 사이의 이견이라곤, 캐시가 ‘얼마나 지독하게 혐오스러운가’ 하는 정도의 차이뿐이었습니다. 당시 본지(타임지)가 그녀를 ‘사악한 음녀’라 평했을 때, 〈뉴욕 타임스〉는 ‘문학사상 가장 악랄한 여성’이라는 왕관을 씌워주었을 정도니까요. 그도 그럴 것이, 캐시는 십 대 시절에 이미 한 남자를 자살로 몰고 가고 자신의 부모를 살해합니다. 게다가 갓 결혼한 남편의 동생과 잠자리를 갖고, 쌍둥이를 낳자마자 곧장 버린 뒤 충격에 빠진 남편에게 총상까지 입히며 달아납니다. 그 길로 유곽에 들어가 포주 여주인에게 온갖 아부를 떨며 신임을 얻더니, 자신에게 전 재산을 상속한다는 유언장을 받아내자마자 그녀를 독살해 버리죠. 이후 캐시의 삶은 가학증과 착취, 협박, 폭력으로 얼룩집니다.
이런 악행의 목록을 보고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고 생각하기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대한 원작 소설을 읽고, 조 카잔이 날카로운 통찰로 각색한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며 저는 한 가지 사고실험을 떠올리곤 했습니다. ‘19세기 여성이라는 억압의 굴레 속에서 태어난 캐시가, 만약 위와 같은 상황들에서 덜 악랄하게 행동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그랬다면 한 성인 남성의 자살은 막을 수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스스로 그의 어린 신부가 되어야만 했겠죠. 부모를 죽이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사소한 빌미로도 끊임없이 딸을 구타하던 아버지의 폭력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결혼과 외도, 임신과 총격이라는 파국을 맞기 전에 남편이 될 남자에게서 도망칠 수도 있었겠지만, 아무런 돈도 연고도 없이 부상을 입은 채 지명수배나 다름없는 처지로 내몰렸다면 파멸은 불 보듯 뻔했을 것입니다. 다른 상황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말해, 캐시는 ‘악의 화신’이라서가 아니라,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유’를 쟁취하려 발버둥 치느라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조 카잔의 7부작 시리즈는 바로 이 가설을 토대로 이야기를 풀어나갑니다. 여성 인물 또한 남성 인물과 똑같은 온전한 인간성을 지닌 존재로 다루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전제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분명 페미니즘적 기획입니다. 또한 카인과 아벨의 비극을 대를 이어 재현하는 우화적 서사 속에서도, 《에덴의 동쪽》은 원래 조연들에게조차 저마다의 개성과 집착, 장단점을 입체적으로 부여하는 소설이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크루엘라나 래치드 간호사 같은 여성 악역들에게 손쉬운 트라우마 서사를 쥐여주고, 세련된 의상을 입혀 매력적인 ‘걸크러시 안티히어로’로 둔갑시키는 공식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카잔이 빚어낸 캐시가 신선하게 다가오고 플로렌스 퓨의 압도적인 연기가 깊은 울림을 주는 까닭은, 이 캐릭터가 스타인벡의 원작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카잔은 최근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원작 텍스트가 제 해석을 온전히 뒷받침한다고 믿어요”라고 밝혔는데, 이는 결코 허세가 아니었습니다. 캐시의 끔찍한 행동들에 굳이 새로운 변명을 지어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원작에는 이미 수많은 근거가 넘쳐나고 있었으니까요. 카잔은 또한 캐시를 온전히 조명한다는 것이 그녀에게 면죄부를 주거나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라는 존재를 있는 그대로 ‘마주 보는 것’임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시리즈의 오프닝 장면에 문자 그대로, 그리고 상징적으로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캘리포니아의 풍경을 차분히 묘사하며 시작하는 원작 대신, 드라마는 연대기상 훨씬 뒤에 일어날 결정적 순간을 먼저 보여주는 플래시포워드로 시작합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심하게 두들겨 맞아 신음하며 배로 기어가는 캐시(플로렌스 퓨 분)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납니다. 그녀가 도착하게 될 농가는 앞으로 대를 이어 수많은 이들의 운명을 뒤흔들어 놓을 장소입니다. 캐시는 내레이션을 통해 담담히 읊조립니다. “인간 부모에게서 괴물 같은 아이가 태어나는 법이다. 괴물이란 사회가 용인하는 정상성에서 크든 작든 벗어난 존재를 뜻한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자기 자신만큼은 정상이라는 사실을. 그렇다면 괴물에게는 도리어 세상의 정상성이야말로 기괴하게 보이지 않겠는가.” 이 사유와 문장 대부분은 스타인벡이 소설 속에서 캐시를 소개할 때 썼던 구절을 그대로 가져온 것입니다. 카잔의 유일한 차이점은, 작가를 닮은 관찰자 화자의 입이 아닌 ‘캐시 본인의 입’을 통해 이 말을 전하게 했다는 점입니다. 원작에서도 그랬지만, 인물의 육성으로 전해지는 이 대사는 괴물에게 애초에 악의가 없었음을 암시합니다. 애초에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던 한 인간에게, 과연 그 책임을 오롯이 물을 수 있을까요?
이 장면은 시청자들로 하여금 캐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이끕니다. 이후 극은 서로 경쟁하는 형제인 아담(크리스토퍼 애벗 분)과 찰스 트래스크(마이크 파이스트 분)의 삶을 되짚어가며, 캐시가 코네티컷 농장에 나타나기까지의 과거로 돌아갑니다. 캐시의 이름을 딴 2화는 순수하고 다정한 아담의 간호를 받으며 회복해 가는 캐시의 현재와, 그녀의 비극적인 과거 서사를 교차해 보여줍니다. 드라마에서 가장 처음 엿보는 캐시의 모습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화책을 넘겨보는 총명한 다섯 살배기 소녀입니다. 고전 삽화 속 앨리스를 쏙 빼닮은 이 아이에게 한 나이 많은 소년이 숲으로 따라오면 사탕을 주겠다며 손을 내밉니다. (앨리스의 작가 루이스 캐럴의 실제 생애를 떠올리면 한층 더 서늘한 기시감을 주는 장면입니다.) 사탕을 좇아간 것은 아이의 선택이었고, 달콤한 것을 좇는 것은 인간 본연의 욕망이었습니다. 그러나 캐시의 삶에서 ‘선악과를 베어 문 순간’이 그토록 어린 시절에 찾아왔다는 점, 그리고 그 대가로 겪어야 했던 성폭력(극 후반부에 가서 확인되는)이 결국 그녀의 마음에 인간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과 환멸을 심어놓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비극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플로렌스 퓨는 〈배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원작에서 소년들을 죄악으로 이끌었다고 묘사된 일화를 각색한 바로 이 장면에 매료되어 배역을 결심했다고 밝혔습니다. “어린 시절의 캐시를 온전히 감싸 안아주는, 가장 아름다운 연애편지 같은 장면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대목을 읽는 순간 ‘이 인물을 지지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었죠. 그런 학대를 겪은 아이가 예전과 같은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건 도저히 상상할 수 없으니까요.” 실제로 캐시는 자아와 주체성을 키워갈수록 더욱 이기적이고 폭력적인 선택을 거듭합니다. 학창 시절의 교사(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명백한 아동 성착취자)와 부모가 지닌 공통점은, 캐시를 소유하려 들고 그녀의 자유를 억압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누구에게나 끔찍한 일이지만, 유년기에 신체의 주권을 유린당한 사람에게는 더욱 견딜 수 없는 악몽이었을 것입니다. 훗날 캐시가 반죽음 상태로 트래스크 농장으로 기어 들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녀를 첩으로 삼아놓고는 사랑을 돌려주지 않는다며 질투에 눈이 먼 포주에게 살해당할 뻔하다 간신히 도망친 직후였죠. 이 모든 내용은 스타인벡의 원작에 그대로 나오는 사실이지만, 카잔과 퓨는 시청자를 캐시의 내면 깊숙이 데려다 놓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녀의 공포와 고통, 그리고 ‘제발 나를 그냥 내버려 두라’는 처절한 갈망을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설령 캐시에게 누군가를 사랑할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었다 한들(드라마는 그 가능성을 열어둡니다), 아담과 결혼해 캘리포니아 농장으로 떠날 무렵에는 이미 바닥나 버린 상태였습니다. 이때 그녀는 찰스의 핏줄일지도 모르는 쌍둥이를 임신 중이었고, 아담에게 이 결혼은 파멸로 가는 길이라고 수차례 경고까지 한 뒤였습니다. 결국 캐시는 누군가 자신을 옭아맬 때마다 해왔던 방식을 되풀이합니다. 아담에게 육체적 상처를 입히고 정신을 철저히 무너뜨린 채 탈출을 감행한 것입니다. 이는 훗날 자신을 수양딸이자 공식 후계자로 삼으며 더 이상 손님을 받지 못하게 통제하려 했던 유곽 여주인 페이(마사 플림턴 분)에게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과거의 가해자들과 달리, 아담도 페이도 캐시가 가한 잔혹한 고통을 받을 만한 잘못을 저지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캐시의 잔인성만큼이나 스스로의 ‘현실 부정’이 낳은 희생자이기도 했습니다. 끔찍한 방식이었을망정, 캐시는 그저 어떻게든 자유를 얻으려 발버둥 쳤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서 유일한 자유는 경제적 자유뿐이야”라는 그녀의 말처럼 말이죠.
전통적으로 순수한 악으로만 치부되던 인물치고, 캐시는 놀라울 정도로 공정하며 무분별한 악의를 부리지 않는 면모를 보입니다. 스타인벡 역시 그녀가 ‘케이트’라는 새 이름을 짓고 페이에게 물려받은 유곽을 운영하는 방식을 묘사하며 이를 짚고 넘어간 바 있습니다. “여자들이 케이트가 정한 규칙을 철저히 따른다면, 그녀는 여자들을 돌보고 보호해 주었다. 거기엔 사랑도 존중도 없었다. 결코 상을 주는 법도 없었으며, 규칙을 어긴 자는 딱 두 번 경고한 뒤 쫓아냈다. 대신 여자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부당하게 처벌받지 않는다는 확신과 안전을 얻었다.” 원작에서나 드라마에서나, 캐시의 가학성은 대외적으로는 권력을 휘두르고 미덕을 설교하며 존경을 요구하다가도, 밤이 되면 온갖 타락을 일삼으러 유곽을 찾는 위선적인 남성들에게만 향합니다. 이는 다섯 살 무렵 선악과를 깨물며 체득한 선악의 지식, 즉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게 된 시선의 반영이었습니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나타나는 변화에 대해 카잔은 이렇게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기묘하게도, 스타인벡은 어느 순간 캐시라는 캐릭터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그에 대한 분풀이로 그녀를 징벌하기 시작해요. 외모를 깎아내리는 등 인물을 대단히 심술궂게 다루기 시작하죠.” 캐시는 흉하게 늙어가고,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뒤틀립니다. 그럼에도 모든 인물을 다각도로 탐구하려 했던 스타인벡의 태도는 인정받아 마땅합니다. 비평가들이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자비, 혹은 적어도 그럴듯한 여지를 캐시에게 남겨주었으니까요. 소설의 어느 대목에서 작가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캐시를 괴물이라 불렀을 때, 진실로 그렇게 보였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갑니다.
“이제 돋보기를 들고 그녀라는 인물의 미세한 활자를 들여다보며 주석을 다시 읽어보니, 그것이 과연 진실이었는지 의문이 든다. 문제는 우리가 그녀가 진정 무엇을 원했는지 알지 못하기에, 그녀가 원하던 바를 얻었는지조차 알 길이 없다는 점이다. 그녀가 무언가를 향해 달려간 것이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도망친 것이라면, 끝내 탈출에 성공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누군가에게, 혹은 세상 모두에게 말하고 싶었으나 공통된 언어가 없어 그러지 못했던 것은 아닐까. 그녀의 삶 자체가 너무도 정형화되고, 고도로 발달하여 도저히 해독할 수 없는 하나의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를 그저 ‘악하다’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그런 단정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는 실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원래 작가란 자신이 창조한 인물에 대해 독자는 상상조차 못 할 사소한 것까지 낱낱이 알고 있어야 하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스타인벡은 도리어 두 손을 들며, 자신조차 캐시에 대해 결코 알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고 털어놓습니다. 바로 이 빈틈이 카잔과 퓨가 시도한 새로운 해석의 여지를 열어주었습니다. 여성으로 살아가며 인간 본성에 대한 냉소적인 의구심을 끊임없이 확인받아야 했던 경험 덕분에 그들이 캐시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다소 단순한 접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캐시라는 인물의 정수에 닿아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카잔의 할아버지 엘리아 카잔 감독이 연출한 1955년 영화 역시 걸작이지만, 아담의 아들들에게만 초점을 맞춘 탓에 캐시를 주변부로 밀어내고 말았습니다.)
카잔이 원작의 설정을 가장 과감하게 비튼 부분은 캐시가 스스로 목숨을 끊어가는 과정입니다. 이는 자신의 삶에 아무런 목적이 없었음을 뒤늦게 깨달은 데서 비롯된 자멸의 선택이었습니다. 캐시는 환각 속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인 찰스와 대화를 나눕니다. 극 중에서 캐시는 성씨의 이니셜이 ‘C’로 시작하는 또 다른 이기적인 인물들, 즉 찰스와 아들 칼(조셉 자다 분)과 끊임없이 나란히 놓입니다. 두 남성은 캐시보다 훨씬 나은 인물처럼 보이지만, 이는 타고난 천성보다는 자라온 환경의 차이 때문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찰스에게는 농장에 은둔할 수 있는 든든한 재력이 있었고, 칼에게는 지혜로운 리(훈 리 분)의 헌신적이고 도덕적인 양육과 더불어 결국 아버지의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캐시에게는, 임종을 앞둔 아담이 아들 칼에게 건넸던 “선하게 살아가도 좋다”는 허락과도 같은 따스한 지지가 단 한 번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캐시의 마지막 환각이, 앨리스의 원피스를 입은 다섯 살 적 자신과의 눈물겨운 포옹이라는 점은 매우 적절합니다. 사탕을 든 소년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리고 조금만 더 자유로웠더라면, 본연의 차가운 천성을 이겨낼 수 있었을지도 모를 마지막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플로렌스 퓨는 평생토록 억누르고 가면 뒤에 숨겨두었던 감정을 한꺼번에 쏟아내며 눈부신 명연기를 펼칩니다. 스타인벡이 창조한 캐시는 결코 사탄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오히려 이브에 가까웠고, 카잔은 그 유사성을 한층 더 부각했습니다. 나아가 이번 《에덴의 동쪽》은 우리에게 또 하나의 잔상을 남깁니다. 그것은 바로 타고난 욕망이라는 ‘흰 토끼’를 쫓아, 영영 빠져나올 수 없는 깊은 굴속으로 끝없이 굴러떨어지는 앨리스로서의 캐시의 모습입니다.
— Time (2026.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