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전트 선생을 위해 옷을 벗다 (번역)
William Benemann 「Stripping for Mister Sargent」
녹음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이제 한 세기도 더 지난 어느 찬란했던 여름을 다정하게 회상하는 한 노신사의 것이다. 대서양 양안의 정서와 순수한 보스턴 억양이 절묘하게 섞인 그의 세련된 말투에는 에콰틴트(동판화 기법) 판화를 보는 듯한 아련한 향수가 묻어난다. “그해 6월 어느 날 오후, 나는 미국 북동부 전역에서 모여들던 유명한 해수욕장으로 향했습니다. 바로 사우스보스턴의 L스트리트 공공 목욕탕이었죠.”
L스트리트 목욕탕은 1860년대에 밀려드는 이민자들로 북적이던 공동주택 주민들을 위해 지어진 공공 목욕탕 중 하나였다. 매력적인 자연 해변가에 자리 잡은 데다 보스턴 전역에서 전차로 쉽게 올 수 있어, 특히 무더운 여름철이면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는 보스턴의 명소가 되었다. 이곳 단골들은 햇볕에 검게 그은 피부 때문에 ‘브라우니’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조지 럭스가 1922년에 그린 〈L스트리트 브라우니들〉이라는 그림을 보면 모래사장과 파도를 즐기는 수많은 피서객이 등장하는데, 전부 알몸의 남성들이다. 미술학도였던 안톤 캠프와 그의 친구 두 명이 1921년의 그 숨 막히는 무더위를 피해 찾아간 곳도 바로 이 누드 해변이었다.
캠프는 녹음 인터뷰와 짧은 자전적 에세이에서 목욕탕에서의 그 기억에 남는 오후를 이렇게 회상했다. “시원하고 짭조름한 바닷물에 몸을 담갔다 나오며 모래사장 위에서 햇볕을 쬐고 있었는데, 물 안팎에 있는 다양한 남성들의 몸이 유독 눈에 들어왔습니다. 체격이 훌륭한 몇몇을 유심히 보며 ‘저 중 한두 명은 전문 모델을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아이디어가 스쳤습니다. ‘내가 앞으로 석 달 동안 모델이 필요한 보스턴의 화가나 조각가들을 위해 모델을 서보면 어떨까?’ 하고 말입니다.” 캠프는 마침 화가 존 싱어 사전트가 보스턴 미술관의 벽화 작업을 의뢰받아 보스턴에 머물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터였다. 그는 L스트리트 목욕탕을 나와 시내를 가로질렀고, 예고도 없이 사전트의 집 문을 두드렸다.
누드 모델에 관한 고찰
당시 미국 남성들은 누드 모델 서는 것을 꺼렸다. 오스카 와일드는 이를 두고 “이제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에는 자국 출신의 모델이 있다”며, “뉴욕이나 보스턴에서는 좋은 모델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 대부분의 화가들이 나이아가라 폭포나 백만장자만 그리는 신세로 전락했다”고 재치 있게 꼬집었다. 유일한 예외는 젊은 남성들이 과학과 서로를 위해 기꺼이 옷을 벗었던 필라델피아였다. 1883년, 사진작가 에드워드 마이브릿지는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초청을 받아 누드 모델을 활용한 연속 동작 연구를 이어갔다. 학내 잡지 〈유니버시티 매거진〉은 이 작업에 열렬한 관심을 보였다. “우리 학교 운동선수들이 힘과 민첩성을 선보이는 순간들이 사진에 담겼다. 한 남성이 공중제비를 넘는 단순한 동작 하나를 무려 24장의 사진으로 포착해 낸 것이다.”
같은 시내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미술아카데미에서는 화가이자 교수인 토마스 에이킨스가 누드 모델을 수업에 도입했다가 큰 파장을 일으켰다. 에이킨스는 미술학교에서 주로 고용하던 단정치 못한 성노동자 모델들에게 불만을 품고, 남녀 학생들에게 수업을 위해 서로 누드 모델이 되어줄 것을 제안했다. 반발이 일자 그는 serious한 예술가가 되기 위한 과정일 뿐 전혀 부적절한 일이 아니라며 강하게 맞섰다. “필요하다면 옷을 벗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크로키 수업을 들을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파리 유학 시절 누드 크로키의 오랜 전통을 몸소 익힌 에이킨스였지만, 전통이라는 명분만으로는 알몸을 드러내는 행위를 용납하지 못하던 미국인들의 보수적인 시각을 너무 안일하게 판단했다. 남학생들은 기꺼이 옷을 벗었지만, 여학생 대부분은 직접 옷을 벗어야 한다는 사실이나 벌거벗은 남학생들을 마주하고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요구에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대다수 미국인이 극도로 당황스럽게 여길 만한 이 상황을 화실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려면 분위기를 탈성애화(de-eroticize)해야만 했다. 하지만 오늘 아침 나란히 등교했던 남학생의 은밀한 부위를 그려야 하는 상황에서 그런 분위기를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에이킨스는 필라델피아의 시골내기들에게 파리의 세련된 예술 문화를 심어주려 했지만, 정작 유럽 미술아카데미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 중 하나를 간과하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누드 수업이 시작되면 모델들이 가림막 뒤에서 재빨리 옷을 벗었다. 코르셋 끈이나 바지 단추를 채우느라 쭈뼛거리거나, 한 발로 서서 속옷을 벗으려다 비틀거리는 식의 민망한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모델들은 완전히 옷을 입은 상태에서 순식간에 완전한 알몸으로 변신했다. 무대 위에 올라가 미동도 없이 고전적인 포즈를 취하는 모델은 석고상이나 잘 익은 과일 바구니처럼 철저히 객관화(depersonalized)되었고, 덕분에 학생들은 시선을 어디에 둘지 민망해하지 않고 오랜 시간 관찰할 수 있었다. 화가의 개인 작업실(atelier)에서는 모델과 어떤 격정적인 사랑(amour fou)이 싹트든 간에, 미술아카데미 내에서만큼은 서로 묵시적인 약속 아래 엄격한 예의와 절제를 지켰다. 반면 에이킨스의 수업은 격식이 없고 지극히 자유로웠다(학생들은 그를 ‘톰’이라 불렀다). 그에게 유럽식의 딱딱한 예법은 고리타분해 보일 뿐이었다. 에이킨스는 학생들이 모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고, 포즈를 취한 모델 주변을 걸어 다니며 모든 각도에서 관찰하고, 다른 자세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장려했다. 에이킨스의 수업에는 가림막도, 절제도 없었다.
마이브릿지가 과학을 위해 알몸을 찍었다면, 에이킨스는 예술을 위해 알몸을 찍기 시작했다. 피사체는 이번에도 그의 제자들이었고, 종종 자신의 알몸을 직접 찍기도 했다. 그렇게 찍은 사진의 상당수는 기존의 전형적인 화실 포즈를 답습한 것이었지만, 에이킨스는 마이브릿지조차 꺼렸던 시도를 감행했다. 바로 모델들을 야외(en plein air)에서 촬영한 것이다. 자연 그대로의 순수한 유토피아(Arcadia), 즉 들판과 시냇가, 울창한 숲속의 물웅덩이를 배경으로 그 분위기를 담아내려 했지만, 19세기 도시인들의 앙상하고 하얀 팔다리와 볼록하게 나온 배는 그리스 신화 속 다부진 아폴로나 날렵한 아르테미스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야외든 그의 개인 작업실이든, 에이킨스가 남긴 발자취는 결코 작지 않다. 제자들의 알몸을 찍은 사진만 무려 400장이 넘게 보존되어 있으니 말이다.
지역 사회와 학교 안팎에서 항의가 빗발치자, 아카데미 교육위원장이던 에드워드 호너 코츠는 여러 타협안을 제시하며 에이킨스를 보호하려고 애썼다. (여학생들을 위한 남성 모델은 최소한의 가리개를 착용하게 했고, 여학생의 누드 모델 참여는 ‘어머니의 인지와 동의’가 있을 때만 허용했다.) 그러나 결국 1886년 1월,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에이킨스는 남녀 합동 수업에서 골반의 미세한 각도 변화가 둔근(gluteus maximus)의 음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던 중, 남성 모델의 가리개가 걸리적거리자 이를 홧김에 걷어내 버렸다. 코츠로서도 더는 손을 쓸 도리가 없었고, 결국 그에게 사임을 요구했다.
그 무렵 미국은 누드화를 보기에 지독히도 엄격한 시절을 지나고 있었다. 1873년부터 1915년까지 뉴욕 부도덕행위방지협회 총무이자 미국 우정청 감사관이었던 앤서니 콤스톡은 인쇄물, 무대, 우편물, 미술관 등 사회 전반에 걸쳐 모든 형태의 외설물을 근절하는 대대적인 검열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누드 크로키의 전통을 이어가고 싶었던 미국의 예술가들은 어쩔 수 없이 해외 유학길을 택해야 했다. 그리고 유럽 대륙에 도착해서야 비로소 인간의 신체를 대하는 완전히 다른 시선을 마주할 수 있었다.
물론 영국은 예외였다. (미국의 유난스러운 보수성을 비꼬았던 오스카 와일드의 말과 달리) 1894년 영국 왕립미술원은 누드화 수업에 참여하는 여학생들이 남성의 성기에 부주의하게 노출되는 일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새로운 규칙을 제정했다. “남성 모델이 착용하는 가리개는 일반적인 수영용 속바지 위에, 길이 약 2.7미터(9피트), 폭 약 90센티미터(3피트) 크기의 가벼운 천을 덧대어 허리에 감고, 다리 사이로 통과시켜 허리띠 안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천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얇은 가죽 끈으로 허리를 단단히 고정해야 한다.” 영국에서는 가리개를 홧김에 걷어내는 일 따위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반면 프랑스, 그리고 이탈리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화가 하퍼 페닝턴은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때 누드 모델을 구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베네치아는 모델의 천국입니다! 문 앞에 서서 손짓을 하거나, 〈아라비안 나이트〉의 주인공들처럼 마음에 드는 사람의 어깨를 툭 치며 ‘날 따라오라’고 말하기만 하면 군말 없이 따라오니까요.” 특히 곤돌라 사공들은 모델로서 인기가 높았는데, 어떤 성향을 지닌 미국 예술가들에게는 사공들이 손님을 모객하며 외치던 관용적인 표현(“Mi comandi, Signore?”—선생님, 명령만 내리십시오.)마저 묘한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자극제로 다가왔다.
니콜라 디인베르노
미국 누드 모델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대부분은 예술가들의 기록이나 그들이 남긴 작품을 통해 전해진 것이다. 정작 무대 위에 섰던 모델들의 생생한 목소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존 싱어 사전트의 모델로 활동했던 남성들의 기록은 아주 귀중한 예외다. 사전트는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미국의 국외 거주자(expatriate)로, 가족들의 크고 작은 병치레를 치료하고 문화를 향유한다는 명목으로 유럽 전역의 소박하고 고풍스러운 호텔과 요양 온천 마을을 전전하며 수년간 유랑 생활을 하고 있었다. 사전트는 로마와 파리에서 미술을 공부했으나, 1890년 새로 지어진 보스턴 공공도서관의 대형 벽화 작업을 의뢰받았을 당시에는 런던에 거주하고 있었다. 벽화는 캔버스에 먼저 그림을 그린 뒤 건물의 벽과 천장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제작될 예정이었기에, 대부분의 작업은 영국에 있는 그의 작업실에서 진행될 수 있었다.
사전트는 당시 에드윈 오스틴 애비(Edwin Austin Abbey, 그 역시 보스턴 공공도서관에 설치할 벽화를 준비 중이었다)와 화실을 함께 쓰고 있었는데, 두 사람은 루이지 디인베르노라는 이탈리아계 이민자를 모델로 고용했다. 하지만 사전트는 체격이 더 훌륭하고 젊은 모델이 필요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이지가 열아홉 살짜리 동생 니콜라와 한 친구를 데려오면서, 그야말로 완벽한 후보가 제 발로 화실 문을 두드렸다. 니콜라 디인베르노는 먼 훗날 그 첫 만남을 이렇게 회상했다.
“한 친구가 화가들 모델이나 서보자고 제안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일종의 장난삼아 해보기로 한 거죠. 그렇게 돌아다니다가 결국 사전트와 애비의 화실에 발을 들였고, 사전트 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는 거구에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선생님이 직접 문을 열어주셨죠. 이름을 묻더니 안으로 들어와 몸을 한번 보여달라고 하더군요. 그렇게 바로 다음 토요일부터 출근하기로 계약했습니다. 마침 그날 형이 모델을 서고 있었는데, 사전트 선생님은 왜 진작 나를 데려오지 않았느냐며, 내가 바로 자신이 ‘ 찾던 그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사전트는 디인베르노의 체격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그가 몸을 관리할 수 있도록 아낌없이 지원했다. 런던의 퀸틴 호그 체육관 회원권까지 끊어주었을 정도다. 그곳에서 청년 니콜라는 운동을 하며 권투를 배웠다. 디인베르노는 “가끔 눈에 퍼렇게 멍이 들어 가곤 했는데, 그럴 때면 어김없이 아침에 선생님이 나를 보고 ‘아, 자네보다 조금 더 주먹이 매운 사람을 만났나 보군’ 하며 농담을 던지셨다”고 적었다. 디인베르노는 화실 일을 돕기 시작하더니, 곧 사전트 집안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식구가 되었다. 두 사람이 함께한 시간은 20년이 넘는다. 모델 겸 집사가 된 그는 사전트를 따라 보스턴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보스턴 공공도서관과 보스턴 미술관 벽화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모델이 되어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디인베르노는 “선생님은 몸이 찌뿌둥할 때마다 나를 불러 마사지를 해달라고 하셨다”고 회상했다. 두 사람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였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사전트가 왜 평생 독신으로 살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선생님의 삶에서 연애담 같은 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제 생각에는 여성을 너무 많이 보셨던 것 같아요.” 여기에 디인베르노는 한마디를 더 보탰다. “선생님의 삶은 주교만큼이나 정갈했습니다.”
사전트와 디인베르노는 1918년 봄에 사이가 틀어졌다. 디인베르노는 사전트를 떠나 미국에 남기로 한 것이 본인의 결정이었다고 주장했다. “여기 삶이 어떤지 눈을 뜨고 나니 돈 욕심이 생겼습니다. 사전트 선생님 밑에 있으면서 받는 돈보다 더 많은 돈이 갖고 싶었고, 또 필요하기도 했죠. 선생님이 그만한 보수를 줄 수 없다고 하셔서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서로 조금은 씁쓸했지만 나쁜 감정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진짜 내막은 조금 더 극적이었다. 권투 선수 출신인 그가 보스턴 벤돔 호텔의 바텐더와 시비가 붙은 것이다. 주먹다짐이 벌어졌고, 호텔 측이 개입해서야 겨우 싸움이 말려졌다. 일이 더 시끄러워지거나 법적 소송으로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전트가 중재에 나섰다. 호텔 측이 바텐더를 해고한다면, 자신도 디인베르노를 내보내겠다는 타협안이었다.
사실 이 모델 겸 집사와 화가 사이는 전부터 이미 삐걱거리고 있었다. 과거 모델이었던 안톤 캠프의 말에 따르면, 사전트는 언젠가 “이탈리아 녀석 하나를 데리고 있었는데, 다소 거만하게 기어오르고 나중에는 내 일에 통 관심을 두지 않아 골칫덩이였다. 결국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으며, “그 친구가 제때가 아닌데도 술에 과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결별 당시 디인베르노는 결코 ‘이탈리아 청년’이 아니었다. 마흔여섯 살의 나이에, 권투 선수 출신이자 폭음으로 인해 예전의 탄탄한 ‘몸매’는 찾아보기 힘든 상태였다. 게다가 사전트에게는 이미 그 자리를 대체할 젊은 모델이 새로 생긴 뒤였다.
토마스 맥켈러
사전트가 보스턴의 벤돔 호텔에 묵고 있던 1916년 어느 날이었다. 그는 호텔 엘리베이터에 탔다가 동료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적 가치가 충분해 보이는 훌륭한 체격을 지닌 젊은 흑인 승무원을 발견했다.” 호텔에서 벨보이 일도 겸하고 있던 그 청년의 이름은 토마스 맥켈러였다. 노스캐롤라이나 출신의 스물다섯 살 청년 맥켈러는 흑인을 억압하던 악명 높은 ‘짐 크로우 법(Jim Crow laws)’을 피해 보스턴으로 막 이주해 온 터였다. 사전트는 그에게 모델이 되어줄 수 있는지 물었고, 이를 계기로 시작된 두 사람의 직업적 인연은 약 10년 뒤 사전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다.
맥켈러는 보스턴 벽화 프로젝트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모델이 되었다. 보스턴 미술관의 아폴로, 아틀라스, 헤라클레스, 오레스테스, 페르세우스 같은 신화 속 인물들은 물론, 하버드 대학교 와이드너 도서관에 있는 제1차 세계대전 벽화 속 미군 보병의 모델도 그의 몫이었다. 하지만 정작 완성된 그림 속에서 그가 흑인임을 알아볼 수 있는 작품은 거의 없다. 사전트에게 필요했던 것은 오직 그의 ‘신체’였을 뿐, 인종은 예술적 목적에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전트는 벽화를 그리며 맥켈러의 피부색을 밝게 보정하고 곱슬머리를 부드럽게 표현했으며, 심지어 여성 캐릭터를 그려야 할 때는 가짜 가슴 모형까지 착용하게 했다.
자신의 인종과 성별마저 지워져 버린 이 지우기 작업에 대해 맥켈러 본인이 어떻게 느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가 사전트의 화실에서 보낸 시간에 대해 남긴 기록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그는 유독 한 벽화 인물에 깊은 자부심을 느꼈던 모양이다. 미술사학자 데이비드 맥키빈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다. “지구를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 머리만 빼면 전부 제 몸입니다.” ‘머리만 빼면 전부 제 몸’이라는 이 말에 담긴 은유적 의미는 흥미로우면서도 어딘가 서글프다. 만약 당시 누군가 토마스 맥켈러에게 속마음을 더 캐물었더라면 그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을지, 이제는 그저 짐작만 해볼 뿐이다. 사전트는 맥켈러를 다른 예술가들에게 빌려주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조각가 사이러스 달린은 플리머스시에 세울 플리머스 인디언 부족장 마사소이트의 동상을 만들 때 그의 몸을 모델로 삼았다.
맥켈러가 탄탄하고 유연한 몸을 지닌 흑인 청년인 본연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곳은 오직 사전트의 초기 스케치나 벽화용이 아닌 개인적인 그림들뿐이다. 그중에서도 1986년 보스턴 미술관이 소유하게 된 〈토마스 E. 맥켈러의 누드 습작(Nude Study of Thomas E. McKeller)〉은 상징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이 유화 속 맥켈러는 쿠션 위에 앉아 다리를 구부려 벌리고 있다. 두 팔로 몸 뒤쪽을 지탱한 채 고개를 들어 빛을 향하고 있으며, 그 표정은 더없이 성스럽고 평온해 보인다. 배경에는 이전 그림의 흔적(pentimento)으로 추정되는 천사의 펼쳐진 날개가 아련히 드러나 있다.
하지만 이 그림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미술사학자 폴 피셔가 지적했듯, “빛을 받으며 정면 알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모습, 반쯤 무릎을 꿇고 다리를 벌린 자세, 뒤로 숨겨진 두 손은 일부 관찰자들에게 관음증적인 시선이나 심지어 결박(bondage)을 연상시킨다.” 19세기 노예제 시절 흑인들의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구도는 사바나나 뉴올리언스의 노예 시장을 너무나 쉽게 떠올리게 만든다. 사전트는 감상자의 눈높이가 모델의 배꼽과 성기 중간쯤에 오도록 아래에서 위로 맥켈러를 올려다보며 그렸다. 이 초상화를 깊이 들여다볼수록 그 안에 담긴 내포적 의미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사전트는 이 그림을 평생 화실에만 보관했을 뿐, 살아생전 단 한 번도 대중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안톤 캠프
L스트리트 목욕탕에서 오전 시간을 보내고 막 사전트의 화실을 찾아온 안톤 캠프를 맞이한 것은 바로 이 맥켈러의 누드 초상화였다. “화실 벽 한쪽에 액자도 없이 걸린 캔버스에 톰 맥켈러라는 흑인의 알몸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정말 탁월하게 발달한 근육질 체격을 지니고 있었죠. 인상적인 습작이었습니다. 아마 화가가 대형 벽화 작업으로 쌓인 피로와 중압감에서 벗어나, 시간이 날 때 잠시 기분 전환 삼아 그린 작품 같았습니다.”
캠프는 사전트와 함께 보낸 그해 여름의 기록에, 자신이 ‘거장’이라 부르게 된 이와 나눈 첫 만남의 대화를 고스란히 옮겨 적었다.
“사전트 선생님, 제 이름은 캠프입니다. 혹시 모델이 필요하신가 해서 찾아왔습니다.”
“전문 모델로 일한 경험이 있나요?”
“네,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세요.” [캠프는 작은 대기실을 지나 넓은 화실로 들어섰다.]
“누드 모델도 가능합니까?”
“네, 원하시면 언제든 가능합니다.”
“체격을 좀 볼 수 있게 잠시 옷을 벗어줄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은 옷을 벗어둘 의자를 가리켰다. 나는 선택받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온몸을 드러낸 채 처분을 기다렸고, 검사는 단 1~2분 만에 끝났다. 그는 내 몸을 구석구석 살피고 뒤로 돌아서 보라고 하더니, 다소 재미있다는 듯 말했다. “아, 수영을 하다 왔군요. 온몸이 까맣게 탔네요.”
“네, 방금 막 목욕탕에서 오는 길입니다.”
캠프는 그날 오후부터 곧장 모델 일을 시작하라는 제안을 받았고, 그렇게 인생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여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는 사전트의 모델로 일하는 것이 어떤 느낌이었는지 가장 사적인 기록을 남겼다. 첫날 화가는 화실의 작은 소파에 그를 알몸으로 눕혀두고 스케치를 했다. 캠프는 “휴식 시간 중에 슬그머니 다가가 경외심 어린 침묵 속에서 그림을 감상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내가 어깨너머로 그림을 훔쳐보자, 선생님은 몸을 반쯤 돌려 눈을 반짝이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의 위대한 조각가 피디아스가 자네를 만났다면 자기 작업실에 두고 아주 흡족해했을 걸세.’ 과분한 찬사에 순간 얼떨떨했지만, 그분에게 들은 그 말은 마치 성스러운 축복처럼 다가왔습니다.” 만약 그것이 넌지시 던진 추파였다 할지라도 캠프는 눈치를 채지 못했고, 이 젊은 모델은 당황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으쓱한 기분을 느꼈다.
모델을 서는 동안 캠프는 높은 무대 위에 올라가 종종 부자연스럽고 고통스러운 자세를 취해야 했다. “한 번은 근육 하나 까딱하지 않고 무려 1시간 45분 동안 같은 자세를 유지한 적이 있습니다. 겨우 자리에서 일어나 굳어버린 뼈마디를 부드럽게 풀려고 하는데, 선생님이 내 뒷모습을 보며 웃고 계시더군요. 내가 쪼그려 앉아 있던 천 소파의 퀼팅 무늬가 엉덩이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던 겁니다.” 구술 인터뷰에서 캠프는 이 일화에 살을 붙여 더 생생하게 전했다. “그 자국이 무려 이틀 동안이나 안 없어졌다니까요! 소파에서 내려와 몸을 쭉 펴며 스트레칭을 하려는데, 선생님이 그걸 보더니 ‘어이, 자네 엉덩이 좀 보게! 소파 무늬가 통째로 복사됐군!’ 하며 박장대소를 하셨습니다.”
맥켈러 때와 마찬가지로, 사전트는 자신의 예술적 의도에 맞지 않는 조형적 특징이 있으면 무엇이든 바꾸는 화가 특유의 권한을 발휘했다. 캠프는 ‘음악’을 의인화한 인물을 표현하기 위해 바이올린을 든 채 몇 시간 동안 굳은 자세를 버텼다. 하지만 완성된 결과물을 보고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 얼굴은 분명 나를 똑 닮아 있었는데, 머리에는 생각지도 못한 금발의 스스럼없는 장발이 더해져 있었습니다.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 대해 물어보고 싶었지만, 자칫 건방져 보일까 봐 꾹 참았습니다.”
하버드 대학교에 설치할 제1차 세계대전 추모 벽화를 그릴 때, 사전트는 알레고리(allegory, 우화)적 여성 인물들이 입은 옷의 주름을 표현해야 했다. “선생님은 치즈 숙성용 거즈 천을 몇 덩어리 뭉치더니, 반창고로 내 가슴에 두 개의 덩어리를 고정해 여성의 흉부처럼 볼록하게 튀어나오도록 모양을 만드셨습니다.” 캠프는 개의치 않았다. “꽤 괜찮은 방법이었습니다. 숯으로 밑그림을 그리는 과정도 생략한 채 내 몸에 장치해 둔 모습을 보며 곧바로 붓을 대셨는데, 그 모습에 서로 몇 번이나 킥킥거리며 웃었습니다.”
사전트는 특별한 목적 없이 그저 생각나는 아이디어가 있을 때마다 캠프의 누드 스케치를 남기기도 했다. 캠프는 면담자에게 “그 모든 포즈가 항상 작품에 사용된 것은 아닙니다”라고 설명했다. “머릿속에 어떤 구상이 떠오르면 무작정 습작을 만드셨죠. ‘이 자세로 누워볼 수 있겠나?’, ‘이렇게 서 있어 보겠나?’, ‘아니면 요렇게 비스듬히 기대어 보겠나?’ 하는 식이었습니다.”
사전트가 사망한 1925년 무렵, 그의 화풍은 이미 시대에 뒤떨어진 고리타분한 것으로 치부되었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그의 명성이 비로소 회복되었는데, 그때쯤에는 사전트의 전문 모델 중 아마 캠프만이 유일한 생존자였을 것이다. 캠프가 당시의 경험에 대해 질문을 받을 때면, 사전트의 성적 지향에 관한 이야기는 약방의 감초처럼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 워낙 추측이 무성할 만한 주제였기 때문이다. 사전트의 개인 스케치나 그림 중에는 동성애적 코드(homoerotic)가 짙은 작품이 많았지만, 동시대 인물 중 누구도 사전트가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 누구와 연애 감정을 주고받았다는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사전트는 무성애자였을까, 아니면 평생 정체성을 숨기고 살았던 벽장 속 동성애자였을까? 캠프는 자신의 젊은 시절 몸을 기준으로 사전트의 열정을 가늠해 보며,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했다. “만약 선생님에게 그런 쪽으로 손톱만큼의 관심이라도 있었다면 기회는 차고 넘쳤을 겁니다. 당시 내 몸은 꽁꽁 얼어붙은 에스키모에게도 불을 지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대중에게 공개할 의도가 없었던 그림과 스케치 속에서, 사전트는 벌거벗은 남성 모델들을 요염하게 누워있는 오달리스크(odalisque, 터키 궁정의 시녀)처럼 묘사하곤 했다. 나른하게 누워 졸린 눈을 한 모델들은 화가의 탐욕스러운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그가 이 남성들에게 손을 뻗어 체온을 나누었는지 여부는, 이제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비밀로 남았다.
— The Gay & Lesbian Review (July-August 2026 issu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