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ueer The Music: 'It's a Sin' by Pet Shop Boys(번역)
팟캐스트 Queer The Music: Jake Shears On The Songs That Changed Lives의 2024년 12월 3일자 에피소드 Queer The Music: 'It's a Sin' by Pet Shop Boys 에서 진행자 Jake Shears와 Neil Tennant의 대담. 애플 팟캐스트의 자동 전사문을 토대로 번역함.
Jake Shears: 닐 테넌트, 참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Neil Tennant: 여기 있게 되어 기쁩니다.
J: 이 쇼에 정말이지 꼭 모시고 싶었어요.
N: 이스트 런던에서요.
J: 오늘 나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N: 아뇨, 기꺼이요. 당신을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저도 좋네요.
J: 네, 저도요. 오늘은 'It's A Sin'에 대해 얘기할 거예요.
N: 네, 좋습니다.
J: 이 곡을 처음 만들었을 때 어떤 기억이 있나요?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시나요?
N: 우리가 곡을 쓰던 모습이 떠오르네요. 크리스와 저는 1982년 3, 4학년 때 작은 스튜디오를 빌렸습니다. 우리는 81년에 만나서 함께 곡을 쓰기 시작했고, 제가 은행에 여유 자금이 있어서 크리스에게 작은 스튜디오에 가서 데모를 만들어야겠다고 말했죠. 그 정도 비용은 감당할 수 있었어요. 어차피 그리 비싸지도 않았거든요. 스튜디오를 운영하는 사람은 레이 로버츠(Ray Roberts)라는 사람이었는데 캠든 타운에 있었어요. 그는 우리가 만든 데모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 스튜디오를 사용해도 좋다고 했고, 만약 건수가 생기면 저작권 지분도 나눠줄 수 있다고 했죠. 그래서 우린 알겠다고 했죠. 그래서 우리는 그곳에 가곤 했습니다. 크리스는 리버풀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기에 주말에 내려왔어요.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거기서 작업을 하고 끝나면 놀러 나가곤 했죠. 그러다 크리스가 런던으로 이사를 왔고 우리는 이 시기에 'West End Girls', 'It's A Sin', 'Rent' 등 수많은 곡을 썼어요. 첫 앨범의 많은 곡들이죠.
제 기억엔 크리스가 이 곡을 시작했고 저는 이상하고 작은 4트랙 데스크를 조정했어요. 심지어 그게 뭔지 아무것도 몰라서 에코 같은 걸 죄다 켜곤 했죠. 그리고 크리스는 셋팅해둔 신디사이저와 일렉트릭 피아노를 연주하곤 했죠. 그리고 저는 업라이트 어쿠스틱 피아노를 연주하기도 했지만 이 곡에서는 안 했어요. 어쨌든 크리스가 이 곡을 연주하기 시작한 게 기억나요.
우리는 후에 하이 에너지로 알려진 음악에 푹 빠져 있었죠. 크리스는 바비 올랜도의 'Passion by the Flirts'라는 음반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곡의 옥타브 베이스 라인 같은 더 많은 음반을 발견하게 되었죠. 그리고 그런 종류의 코드 변경도요. 어쨌든 그는 이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어요. 그 순간 왜 그 가사가 떠올랐는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저는 뉴캐슬 어폰 타인에서 가톨릭 신자로 자랐습니다. 성 커스버트라는 가톨릭 학교에 다녔죠. 신부들도 교편을 잡긴 했지만 대부분은 그냥 일반 교사였어요. 하지만 꽤 종교적이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 꽤 종교적이었지만 자라면서 점차 벗어나게 되었죠.
J: 학교 다닐 때 몇 살이었나요?
N: 11살부터 18살까지요. 성 커스버트 학교에서는 출산을 목적으로 하는 결혼 생활 외의 섹스는 죄라고 배웠던 기억이 나요. 꽤나 엄격한 말이죠. 그걸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It’s a sin'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것이 기억에 남아있었어요. 아마도 결혼 생활에서의 성적 쾌락을 부정하는 좁은 정의였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한 번은 신부님이 말씀하시길 성행위 자체를 모방하는 일종의 키스가 있다고 하시는 거예요. 우리 모두 뜨악했죠.
J: 분명 프렌치 키스를 말하는 거겠죠.
N: 그러다 그게 프렌치 키스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아, 그렇구나 싶었죠. 사실 조금 실망스러웠어요. 그리고 그가 묘사하는 방식 때문에 모두가 뜨악한 거죠.
J: 정말 자극적이네요.
N: 그래서 이 노래 가사에 이 내용을 넣었어요. 그리고 모든 것이 아주 빠르게 쓰여졌어요. 사실 웃기려고 한 의도가 컸어요.
J: 맞아요, 초기 버전은 좀 캠피했다고 하셨죠.
N: 약간 캠피한 느낌이었죠. 돌이켜보면... 멜로드라마틱 하달까.
'When I look back upon my life, it's always with a sense of shame. I've always been the one to blame for everything I long to do, no matter when or where or who. Has one thing in common, too.' 항상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운율이 떠오르지 않았어요. 'It’s a…' 이것도 항상 약하다고 생각했어요. 'It's a, it's a, it's a, it's a sin'. 항상 약하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생각이 안 났어요. 'Everything I've ever done', 그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다른 키로 작곡한 꽤 우울한 곡을 하나 만들었는데. It's A Sin은 C단조였죠. 제 기억으로는 중간 부분이 E플랫 단조였던 것 같아요. 그 다음 스튜디오에 갔을 때 이 곡을 중간에 넣어봤더니 정말 으스스하게 들리면서 고딕풍이 더 강해졌어요. 그리고 나서 교묘하게 다시 돌아가도록 G7에서 끝나고 다시 C 단조로 돌아가는 식으로 마무리했습니다. 그때 곡이 어느 정도 완성됐죠.
3절 가사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더라고요. 그 이후로 계속 생각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첫 소절만 반복했어요. 'For everything I long to do'. 좀 게으르지만 하고싶은 말은 다 했어요.
J: 하지만 때때로 이렇게 구절을 반복하면 실제로 노래가 더 중독성 있게 만들어지죠. 사람들은 결국 그 구절을 배우게 되고 함께 부를 수 있게 됩니다.
N: 그리고 의미도 강화되죠.
J: 맞아요.
N: 맞아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 노래의 핵심 부분, 개인적인 부분은 중간에 있습니다. 'Father, forgive me'.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를 때 항상 생각합니다, 여기 아버지가 누구일까? 자신의 아버지를 말하는 걸까요, 아니면 신부님을 말하는 걸까요? 저는 신부라고 생각해요. 'I tried not to do it, turned over a new leaf and tore right through it. Whatever you're taught me , I didn't believe it because I didn't care and I still don't understand' 운율도 안 맞아요. 그래서 그 대사가 눈에 띄네요. 'And I still don't understand'.
정말 화가 나요. 저는 항상 무대에서 노래할 때 분노를 느낍니다. 그게 이 노래의 클라이맥스죠.
그리고 다시 돌아갑니다. 'When I look back upon my life It's always with a sense of shame' 이건 전에 한번도 말한 적이 없는데 이건 일종의 자위행위를 말하는 걸까요? 사춘기 소년으로서 사춘기 시절의 감정을 떠올려보면 성 커스버트 학교에서는 분명히 그게 죄라고 들었죠.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생각은 훨씬 후에야 했어요.
저는 아마 인터뷰를 하면서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 있었을 거예요. 하지만 성행위가 출산 목적 이외의 모든 것은 죄라는 아이디어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모든 사람들이 동성애, 게이, 퀴어 등 어떤 단어를 사용하든 동성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게 되죠. 물론 그것에 관한 것이지만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J: 내가 지금까지 해온 모든 것, 내가 앞으로 할 모든 것, 내가 가본 모든 장소, 내가 갈 모든 곳(이 죄악이다)(Everything I've ever done, everything I ever do, every place I've ever been, everywhere I'm going to). 수년 동안 수많은 게이들이 느꼈던 감정을 요약한 것 같아요.
N: 맞아요. 아니, 나중엔 모두에게 히트를 쳤다는 사실에 감사했어요. 정말 감사했어요.
J: 가끔은 그때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게 있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어요. 37년이 지난 지금 이 노래는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N: 더 퀴어해졌다고 생각해요. 원래 데모에는 경쾌한 키보드, 유로 키보드 파트가 있습니다. 사실 이 곡은 트라우마적인 분위기로 시작하지 않아요. 그냥 '두, 두, 두, 두, 두, 두, 두, 두, 두, 두, 두, 두, 두, 두, 두, 두'로 시작하죠. 귀엽고 아주 유로 스럽죠.
그리고 뉴욕에서 바비 오를 만나서 함께 일하기 시작했어요.
J: 그 얘기를 잠깐 해주시겠어요? 바비 오가 누구인가요? 하이 에너지 음악이란 무엇인가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어떤 관계였나요?
N: 캠든의 스튜디오에 있을 때 크리스와 저는 가끔 캠든의 블랙 캡(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옛날 드래그 바)에 가곤 했어요. Camden Palace에도 가곤 했는데, 그곳은 Smash Hit(주:닐 테넌트의 직장이었던 음악 잡지)로 쉽게 들어갈 수 있었거든요. 아니면 그 당시 유럽에서 가장 큰 게이 클럽이었던 헤븐에 갈 수도 있었죠.
특히 헤븐뿐만 아니라 이름은 생각나지 않지만 가곤 했던 다른 바에서도 당시에는 게이 디스코라고 부르던 음악을 듣곤 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꽤 시간이 지나고 나서, '하이 에너지’로 알려지게 되었죠. 우리는 앨범 발매를 위해 작가인 존 새비지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가 모든 댄스 차트가 수록된 미러(Mirror) 잡지의 오래된 복사본을 가지고 있었는데, 1983년인가 4년에 나온 유로비트 차트를 읽어줬어요. 그래서 유로비트라고 부르기 시작했죠. 유럽적인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죠. 아마도 코드의 변화도 로큰롤이나 R&B 코드가 아니었을 거예요. C 단조, A 단조 같은 코드였어요.
J: 더 복잡하고 흥미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N: 복잡하다기보다는 그리 우울하지 않고 로큰롤이라기보다는 클래식 음악, 어떻게 보면 단순화된 클래식 음악에 가깝다고 할 수 있죠. 그리고 우리가 정말 좋아했던 음반이 많았는데, 바비 오가 만든 더 플러츠의 'Passion'이라는 음반을 들었고, 'Ask The DJ'를 알게 됐고, 로니 그리피스의 'The Best Part Of Breaking Up'이라는 음반도 좋아했는데, 그게 바비 오라는 걸 알게 됐고, 그 덕분에 두-두-두-두-를 알게 됐죠.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레이 로버츠라는 분과 함께 작업할 때 재밌었는데, 그가 라틴 퍼커션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더군요. 크리스와 저는 당황해서 ‘어, 네…’라고 대답했죠. 그리고는 두-두-두-두-두-알지? 하길래 우리는 아, 그게 라틴이구나, 당연히 라틴이겠지라고 생각했죠. 저희는 그냥 두-두-두-하면 바비 오 라고 생각했어요, 정말 바비 오라고 생각했죠. 그리고 첫 앨범에 그 곡을 넣었죠, 'Opportunities' 같은 곡을요.
그리고 스매시 히트 매거진에서 뉴스 에디터로 일할 때 사람들을 인터뷰하곤 했어요. 매일 쓰나미처럼 음반이 쏟아져 들어오는 '덤프 어 박스'라는 음반 상자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거기에 물건을 그냥 던져 넣곤 했죠. 그리고 저는 여전히 일하면서 그것들을 검토해야 했죠. 그러던 중 바비 오의 음반이 많이 나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를 만났을 때 그는 1년에 컬럼비아 레코드보다 더 많은 음반을 발매하려고 한다고 했어요. 수백 장의 음반을 발매할 거라고요. 그래서 우리는 바비 오에게 약간 집착하게 되었죠.
그리고 1983년 스팅을 인터뷰하기 위해 뉴욕에 갔을 때 바비 오에게 전화를 걸었죠. 사실 홍보 담당 폴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그리고 내가 뉴욕에 갔을 때 영국 홍보 담당자가 그를 만날 수 있도록 주선을 해줬죠. 점심을 먹으러 나갔을 때 그가 음반을 만들자고 말했어요. 저는 ‘당신 지금 아직 아무것도 못 들었잖아요’라고 했죠. 그의 사무실로 돌아가서 저는 'Opportunities'를 들려주었어요.
J: 그에게 음악을 들려주는 게 쑥스러웠나요?
N: 네, 부끄러웠어요. 뭐, 좀 촌스럽기도 하고요. 제 주머니에 카세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정말 좋아했어요. 그리고 한 달 후에 우리는 'West End Girls'를 만들었죠. 그다음 해에 다시 돌아가서 'It's A Sin'을 만들었죠. 그러자 그는 처음부터 두-두-두-두-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는 멜로디 라인을 스트링 사운드에 넣었어요. 그리고 2년 후에 줄리안 멘델슨과 스티븐 헤이그와 함께 녹음했을 때 그 인트로, 그러니까 인트로에 더 많은 것을 넣었죠. 그게 바로...
J: 최종 곡이 그 편곡 그대로군요.
N: 그렇습니다. 86년, 87년에 음반을 만들 때 우린 가톨릭 분위기가 물씬 풍기길 원했거든요. 그리고 브롬튼 오라토리 교회에 가서 브롬튼 오라토리의 분위기를 녹음했어요. 우리가 들어갔을 때는 완전히 비어 있었지만 캔들 홀더를 청소하는 청소부가 있었습니다.그래서 녹음할 때 중간에 'father, forgive me'라는 대사가 나오는데, 이 분위기가 들어와서 으스스한 효과를 냅니다. 그리고 런던의 가톨릭 성당인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갔습니다. 미사가 진행 중이었고 줄리안 멘델스존이 녹음을 약간 했는데, 곡과 딱 맞는 키였어요. 앞서 말했듯이 클래식 음악이나 교회 음악처럼 C 단조, 상당히 무거운 키입니다. 그리고 모두 "와, 그야말로 웨스트민스터 극장의 회중들이야"라고 외쳤죠.
음반을 만들 때 앤디 리차드라는 훌륭한 프로그래머가 있었는데, 그는 정말 대단한 페어라이트 프로그래머였기 때문에 다양한 사운드를 만들 수 있었어요. 앤디가 소리를 휙휙 바꿔가는데 갑자기 달 착륙 소리가 나왔어요. '20 seconds', 그 인트로요. 그래서 ‘오, 그거 좋다, 그걸 시작부분에 넣자’고 했죠. 완전히 아무 의미가 없지만 그는 우리가 필요한 것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는 멋진 종교 합창단 사운드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아아아~ 그걸 가져왔죠. 모르겠어요, 그게 뭐든 간에 정말 흥미롭게 들렸어요. 그리고 어떤 면에서는 실제로 음반을 분석해보면 시작과 끝이 모두 같아요. 시작은 영원히 계속되죠. 끝도 영원하죠.
거의 5분 길이입니다. 아시다시피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3분 30초는 돼야 하지만 4분 58초인 것 같아요.
J: 저는 긴 팝송을 좋아해요.
N: 저도 긴게 좋아요, 항상 그랬죠. 얼마 전 존 새비지와 'Excerpt from 'A Teenage Opera'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어요. 아마 이 음반을 모르실 거예요. 1967년 영국에서 히트를 쳤고, 그 사람이 틴에이지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전 그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었거든요.
저는 그 아이디어가 여전히 좋다고 생각해요. 대단한 곡입니다. 후속작은 '샘'이라는 곡이었는데, 기차를 운전하는 남자의 이야기를 담은 5분짜리 곡이었는데, 지금까지 발매된 팝 싱글 중 가장 긴 곡이라고 해서 그 곡을 샀어요.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우리는 5분짜리 음반인 'It's A Sin'을 발매했는데 뭐 상업성을 해친 것 같진 않았죠.
J: 이 곡을 스톡 에이큰과 워터맨이 프로듀싱했다면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피트 워터맨이 이 곡을 거절했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그는 노래를 좋아하지 않았잖아요.
N: 여러 가지 이야기가 얽혀 있는 것 같아요. 우리에게 매니지먼트가 붙기 전에 우린 'It's A Sin'을 작곡했고, 우린 그게 하이에너지 클래식이 될만한 곡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죠.
Miquel이라는 가수가 있었어요. 그녀에겐 'He's A Saint Not A Sinner(그는 죄인이 아니라 성자)'라는 유로비트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한 대단한 하이에너지 노래가 있었어요. 그래서 음반사를 운영하던 프로듀서에게 전화를 걸었죠. 'It's A Sin'이라는 멋진 곡이 있다고 말했죠. Miquel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어요.
그러자 그는 죄에 관한 다른 곡을 써보는 게 어떻겠냐고 했어요. 그리고나서 우리에게 매니저 톰 왓킨스가 생겼죠. 톰은 스톡 에이큰과 워터맨을 알고 있었는데요, 왜냐하면 그에게는 EMI가 많은 돈을 투자했지만 안타깝게도 성공하지 못한 'Spelt Like This'라는 그룹이 있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톰은 스톡 에이큰과 워터맨을 발견했죠. 그리고 우리에게 프로듀싱을 제안했습니다만 우리가 원한 사운드는 그게 아니었어요. 저희는 좀 더 서사적이면서도 쿨한 음악을 원했죠. 저희는 힙합 음악도 좋아했어요. 'West End Girls'는 일종의 이상한 방식으로 'Grandmaster Flash'에게 헌정하는 곡입니다. 아무래도 그들은 그것과는 별 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전 그들이 거절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제가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죠.
J: 'Actually'를 제작할 땐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N: 사실 저희는 'Actually'를 만들고 있을 때 잘 나가고 있었어요. 사실 꽤 오랫동안 잘 나가고 있었죠. 그래서 바비 오와 계약을 체결했고, EMI가 백만 달러에 저희를 사갔죠.
85년 7월에 'Opportunities'를 발매했죠. 그건 실패작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린 'West End Girls'를 다시 만들었고, 그건 확실히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죠.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첫 번째 앨범을 만들고 있었어요. 첫 앨범은 정말 잘 나왔어요. 그리고 마지막 싱글인 'Suburbia'를 발표했죠.
'Suburbia'는 우리가 녹음한 마지막 트랙이었고 데모와 똑같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곡으로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톰 왓킨스는 트레버 혼과 함께 작업했던 줄리안 멘델슨과 함께 작업하자고 제안했죠. 그리고 크리스와 저는 트레버 혼이 1년 동안 제작한 'Slave to the Rhythm'에 푹 빠져 있었어요. 그리고 줄리안은 이 작업을 훌륭하게 해냈고, 앞서 언급한 앤디 리차드라는 프로그래머를 데려왔죠. 저희는 그가 새로운 버전의 'Suburbia'를 작업한 것이 정말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와 함께 일하게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는 여전히 첫 번째 앨범을 프로듀싱한 스티븐 헤이그와 함께 작업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1986년 말부터 앨범 작업을 시작했고, 1년 내내 전 세계를 돌며 홍보를 하거나 새로운 곡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기존에 작곡한 곡들도 많았죠. 그래서 더스티 스프링필드와 함께 작업한 곡을 먼저 발표했죠. 그리고 다음 해에도 여전히 유럽에서 'Suburbia'를 홍보하고 스티븐 헤이그와 몇 곡을, 줄리안 멘델슨과 몇 곡을 작업하며 새 앨범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줄리안 멘델슨이 스티븐 헤이그의 트랙 중 하나를 믹싱하고 스티븐 헤이그가 줄리안의 트랙 중 하나를 믹싱하고 있었는데 그게 사실 'It's A Sin'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매우 자신감이 생겼어요.
J: 이것이 작곡에도 영향을 미쳤나요? 이 기간 동안 작곡은 어떻게 발전하고 있었나요?
N: 스튜디오에서 몇 곡을 새로 썼어요. 아시다시피 그 당시에는 장비가 복잡했습니다. 저희는 장비가 없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완즈워스에 있는 한 때 정신병원이었던 어떤 웃긴 스튜디오에 가야 했습니다. 이상했지만 장비를 빌려서 작업해야 했기 때문에 할 수 없었죠. 어쿠스틱 피아노, 일렉트릭 피아노, 키보드, 드럼, 닥터 리듬 드럼 머신 등 장비는 캠든 타운의 것이 좋았어요. 그래서 모든 것이 정말 쉬웠죠.
하지만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Actually'의 마지막 트랙인 'King's Cross'를 작곡했는데, 저는 이 곡이 우리가 지금까지 작곡한 곡 중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I Want To Wake Up', 'Shopping'을 썼어요. 'Shopping'은 농담처럼 시작하죠. S-H-O-P-P-I-N-G. 쇼핑하러 가는 길에 본드 스트리트를 걸어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곡의 절반 정도는 새로 썼고 나머지 곡은 기존에 있던 곡을 썼어요. 'It's A Sin'도 있었고, 'Rent'도 있었고, 'One More Chance'도 있었죠. 그래서 정말 쉬웠고, 2집 앨범에 이렇게 좋은 곡이 많다는 게 놀랍다고 생각했어요. 왜냐면 2집 앨범은 쉽지 않으니까요.
J: 이미 좋은 곡들이 준비되어 있었군요.
N: 모든 곡을 다 녹음하진 못했으니까요. 1983년에 쓴 곡 중 정말 좋은 곡이 하나 남아있었죠. 그래서 우리는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첫 번째 앨범 때 'It's A Sin'이 있었음에도 우린 녹음하지 않았죠. 많은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거든요.
J: 하지만 재미있고 캠피한 'It's A Sin'을 쓴 다음 'King's Cross'와 같은 곡으로 넘어가는 것은 꽤 큰 도약이라고 생각했어요. 'Actually'의 마지막 트랙이죠.
N: 네, 맞아요.
J: 그리고 킹스 크로스는 아주, 뭐라고 해야할까…
N: 정치적인 노래죠.
J: 정치적이긴 하지만 매우 생생하고 의도적인 곡이기도 하죠.
N: 지금의 킹스 크로스가 당시의 킹스 크로스가 아니라는 점도 놀랍습니다.
J: 그렇죠.
J: 'Only last night I found myself lost…' 이 부분 가사를 읽어주시겠어요?
N: 'Only last night I find myself lost by the station called King's Cross. Dead and wounded on either side. You know it's only a matter of time. I've been good and I've been bad. I've been guilty of hanging around(어젯밤 나는 킹스 크로스라는 역에서 길을 잃었어. 양쪽에 죽고 다친 사람들이 있었지. 시간 문제라는 걸 알고있잖아. 나는 착했고, 나는 나빴어. 나는 주위를 맴도는 것에 죄책감을 느꼈어)'.
이것은 대처주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986년과 1987년은 매우 정치적인 시기였습니다. 1987년 대처 여사는 세 번째, 사실 마지막 총리 임기에 당선되었습니다. 민영화가 진행되던 시기였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우리가 이미 10년 전에 풍자했던 '돈 많이 쓰자'는 부유층이 실제로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그 희생자였죠. 킹스 크로스는 대처주의의 희생자들에 대한 이야기였죠.
그리고 사회가 붕괴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사람들을 소외시키는 방식으로 변화하면서 3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습니다. 광부들의 파업도 겪었죠. 당시 킹스 크로스는 정말 쓰레기장이었죠.
크리스와 저는 북부 출신이었기 때문에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북부 사람들이 내려왔죠. 사실 크리스는 북서부에서 왔기 때문에 유스턴에 가서 비평을 하곤 했죠. 저처럼 북동부 출신이나 스코틀랜드 출신은 킹스크로스에 오곤 했죠. 그 근처는 매우 낙후된 지역이었고, 웃긴 포르노 가게와 오래된 빅토리아 시대 주택 조합 아파트가 많았어요. 밥 호스킨스가 출연한 모나리자라는 영화가 있었는데요. 많은 부분이 80년대 킹스크로스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 주변에는 마약 거래가 많았어요. 길거리에는 매춘부들도 있었죠.
J: 크루징도 있었나요?
우리가 자주 가던 바가 있었는데, 이름은 트래픽이었고 킹스 크로스에서 조금 위쪽에 있었습니다. 그곳이 게이 크루징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성애자 크루징, 성노동자 크루징이 더 많았어요. 사람들은 차를 천천히 몰고 다녔습니다. 또한, 그곳은 다소 위험한 곳이었습니다. 사회의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이 일종의 버려진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어느 날 밤 저와 크리스, 그리고 친구 두 명이 킹스 크로스를 지나가는데 친구 중 한 명이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는 자기에게 월요일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토요일이라고 말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저는 시적으로 들렸고 저는 이 구절을 기억해냈어요. 그것은 킹스 크로스에서 일어났지만, 더 나은 것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란 아이디어 자체에 일종의 비극과 비애가 서려 있죠.
J: 에이즈는 현재 당신의 관점을 어떻게 바꾸고 있으며, 당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나요?
N: 에이즈는 두 번째 앨범에서 꽤 두드러진 주제였어요. 첫 번째 앨범보다 훨씬 더요. 제 오랜 친구 중 한 명인 크리스 도웰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저희는 제 첫 밴드였던 Dust라는 포크 그룹에서 함께 활동했는데, 음악적 견해 차이 때문에 해체되었죠. 그는 포크를 하고 싶어 했고, 저는 팝 음악을 하고 싶어 했거든요.
그는 교사였는데, 스리랑카에 가서 가르쳤어요. 그리고 1986년 중반에 돌아왔는데, 그동안 저는 팝스타가 되어 있었죠. 저희는 늘 팝스타가 되는 걸 염려했었어요. 물론 저는 이 이야기를 썼고, 그 노래는 'Being Boring'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랐습니다. 그리고 그해 말, 우리가 'Suburbia' 활동을 하고 있을 때 같은데, 그가 갑자기 병원에 입원했고, 폐렴에 걸렸고, 에이즈에 걸렸어요. 긴 이야기를 짧게 줄이자면요.
제가 아는 사람 중 에이즈에 걸린 사람은 그 사람이 처음이었어요. 슬프게도 첫 번째였죠. 그래서 제 인생은 세계적인 팝스타가 되어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리는 MTV 시상식에 참석하는 것과 패딩턴의 세인트 메리 병원에 가는 것 사이에 엄청난 분열이 일어났어요.
제 친구는 끔찍한 모습으로 누워 있었어요. 깡마르고 모든 게 안 좋아 보였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첫 발병에서 회복했지만 1989년에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펫샵 보이즈 경력의 초창기에는 이런 일이 우리 삶에 완전히 만연해 있었어요.
그래서 이 이야기는 꽤 많은 노래에 등장하는데, 예를 들어 'It Couldn't Happen Here'라는 노래에도 나와요. 그와 제가 나눴던 대화가 기억나는데, 그는 "사람들이 미국에서는 정점을 찍었다고 하지만, 여기서는 같은 방식으로 일어나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더라."라고 말했어요. 이에 대한 어떤 통계가 있었던 거죠.
그때를 돌이켜보면 잘 안 됐구나 싶었죠. 하지만 그 노래의 가사와 음악은 여러 가지 복잡한 이유로 우리와 엔니오 모리코네가 함께 썼어요. 엔니오 모리코네에게 편곡을 부탁했더니 그의 에이전트가 돌아와서 ‘마에스트로 모리코네는 거절했지만 이 곡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도 된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는 1970년에 나온 이 곡을 우리에게 주었고, 데이비드 보위처럼 들리도록 후렴구를 사용하고 새로운 구절을 썼습니다. 그것이 'It Couldn't Happen Here'가 되었습니다. 그러고나서 엔니오 모리코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했던가 아닌가 그래서 안젤로 바다라멘티에게 편곡을 맡겼어요. 하지만 저는 에이즈에 걸린 친구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암호화된 방식으로 가사를 썼는데, 그가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매우 시적으로 만들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의미가 완전히 투명하진 않았습니다.
J: 친구를 위해 노래를 암호화 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네요.
N: 저는 항상 그렇게 해왔고, 꽤 자주 그렇게 해왔습니다. 저는 제 노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매우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인데, 개인적인 함의나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때로는 그것이 무엇에 대한 것인지 부인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덜하지만 예전에는 더 그랬어요.
J: 당신은, 그리고 당시에는, 당신의 삶이 마치 두 갈래로 나뉜 것처럼 느껴졌나요? 방금 말했듯 당신은 팝스타였고, 친구를 방문하기도 했죠. 당신은 또한 팝스타가 된 게…
N: 늦었죠.
J: 늦었죠.
N: 네. 그점에 있어서 재밌는 점은, 제가 10년 동안 출판업계에서 일했다는 것입니다. 마블 코믹스에서 영국 프로덕션 에디터로 일했고, 마돈나 에듀케이셔널이라는 교육 출판사에서도 일했죠. 한때는 메리 베리의 편집자였어요. 그다음에는 ITV가 소유한 ITV Books라는 회사에서 TV 연계 작업을 했어요. 그리고 스매시 히트에서 일했죠.
J: 당시 동성애자로서의 삶은 어떠셨나요?
N: 제 동성애자로서의 삶은 정말이지 막 시작되려던 참이었어요. 70년대에는 아마도 저 자신을 양성애자라고 생각했었기에 여자친구들도 사귀곤 했어요. 80년대에 서른이 가까워지면서 제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바에 가곤 했죠. 당연하겠지만…크리스와 저는 게이 클럽에 가곤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음악도 그곳을 방문한 목적 중 하나였어요. 하지만 저는 실제로 음반 작업을 하는 동안, 특히 막바지에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않았어요. 사실 그렇다고 할 수도 없네요. 저는 실제로 1991년까지는 진정한 게이 관계를 맺지 못했어요. 게다가 물론, 저희는 항상 매우 바빴으니까요.
J: 그 나이에 팝스타가 된 것에 대한 장단점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N: 제 생각에는 정말 단점이 거의 없었어요. 물론 돈은 확실히 벌었죠. 단점은 사람들이 따라다닌다는 것이었어요. 제 말은, 제가 31살에 팝스타가 되었기 때문에 꽤 안정된 사람이었다는 것이 문제였어요. 17살에 팝스타가 되는 것과는 다르죠. 그렇지 않나요? 아니, 어떤 면에서는 좋죠. 왜냐하면 저는 어느 정도 분별력이 있거든요. 네, 저는 항상 어느 정도 분별력이 있었어요. 하지만 때로는 약간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해요.
풀럼에 아파트를 샀어요. 지금 돌이켜보면 정말 좋은 선택이었어요. 하지만 당시에는 늘 짜증이 났어요. 항상 여자애들이 집 밖에 어슬렁거렸거든요. 좀 사소한 얘기려나… 헐링엄 로드였어요. 길 건너에는 헐링엄 공원이 있었고요. 한 여자애가 저에게 "헐링엄 공원 여자 화장실에 가본 적 있어요?"라고 물었어요. 저는 "당연히 안 가봤지"라고 대답했죠. 그러자 그 애가 "아, 가보고 싶어 할 텐데?"라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헐링엄 공원 여자 화장실 중 한 곳의 창문에서 제 침실 창문이 보인다는 것을 알아낸 거였어요. 그리고 그곳은 저에 대한 성적으로 노골적인 낙서로 뒤덮여 있었어요. 저는 꽤, 음, 저는 '오, 세상에'라고 생각했어요. 요즘에는 휴대폰이 있어서 사진을 찍겠지만, 그때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야 했어요. 아마 카메라를 가지고 다니지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항상 그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하고 후회해요. 하지만 사람들이 제 쓰레기를 훔쳐 가기도 하고, 누군가는 풀럼 브로드웨이 지하철역 하행 에스컬레이터에 설치된 모든 광고마다 제 주소를 스티커로 붙여놔서 제가 직접 가서 떼어내야 했던 적도 있어요. 그런 일들이 있었죠.
그리고 우린 홍보 활동을 정말 열심히 했어요. 홍보라는 것은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일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죠. 물론 재미있는 부분도 있었지만, 크리스는 그런 점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었어요. 크리스는 저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기 때문에, 팝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도 당연했고요. 저는 스매시 히츠에서 일했던 경험 덕분에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어쨌든 모든 것이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라 정말 정신없고 흥분되는 시간이었어요. 미국에서 1위를 한다는 것, 콩코드를 타고 미국에 가서 1위를 한다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죠. 그리고 그런 성공을 바탕으로 데릭 저먼 같은 감독에게 뮤직비디오 제작을 의뢰할 수도 있었고요.
J: 'It's A Sin'의 뮤직비디오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N: 스티븐 힉스가 런던 포틀랜드 플레이스 근처의 애드비전 스튜디오에서 'It's a Sin'의 최종 믹싱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채널 4에서는 데릭 저먼의 영화 ‘카라바조’를 방영하고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흔한 일이었듯이, 텔레비전은 소리를 끈 채 켜져 있었죠. 그래서 그가 'It's a Sin'을 믹싱하는 동안 '카라바조'가 나오고 있었던 거예요. 저희는 ‘와, 데릭 저먼에게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달라고 하면 어떨까?’라고 생각했어요. 가톨릭적인 요소가 있었기 때문이죠. 그리고 저는 잔 다르크에 대한 관심 때문에 제가 화형당하는 장면을 상상해봤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데릭이 EMI를 통해 연락을 받고 바로 다음 날이나 이틀 후에 스튜디오에 도착했어요. 캐리스와인 에반스를 포함한 그의 팀 전체가 함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는 자신이 하던 방식대로 슈퍼 8mm 필름으로 비디오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저희는 카라바지 조처럼 보이고 싶다고 했죠. 그의 일기에서, 그는 한때 이 일에 대해 영화보다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고 불평하기도 했죠. 사실, 제 생각에는 정확히 그랬던 것 같아요. 제작비가 5만 파운드였는데,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뮤직비디오에 엄청난 돈을 쓰곤 했지만, 5만 파운드는 뮤직비디오치고는 중간 정도 수준이었죠.
그래서 제가 화형을 당하는 장면을 말했는데, 실제로는 그런 장면이 나오지는 않아요. 비디오 마지막 부분에 모닥불이 나오긴 하지만 제가 불타는 모습은 나오지 않습니다. 저는 죄수이고 크리스는 간수 역할을 맡았습니다. 라임하우스 강가 근처에 아직 창고들이 남아 있을 때, 창고에서 촬영했어요. 스탠리 큐브릭이 바로 그곳에서 '풀 메탈 재킷'을 촬영했었죠. 온갖 이상한 군용 장비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어요.데릭은 그곳에서 일곱 개의 대죄에 대한 아이디어를 떠올렸고, 여러 사람들을 섭외해서 일곱 개의 대죄를 연기하게 했어요. 특별히 유명한 분이라면 영화 ‘올리버’에서 페이긴 역을 맡았던 론 무디였죠. 정말 흥미로운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저희가 원했던 대로 카라바조처럼 보였어요.
저희는 그 해 말에 'Rent' 뮤직비디오를 데릭과 함께 또 찍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그가 저희의 첫 번째 투어의 연출을 맡기도 했죠. 그래서 데릭과의 오랜 관계가 시작되었고,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저희는 맨체스터에서 열린 데릭을 위한 콘서트에서 'Go West'를 처음으로 공연했습니다. 커버 버전 외에도 크리스가 'Go West'를 제안했었죠. 그래서 그것 또한 오랜 관계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데릭은 제가 아는 사람 중 에이즈로 사망한 마지막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 거죠. 데릭이 'It's A Sin' 비디오를 함께 작업할 때 그는 실제로 HIV 감염 진단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어요.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HIV와 에이즈를 구분해서 불렀던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완전한 에이즈로 진행됐다"라고 말하곤 했죠. 그들은 그것이 거의 같은 것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거죠.
그리고 데릭은 그 해 말에 던저니스에 집을 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존 새비지와 저는 다음 해에 그곳을 방문했었죠.
그는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는 사실 팝적인 사람이 아니었는데, 저희는 그런 점을 좋아했습니다. 그가 정말 대중적이지 않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어요. 그런데 저희는 항상 음반을 영화적인 사운드로 만들려는 강박관념이 있었어요. 'West End Girls'를 생각해보면 거리에서 걸어가는 발소리로 시작하죠. 마치 필름 누아르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마이너 코드가 들어옵니다. 사실 그것은 저희가 만든 것 중 가장 영화 같은 장면입니다.
J: 당신이 쓰고 있는 것은 등장인물들이죠. 당신은 목소리를 빌려 쓰고 있습니다. 당신은 음악이 보통 감정의 혼란을 나타낸다고 말했죠. 가사에서 진실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표면을 얻고 음악은 그 깊이를 표현하는데, 저는 그것을 정말 좋아합니다.
N: 전적으로 맞아요. 네.
J: 불확실한 화자에 대해 이야기해 주시겠어요? 당신에게는 등장인물 속에서 콘셉트가 떠오르나요?
N: 네. 저는 지금도 노래를 쓸 때 종종 제가 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J: 그렇군요.
N: 예를 들어, 'Rent'라는 노래에서 저는 상상했어요. 80년대에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의원이, 소위 정부(mistress)라고 불리는 여성이 있었다는 스캔들이 있었죠. 사람들은 아직도 그 용어를 사용하나요?
J: 네.
N: 네
J: 전 ‘정부(mistress)’라는 단어가 좋아요
N: 네. 뉴욕의 아파트에서, 그들은 꽤 오랫동안 그곳을 비웠던 것 같더군요. 저는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었어요. 'You took me to a restaurant off Broadway to tell me who you are(당신은 나를 오프 브로드웨이에 있는 식당에 데려가서 당신이 누군지 말해줬죠)' 저는 케네디에게 보내졌어요. 지금 생각해 봐도 여성이 되어야만 상상이 돼요. 정말이에요. 우리는 'Rent'라는 제목을 사용했는데, 그것이 도발적이었기 때문이고, 'rent boy(남성 매춘부)'를 연상시키기 때문이었죠. 우리는 일종의 펑크 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크리스도 어느 정도 그런 면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다소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나서 그것을 완화하려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Rent'는 'rent boy'에서 왔지만, 가사는 'rent boy'에 대한 내용이 아니에요.
J: 지난 10년 동안 음악과 가사가 훨씬 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지는 게 웃긴 것 같아요. 심지어 20년 전에 에미넴이 온갖 비난을 받았을 때조차도, 저는 속으로 글래드가 에미넴을 쫓아다니는 것을 보면서 '그는 캐릭터를 만들어 글을 쓰는 거지,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게 아니야'라고 생각했어요.
N: 그는 항상 그렇게 말했죠. 그래서 크리스와 저는 저희의 노래 중 가장 게이적인 노래인 'The Night I Fell In Love'를 썼는데, 원래 제목은 'The Night I Met Eminem(내가 에미넴을 만난 밤)'이었어요. 이 노래는 한 남학생이 에미넴 콘서트에 가서 백스테이지에 갔다가 결국 그와 밤을 보내게 되는 내용이에요. 그들은 이 노래를 미국 MTV에서 닥터 드레에게 들려주었는데, 닥터 드레는 듣더니 "그가 저 자식들을 죽여 버릴 거야"라고 말했대요. 그 노래가 "Stan"을 언급했기 때문이죠. 원래 가사는 'I met Eminem(나는 에미넴을 만났다)’이었지만, 'I Fell In Love(나는 사랑에 빠졌다)'로 바꿨어요. 그래서 그를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게 된 거죠. 그런데 그는 데모로만 발표한, 유튜브에서 볼 수 있는 노래를 썼는데, 거기서 그가 Pet Shop Boys를 죽이는 내용이 나오더군요. 그는 다른 사람을 죽이러 캐나다로 운전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런 대사가 있어요. '그는 마치 평소 목소리로만 랩을 한다'는 식으로 말한 것 같아요. "저 소리는 뭐지?" "펫 샵 보이즈." 그리고 차가 그들을 덮치는 장면이 나오죠. 그래서 로비 윌리엄스가 저에게 "에미넴이 당신들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어요.
J: 매우 그렇습니다.
N: 저희가 에미넴의 캐릭터를 만들어 쓰는 작사 기법을 가져와 그대로 에미넴에게 돌려준 거니까요.
J: 그게 불편하셨나요? 그런…그…
N: 아니요, 그렇지는 않아요. 저는 항상 현대 팝 가사가 일기 같다고 불평하는데, 물론 괜찮죠. 저는 여러 해 동안, 심지어 이제는 수십 년 동안 이렇게 말해 왔어요. "시는 어디에 있는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매우 흥미롭다고 가정하죠. 저는 제 자신이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지만 다른 사람이 된 척 해볼 수는 있다고 말하고 싶어요. 그리고 저는 그것이 정말 끝내준다고 생각해요. 모든 것이 그냥 흘러나오는 거죠. 어쩌면 누군가가 분석해 보면, 제가 다른 사람의 모습을 빌려 실제로 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일지도 몰라요. 모르겠어요.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죠. 누가 알겠어요?
J: 오래전에 썼던 노래들을 다시 들으면서 ‘맙소사,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잖아?’라고 생각한 적이 있나요?
N: 음, 'It's A Sin'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면, 최근 몇 년 동안 그 노래는 일종의 퀴어 클래식이 되었죠. 공연을 하는데 안무가도 있었고 엄청나게 퀴어적인 분위기잖아요. 그래서 저는 ‘정말 멋지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 인터뷰 시작 부분에서 말했듯이, 저는 결혼 외의 모든 성행위는 죄라는 생각에 대해 쓴 거예요.’라고 말했죠.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어요. 그것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만드는 것은 다소 단순화하는 것이니까요.
그나저나 TV 시리즈 'It's A Sin'은 촬영이 끝난 후에 붙여진 것입니다. 원래 제목은 'The Boys'였는데, 다른 작품이 "The Boys"라는 제목을 쓰는 바람에 제목을 바꿨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여기서 제목은 에이즈를 의미합니다. 'It's A Sin'의 'a sin'이 에이즈에 대한 우익적인 의미를 갖게 된 것도 'It's A Sin'이 나왔을 때였죠. 심지어, 제가 크리스와 함께 1986년 MTV 어워즈에 참석했을 때, 밖에서 시위자들이 "비디오 스타는 죄악이다. 비디오는 악마의 작품이다."라고 외치고 있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그 말 속에는 영국인들이 항상 이상하게 여겼던 TV 전도사라는 의미도 들어 있었거든요. 제 기억이 맞다면, 제네시스나 필 콜린스가 그런 사람에 대한 음반을 냈던 것 같은데, 그는 항상 호텔 방에 앉아 텔레비전을 켜놓곤 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손가락을 튕겨가며 채널을 넘기는 거죠.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유럽에서 그런 건 정말이지 없어요. 왜냐면 그들이 분명 사람들에게서 돈을 뜯어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할테니까요. 하지만 그들은 분명히 죄를 다시 의제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노래에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J: 퀴어 음악에 관한 쇼를 하는 것이 환원주의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N: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는 음악은 그 자체의 의미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아요. 말이 되는지 모르겠지만요. 사람들은 음악이 자신의 삶과 관련이 있고, 음악을 들었을 때 자신이 어디에 있었는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따라 음악에 의미를 부여하죠. 많은 사람들에게 'It's A Sin'은 학교 무도회에서 누군가와 사귀게 되었던, 정말 신나는 순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데릭 저먼을 처음 알게 된 순간일 수도 있고요. 펫 샵 보이즈가 다른 차원으로 도약한 순간 같은 것이었죠.
그래서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닙니다. 하지만 퀴어라는 것은, 저는 퀴어라는 단어를 싫어하지 않아요. 왜냐하면 게이라는 단어가 항상 저에게는, 제가 예전에 반대했던 것처럼, 클럽이나 하이엔드 뮤직의 다소 행복하고 경쾌한 문화적 의제를 가진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저는 하이엔드 뮤직을 좋아했지만요. 반면 퀴어는 동성애자라는 신비로운 타자성으로 돌아갔고, 제가 실제로 더 선호하는 용어입니다. 피터 파커가 편집한 책들을 보셨나요? 두 권의 훌륭한 책인데,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그 선집의 제목은 'Some Men In London(런던의 어떤 남자들)'입니다. 이 책은 1945년부터 1961년까지의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리고 다른 한 권은 1959년부터 동성애가 합법화된 1967년까지의 이야기를 다루죠. 당시 게이들의 삶은 정말 지하에 숨겨져 있었어요. 저는 그런 시대의 거의 끝자락에 런던에 왔죠. 제 친구 크리스 도웰과 저는 예전에 리젠트 팰리스 호텔에서 쫓겨난 적이 있는데, 그들이 저희를 남자 매춘부로 오해했기 때문이었어요. 물론 저희는 엄청나게 신났었죠. 저희는 18살이었고, 꽤 어려 보였어요. 저는 아마 더 어려 보였을 거예요. 물론, 남자 매춘부들은 있었죠. 저는 당시에는 그런 것에 대해 잘 몰랐어요. 하지만 당시 게이들의 삶은, 아시다시피, 공중 화장실과 크루징이 주를 이루었어요. 물론, 이런 것들 중 일부는 여전히 존재하지만요. 하지만 저는 'Grindr'가 이 모든 것을 없애버렸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가 그리워하는 풍부하고 에로틱한 문화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것은 거리의 문화였죠. 그리고 그것은 퀴어적이었어요.
그리고 또한, 퀴어라는 것을 접하게 되면, 오스카 와일드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고 모든 하우스 음악과 쇼 비즈니스가 정말 퀴어하다는 것을 알게 되죠. 저희의 게이 매니저였던 톰 왓킨스, 브라이언 엡스타인도 게이였고, 샘 내피어-벨, 심지어 롤링 스톤즈의 매니저였던 앤드류 로이드-골드햄도 게이였거나 양성애자였거나 그랬죠? 모든 것이 정말 퀴어해요. 롤링 스톤즈가 1966년에 여장 차림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은 것을 보세요. 지금 보면 정말 퀴어하죠. 사실, 어떤 면에서는 퀴어하지 않기도 하고요. 그들이 게이가 아니거나 그런 사람들이 아니지만, 그저 파격적이기 위해 그런 일을 할 용의가 있다는 점에서 정말 퀴어한 거죠. 그리고 퀴어는 일종의 내재된 파격성을 가지고 있는데, 저는 그 점이 꽤 마음에 들어요.
J: 지하 문화는 사라졌나요?
N: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지만, 여기 이스트 런던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죠. 달스턴은 여전히 일종의 지하 문화가 남아 있나요? 어느 정도는요?
J: 잘 모르겠어요.
N: 이번 주 초에 킹스랜드 로드에 있는 블루 도어에서 친구의 생일 파티에 갔었어요. 사실, 5년 전에도 다른 장소에서 같은 사람들과 제 생일 파티를 했었죠. 그들은, 당신도 아시다시피, 데이비드 호일, 우리는 여전히 그를 "신성한 데이비드"라고 부르는데, 예전부터 그렇게 불렸기 때문이죠. 데이비드 호일은 그곳에서 일종의 입문용 카바레 공연을 했어요. 그는 여전히 꽤 언더그라운드에 머물러 있어요. 여전히 파격적이고요.
J: 네, 분명히 그렇습니다.
N: 저는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좋아하는데, 그는 정말로 그렇고, 항상 그래 왔어요.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은 여전히 꽤 언더그라운드적인 것이라고 생각해요. 유일한 문제는 감히 말할 수 없는 것이 때로는 극우 정치로 나타나서, 그러면 그들이 그런 말을 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는 것이죠. 하지만 이런 퀴어 세계에서는 꽤 신선하다고 생각해요.
J: 일종의 접근성 문제이지 않을까요?
N: 하지만 아시다시피, 소셜 미디어가 거의 모든 것을 없애고 모든 것을 만들어냈어요. 소셜 미디어 없이는 트럼프, 브렉시트 등을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하죠. 바로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사라진 거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언더그라운드가 없는 거예요. 인기가 조금만 있어도 즉시 언더그라운드가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별로 인기가 없는 것들, 바로 그곳에서 흥미로운 일이 일어나는 걸지도 몰라요. 그게 새로운 언더그라운드일지도 모르죠.
J: 당신은 정말 놀랍고 대단한 여성들과 함께 작업해 왔죠. 라이자 미넬리, 당신은 그녀와 함께 'Results' 앨범을 작업했고, 더스티 스프링필드와도 앨범의 일부분을 함께 작업했죠. 그런데, 그건 그렇고, 얼마나 놀라웠나요? 정말 엄청난 경험이었을 텐데요.
N: 정말 대단했죠. 고(故) 알리 윌리스와도 함께 곡을 썼어요. 그녀는 미국인이고 캘리포니아 출신의 작곡가이자 아티스트였습니다. 그녀는 프렌즈의 주제곡을 작곡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여러분이 엄청나게 감명받았던 'Boogie Wonderland'도 공동 작곡했습니다. 부기 원더랜드를 공동 작곡한 사람과 같은 방에 있었던 거죠. 곡을 함께 썼고 데모 버전에서는 그녀와 제가 듀엣으로 불렀어요.
저희는 그 곡을, 첫 번째 앨범에 넣을 수도 있었어요. 두 번째 앨범에도 다른 곡과 함께 가지고 있었죠. 톰 왓킨스의 사무실에 있던 누군가가 "당신은 항상 더스티 스프링필드, 'Dusty in Memphis'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녀에게 부탁해 보는 게 어때요?"라고 말했어요. 저희는 ‘맙소사, 정말 멋진 아이디어다’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녀와 연락이 닿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죠. 그래서 첫 번째 앨범에 그 곡이 실리지 못했던 거예요. 그녀를 섭외하는 데 1년이나 걸렸거든요. 저희는 그녀가 거절했다고 생각했지만, 더스티는 요청이 자신에게 전달되지 않았다고 말했어요. 그녀는 'West End Girls'를 정말 좋아했거든요.
그 곡은 우리가 'Actually'를 위해 작업한 첫 번째 트랙이었고, 그녀가 마침내 우리 비전 스튜디오에 들어왔을 때, 크리스와 저는 스튜디오 매니저의 현관에 있는 작은 유리 사무실에 앉아 있었는데 더스티가 검은 가죽 코트와 부츠를 신고 들어왔고 우리는 긴장해서 떨고 있었죠. 통제실로 들어가서 스티븐 헤이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그녀가 "제가 어떤 목소리를 내길 바라세요?"라고 묻자 저희는 "아, 더스티 스프링필드처럼요"라고 대답했어요. 그러자 그녀는 "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더군요. 그리고 크리스와 저는 뉴캐슬에 가서 TV 쇼 ‘The Tube’를 촬영해야 했기 때문에 내려갔고, 스티븐 헤이그가 보컬 녹음을 진행했어요. 저희가 2년 후에 돌아왔을 때 그녀는 녹음을 마친 상태였죠. 스티븐 헤이그는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는데, 사람들이 그녀가 더 이상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말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습니다. 사람들은 더스티에 대해 실제로 많은 나쁜 말을 했었죠.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60년대 그대로였어요. 그 곡은 사실 미국에서 그녀의 가장 큰 히트곡이 되었죠. 하지만 제 말은, 그 곡은 저희의 곡만큼이나 더스티 스프링필드의 곡과 같다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갑자기 마지막 부분의 애드리브가 떠올라서 정말 짜릿했어요. 'We don't have to fall apart. We don't have to fight.' 그리고 저희는 들어가서 나란히 있는 마이크에 대고 그 부분을 불렀어요. 그녀는 "어머, 다 끝난 줄 알았는데요"라고 말했고, 저희는 "자, 어서, 이것만 해 봐요"라고 말했죠. 그리고 더스티는 실제로 다른 사람과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을 좋아했어요. 예를 들어, 그녀는 백 보컬이나 코러스 가수를 하는 것을 정말 좋아했죠. 정말 재밌었어요. 저희는 실제로 마지막 부분의 애드리브를 약 15분 만에 끝냈는데, 그 부분은 물론 여전히 음반에 실려 있습니다.
하지만 더스티와 관련해서, 저희 커리어에 대한 몇 안 되는 후회 중 하나는, 항상 더스티와 함께 앨범 하나를 제대로 만들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다는 거예요. 당시에는 시간이 없었어요. 라이자 미넬리가 나타났고, 데릭 저먼이 연출한 쇼로 첫 투어를 떠나게 되면서 정말 시간이 부족해졌죠. 그래서 저희는 반쪽짜리 앨범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저희가 만든 결과물에는 매우 만족합니다.
J: 함께 작업했으면 좋았거나 지금도 함께 음악을 만들고 싶은 전설적인 여성이나 여성이 있나요?
N: 저희는 항상 니나 시몬과 함께 작업하고 싶어 했어요.
J: 어떤 느낌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정말 멋지게 들릴 것 같아요.
N: 네, 그녀는 전자 음악 같은 것 때문에 저희를 아마 경멸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잘 모르겠지만요. 하지만 저희는 항상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전자 사운드 음악, 그것이 저희가 하고 싶었던 것이었죠.
셰인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저희는 마돈나와 직접적으로 함께 작업한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일종의 공유하는 음악적 요소가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그 일은 분명히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그러니까, 저희가 그것을 추진한 적이 없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는 'Sorry' 리믹스를 했었죠. 남자에게 'I don't want to hear you say sorry'라고 노래하는 부분을 새로 만들었죠. 그래서 제가 처음에 남자 역할을 맡았어요. 'I'm sorry, so sorry'
어쨌든 그녀는 믹스를 좋아했어요. 마돈나의 친구가 말하길 마돈나가 당신의 믹스를 정말 좋아해서 투어에 넣었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제 목소리가 마돈나의 투어에 실제로 사용되었던 거죠. 같은 일이 카일리와도 있었어요. 저희는, 물론 저희 음반이었지만, 카일리와의 듀엣곡 'Denial'을 작업했는데, 카일리는 마돈나의 투어와 동시에 자신의 투어에서 그 곡을 사용했어요. 저는 실제로 카일리와 마돈나의 투어에 동시에 참여하고 있었던 셈이죠. 정말 멋졌어요.
J: O2에서 공연하는 걸 보러 갔었어요. 아마 2년 전이었을 거예요. 정말 신기한 게, 그때가 제가 정말로 그 공연이 필요했던 순간이었어요. 제가 경험했던 콘서트 중 가장 좋았던 경험 중 하나였어요. 공연 내내 노래를 따라 불렀죠. 정말 즐겁고 영감을 주는 무언가가 있었어요. 그리고 이 쇼를 준비하면서 당신들의 음악을 다시 듣는 것만으로도 작곡에 대한 영감을 정말 많이 받아요. 예전 데모들을 다시 듣는 것도 작곡에 대한 영감을 주고요. 노래가 어디에서 왔는지, 'It's A Sin'처럼 거대한 서사시로 변하는 아이디어의 핵심들을 생각하게 되죠. 정말 놀랍고,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당신과 크리스가 여전히 멋진 음악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 저를 기분 좋게 만들어요.
N: 사실 저희는 정말 놀라운 한 해를 보냈어요. 정말 놀라운 한 해였다고 말씀드려야겠네요.
J: 모든 것이 놀라웠어요.
N: 올해는 특히, 모든 것이 정말 놀라웠어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저희도 부침을 겪었고, 정점과 저점을 모두 경험했죠. 하지만 제가 사람들에게 말하듯이, 그것이 바로 '커리어'라고 불리는 것이죠. 하지만 올해는 펫샵 보이즈로서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그리고 우리가 낸 앨범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사실 저는 저희 앨범들을 모두 좋아하지만요. 제 생각에는 저희 앨범들이 꽤 일관성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이번 앨범은 코로나19로 인해 곡을 쓸 시간이 많았어요. 곡이 정말 많았죠. 그래서 각 싱글마다 두 곡의 B사이드를 넣은 싱글들을 발매한 이유도 많은 곡을 썼기 때문이에요. 아직 곡이 다 떨어지지도 않았어요. 그래서 좋았어요.
그리고 최근에 MTV EMAs에서 저희 디자이너인 톰 스콧과 함께 거대한 무대를 만들었는데, 정말 재밌었어요. 그리고 존은 엄격하게 저희가 절대 하지 않을 거라고 상상했던 일을 하라고 했죠. 저는 사람들 거실에 들어가는 것을 좋아해요. 지금은 그럴 기회가 거의 없으니까요.
J: 네, 맞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팟캐스트 하는 것을 꺼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이 팟캐스트에 참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N: 제이크, 당신을 위해 하는 거예요.
J: 감사합니다.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 저와 이야기해 주신 것이 저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이 일을 하는 것이 정말 멋지다고 생각해요. 정말 멋져요.
N: 감사합니다.
J: 감사합니다. 다시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N: 저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