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et Shop Boys 인터뷰: "우리는 가짜로 보이는 것을 선호하지 않습니다"(번역)
원문: Pet Shop Boys Interviewed: "We Prefer Not To Be Fake…" —MOJO(2013)
닐 테넌트, 팝 음악과 에벌린 워의 만남, 글래스턴베리 공연, 커밍아웃, 그리고 뜻하지 않게 대처주의 찬가를 쓰게 된 이야기...
by Ian Harrison
늦은 4월 오후, 닐 테넌트를 만나러 런던 동부의 회원제 클럽 쇼어디치 하우스에 도착한 MOJO 취재진은 빈틈없는 컨시어지 직원에게 제지당했다. 그 직원은 회원이 아니면 입장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행히 32년간 테넌트와 함께 음악 활동을 해온 또 다른 펫 숍 보이 크리스 로가 마침 공동 인터뷰를 마치고 나가던 길에 우리를 발견하고는 흔쾌히 보증을 서주었다. 그는 앞선 인터뷰에서 이 그룹이 없는 자신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고 밝힌 바 있다.
한적하고 세련된 최상층 바의 창가에 자리를 잡은 펫 숍 보이스의 보컬이자 공동 작곡가인 그는 자신도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59세의 그는 스웨덴 데님 브랜드 아크네(Acne)의 올 블랙 의상에 눈부시게 흰 플림솔 신발을 신고 있었다. 박식하고 침착한 분위기를 풍기는 그의 명료한 발음은, 마치 속삭이는 듯한 특유의 영국식 창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때때로 고향인 타이네사이드(Tyneside)의 빠른 억양이 섞여 나오곤 했다.
그는 주의를 산만하게 하는 것을 꺼리는 듯했다. 갑자기 Muzak1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자, 그는 바를 가로질러 직원에게 다가가 정중하게 음악을 꺼 달라고 요청했다(이곳은 눈에 띄지 않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 외에는 휴대전화 사용이 금지되어 있다). 이후 그는 온라인 개인 정보 보호 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구글이 모든 사용자의 온라인 활동을 기록하는 방식에 대해 탐탁찮은 기색을 보였다. 그는 "마치 스릴은 빠진 편집증적인 스릴러 영화 속에 있는 것 같다"고 비유하며, 지나친 온라인 소통의 매력에 의문을 표했다. "익숙함이 경멸을 낳는다는 오래된 격언은 100% 맞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1985년 "West End Girls"로 첫 히트를 기록한 이후, 전 세계적으로 수천만 장의 음반을 판매해 온 펫 숍 보이스를 단순히 '익숙한' 팝 그룹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오히려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준 높은 음악성과 지적인 가사로 팝 음악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온 그들—컴필레이션 앨범 Pop Art를 통해 그들의 음악적 여정을 확인할 수 있다—은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면서도 동시에 독특한 개성과 신비로운 분위기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스미스나 뉴 오더와 같은 반항적인 성향의 영국 음악과 같은 맥락을 공유하는(실제로 PSB는 조니 마, 버나드 섬너와 여러 차례 협업하기도 했다) 그들은 로비 윌리엄스, 카일리 미노그와 같은 대중적인 아티스트는 물론, 데이비드 보위, 오노 요코와 같은 거장들과도 거리낌 없이 협업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기악곡 작곡에 대한 꾸준한 실험은 그들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더욱 넓혀주었고, BBC 라디오 1, 2, 3, 4 모든 채널에서 폭넓은 사랑을 받는 몇 안 되는 밴드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했다.
이들의 이야기는 현재진행형이다. 황홀한 사운드를 예고하는 열두 번째 앨범 Electric의 발매가 임박했는데,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Last To Die" 커버곡과, 역사학을 전공하고 러시아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작사가에게 더없이 어울리는, 독특하면서도 웅장한 찬가풍의 곡 "Love Is A Bourgeois Construct"가 수록되어 있다. "팝송을 만드는 건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어딘가 묘하면서도 평화로운 작업이죠. 저는 이 감각을 잃어본 적이 없습니다."
"Love Is A Bourgeois Construct"라는 제목은 정말이지 펫 숍 보이스답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사는 데이비드 로지의 소설 ⟪Nice Work⟫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소설 속에서 영문학 강사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버밍엄의 한 공장 사장을 밀착 취재하게 되고, 결국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녀가 "사랑이란 건 없어. 그건 19세기적 허구일 뿐이지."라고 말하는 유명한 장면이 있는데, 바로 거기에서 이처럼 지나치게 학문적인 제목의 노래를 만들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얻었죠. 일종의 비극적인 희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자가 떠나버리는 바람에 그녀의 연인은 삶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그녀가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상황을 그린 곡이죠.
떠나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최근에 레이블도 옮기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28년간 함께 했던 팔로폰(Parlophone)을 떠났습니다. 계약이 만료되었고, 팔로폰 측에서는 계약을 갱신하여 앨범 두 장을 더 낼 수 있는 선택권이 있었지만, 그에 따른 높은 선지급금을 지불하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 문제는 꽤 오랫동안 논의되었고, 결국 "음악 산업이 변화하고 있으니,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곳(코발트 레이블 서비스)에 가서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보자"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지금까지 수 많은 단계를 밟아오셨을텐데요. 음악적으로 가장 처음 경험한 것은 무엇이었나요?
저는 1954년생이니까, 말하자면 팝 음악의 태동기와 함께했다고 할 수 있죠. 60년대에는 팝 음악에 완전히 매료되어 있었어요. 제가 처음으로 영화관에 갔던 기억은 ⟪The Young Ones⟫를 보러 갔을 때인데, 정말 재미있게 봤습니다. 1963년 여름은 제 인생의 첫 '팝의 여름'이었죠. 바로 "She Loves You"의 여름이었고요. 저와 여동생은 비틀즈에 푹 빠져 있었어요. 늦게까지 깨어 있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을 때, 잠옷 차림으로 집에서 텔레비전으로 Royal Variety Performance2를 봤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저는 아홉 살이었을 거예요. 놀랍게도, 브루스 포사이스가 사회를 맡았을지도 모르겠네요. 뉴캐슬의 텔레비전에서도 런던 팔라디움 밖의 함성 소리가 들릴 정도였죠. 그, 정말이지 격렬했던 흥분감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비틀즈 싱글 음반을 모두 가지고 있었고, 작은 댄세트(Dansette)3전축에서 질리도록 틀어댔어요. 그 짜릿한 흥분은 아직까지도 제 안에 남아 있습니다.
팝 음악 외에 다른 영향도 받았나요?
1965년에 부모님께서 스테레오를 사주셨는데, The Sound Of Music과 My Fair Lady 사운드트랙이 있었어요. 최근에야 가사를 쓰는 사람으로서 이 사운드트랙이 제게 얼마나 큰 영향을 주었는지 깨달았습니다. (노래를 부르며) "영국인들은 왜 아이들에게 제대로 말하는 법을 가르치지 못할까? 이 언어적 계급 구분은 지금쯤 시대의 유물이 되었어야 합니다!"4 이건 거의 펫 숍 보이스 음악과 다름없지 않나요?
록 음악에 빠진 적이 있나요?
1968년 뉴캐슬 페스티벌에서 처음 본 밴드는 존 히스먼의 콜로세움이었는데, 재즈와 프로그레시브 록을 하는 밴드였죠. 그 후 1970년 초, "A Whole Lotta Love"가 막 나왔을 즈음에 뉴캐슬 시티 홀에서 레드 제플린을 봤습니다. 인크레더블 스트링 밴드를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가 Wee Tam을 들려줬을 때 "이건 정말 내 인생에서 들어본 것 중 최악이야"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하지만 어쩌다 보니 그 음악에 빠져들었고, 정말 좋아하게 되었죠.
장발의 닐 테넌트라니, 상상이 잘 안 가는데요.
제가 다녔던 세인트 커스버트 학교에서 허용하는 만큼 길렀었는데, 그렇게 길지는 않았어요. 옷깃에 닿지 않아야 했거든요. 세인트 커스버트에서의 학교 생활은 그리 즐겁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학교가 권위적이라서만은 아니었고, 학교 문화 자체가 저와 맞지 않았어요. 온통 축구 이야기뿐이었는데, 저는 축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기타와 피아노를 독학했고, 첼로도 배웠습니다. 점심시간에 음악실에 갈 수 있어서 첼로를 시작했던 거죠. 혼자 곡을 쓰곤 했는데, 정말 좋아했어요. 오로지 화음만으로 무엇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 원리가 무엇인지 탐구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많은 것을 스스로 깨우쳤고, 실수로 잘못 누른 건반에서 비롯되는 ‘우연의 마법’을 발견하기도 했죠. 그건 지금도 저에게 큰 매력으로 남아 있습니다.
당신을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시킨 것은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나요?
데이비드 보위(Davie Bowie), 그리고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입니다. 재밌는 건 사람들이 모두 보위가 Top Of The Pops에 출연했던 장면[1972년 7월 6일]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저도 그 장면을 기억하지만, 저에게 진정으로 큰 영향을 준 건 Old Grey Whistle Test[1972년 2월 8일] 출연이었어요. 그들이 "Five Years"를 연주할 때 카메라가 그의 얼굴을 클로즈업했는데, 저는 그때 정말 굉장하다고 생각했죠. 그 모든 것에 완전히 매료되었어요. (속삭이며) 하지만 제가 팝 스타를 꿈꾸게 만든 건 비틀즈였습니다.
지금 속삭이셨는데요…
지금도 팝 스타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는 게 조금 부끄럽네요. 배우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지만, 저희 영화[It Couldn't Happen Here(1988)]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제가 연기를 잘 못 한다는 걸 깨달았죠. 그래서 음악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열두 살 때부터 혼자 곡을 쓰기 시작했어요. 여러 시기를 거쳤죠. 비틀즈에 심취했던 시기, 70년대 발라드 가수를 동경했던 시기, 어쿠스틱 기타로 디스코 음악을 연주하려고 했던 시기, 록 음악에 빠졌던 시기, 엘비스 코스텔로의 뉴 웨이브 음악에 심취했던 시기… 그러다 1981년, 첼시 일렉트리컬(Chelsea Electrical)이라는 음향 기기 판매점에서 크리스를 만났습니다.
만나자마자 음악적 취향이 잘 맞았나요?
전혀요. 저희는 완전히 다른 음악을 좋아했어요. 크리스가 이매지네이션(Imagination)의 "Body Talk"를 좋아한다고 했을 때 정말 놀랐습니다. 물론 저도 속으로는 그 노래를 좋아했지만, 당시 뉴 웨이브 음악에 심취해 있었기 때문에 차마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었죠. 크리스는 명랑한 디스코 팬이었어요. 하지만 그도 보위를 좋아했는데, 바로 그 점이 저희를 이어주었습니다. 댄스 음악과 힙합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떠오르기 시작한 일렉트로 팝, 12인치 믹스 등 공통점도 있었죠.
만난 지 얼마나 지나서 함께 음악 작업을 시작했나요?
제 일기장을 찾아보면 만난 지 2주도 안 돼서 함께 작업을 시작했을 겁니다. 저는 어쿠스틱 기타를 치고 크리스는 모노포닉 신디사이저로 베이스 라인을 연주했죠. 크리스는 경험이 풍부한 음악가였고 키보드 연주도 아주 능숙했습니다. 당시 저는 27, 28살이었는데… 베이스 라인이라는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어요. 우리는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한 것 같았습니다. 처음부터 뭔가 통하는 게 있었죠. 1983년 초에는 "Opportunities", "Rent", "It's A Sin", "West End Girls", "Love Comes Quickly" 등 많은 곡을 함께 썼죠.
언제 당신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되었나요?
첫 번째 데모를 만들었을 때는 제가 노래하는 테이프를 만드는 데 익숙했기 때문에 제가 노래를 불러야 했어요. 사실 이 음악으로 뭔가 해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조금씩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노래를 시킬)더 나은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1983년 8월, 바비 O(프로듀서)와 함께 타임스퀘어 근처의 유니크 스튜디오라는 제대로 된 스튜디오에서 녹음 작업을 하기 위해 뉴욕에 갔을 때, 가장 먼저 작업한 곡이 "West End Girls"였어요. 당시 스티브 제롬이라는 엔지니어가 있었는데, 그는 최초의 신스 팝 음반이라고 할 수 있는 "Popcorn"을 만든 사람이었죠. 어쨌든, 그의 어시스턴트인 트레이시가 "어머, 당신 목소리는 정말 듣기 편안하네요!"라고 말했던 게 기억납니다. 저는 '그런가?'라고 생각했죠. 그때 '내가 가수를 해도 괜찮을지도 모르겠다' 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그 음반으로 주사위가 던져지고 나니 그대로 굳어진 거죠. 저는 그 음반을 통해 제가 독특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컬을 더블 트래킹(보컬을 겹쳐서 녹음하는 기법)하는 것이 정말 팝 음악적인 사운드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82년부터 85년까지 Smash Hits의 편집 보조로 일하셨죠. 팝 음악에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하셨나요?
전혀요. 제가 생각하기에 스매시 히트에서 일한 시기는 팝 음악의 황금기였어요. 사람들은 당시 주류 팝 음악이 얼마나 실험적이었는지 잊고 있어요. 7인치 싱글부터 댄스 팝, 12인치 리믹스의 태동, 힙합의 시작, 전자 음악까지… "Planet Rock"이 등장했을 때 저는 완전히 매료되었고, 이후 하이-에너지라고 불리게 된 음악 등, 우리가 하는 음악에 영향을 준 모든 요소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죠. 정말 흥미진진한 시기였습니다. 저는 막 시작된 비디오 세상이 다 좋았고, Smash Hits가 재치와 유머를 섞어 그 세계를 보여주는 방식도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펫 숍 보이스는 Smash Hits에서 언급이 금지되어 있었어요. 제가 휴가를 갔을 때만 간혹 언급되었는데, 누군가가 곧바로 Bitz(뉴스) 페이지에 저희에 대한 언급을 슬쩍 넣곤 했죠. 저는, 음, 그런 연관성을 만들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Smash Hits는 팝 스타들에게 독특한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유명했죠. 기억에 남는 재밌는 질문이 있나요?
제가 던졌던 유명한 질문 중 하나는 "어머님은 골프를 치시나요?"였어요. 저는 그 질문이 상대방의 가정환경을 많이 드러내기 때문에 흥미로운 질문이라고 생각했죠. 제 어머니는 실제로 골프를 치셨는데, 그 질문을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받아들이셔서 화를 내셨어요. 크리스 히스는 늘 "화요일은 무슨 색깔인가요?"라고 물었는데, 저는 바로 "초록색"이라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에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Smash Hits는 제가 유머를 두려워하지 않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런 영향은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도, 그보다 전에는 학교에서 HMS Pinafore를 공연했을 때부터도요. 진지함과 유머를 동시에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 겁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에벌린 워(Evelyn Waugh)도 그런 스타일이죠. 재밌으면서도 동시에 아주 냉소적이고, 사실 꽤 심술궂기도 해요.
에벌린 워와 차트 팝의 조합은 조금 의외네요. 당시 새로운 것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나요?
저희는 Duran Duran, Culture Club, Spandau Ballet, Frankie Goes To Hollywood 이후의 현대 팝, 즉 힙합, 하이-에너지, 일렉트로닉 음악을 감성과 결합한 음악의 비결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현실적인 삶에 대한 노래를 만들고요.
당신의 가사는 처음부터 재치가 넘쳤죠.
저희의 아이디어는 일상적인 가사로 표현되지 않은 감정을 담은 극적인 음악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집에서 섹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던 시대, 많은 것들이 암묵적으로 금기시되던 시대에서 자랐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행간을 읽어야 했죠. 심지어 스스로도 그 노래가 무엇에 대한 내용인지 모를 정도까지요. "Rent(1987년 싱글)"는 재밌는 곡이에요. 저는 정치인의 후원을 받는 여성을 상상했지만, 사람들이 "I love you"와 "you pay my rent" 사이에 빠진 단어가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저도 사실 잘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도발적인 제목을 좋아했기 때문에 그런 제목을 붙이게 된 거예요. 그건 펑크 문화의 영향이었죠.
성공의 발판을 마련해 준 곡은 1985년 11월 영국에서, 그리고 6개월 뒤 미국에서 정상을 차지한 "West End Girls"였습니다.
우리가 다니던 작은 스튜디오에서 즉흥 연주를 하곤 했는데, 그러다가 "West End Girls"가 만들어졌어요. 뉴욕에서 바비 O와 함께 녹음한 후, EMI와 계약하고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 "Opportunities (Let’s Make Lots Of Money)"를 발매했지만, 완전히 실패했죠. 그래서 "West End Girls"를 다시 녹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곡은 정말 독특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가진 음반이에요. 저는 예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T.S. 엘리엇의 황무지에 매료되어 있는데, 여러 목소리가 콜라주처럼 뒤섞여 있는 작품이죠.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끌리는 매력이 있어요. 저희는 그런 방식으로 곡을 만들었고, 그 곡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팝 스타로서의 초기 시절은 어떠셨나요?
80년대 펫 숍 보이스가 팝 음악으로 성공을 거두었던 시기에는 정말 멋진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Soul Train에 출연하기도 했죠! 돈 코넬리우스가 저희를 인터뷰하면서 "정말 펑키하군요"라고 말했던 기억이 납니다. Soul Train 댄서들이 모두 "West End Girls"에 맞춰 춤을 추는 모습을 보면서 정말 감격했죠. 거의 매일 텔레비전 쇼에 출연했는데, 이상한 이탈리아 팝 쇼, 이상한 독일 팝 쇼, 이상한 네덜란드 팝 쇼 같은 것들이었어요. 하지만 동시에 "싫어요, 그런 건 하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해야 하는 등 긴장되는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저희가 하고 싶은 것을 고수하기 위한 노력을 많이 기울였죠. 독일에서 팝 록키 잡지 표지를 위해 테디베어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라는 요구를 받았을 때처럼요. 사진 촬영과 관련해서는 항상 엄청난 긴장감이 감돌았어요. 정말이지,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렇게까지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쨌든 팝 음악이잖아요.
저희는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시각적인 표현에 매우 신경을 썼어요. 저희는 듀란 듀란이나 컬처 클럽 같은 스타일의 팝 스타로 비춰지고 싶지 않았어요. 애초에 저희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죠. 저희가 활동을 시작하기 전부터 저는 그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는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하지만 "Love Comes Quickly"를 발표했을 때 19위에 그쳤고, "Opportunities"는 고전하면서 모든 것이 불안하게 느껴졌어요. 1986년 초에는 저희가 ‘원 히트 원더(단 한 곡만 히트한 가수)’처럼 여겨진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납니다.
"Opportunities"는 지금도 금융 관련 소식이 있을 때마다 자주 나오죠.
간단한 메시지죠. '나는 머리가 좋고, 당신은 외모가 뛰어나니, 돈을 많이 벌어보자'는 내용입니다. 대처주의를 풍자하려는 의도로 만든 아주 냉소적인 가사였는데, 결과적으로는 대처주의를 찬양하는 노래가 되어 버렸어요. 지금으로서는 돈 중심의 문화 이전 시대가 있었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그 시기가 모든 것이 변하는 순간이었죠. 해리 엔필드의 ‘Loadsamoney’와 같은 시기였기 때문에, 사실 아주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었습니다. 모든 것이 돈에 의해 좌우되는 세상에 민감한 좌파 성향의 사람들이 큰 충격을 받았던 시기였죠. 이제는 그런 세상 말고는 알지 못하는 세대가 자라났습니다. 참고로, 그 가사는 크리스의 아이디어였습니다.
원 히트 원더로 여겨지던 상황에서 1987년에 엄청난 성공을 거둔 앨범 Actually를 발표하셨죠.
저희는 거의 1년 만에 세 곡이나 되는 1위 곡을 연달아 발표했습니다. 정말 놀라웠고, 그때 처음으로 상업적인 압박을 느꼈던 것 같아요. 특히 "It’s A Sin"을 발표하면서 펫 숍 보이스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죠. 엄청난 에너지와 과장된 분위기를 담은 음악을 선보이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거의 우연처럼 TV 쇼를 위해 "Always On My Mind"를 만들게 되었고요…
일부 팬들은 그런 웅장한 댄스곡을 당신들의 대표적인 스타일로 여기는데, 그런 점이 조금 신경 쓰이시나요?
당신의 말 마따나, 사람들이 저희가 하는 음악이 단 한 가지 스타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스타일의 음악만 하기를 바라는 것이 신경쓰이죠. 그 '한 가지 스타일'이라는 건, "It’s A Sin"이나 "Go West" 같은 곡들을 말하는 거겠죠. 하지만 실제로 저희의 모든 곡들을 들어보면 그런 스타일의 곡은 그리 많지 않아요. 펫 숍 보이스는 다양한 음악 스타일을 시도해 왔는데도, 사람들은 "아, 또 웅장한 댄스 팝 음악을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물론 이번 새 앨범에서는 그런 스타일의 곡을 만들기도 했지만, 항상 그런 음악만 하려는 건 아닙니다.
1989년부터 모든 것을 쏟아내는 듯한 화려한 무대 연출을 선보이기 시작하셨는데, 이제는 그것이 펫 숍 보이스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되었죠.
저희의 공연은 음악, 비주얼, 조명 등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 관객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하도록 기획됩니다. 관객들이 흥미를 느끼고 즐거워하기를 바라죠. 무대에 올라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때 정말 짜릿합니다.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은 느낌이죠. 잘 알려져 있다시피, 저는 무대에서 항상 높은 굽의 신발을 신는데, 더 강렬한 느낌을 받고 싶어서입니다. 화장도 하지만 아마 눈치채지 못하는 분들이 많을 거예요. 그것은 저에게 일종의 의식과 같습니다. 무대 의상을 입는 순간, 무대에 오를 준비가 완료되고, 펫 숍 보이스의 일원이 되는 거죠. 꽤 중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즐깁니다. 정말 기분 좋은 일이죠, 하하!
지금까지 개인적인 큰 어려움 없이 비교적 순탄한 음악 활동을 이어오셨죠.
네, 저희는 소위 ‘인생의 큰 시련’이라고 할 만한 순간들을 겪지 않았습니다. 그저 일상적인 삶의 부침을 겪었을 뿐이죠. 어떤 사람들은, 당신이 언급했듯이, Dave Gahan 디페쉬 모드의 리드 싱어이 30초 동안 죽었다 살아난 것과 같은 극적인 일을 겪기도 하지만, 저희는 그런 경험은 없습니다.
이런 비교적 과묵한 태도는 과잉 공유가 만연한 요즘 시대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데요?
제 생각에 누구도 진심으로 '공유'하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소셜 네트워크에 대한 저의 생각은 근본적으로 진실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음반 회사 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마케팅의 일부이고, 팬들이 아티스트와 소통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결국 가짜 친밀감을 조성하고, 그로 인해 좌절감을 느끼게 하며,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을 화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트위터나 가디언 댓글에서 그토록 많은 논쟁이 벌어지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봅니다. 마치 사람들이 당신의 생각에 정말 관심 있는 것처럼 포장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상황이 악화되는 거죠. 일종의 가짜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는 가짜가 되지 않는 것을 선호합니다.
1994년 Attitude 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동성애자임을 밝히셨죠. 그전에 밝히지 않았던 이유는 직업적인 이유였나요, 아니면 개인적인 이유였나요?
직업적인 이유였습니다. 음, 두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80년대 후반에는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Attitude 인터뷰를 했을 때는 진지한 관계를 막 정리하고 새로운 관계를 시작했을 때였죠. 그리고 80년대에는 제가 동성애자임을 밝히면 펫 숍 보이스의 활동에서 그 문제가 가장 큰 화제가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이후에는 어느 정도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 사람들이 저를 "동성애자 팝 스타 닐 테넌트"로 인식하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그것이 당신의 음악 활동에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하시나요?
영향을 미쳤을까요? 글쎄요… 아시다시피, 1996년에 저희는 미국의 애틀랜틱 레코드사와 계약했는데, 저희의 마케팅은 '게이 마케팅 부서'에서 담당하게 되었어요. 그 점에 대해서는 꽤 놀랐습니다. 물론 게이 팬들을 좋아하고, 그들이 실제로 게이 마케팅 부서를 운영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점을 이용하여 저희를 주변화하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더스티 스프링필드가 세상을 떠났을 때, 저는 그녀의 매니지먼트 요청으로 몇 차례 인터뷰를 했는데, 첫 번째 인터뷰에서 "왜 그녀는 그렇게 게이들의 아이콘이었나요?"라는 질문을 받았고, 저는 "그녀를 게이 아이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녀를 단순히 주변화하는 행위입니다. '그녀는 게이들만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고 단정 짓는 것과 같고, 사람들은 게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게 되는 거죠"라고 대답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고방식은 점점 사라지고 있죠, 그렇지 않나요?
사회가 변했으니까요. 제 지론 처럼, 동성애자라는 것은 사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어야 합니다. 제 말은, 제가 90년대 초에 했던 이야기를 되돌아보면, 저는 항상'게이 공동체'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의 공동체를 가져야 하고, 소위 공동체 지도자들이 있는 이런 작은 공동체들로 우리 자신을 분열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가 점점 더 동성애자라는 것이 그저 삶의 일부일 뿐, 엄청나게 대단한 일이 아닌 그런 모습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 그랜트 같은 사람을 보세요. 저는 제가 정말 좋아하는 그의 첫 앨범을 들었을 때 그가 동성애자인 줄도 몰랐습니다. 두 번째 앨범도 정말 좋아하고요. 몇 주 전에 베를린에서 그의 공연을 보기도 했습니다. 그는 특히 최근 작품에서 작곡가의 의제 안에서도 동성애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사람이지만, 그것이 '게이 음악'일까요? '게이 음악'이라는 것이 존재할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고, 그것에 많은 일종의 게토화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저를 짜증나게 합니다. 아시다시피, 게이들도 오아시스(밴드)를 좋아합니다. 믿기 어렵겠지만요.
지난 10년 동안 당신은 다양한 부대 활동도 해 왔습니다. 그것들은 펫 숍 보이스와 어떤 관련이 있나요?
저희는 전함 포템킨 사운드트랙(2004)을 작업했고, 발레 공연(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의 이야기 ⟪The Most Incredible Thing⟫을 바탕으로 한 공연, 2011)도 했습니다. 저희는 이제 그것들을 ‘테넌트/로’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전함 포템킨의 크레딧 때문에 우연히 그렇게 된 것입니다. 저희는 이건 테넌트/로가 하는 거지, 펫 숍 보이스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저희는 팝송의 구조를 가지지 않은 기악 음악을 만드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은 매우 신선하고, 많은 것을 배우는 경험이며, 저희를 성장시켜 줍니다. 유일한 걱정은 그것이 프로그레시브 록으로 변질될까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내년에는 저희가 앨런 튜링(Alan Turing)에 대해 쓴 프로젝트, The Man From The Future가 있습니다. 그의 삶의 여덟 장면을 음악과 함께 담은 것인데, 정말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꽤 아름답고 독특한 작품입니다.
지난 30여 년 동안 당신이 간직하고 싶은 펫 숍 보이스의 결정적인 순간이 있었나요?
2010년 글래스톤베리입니다. 완벽한 순간이었죠. 토요일 밤, 메인 무대에서 뮤즈가 공연하는 바로 그 시간에 저희는 Other Stage의 헤드라이너로 공연했습니다. 사실 저는 8천 명 정도의 관객이 저희를 보러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글래스톤베리 측에서 나중에 저희에게 5만 명이 저희를 보러 왔다고 알려줬는데, 그것은 뮤즈만큼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공연은 텔레비전에서 네 번이나 방송되었고, 계속 재방송되었습니다. 저희는 이미 1년 반 동안 이 공연을 해 왔고, 그야말로 절정이었죠. 머리에 상자를 쓴 광적인 댄서들이 모두 온 힘을 다해 공연했죠. 그리고 사람들은 발라드 곡을 듣는 동안 지루해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록 페스티벌에서 공연하려고 의도한 적은 없었지만, 저희가 겪어온 모든 일들, 저희 삶의 모든 것을 이 공연, 음악, 비주얼, 디자인에 쏟아부었기에, 그것은 우리가 누구인지, 그리고 우리와 같은 존재는 없다는 것을 완벽하게 보여주는 결과물이었습니다. 그리고 완전히 성공적이었죠.
그렇게 좋은 반응을 얻은 것에 놀라시는 것 같네요. 스스로 충분히 인정받고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상황에 따라 다르죠. 때로는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고 느끼지만, 때로는 놀라울 정도로 과소평가되고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저희 음반과 곡 작업에는 항상 일관성이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일관성이라는 건 좀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죠. 하지만 Actually의 곡과 Elysium의 곡을 비교해서 들어보면, 25년 전에 발표된 Actually의 곡 못지않게 Elysium의 곡도 여전히 신선하고 생동감 넘치게 들립니다. 하지만 저희는 그 점에 대해 충분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요. 다른 가수들이 저희와 비슷한 곡을 발표했다면 모두들 극찬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저희에게 너무 익숙해져 버렸어요. 펫 숍 보이스의 음악은 당연히 훌륭한 퀄리티에, 강렬한 멜로디를 가지고 있고, 어쩌면 재밌거나 아이러니하거나 아련한 분위기를 풍길 거라고 생각하는 거죠. 그게 저희 음악의 특징이긴 하지만요. 사람들은 쉽게 익숙해지니까요. 하지만 가끔은, 아무도 저희 최근 앨범의 "Invisible"이라는 곡이 얼마나 훌륭한지, 또 얼마나 멋진 뮤직비디오를 가지고 있는지 알아주지 않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저만 그렇게 느끼는 걸까요?
하지만 29년 동안이나 히트곡을 내셨고, 보위와 협업도 하셨고, 런던 올림픽에서 "West End Girls"를 공연하기도 하셨고, 브릿 어워드와 아이버 노벨로(Ivor Novello) 상까지 수상하셨는데, 영국의 팝 음악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글쎄요,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만… 저희는 항상 주류 팝 문화 안에서 활동하려고 노력해 왔지만, 어느 순간에도 팝 문화의 '중심'에 있다고 느껴본 적은 없습니다. 브릿팝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 저희는 라틴 음악 앨범인 Bilingual을 만들고 있었으니까요. 다른 사람들이 하는 것과는 다른 길을 걸어온 거죠. 그래서 항상 반대편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희 음악의 본질적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죠. 인크레더블 스트링 밴드(The Incredible String Band)처럼, 저희만의 독자적인 방식으로, 저희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해 온 겁니다. 충성스러운 대척자 같다고 할 수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