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용

레거시로의 회귀

페이스북이 온라인 채팅을 죽인 방법 - Hackaday

링크한 글을 보니 내가 트위터를 떠나고 싶었던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글의 요지는 이렇다. 초기 인터넷 시대에 인터넷을 한다는 것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는 뜻이고 메신저에 로그인해서 '대화 가능'을 설정하는 행위 자체가 양자 공히 고의적으로 대화에 참여하겠다는 의지 표명과도 같았다는 것. 이런 의도성으로 더 깊고 의미 있는 대화를 끌어냈으며, 온라인과 오프라인 생활 사이의 건강한 경계를 만들어냈지만, 페이스북 메신저의 등장으로 그 경계가 사라졌고 덕분에 언제든 대화를 개시하고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대화 상대가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 더 예측할 수 없어졌기 때문에 깊은 대화를 시작하기 어려워졌고, 대화는 단편적이고 얕아졌다는 것.

나도 그 시절에는 메신저를 많이 했다. ICQ가 내 첫 인터넷 메신저였고, MSN과 네이트온까지는 썼던 것 같다. 메신저에 로그인한다는 건 대화가 가능하다는 의사를 표명하는 거였고 대화를 할 수 없거나 하기 싫은 상황이면 자리 비움으로 두거나 아예 로그인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스마트폰을 쓰기 시작하고 네이트온을 쓰지 않게 되면서 나는 지인들과 온라인 대화를 거의 나누지 않게 되었다. 상술된 글처럼 상대가 어떤 상태인지 예측할 수 없다는 느낌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 통화 가능해?'라고 묻는 것처럼 '대화 가능?' 이라고 묻는 것도 너무 진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하는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다. 나도 대화를 시작하지 않지만 지인들 역시 쉬이 대화를 걸어오지 않는다. 어쩌면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사람들도 같은 느낌을 받았을 거로 생각한다. 지금은 명절이나 기념일 인사가 아닌 이상 온라인 대화는 주로 약속을 잡기 위해 하고 실제 대화는 직접 만나서 한다. 되려 과거로 돌아간 느낌도 든다.

개인 홈페이지 시절에는 타인의 저작물을 보기 위해서는 타인의 공간에 직접 방문해야 했다. 방문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메신저에 로그인하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의 저작물을 보거나 읽을 거란 적극적인 의지를 수반한다. 트위터를 떠난 건 바로 이 읽는 행위를 좀 더 적극적인 행위로 바꾸고 싶었던 것도 있다. 트위터를 10년 이상 사용했고 한 때는 꽤 즐겼지만, 지금은 즐겁지 않은 마음이 좀 더 큰 것 같다. 읽고 싶지 않은 것들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마구 흘러 들어온다. 하나의 글에 집중하거나 곱씹을 시간도 없다. 새로운 트윗을 소화하기도 벅차다. 북마크(트위터)에 던져넣은 트윗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내가 쓴 글도 되돌아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단편적으로 읽고 단편적으로 대응한다. 단편적인 감정들이 난무한다. 나 역시 그런 혐의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이 모든 것들이 읽는 행위를 지치고 불쾌하게 만든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왔다. 그냥 뭐 돌아와 본 거지. 어디 교감이란 게 나 혼자만의 행위로 성립되던가. 다시 온/오프라인 구분되어 있던 시절처럼 살고 싶어도 세상이 그 장단에 맞춰주지 않는다. 사람들은 여전히 트위터에 있고 인스타그램에 있다. 그렇지만 종이책을 읽지 않는 시대에 종이책을 내는 사람이 SNS 대신 블로그를 하는 건 어울린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게 아무도 읽지 않아 잊히고 굶어 죽고 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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